금산군 1읍 9면,
제원리에서 충북 영동 방면의 698번 지방도로를 따라 500m 남짓 거슬러 올라가면 제원대교가 나오고 제원대교 천내강을 건너면 산자락을 등지고 천내리가 자리한다.
천내리는 금강 상류의 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강의 안쪽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 내안 또는 천내라 불렀다,
금강변에 위치해 있으나 대체로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이며 서쪽에 위치한 금산읍에서 영동에 이르는 국도가 있어서 금강변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나 북쪽과 남쪽은 교통이 아직도 불편한 상황의 지역이다.
제원면 용화리에서 강의 흐름을 서북쪽으로 그 방향을 바꿔 금강이 봉황천과 합류하면서 다시 동남쪽으로 그 방향을 꺾고는 여러 궁형을 이루면서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그 안쪽과 북쪽으로는 첩첩산중을 이루는 산악지대를 북벽처럼 막고 천내리는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신안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대산리와 남쪽으로는 용화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과 경계를 나눈다.
마을의 역사
인류의 정착은 선사시대로 본다. 백제 때는 부시이현의 영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이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기에 부리현에 속했다가 제19대 명종 5년(1175)에 감무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으며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한 금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부터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옛날에는 천내리에서 저곡리 개티로 건너다니는 나루가 있어서 이 나루를 천내나루라 하였으며, 금산에서 금강변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으며 금강변의 큰 나루였다. 지형이 웅장해서 명당자리도 많았으며 한때 고려의 공민왕이 그의 묘터로 지목된 곳도 천내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강을 건너서 금산을 침략한 그 강기슭도 천내리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북면의 지역으로서 금강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내안 또는 천내라 부르던 지역인데 1789년 [호구총수]에는 천내리가 나타나고, 1872년 금산군지도에는 광석리가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광석리와 북쪽의 장선리 일부를 병합하여 천내리라 하고 전라북도 금산군 제원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에 충청남도에 편입, 청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가 되었다. 1789년 편찬한 [호구총수]에도 천내리의 지명이 등장한다.
리의 면적은 8.32㎢ 이다.
산줄기
천내리는 백두대간에서 뻗은 산줄기와 금남정맥에서 뻗은 산줄기로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① 백두대간에서 뻗은 산줄기는 영동군 삼도봉에서 백두대간을 벋어나 남서진하면서 민주지산-각호산-백하산-칠봉산을 지나 금산군 부리면 어제리 삼도봉에 들어와 북진하여 성주산-구라리산-기웃재-자사봉에서 월영산을 지나 영동군 양산면 가산리와 접하며 금강 취병협에 산줄기를 마감하고, 한줄기는 성주산-구라리산-기웃재-차대골을 이루며 베원면 용화리와 접하며 금강으로 들어가는 산줄기 사이에 내안과 원골이 자리하고 있다.
② 또 다른 산맥은 금남정맥이 운장산을 지나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 함박산에서 하막산-백암산-궁산-마당재-열두봉재-월봉산-지춘산-학성산-금성산-북산-왕재산을 이루고 동진하여 승암재-조정리재-민재-주지봉-방화봉-비들목재-국사봉을 낳고 지작목-송장재-영신산-천태산을 낳고 마당재를 이루고 신안리와 접하며 신안천을 만나는 산줄기
천태산에서 먹뱅이산-성재산으로 이어져 황골을 이루고 영동의 가선리와 접하며 금강을 만나는 산줄기
-용두봉
낙안들 맞은쪽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다.
-시루봉
난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고 한다.
자연마을
천내, 나반들, 원골, 장선이,
천내 마을,
-천내리
금강 안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천내 또는 내안이라고 부른다. 천내나루 안쪽 마을 앞에 있는 골짜기 시암골에는 약수로 통하는 찬샘이 있으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지당골에는 산제당이 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산 성재에는 옛날에 성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마을 서북쪽으로 금강가에 있는 들을 갯들이라고 부른다.
