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자동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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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운전사는 윤권으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운전기술을 익힌 뒤 황실의 운전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무렵 상류층 사람들은 주로 인력거를 이용했고(1911년 현재 전국에 1,217대), 서울의 경우 서민들은 전차를 타고 다녔다.
인류가 그시대로부터 바퀴를 발명한 것은 약 6,000년 전이라고들한다. 그것을 사람의 힘이나 짐승의 힘으로 사용 하게된 시대가 상당한 오랜시간이 지속되었으며, 자체의 힘으로 달리는 수레는 항상 인간의 꿈이었다. 예를 들면, R.베이컨은 1250년 “어느 날엔가 말이나 그밖의 동물에 의하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달리는 차가 생기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15∼16세기의 대예술가이며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도면까지 그렸던 만능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스프링의 힘으로 달리는 3륜의 자주차(自走車)의 도면을 그렸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569년 네덜란드인 S.스테핀이 돛에 바람을 받아 주행하는 풍력(風力) 자동차를 만들어, 28명을 태우고 시속 34km로 달렸는데, 현재와 같이 고도한 범주기술(帆走技術)이 없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는 달리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1680년대 에는 대과학자 I.뉴턴이 증기를 뒤쪽으로 분출시켜 그 반동으로 달리는 추력(推力) 자주차를 계획하였으나, 실물을 제작하지는 못하였다. 본래의 의미의 자동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에 증기기관이 실용화된 후이며, 특히 1770년 프랑스의 N.J.퀴뇨가 제작한 증기자동차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의 힘에 의해 주행한 차로서 유명하다. 당시 퀴뇨는 프랑스군의 공병 대위였으며, 포차(砲車)를 견인할 목적으로 대소 2대의 증기자동차를 시작(試作)하였다. 이 증기자동차는 앞바퀴 하나만을 구동하는 3륜차였으며, 중량이 크고 보일러의 용량이 작았기 때문에 그 속도가 겨우 사람이 걷는 정도인 시속 5km였다.