풍수에 천내는 선인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선인부사도강(仙人浮槎뗏목사 江)'의 명혈로 알려져 있다. 신제 우리나라의 음택을 논할 비결서에는 3대 명혈처의 하나로 천내리를 꼽는데, 아직 그 혈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 안동에서 피란을 내려온 공민왕이 천내리에 자신의 능묘를 정하고 석물까지 갖추게 하여 용호석을 세웠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금강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천내 또는 내안이라고 부른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많이 세거한다.
낙안(落雁), 낙안평, 광석(光石)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원골에서 금강을 건너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또한 돌밭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 기러기가 넓은 들판에 앉는 모양))의 형국이라 하여 낙안, 낙안평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나반들(난들)이라고 부르며 광석이라고도 부른다.
난들은 광석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천내강을 광석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원골은 조선시대 제원역에 딸린 동원이 위치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세거한다.
-원골
원곡(院谷)이라고도 부른다. 천내 동북쪽으로 금강변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제원역에 딸린 원집 동원(東院)이 있었던 마을이라 원골, 원곡이라고 부른다,
-짚은장선이
천태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며, 신선이 살만한 마을이라 하여 장선이라 한다.
천내리 원골에서 영동방면의 698번 도로르 따라 2Km 가량 내려가면 양산면 가선리르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천내강 하류 가선교를 건너 구비구비 험준한 산길을 휘돌아 2Km 쯤 올라가면 천태산 아래에 장선이가 위치한다.
장선리는 계곡물을 사이에 두고 영동군 양사면 가선리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한 마을임에도 개울 건너편은 네원면 천내리가 관할구역이고, 반대쪽은 양산면 가선리에 맞닿아 있다.
과거 장선리는 장수황씨의 집성촌으로 30호에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아담한 산촌이었으나 대부분 대처로 떠나고 지금은 고작 세 가구에 다섯 명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당시 전란을 피해 숨어든 장수황씨, 졍주최씨, 정씨가 비슷한 시기에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경주최씨는 길곡리로 이거하고 정씨도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다. 장수황씨는 입향 이후 13대를 이어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가선교르 통하여 왕래를 하지만 지난날 장선이는 신안골 열두 다리를 경유하여 제원방면으로 왕래했다.
-시암골
천내 앞에 있는 골짜기로, 샘이 있다고 하여 샘골로 부르다가 변하여 시암골이 되었다.
-고사발
천내 남쪽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임내골
천내와 원골 사이의 골짜기를 골짜기를 임내골이라 부른다.
-승주골
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지칭한다.
-앞내안
내안 마을 안쪽에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 뒷내안
내안 마을 뒤쪽에 있어 뒷내안이라 하며 인흥동이라고고 한다.
문화유적과 민속
- 천내리 고인돌(주소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502-1, 천내리 470-5)
"천내리"고인돌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5호(1995.03.06 지정)
"용화리"고인돌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6호(1995.03.06 지정)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이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일용골 마을 뒷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낮은 구릉성(丘陵性)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모두 12기가 확인되며 덮개돌은 사각형(四角形) 또는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200㎝ 안팍의 크기이다. 주변에서 돌칼, 돌화살촉, 붉은색을 띤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 제원대교에서 바라본 용호석①과 용호석② 위치한 모습,
- 용호석(주소 :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449)
길 찾아가기
금산IC에서 제원 방면으로 계속직진하면 1.7km 전방 제원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영동방면으로 길을 잡아 계속 직진하면 1.95km 전방 제원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농로로 접어들면 용호석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도유형문화재 4호로 지정되어 여기면서 용호석제를 모시고 있다.