보일러도 15분마다 물을 보충해야 했으며, 앞바퀴 하중(荷重)이 너무 커서 조향(操向)하기가 어려웠고, 브레이크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때문에 대형의 것은 파리 교외에서 시운전 중 언덕길에서 세우지 못하고 벽에 부딪쳐 화재를 일으켰다. 퀴뇨의 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중지되었으나, 그후에도 유럽 각지에서 증기자동차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 중에 영국의 R.트레비식이 1801년 완성한 증기자동차는 상당히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그 2년 후에 제작한 지름 3.8m의 거대한 구동바퀴를 갖춘 4륜차는 런던 시내에서 시속 13km로 주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6∼1836년에는 W.핸목이 만든 10대의 증기자동차(버스)가 런던 시내와 첼트넘 간에서 정기 운행하여, 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자동차가 되었다.
이 정기버스는 22인승에 평균 속도는 16∼23km/h였다. 이렇게 하여 증기자동차가 그 실용의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1865년에, “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 중 1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가지고 60km 앞을 달려야 한다, 최고속도를 6.4km/h 이하로 하되, 시가지에서는 3.2km/h로 제한한다, 증기를 방출하지 않는다” 등을 정한 ‘붉은 깃발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의 자동차 발전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것은 마차를 끄는 말이 자동차에 놀라서 폭주하여 위험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자동차가 상당히 보급된 1896년까지 존속되었다.
증기자동차는 유럽 대륙이나 미국에서도 제작되었지만, 보일러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자동차의 성능이 낮고, 불을 때서 증기가 발생하여 주행이 가능하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등의 결함이 있어, 개인용의 소형 자동차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증기기관은 영국 등에서 대형 트럭이나 중량물 견인용 트랙터 등으로 192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보다 소형이고 강력하며 간편한 원동기를 계속 추구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전기자동차가 출현하였으나, 이것도 축전지가 무겁고 항속거리가 짧으며, 충전에 장시간을 요하는 등의 결점이 있었다. 그래도 구조가 간단하고 내구성(耐久性)이 크며 운전하기가 쉬운 점 등이 있어 주로 여성용으로 미국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소량 생산되었다. 자동차의 본격적인 발전은 내연기관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연기관에 대한 발상은 상당히 오래 되었으며, 네덜란드의 C.하위헌스가 1680년에 화약의 폭발에 의해 작동되는 기관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1860년에는 프랑스의 J.E.르누아르가 석탄가스를 원시적인 점화장치로 연소시키는 기관을 만들었고, 3년 후에는 액체연료로 작동되는 기관을 마차에 탑재하고 주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8년 오스트리아의 S.마르쿠스가, 1884년 이탈리아의 E.베르나르디가 내연기관을 탑재한 자동차를 만들었다. 한편, 1862년 프랑스에서는 A.B.로사가 사이클 기관의 원리를 발견하였으며, 1876년 독일의 N.오토가 처음으로 이 원리에 따른 4행정사이클 기관을 완성하였다.
오토 내연기관연구소의 젊은 기사였던 G.다임러가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가볍고 강력한 기관을 완성하고, 1885년 이것을 목제의 2륜차에 탑재하여 사상 최초의 2륜차를 시작하여, 각각 특허를 얻었다. 또 K.벤츠도 독자적으로 2행정사이클 가솔린기관을 완성, 다임러와 같은 해인 1885년에 3륜차를 제작하고 다음해에 특허를 얻었다. 다임러와 벤츠 두 사람은 사상 처음으로 실용적인 가솔린기관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업화한 점에서 획기적이었으며, 두 사람은 자동차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그후 이 두 회사는 서로 좋은 경쟁상대로 발전하였으며, 1926년 합병하여 회사명을 다임러-벤츠, 차의 명칭을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로 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프랑스에서는 파나르-르바소르(Panhard-Levassor)회사가 다임러 기관의 제작권을 얻어 자동차의 생산을 개시하였는데, 앞쪽에 기관을 설치하고, 동력을 클러치 → 변속기 → 뒷바퀴로 직선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갖추었다.
1900년 다임러가 발표한 최초의 메르세데스차는 벌집 모양의 라디에이터, 둥근 핸들, 반타원형 스프링 등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는 자동차의 근본적인 형태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자동기어 장치(1827년 프랑스의 O.페쿠르), 변속기(1832년 영국의 W.H.제임스), 공기타이어(1845년 R.W.톰프슨) 및 그 밖의 발명도 크게 공헌하였다.
1887년 영국의 J.버틀러가 3륜 가솔린차의 시작에 성공하였고, 1889년에는 독일의 마이바흐, 프랑스의 푸조, 이탈리아의 비안키 등이 자동차의 생산을 개시하였다. 좀 늦은 1893년에 미국에서도 C.두리에이와 F.두리에이 형제가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완성하고, 2년 후에 생산·판매를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프랑스의 《프티 주르날》 신문사의 주최로 파리-루앙 간 126km 구간에서 자동차경주가 열려, 드 디옹 백작이 운전한 드 디옹 부통 증기자동차가 6시간 걸려 평균 21km/h의 속도로 1착을 하였다.
엄정한 판정 결과 다임러 기관을 탑재한 푸조와 파나르가 승리를 나누어 가지게 되어 가솔린 자동차의 우위가 입증되었다. 후에 드 디옹 부통도 가솔린 자동차로 전향하였다. 유럽에서는 처음에 자동차는 귀족이나 일부 대부호만이 가졌으나,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R.E.올스는 1901년 유명한 올즈모빌을 425대 제작하여 세계 최초의 자동차 양산 제조업체가 되었다.
1908년 H.포드가 발표한 T형 포드는 간결하고 신뢰성이 높은 설계와 새로운 합금강의 사용으로 견고할 뿐 아니라, 양산방식 때문에 그 값이 저렴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첫해에 6,850대, 그 다음해에는 1만 대를 판매하였다. 1913년에 포드는 급증하는 수요에 맞추기 위해 자동차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컨베이어 라인에 의한 작업방식을 채택하였고, 최전성기였던 1925년에는 연간 199만 950대를 생산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최염가형 로드스터의 값이 260불이었다. 그러면서도 품질이 나쁘지 않았고, 대량구입에 의한 우수한 원자재, 대량생산에 의한 균일한 공작 등으로 10배 이상이 되는 비싼 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회사가 충분한 이익을 올려, 근로자에게 그 당시의 평균의 배가 되는 일급 5달러를 주고, 신규 구입자에게는 수표로 50달러씩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1914).
T형 포드는 미국 외에 영국·독일에서도 생산되고 세계 각지에서 조립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의 첫 출고부터 1927년 5월 26일 생산 중지일까지의 18년 반 사이에 1500만 7033대를 생산하였다. 통칭 ‘딱정벌레’라고 하는 폭스바겐이 1972년, 1945년 만에 이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여기에는 27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종전 후의 무의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T형 포드는 그 전성기에 전세계 자동차 보유량의 68%를 차지하고 있었다.
T형 포드의 성공은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A.시트로엥은 포드에서 배운 방식으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량생산을 개시하였으며, 1922년 독일의 오펠(Opel)사는 5CV차를 양산하여 유럽의 대중에게 제공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1919년에 피아트(Fiat)사가 501형을 양산하였고, 영국에서는 1922년에 H.오스틴이 유명한 오스틴 세븐을 발표하여 자동차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0년에는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전근대적인 일품제작(一品製作)의 고급차는 거의 소멸하고, 자동차는 모두 대중차 양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사이에 기구상(機構上) 개량·진보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차체(body)는 1900년대에 이르러 마차의 형태를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그후에도 포장마차형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상자형 대중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말에 이르러서이다.
1930년대에는 전부 강판으로 된 상자형 차체의 양산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1934년부터는 유선화(流線化)가 진행되었다. 1940년 이후에는 차체의 높이가 더 낮아지고 길이도 길어지고 폭이 넓어졌으며, 스텝이 차체에 포함되고, 객실이 더욱 넓어졌다.
주 용어 & 관련 업군
주요 용어
• 연소(燃燒): 물질이 빛이나 열 또는 불꽃을 내면서 빠르게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이다.
• 윤활(潤滑): 마찰면에 기름이나 그리스 등을 도포하여 마모, 열 발생을 막아 마찰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 공기저항(空氣抵抗): 자동차가 운행 중 공기로부터 받는 저항으로 자동차의 정면 면적에 비례하고, 자동차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 ECM(Electronic Control Module): 자동차의 엔진, 자동변속기, ABS(Anti-lock Brake System) 등의 상태를 컴퓨터로 제어하는 전자제어 장치이다.
• 공냉식(air cooling type): 공기에 의한 냉각방식이다.
• 수냉식(water cooling type): 별도의 물 펌프와 방열장치를 두고 냉각수를 순환시키며 냉각하는 방식이다.
• 3원 촉매장치: 배기가스 중의 질소산화물(NOx), 일산화탄소(CO), 탄화수소(HC) 등 3가지 유해물질을 동시에 정화, 처리하는 장치이다.
• 주행저항(走行抵抗): 자동차 주행 시 그 주행을 방해받는 힘을 말한다. 주행저항에는 차바퀴가 노면을 굴러갈 때 발생하는 구름저항, 주행 시 공기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공기저항, 언덕을 오를 때 중력의 힘에 의한 등판(구배)저항 등이 있다.