충청의 젓줄 금강이 ‘U’ 자 형을 그리며 남에서 북으로 휘돌아 나가면서 만들어 낸 충적평야가 발달한 곳 낮은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 마을은 강의 안쪽에 있다하여 ‘내안’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의 동부와 북부, 서부 강쪽으로 발달한 충적평야는 문전옥답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천내리의 옥토이자 옛 왕이 정한 능묘자리로 정했을 정도로 길한 기운이 도는 명당이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안동으로 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陵墓)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로 준비하게 하였으나, 개경(開京)으로 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과 함께 그 사실을 미루어짐작케 할 수 있는 용호석이 그 터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천내리의 농토 북서쪽 강변쪽으로 230m의 간격을 두고 있는 용호석, 남쪽에 용석이, 북쪽에 호석이 모진 풍파를 견디며 600여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용호석은 한 때 천내리에 있어서 장승같은 존재였다. 동네사람들이 잡귀들로부터 재액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정월 초사흗날 자정에 산제를 지낸 다음 정월 열나흗 날 저녁에 용호석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용호석은 용과 호랑이 모습을 각각 2기(基)의 돌에 새긴 것이다. 천내리의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변 제원대교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용석(龍石)이, 그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230m 지점에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
용석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如意珠)를 물고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호석은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두툼하게 튀어나온 곡선과 동그라미를 조각하여 호랑이의 털 무늬를 만들었다. 호석의 몸체는 서쪽을 향하였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열고 있다.
- 취병협
월영산과 천태산 줄기 부엉댕이산 사이에 흐르는 금강가 절벽에 푸른 옥이 병풍처럼 펼쳐있다고 하여 취병협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원골유원지와 어죽마을로 유명하다.
"금산의 명소 인공폭포 탄생"
금산, 원골관광지 자지산 자락에 80m 높이, 주변 경관과 더불어 장관, 관광상품 개발 기대
금강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조성됐다.
금산, 원골관광지 자지산 자락에 80m 높이, 주변 경관과 더불어 장관, 관광상품 개발 기대
금강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조성됐다.
금산군은 제원면 천내리(원골) 금강변에 자연 친화형 인공폭포조성사업을 마무리하고 18일 지역 주민들과 함께 준공식을 가졌다.
인공폭포의 규모는 높이 80M, 총길이 95M로 5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으며 하루 2번(오전 11시30분~13시30분 / 오후 16:00~18:00) 가동된다.
인위적인 구조물 없이 자연암반을 배경으로 삼아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원골 인공폭포의 특징이다.
폭포 아래로 휘감아 도는 금강줄기와 강물에 비치는 산그림자가 일품인 월영산의 위용이 더해져 한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인공폭포가 조성된 원골지역은 맑은 금강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이용한 어죽, 매운탕, 도리뱅뱅이 등 금산만의 특별한 민물고기 요리로 이름 높은 곳이다.
연평균 20여만명에 달하는 관광객과 미식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주변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민박 및 팬션이 자리해 가족형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취병협이라 불리는 기암절벽과 맞단 여울과 소에서 즐기는 낚시와 다슬기 잡이 등 다양한 강변체험도 가능하다.
이번 인공폭포 준공은 기존 금강변에 조성된 체육시설과 잔디광장의 활용도 제고를 통해 집객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금산만의 독특한 볼거리 먹거리 등 다양한 주민 소득원 발굴을 통한 소득증대를 기대와 함께 월영산 등 기존 관광자원과 연계한 관광 상품의 개발도 가능해졌다.