1886년 칼 벤츠가 만든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 구동력(驅動力): 어떤 속도로 기계를 움직이거나 배나 자동차 등을 주행시킬 때 그 운동저항을 이기기 위한 힘이다.
• 가속능력: 자동차가 일반 평지에서 주행 시 가속할 수 있는 최대 여유 능력을 말한다.
• 등판능력: 자동차나 트럭 등이 비탈길을 오를 수 있는 능력이다.
• 연비: 자동차의 주행에 따라 소비되는 연료의 양의 비율이다.
• 하이포이드기어: 종 감속 기어의 일종으로, 테이퍼 롤러 베어링에 지지된 구동 피니언기어는 링 기어의 중심보다 낮게 설치되어 있는 베벨기어(spiral gear)의 일종을 말한다.
• 쇼크 업소버(shock absorber): 쇼크 업소버의 원리는 스프링의 수축력을 조절해, 노면 에서 충격을 받은 스프링이 위아래로 반복해서 상하운동을 하는 것을 감쇄 시켜 줌으로써 스프링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관련 직업군
• 기업체: 각종 기계 및 관련 장비 생산업체, 산업기계 제작회사, 자동차 생산업체, 자동차부품 설계 및 생산업체, 자동차정비 및 검사업체 등
• 정부 및 공공기관: 기계직 공무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
각종차의 용도에 따라 발전,
승용차·버스·트럭·특수작업차 등.
승용차
승용차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9년 당시 총리대신이 인력거를 탔다는 기록이 있고,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에서 1911년 미국산 포드형 승용차를 1대씩 구입하였다고 하므로 이 해에 처음 도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왕직에서 구입한 차는 고종이 탔는데, 윗덮개가 없고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큰 가솔린 승용차였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차는 미국산 캐딜락이었다.
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승용차가 서울의 상류층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도로사정이 나빴던 데다가 한강 인도교 조차 없어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도교 가설 이듬해(한강 첫 다리는 1917년 10월 7일 준공됨)인 1918년 212대로 불어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승용차는 꾸준히 증가해 1926년 1,587대, 1931년 4,331대에 이르렀다. 한편, 각 지방도시에서는 1910년대 말부터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이에 따라 승용차도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되어 1919년에는 전국의 자동차가 4,535대로 불어났으며, 1945년에는 7,326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승용차는 관용·자가용·영업용·특수용 등으로 나누어졌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승용차는 크게 줄어 1951년의 경우 자가용이 787대, 관용이 633대였으나, 10년 뒤인 1961년에는 관용이 1,095대, 자가용이 1,925대로 불어났다. 1972년 3,063대였던 관용승용차는 1983년에는 5,812대가 되었다. 1987년 1월 말 기준으로 승용차는 전체 자동차의 50.8%인 67만 2493대에 이르렀다.
외제자동차는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진 1987년 하반기부터 1989년 11월 사이 1,181대가 판매되었다. 서울의 경우 1989년 6월 말 기준 등록된 외제차량대수는 2397대였으며, 이는 1988년 말의 2,088대에 비해 14.8%나 늘어난 것이었다.
영업용 승용차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운행된 것은 1912년이다. 운행자는 일본인 오리이[織居加一]였고(일본인 近藤와 한국인 李逢來라는 설도 있다.), 요금은 1시간에 5원이었으며 전화로 불러 이용했다. 당시의 요금은 매우 비싼 편이어서 일부 부유층이나 특수직업을 가진 사람이 탔다. 영업용 승용차를 오늘날처럼 ‘택시’라고 부른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매우 귀해서 승용차의 경적 소리만 나면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뛰어나올 정도였다.
자동차 경적이 클랙슨으로 바뀌기 전에는 바람이 찬 고무공을 꾹꾹 누르면 작은 나발에서 ‘뿡’ 하는 소리가 났다. 이무렵에 퍼진 「오줌 찔금 진고개, 방구 뿡뿡 자동차」라는 동요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승용차 속도는 매우 느려서 자동차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솔린 냄새를 맡으려고 어린아이들이 달음박질로 따라갈 정도였다.
택시운전사들은 제복을 입지 않고 양복을 입었는데 헌팅모자를 반드시 뒤로 돌려서 썼다. 이무렵에 차양이 뒤로 가도록 모자를 돌려서 쓴 사람은 야구 포수와 운전사 뿐이었다. 이것은 1921년 제작된 미국영화 「생지옥」의 주연배우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헌팅모자를 뒤로 젖혀 쓴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달리는 차의 스피드 감각을 더 잘 느끼게 해주었다.
택시는 점차 이용자가 늘고 대수도 증가하자 요금이 떨어져 1928년에는 서울시내 어디나 4인 기준 1원이었고, 한 사람이 느는 데에 따라 20전씩 더 받았다. 그러나 교외는 별도의 요금을 적용했다. 예컨대 망우리는 4원 50전, 신촌역과 청량리역은 2원, 우이동은 5원이었고, 인천이나 수원은 15원이었다. 한편, 대기요금은 30분에 2원을 받았다.
1931년에는 택시요금이 80전으로 내려갔다(당시 인력거의 하루 요금은 4원). 택시는 점점 불어나서 1947년 말 전국 81개 사업자가 1,090대의 면허를 받아 영업했으며, 이 가운데 54개 업자의 949대는 서울에서 운행되었다.
택시대수는 2년 뒤 1,312대로 늘었으나 당시의 업자들은 5∼10대의 차량을 가진 영세업자들로서 경험이 부족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특히, 1949년 4월 1일 운임규정이 고시되기까지 요금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한때 사라졌던 승합마차와 인력거가 다시 등장하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한국전쟁 직전 전국택시는 1,570대였으며, 이들은 모두 외국산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국산차인 6기통의 세단형 ‘시발(始發)’차가 양산되면서 택시대수도 늘어났다. 1957년에는 322명의 업자가 3,864대를 보유(서울 1,576대)했다. 이무렵부터 택시에 요금표나 이정표를 비치, 문제점이 개선되어 대도시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서 위치를 점점 굳혀갔다.
1987년에는 전국의 택시가 4만 1200대로 늘었났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PATT 총회를 계기로 664대의 콜택시가 등장했으나 1988년 4월 15일 이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형택시가 나왔다. 또, 1985년부터는 일부 대도시에서 시간·거리 병산제도가 채택되었다.
서울시내의 경우 1950년대 초부터 합승택시가 운행되었다. 1957년에는 24개 노선에 900대가 움직였으며, 차량도 점차 대형화되어 1960년에는 9인승이 11인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16인승의 마이크로버스가 나타났다. 이 합승택시가 차지하는 운송비율은 매우 높아서 1960년 기준 3,000여 대가 운행되었으며, 차체가 작아서 대형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비교적 좁은 도로에서도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버스
버스는 사용목적에 따라서 정기수송용의 노선버스, 장거리고속버스, 관광용의 관광버스로 나뉘며, 이밖에 관청이나 학교 등에서 출퇴근에 쓰는 자가용버스, 정기버스 정거장에서 멀리 떨어진 인구조밀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운행하는 새마을버스도 있다.
노선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으로, 일본인 오쓰카[大塚金次郎]가 경상북도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는 부정기버스를 운행했다. 이어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오리이 등에 의해 황해도 사리원에서 해주, 평안남도 평양에서 진남포, 진남포에서 광량만,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의주, 충청남도 천안에서 온양 및 공주에서 조치원·청주,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에서 상주 사이에 버스가 등장했다.
버스운행은 도로의 신설과 교통량 증가에 따라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1917년에는 업자 10명에 영업노선 1,000㎞를 넘어섰고, 5년 뒤에는 업자 154명에 1만㎞를 돌파했다. 1934년에는 233명에 3만여 ㎞로 확대되었으나 1940년경에는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연료부족사태가 벌어져 업자 151명에 2만 5000여 ㎞로 줄어들었다. 1937년에는 연료를 카바이드로 대신한 버스도 나타났다. 이때까지의 버스는 대부분 중형이어서 승차정원이 35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40년대에 이르러 50명이 되는 대형버스가 등장했다. 서울의 버스운행은 1928년 부영(府營)버스가 나타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승합자동차’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버스’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의 버스노선은 러시아워선과 임시운전선의 2개선으로, 러시아워선의 경우 서울역에서 시청을 거쳐 중앙청에 이르는 제1구와 중앙청에서 안국동·종로를 거쳐 을지로 3가로 돌아서 필동에 이르는 제2구에서 운행되었다(임시운전선은 4구간).
버스는 모두 30대로 12인승의 초미니 상자형이었으며 요금은 5전이었고, 그나마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 및 오후 5시에서 10시까지만 움직였다. 1929년에 들어와 요금은 전차요금과 같은 5전으로 내린 반면 버스는 50여 대로 늘었으며 노선도 9개 노선으로 확장되었다. 여러가지 문제점이 많아 1932년 운영권이 전차 운영회사인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넘어갔으며, 이에 따라 버스와 전차를 갈아탈 수 있는 승환제가 생겨났다.
관광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이다. 이 해 6월 22일부터 경성명소유람승합자동차(京城名所遊覽乘合自動車)가 운행된 것이 그것으로, 하루 오전 8시와 오후 1시에 두 번 떠났다. 14개소를 들르는 데 4시간이 소요되었고, 요금은 2원 20전이었으며, 버스는 16인승이었다.
1923년에는 서울과 양평 사이에 시외버스가 매일 운행되었고, 1928년에는 서울-인천간(1일 12회, 요금 95전), 1929년 1월부터 서울-원주간, 9월에는 서울-춘천간에 버스가 투입되었다.
1930년에는 서울과 포천 사이에 직통자동차가, 이듬해 3월부터는 서울-수원간에도 버스가 운행되었다. 광복 후 서울의 버스는 100여 대로 늘었으나 연료부족 등으로 운휴되기 일쑤였다.
1949년 8월 31일 처음으로 시내버스운수업자가 지정됨에 따라 105대가 움직였으며 연말에는 521대로 늘었다. 이때의 버스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것으로서, 뒤쪽에 붙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승객은 좌우 양쪽의 나무의자에 앉거나 중간에 서 있어야 했다.
한 노선의 예를 들면, 독립문에서 출발해 을지로 입구가 종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버스운행은 점차 되살아나 1953년 말 전국의 버스는 2년 전보다 2배가 늘어난 1만 8000여 대에 이르렀다. 이듬해 3월 3,000여 대로 불어나면서 버스운송은 철도의 여객운송(4700만 명)을 능가하는(5500만 명) 실적을 올렸으며, 수입면에서도 철도(20억 환)보다 훨씬 앞질렀고(35억 환), 1957년에는 135명의 업자가 4,560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의 서울시내버스는 타고 내리는 문이 앞뒤 두 곳에 있었고, 남자 차장이 요금을 받았다. 뒤에 차장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뒤쪽의 문은 가운데로 옮겨졌다. 그러나 1982년 자율버스제도가 시행되면서 부분적으로 안내양이 줄어들다가 1985년 말에는 완전히 없어지고 운전사가 요금을 받는 현재의 제도로 굳어졌다. 1984년 5월 말 기준 3만 2863대였던 전국의 버스는 이듬해에 11만 5000여 대로 급증했으며, 1987년 1월말에는 15만 6000여대가 되었다.
화물자동차
화물자동차의 영업은 1926년부터 본궤도에 올랐다. 당시의 사업자는 45명이었고 연장노선은 3600㎞였다. 2년 뒤에는 1만㎞로 확장되었고(업자 129명) 1934년에는 2만 7500㎞(업자 234명)에 이르렀다.
버스의 경우처럼 화물자동차도 1940년에는 정기화물업자 23명에 영업노선은 4,800㎞로 축소되었고, 부정기화물은 업자 99명에 노선은 1만 8000여 ㎞였다. 광복이 되면서 생활필수품의 대도시 운반 등 화물자동차의 운송량이 대폭 늘었다.
이에 따라 1947년에는 178명의 업자가 2,551대의 트럭으로 126만 84t의 화물을 수송해 5억 2000여 원의 수입을 올렸다. 1950년 5월에는 242개업자가 3,130대의 트럭을 운행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트럭의 78%가 피해를 입었고, 나머지도 군용으로 징발되는 등 화물운송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휴전 무렵부터 징발차량이 해제되고 850대의 트럭이 수입되면서 화물운송업계는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54년 1월 15일 기준 전국의 화물트럭은 4,211대(업자 334명)였으나, 3년 뒤에는 2배에 가까운 8,713대(업자 401명)로 늘었다.
이후 화물자동차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972년 2만 1161대이던 것이 1980년 6만 4140대, 1983년 7만 5655대, 1985년 41만대, 그리고 1987년에는 47만 5615대로 늘었으며, 1990년에는 87만여 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1955년 시발자동차회사(始發自動車會社)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300대의 미국산 윌리스지프를 조립해 관용으로 납품한 것을 발판으로 이듬해부터 지프형의 ‘시발’차를 생산, 전국에 택시로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차 이름인 시발에는 이처럼 ‘첫걸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시발은 미군이 쓰던 지프의 부품과 4기통 엔진을 조립한 것으로, 1964년까지 3,000여 대를 생산했다.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최초의 자동차 공장은 재일동포인 박노정이 1962년 경기도 부천에 세운 새나라자동차공장으로서, 이 회사에서는 일본 닛산회사의 블루버드 승용차 400대분의 중간분해부품을 들여와 그 해 8월부터 ‘새나라’승용차를 조립, 판매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하동환(河東煥)자동차제작소(동아자동차회사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1963년에는 기아산업주식회사에서 세바퀴 화물자동차를 만들었다.
1963년에는 신진공업사가 미국산 불하품으로 승용차 ‘신성호(新星號)‘를 생산하다가 1965년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이듬해 신진자동차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조립한 코로나승용차를 선보였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회사는 이듬해부터 미국의 포드회사와 손잡고 코티나를 만들었으며, 아세아자동차회사 1970년부터 피아트 124를 생산해 ‘신진‘·‘현대‘·‘아세아‘의 세 회사가 경쟁상태에 들어갔다.
1974년 기아산업주식회사가 일본의 마쓰다회사와 협력해 브리사승용차를 제작했다. 이와 같은 자동차공업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국내수요가 늘어 호황을 누렸으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1980년 이른바 「2·28조치」를 발표, 승용차는 현대자동차회사와 새한자동차회사로 이원화하고, 기아산업주식회사는 소형버스와 트럭만을 생산하도록 규제했는데, 1982년 기준 승용차 9만 3451대, 버스 2만 931대, 트럭 4만 8279대가 출고되었다. 경기회복과 수출증대에 따라 1987년 이 조치가 해제되면서 현대자동차회사와 대우자동차회사(새한자동차회사는 1983년 대우자동차회사로 바뀜) 그리고 기아산업주식회사의 세 회사가 전차종을, 동아자동차회사는 지프와 특수장비차를, 아세아는 버스와 특수장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전국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돌파했고, 현대자동차회사의 포니 2가 캐나다에 처음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에는 같은 회사의 엑셀이 미국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편 이듬해에는 대우자동차회사의 르망, 기아자동차회사의 프라이드(해외에는 페스티바로 수출)가 미국시장에 진출했다.
1987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130만 대에 이르렀고, 이 해에 50만여 대가 수출되어 한국은 자동차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해마다 늘어난 자동차 등록대수는 1990년 6월 말 기준 자가용 266만 1565대, 영업용 29만 4207대, 관용 3만 2178대로 모두 298만 7950대에 이르게 되었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생활이 그만큼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에 못지 않은 부작용도 생겼다. 대도시의 교통체증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대기오염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통사고이다.
1965년부터 20년간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8만 1000명에 이르고, 1985년 한해 동안 사고건수 14만 6000건에 7,500명이 죽고 1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의 교통사고율은 세계에서도 상위 수준으로, 1982·1983년의 1만 대당 사고율은 미국이 125건에 2.7명 사망, 일본이 112건에 2명 사망, 영국이 146건에 3.3명 사망이었으나 우리는 무려 1,500건에 88명 사망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사고율은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긴요성에 관계없이 자동차를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심지어 자동차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자동차 보급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자동차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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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구동
1957년 프랑스 시트로엥사에서 제작된 자동차. 2실린더, 배기량 425cc 엔진이 달려있다. 경제성이 뛰어난 자동차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1990년까지 3,868,634대가 생산되었다.
자동차산업은 부품 제조와 완성차 조립, 판매, 정비, 할부 금융, 보험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전후방 연관 산업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종합산업이다. 전후방산업에 대한 파급 효과와 규모의 경제 효과가 큰 산업이며, 지속적인 첨단기술의 개발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산업이다.
넘처나는 차량들 때문에 이부제와 소형차도 등장하게 되었읍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자동차 종류 (Naver Inforgraphics Search™, 2011.,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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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 (세상을 바꾼 수레, 2010. 11..,)
[네이버 지식백과] 자동차 [automobile, 自動車]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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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 Mécanique(독일어), Voiture Ingénierie(프랑스어), (한자)
기원전 9세기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에는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스스로 움직이는 순금 바퀴가 달린 수레 20대를 만들었는데 번개 같이 달려갔다는 표현이 나온다. 1250년 영국의 철학자 로저 베이컨은 “먼 훗날 언젠가는 말이나 그 밖의 동물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달리는 자동 수레를 만들어 지구를 누빌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기선과 비행기를 예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에는 명나라 초기인 1400년경 발명을 좋아하는 한 부자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앞으로 달리는 로켓식 자동 수레를 만들었는데, 시험 운전 도중 폭발한 탓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2년 태엽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설계해 요즘의 어린이 장난감 같은 네 바퀴 태엽 자동차를 만들기도 했다. 다빈치의 자동차 설계도는 오늘날 자동차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599년경 폴란드의 시몬 스테빈은 풍력 자동차를 발명했다. 그는 직경이 1.5미터나 되는 큰 나무 바퀴를 장착하고 돛을 단 수레를 만들어 28명의 사람을 태우고 시속 14킬로미터로 달리기도 했다. 태엽이나 바람을 이용해 저절로 움직이는 수레를 만든 것은, 비록 요즘의 자동차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인류가 소와 말이 아닌 자연에서 동력을 얻으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다빈치의 자동차 설계도
전 세계에서 자동차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된 것은 유럽 지역뿐이었다. 로마 제국이 5세기 후반 붕괴된 후 오랫동안 유럽은 교통이 낙후된 지역이었다. 지속된 전쟁과 인구 이동, 지방 영주들의 난립 등 많은 문제로 인해 도로는 황폐화되었고, 수레 운행은 급격히 줄었다.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고도로 발달했던 로마의 도로 건설 기술을 잊은 채, 장거리 도로 교통은 여전히 로마 시대의 도로를 부분적으로 수리해서 이용했을 뿐이었다.