제원나루 전설
제원면에 위치한 금강 지류의 나루. 나루의 동쪽은 금산과 충청 북도 영동을 나누는 도계를 이루며, 나루에서 3㎞ 하류 지점은 강이 산 능선을 갈라서 흐르는 선행성 유로가 있다. 이 협곡은 길이가 5㎞로 경치가 아름다우나 홍수 때 배수가 안 되고 급류이며, 하상은 넓은 바위로 되어 있다. 또한, 이 협곡은 금산-영동간의 주요 교통로로서 현재 정기 버스 운행 노선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 2만 여명이 금산과 옥천 사이 골짜기에 침입하여 제원 나루를 건너 금산읍으로 진출하려 할 때, 금산 군수 권종이 강을 못 건너게 화살을 쏘아 많은 왜적을 죽였다. 수와 무기가 월등한 왜군이 밤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자 권종은 아들 준과 끝까지 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따른 전설로는 권종이 왜적에게 실제의 강보다 깊은 것으로 오인시켜 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
옛날에 권종을 짝사랑하다가 죽은 처녀의 귀신이 왜놈들이 보는 앞에서 강을 맨몸으로 건너 보임으로써, 그것을 본 수 많은 왜적이 일시에 강을 건너 금산이 함락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는 이 나루터에 360m의 제원 대교가 건설되어 뱃길은 없어져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여름철에는 인근 주민들의 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닥실나루,
뽕나무여인의 전설이 전해오는 금강을 오가는 중요한 교통요지였던 제원면 저곡리 닥실나루 닥실마을 농촌체험마을
비단강이라고 불리는 금강이 장수 진안 무주를 지나 금산으로 흘러들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과 비슷하다는 적벽강을 지나 금산오토캠핌장이 있는 수통리를 지나 충북 영동군으로 흘러들기 전에 만나는 곳이 바로 닥실나루이다.
지금은 제원면 저곡리와 천내리 사이에 제원대교가 세워져 나루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천내리에 있는 천내나루와 저곡리 닥실나루를 오가는 나룻배는 금산과 영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중의 하나였다.
금강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천내습지를 가운데 두고 금강이 흘러내리는 저곡리 마을 앞길에는 닥실나루가 있었던 흔적은 온데 간데 없고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돌로 만든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준다
닥실나루에서 마골피로 가는 오른편에는 금계포란형이라는 명당자리에 터를 잡은 닥실마을을 만날수 있는데 닥실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금강생태체험관을 비롯해서 닥실농촌체험마을에서 다양한 체험과 인삼이 들어간 음식체험을 할수 있다
비단강이 흐르는 닥실나루가 있는 저곡리에는 블랙푸드로 각광을 받고 있는 오디열매가 열리는 뽕나무가 여기저기 자생하고 있는데 이 뽕나무와 관련하여 임진왜란 당시 갯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와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이 전설은 닥실나루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제원대교 방면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임진왜란때 금산군수 권종이 순절한 곳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된 권 충민공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비석의 주인공과 관련된 전설이라고 전해온다.
권율의 사촌형인 금산군수 권종은 1592년 6월 24일 충북 영동을 거쳐 금산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서 닥실나루 앞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지인 저곡산성에 진을 치고 강물의 깊이를 알수없게 하기 위하여 황토물을 흘러보내서 적을 교란하였다.
노란 황토물을 금강을 가득 매운채 강물이 흘러내리고 천내나루에서 닥실나루로 건너갈 배한척 구하지 못한 왜군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데 권종군수에게 버림을 받아 세상을 등진 처녀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뽕나무단을 머리에 이고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유유히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물이 깊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강을 건너 우리군사들이 패퇴하였다고 한다.
금산군수였던 권종장군의 전설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남한강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을 맞이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신립장군의 전설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남성상위의 계급구조가 불러온 비극이 이렇게 전설로 전해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닥실나루 인근에 자리잡은 저곡리 닥실마을은 닥나무를 많이 심어서 닥실마을로 불리는 저곡1리는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금강초등학교가 자리잡은 이유도 병아리들이 모여드는 형상이라고 전해오는데 사계절 다양한 테마로 농촌체험활동을 할수 있다.
그리고 가을에는 고구마캐기, 감자캐기, 땅콩따기, 고추따기, 콩탈곡, 포도따기 등의 체험을 할수 있고 겨울에는 윷만들기, 썰매타기 등을 체험할수 있고 민물음식만들기, 서각체험, 전통놀이, 생화체험, 연만들기 등을 연중체험할수 있다.
충청남도 금산여행지,
닥실나루(닥실마을)- 권충민공유허비,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25-1번지 ,
출처 ^ 참고문헌,
[제원나루 전설
[제원면(濟原面) 천내리(川內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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