유럽에는 도로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무역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유럽 전역에 퍼뜨리고자 하는 상인들의 욕망이었다. 두 번째는 전쟁에 쓰일 화포의 운반과 같은 군사적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상인들의 욕망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엄청난 재물을 가져오면서 더욱 커졌다.

육상 교통이 발전하는 것을 제한하는 요소도 있었다. 유럽은 지중해, 대서양, 발틱 해, 흑해 등 여러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배를 통한 물자 이동이 많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일본의 경우처럼 해상 교통이 육상 교통의 발전을 제약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유럽의 한자동맹 도시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했고, 프랑스, 영국 등에서는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 수레와 도로를 개설하려는 노력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해외를 개척하기 위해 보다 많은 대포와 총이 필요했던 유럽에서는 철, 석탄 광산이 크게 성장했고, 광산에서 광물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레가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도시 자유민인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실험들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재물을 축적한 이들은 왕과 귀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어 시민혁명까지 성공시켰다. 그들은 보다 빨리 보다 많은 물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교통의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자연히 이륜마차, 사륜마차, 합승 마차 등 다양한 수레가 사용되었다. 특히 광산에서는 울퉁불퉁한 갱도 내에서 수레가 쉽게 다니는 방법을 찾다가 나무로 바닥판을 까는 궤도가 고안되었다. 이것은 뒷날 철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레가 자동차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도 이 무렵 유럽에 등장했다. 도로가 물에 젖어 진흙탕이 되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1764년 프랑스에서는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포장하는 공법이 탄생했다. 영국의 매카담은 1815년경에 비용도 싸고, 무거운 마차가 다녀도 견딜 수 있는 뛰어난 도로를 만들었다. 1834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물이 거의 스며들지 않아 축축해질 염려가 없으며 덜 미끄러운 아스팔트로 도로 포장이 이루어졌다.

보다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무거운 물건을 쉽고 빠르게 운반하려는 유럽 사람들의 노력은 마침내 많은 이들이 기다리던 발명품을 등장시킨다. 제임스 와트가 와트식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1769년 특허를 취득하고, 그해 프랑스에서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최초의 증기자동차를 발명한 것이다. 퀴뇨의 증기자동차는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로, 베이컨의 예언을 실현시킨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유럽이었기에 1800년대에 들어와서 자동차 기술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증기자동차가 개선되어 1830년대에는 영국 런던에서 정기 운행을 하는 증기로 움직이는 버스가 다녔다.

19세기 중반에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기차였다. 석탄과 물을 실어야 하는 무거운 증기자동차는 도로를 다니기에 매우 위험했다. 따라서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가 더 각광 받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1886년 고트리프 다임러가 휘발유 자동차를 선보였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자동차는 형태가 마차와 큰 차이가 없었다. 1894년에 루돌프 디젤이 디젤엔진을 발명해 에너지 효율과 안정성을 높이면서 자동차는 더욱 발전했다. 1895년 이후에는 자동차에 타이어를 장착하게 되었으며, 1900년대 초에는 겉모습도 상자 형태로 개량되었다. 실내를 넓히고 유리와 지붕으로 감싸 더욱 편안해진 자동차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1900년경부터 자동차는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자동차를 바퀴 달린 쇠귀신이라고 생각하던 조선에 자동차가 등장한 것도 1900년 무렵이었다.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稱慶式)이 거행되었다. 신하들은 고종에게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개혁 군주임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자동차를 타는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이때 미국에서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조선에서도 자동차가 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자동차는 외형에서도 발전을 거듭했다. 1930년대 중반에 유체역학을 활용한 폴크스바겐 비틀이 등장한 이후 경쟁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가 등장했다. 자동차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탈 수 있었지만, 오늘날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사람과 동물의 힘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인 자동차를 만들려는 인간의 꿈이 결국 성공을 거둔 셈이다.
자동차공학(, automotive engineering)이란?
가솔린·경유 따위를 원료로 삼는 원동기를 장치해 그 동력으로 바퀴를 돌려 도로 위를 달리게 만든 이동수단.
기계공학(機械工學, mechanical engineering)의 한 분야로 자동차를 구성하는 각 파트의 공학적 학문을 다루는 분야이며 자동차의 설계, 조립, 시뮬레이션 및 전체 자동차시스템과 개별부품의 동작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1903년경에 구입한 고종임금 전용 승용차. 창덕궁 소장.,

자동차공학의 학문적 세부 분류는 자동차의 동력원(動力源, power source)에 해당하는 엔진시스템 및 이와 관련한 연소(燃燒)윤활(潤滑)냉각(冷却)연료(燃料) 및 흡/배기(吸/排氣)시스템에 대한 공학적 학문과 자동차를 구동하는 동력전달(動力傳達)계통제동(制動)현가(懸架) 및 조향(操向)시스템에 해당하는 새시 파트의 공학적인 학문을 들 수 있다. 또한 편의장치를 비롯한 전기/전자(電氣/電子)시스템을 연구하며, 차체와 관련한 안전성, 경량화, 공력성능 및 재료에 대하여 공학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현대시대에 대부분의 자동차에 적용된 내연기관(內燃機關)은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작동된다. 이러한 석유로부터 얻어진 연료는 연소 시 인체에 매우 유해한 물질을 배출하며 석유자원의 고갈 역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내연기관을 적용하는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CO2)는 매우 많은 양이 배출되며 지구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 세계 자동차 제작사들은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 대신 전기모터를 적용한 전기자동차(electric vehicle)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이와 같은 전기자동차의 기술개발에 따라 자동차 전력공급 및 전기/전자제어 분야의 학문이 더욱 발전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배터리 제조기술 역시 발전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자동차는 이러한 기술과 더불어 고도의 기동성능과 안전성, 보안성, 조종성능을 갖춰야 하며 현재는 대기 환경오염에 대응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자동차 기술개발이 핵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차의 발전
공학(工學, engineering)의 근본적 의미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창의적이고 실용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학문을 말한다. 학문의 기본이 되는 자연과학(自然科學, natural science)에 비교하여 볼 때 실용적 가치를 중요시 하는 학문 분야를 공학 분야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어떠한 발명이나 기술적 진보도 자동차만큼 인류를 빠르게 변화 시키진 못하였다. 즉 실용적인 공학 분야 중에서 인류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발전시켜온 공학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차 분야이다.
초기의 증기자동차
1765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 개량 후 1769년 프랑스 군대의 기술자인 니콜라스 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 1725~1804)가 만든 최초의 3륜 증기트랙터(steam tractor)를 시작으로 1801년과 1803년 영국의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 1771~1833)이 승객을 운송하는 8인승 증기자동차를 완성하였다.

영국에서 개발된 증기자동차는 도로를 파손하고 소음이 심했으며 연기를 많이 배출하여 말들을 놀라게 하는 문제점들이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65년에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 역시 ‘적기법(赤旗法, Red Flag Law)’을 시행하여 30년간 영국의 자동차 개발을 중단, 자동차의 보급을 방해하였다. 적기법이란 증기자동차가 시골에서는 6㎞/h, 도시에서는 3㎞/h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없는 법이면서 도로통행료를 마차보다 10배나 더 내도록 하는 규제법이었다. 또한 증기자동차가 접근하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낮에는 붉은 깃발을, 밤에는 등불을 흔들어야 했다.

그 후 19세기 후반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증기자동차를 개발하고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중에 미국의 스탠리(Stanley) 증기자동차 회사는 프랜시스 에드거 스탠리(Francis Edgar Stanley, 1849~1918)와 프리랜 오스카 스탠리(Freelan Oscar Stanley, 1849~1940) 쌍둥이 형제가 설립한 회사로 가장 성공적인 증기자동차 회사였다.

그 시기의 증기자동차는 외부의 보일러에 불을 피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자동차 크기에 비해 작고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고압의 증기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이러한 증기기관은 제작 및 유지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증기자동차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트레비식의 증기자동차,
스탠리의 증기자동차,
내연기관 자동차
증기를 이용한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이미 1770년에 개발되었지만 현존하는 자동차의 역사는 내연기관의 적용에서 부터이다. 최초의 내연기관은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1820년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 1792~1882)이 수소(水素, hydrogen)와 공기의 혼합물을 폭발시켜 작동하는 엔진을 개발하였다.

그 후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4행정 엔진을 1885년 독일의 고틀리프 빌헬름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 1834~1900)와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Karl Friedrich Benz, 1844~1929)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였고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는 1891년에 프랑스인 에밀 르바소르(Emile Levassor, 1843~1897)와 동업자였던 르네 파나르(Rene Panhard, 1841~1908)가 다임러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에서 유래한다. 르바소르는 이듬해 앞부분에 엔진을 장착한 전륜 구동방식의 자동차를 최초로 만들었다.

그 후 1898년 루이 르노(Louis Renault, 1877~1944)가 기존의 체인 구동방식에서 오늘날과 같이 구동축을 적용시켜 자동차의 구동기술을 발전시켰다.
차의 구조,,
자동차는 약 3만여 개의 부품의 조립으로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자동차는 일반적으로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 할 수 있다.

① 자동차의 외형과 내부의 공간을 구성하는 차체(body)
② 자동차의 구동과 각종 주행에 필요한 장치들의 조합인 새시(chassis)
차체(body)
자동차의 차체의 유형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차체의 모형은 공기 저항(空氣抵抗, air resistance)을 적게 받을 수 있는 형상으로 설계되며, 승용차 기준으로 엔진실과 트렁크, 승객실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차체는 일체식 구조와 프레임(frame) 장착 구조로 분류할 수 있다. 일체식 구조는 차체의 지붕(roof), 옆 패널(side panel) 및 바닥(floor)을 일체화 구조로 제작한 것으로 모노코크 보디(monocoque body)라 하며 대부분의 중·소형 승용차에 적용하고 있다.

모노코크방식은 강성이 우수한 차체에 동력발생장치 및 동력전달장치 등을 직접 조립하는 방식으로 자동차의 중량을 가볍게 할 수 있고 유효 공간을 확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프레임 장착 차체 구조는 차체의 골격을 이루는 분리된 프레임과 차체를 따로 제작하여 조립하는 형태를 말하며 일부 차종과 대형 차량에 많이 적용 되고 있다.
새시(chassis)
새시는 자동차의 차체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든 부분을 말하며 자동차의 엔진, 동력전달계통, 조향장치제동장치현가장치, 프레임, 타이어 및 휠 등을 포함한다.
엔진(engine)
자동차공학에서 엔진은 동력발생장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자동차가 주행에 필요한 동력을 발생하며 엔진 본체와 부속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자동차용으로 적용되고 있는 엔진의 종류로는 가솔린 엔진(gasoline engine)디젤 엔진(diesel engine)가스 엔진(gas engine)-LPG, LNG, CNG engine 등-, 로터리 엔진(rotary engine) 등이 있으며 승용차에는 가솔린과 LPG 엔진을, 트럭이나 버스와 같은 상용자동차에는 디젤 엔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자동차에서 엔진의 구동방식은 대부분 4행정 1사이클(흡입, 압축, 폭발, 배기)방식을 적용하고 있으며 엔진의 부속장치로는 연료장치, 점화장치, 윤활장치, 냉각장치, 흡/배기장치 및 시동장치 등이 있다.

① 연료장치
연료시스템(fuel system)은 엔진의 연소를 발생시키기 위하여 연료를 공급하는 장치를 말하며 엔진의 성능이나 연료 소비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이다. 연료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연료 탱크, 연료 펌프, 연료 여과기, 연료 분사기, 연료 파이프 등으로 구성되며 공기와 연료의 혼합비(공기+연료의 비율)를 엔진 운전 상태에 알맞게 ECM(ECM: Electronic Control Module)으로 정밀 제어하여 공급하는 장치이다.

② 점화장치
점화장치는 연소실 내에서 압축된 혼합가스(연료+공기)에 전기적인 불꽃을 발생시켜 적절한 시점에 맞게 연소시키는 장치로서 점화코일(ignition coil)점화플러그(ignition plug) 등으로 구성되며 ECM(Electronic Control Module)으로 정밀제어 한다. 가솔린 및 가스엔진에 장착되며 디젤엔진에는 따로 적용되지 않는다. 디젤엔진은 흡입된 공기를 압축할 때 발생하는 압축열에 의하여 연소를 일으키게 된다.

③ 윤활장치
자동차 엔진에는 크랭크축, 캠축, 밸브 개폐기구, 베어링 등의 각종 기계장치가 각각의 운동 상태를 가지고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기계장치들의 작동 시 기계적인 마찰이 발생하며 그 마찰 현상들 또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기계적인 마찰이 발생하면 마찰에 의한 열이 발생하게 되고 이 열이 과도하게 축적되면 각각의 기계부품의 열팽창 또는 손상으로 인하여 엔진의 작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윤활장치는 이러한 각 마찰요소에 윤활유를 공급하여 마찰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방지하는 장치로서 엔진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고 엔진의 내구수명을 길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윤활장치는 오일펌프(oil pump)오일 여과기(oil filter)오일 팬(oil pan)오일 냉각기(oil cooler) 등으로 구성되며 감마작용, 밀봉작용, 냉각작용, 응력 분산작용, 방청작용, 청정작용 등의 역할을 수행 한다.

④ 냉각장치
연소를 통하여 동력을 얻게 되는 내연기관의 특성상 엔진에서 매우 높은 열(약 2000~2200℃)이 발생하게 되며 발생한 열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엔진의 각 부분에 전달되어 부품의 재질변형 및 열 변형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반대로 너무 냉각되어 엔진이 차가운 경우에는 열효율이 저하되고, 연료소비량이 증가하여 엔진 전체 효율이 나빠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냉각장치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엔진의 전 속도 범위에 걸쳐 엔진의 온도를 정상 작동 온도(80~95℃)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여 엔진의 효율 향상과 열에 의한 손상을 방지한다.

냉각방식에는 크게 공냉식(air cooling type)과 수냉식(water cooling type)으로 분류하며 현재 자동차에는 일반적으로 수냉식 냉각시스템을 적용 하고 있으며 냉각장치는 방열기, 냉각팬, 수온조절기, 물재킷, 물펌프 등으로 구성된다.

⑤ 흡/배기장치
엔진으로 유입되는 대기 중의 공기는 먼지와 이물질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먼지 등이 엔진으로 유입되면 실린더(cylinder)흡기밸브(intake valve) 및 각종 베어링(bearing) 등의 마모를 촉진시켜 엔진의 내구수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따라서 엔진으로 유입되는 공기는 공기 여과기(air filter)를 장착하여 대기 중의 먼지 및 이물질 등을 제거함과 동시에 공기 흡입행정 시 발생하는 강한 소음을 감소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배기장치는 엔진에서 연소 후 배출되는 가스를 대기 중으로 방출 시켜 원활한 엔진의 운전 상태를 만들어 주는 장치이다. 일반적으로 배기장치에는 배기 시 소음을 줄여주는 소음기와 배기가스 중의 유해물질을 걸러주는 3원 촉매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⑥ 시동장치
엔진은 자력기동(自力起動)이 불가능 하여 초기 시동 시 축전지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기동전동기(起動電動機, starting motor)를 이용하여 엔진을 구동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초기 시동 시 최초 흡입 및 압축행정에 필요한 힘을 외부에서 제공하여 엔진을 시동시키는 장치를 시동장치라 한다. 시동장치는 일반적으로 기동전동기, 축전지, 시동스위치 등으로 구성되며 구동회전력이 큰 전동기와 적절한 기어비(gear ratio)를 이용하여 엔진의 크랭크축을 회전시킨다.
동력전달장치(power train system)
동력전달 계통은 엔진에서 발생된 동력을 운행상태에 알맞게 바퀴까지 전달하는 전달계통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클러치, 변속기, 종 감속 및 차동기어, 휠 및 타이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클러치
클러치(clutch)는 엔진과 변속기 사이에 설치되며 엔진에서 발생된 동력을 필요에 따라 변속기로 전달 또는 차단하는 장치이다. 자동차에 적용되는 클러치는 일반적으로 마찰력을 이용한 마찰 클러치, 유체의 유동작용을 이용한 유체 클러치, 전자력을 이용한 전자석 클러치 등으로 분류된다.

② 변속기
자동차가 주행하기 위해서는 주행저항(走行抵抗)보다 구동력(驅動力)이 커야 주행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변속기란 적절한 기어비를 통하여 엔진의 동력을 자동차의 주행조건에 따라 구동력 및 주행속도를 증감시키는 장치이다. 클러치와 추진축 사이에 설치되며 일반적으로 수동변속기와 자동변속기로 분류된다.

③ 종 감속 및 차동기어
종 감속기어는 변속기로부터 전달되는 회전력을 더욱 증가시켜 가속능력, 등판능력, 연비 등의 자동차의 주행에 필요로 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설치된다. 내부 구성은 구동축(驅動軸)과 연결된 피니언기어(pinion gear)와 피동축(被動軸)과 연결된 링 기어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종 감속기어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현재에는 자동차의 무게 중심을 낮출 수 있고 비교적 큰 동력을 전달 할 수 있는 하이포이드기어(hypoid gear) 형식의 종 감속기어가 대부분 적용되고 있다.

또한 자동차가 선회 할 경우 자동차의 각 바퀴는 크기가 다른 원주를 그리며 회전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각 바퀴들의 회전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차동기어는 랙(rack)과 피니언기어의 원리로 자동차의 구동 바퀴축에 설치되어 커브길 선회 시 좌, 우 바퀴의 회전수 차이를 발생시켜 원활한 선회를 돕기 위해 장착되어 있는 장치이다.

④ 휠 및 타이어
휠과 타이어는 자동차가 주행하기 위한 구동력을 노면에 전달하고 제동 시 노면과의 마찰을 발생시켜 제동력을 발생, 전달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공기주입식 타이어의 경우 노면의 진동을 흡수하는 기능과 원심력에 의한 자동차의 옆 방향 미끄러짐에 대한 저항성 역시 갖추고 있다. 이러한 휠과 타이어는 조향 성능 확보, 주행안전성 확보, 소음진동 감소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향장치
조향장치(操向裝置)는 운전자의 의지에 따라 자동차 주행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장치로서 조작기구, 기어기구, 링크기구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조향장치는 스티어링 휠(steering wheel), 조향 축, 조향기어, 타이 로드(tie rod)너클 암(knuckle arm), 휠 및 타이어의 계통으로 조향 조작력이 전달되며 조향 기어박스에서 조향력을 증가시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조향 조작력을 돕기 위한 장치로 유압의 힘을 이용한 동력조향시스템을 대부분 적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 동력조향시스템의 유압펌프를 작동시킬 때 발생하는 엔진 손실 동력을 개선시키기 위해 조향 축 또는 조향 기어박스 부분에 전기모터와 감속기어를 장착한 전자식 동력조향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다.
제동장치
제동장치(制動裝置)는 주행 중인 자동차를 감속, 정지 시키거나 또는 정지되어 있는 자동차의 정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자동차의 모든 바퀴에 적용되며 크게 유압식, 공압식, 기계식으로 분류되며 일반 승용차에는 유압식 제동장치가 보편화 되어 있다.

제동장치는 일반적으로 주행 시 사용되는 주 브레이크와 자동차의 정지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주차브레이크로 나누어진다.

유압식 제동장치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브레이크 페달, 하이드로 백, 마스터 실린더, 브레이크 파이프, 휠 실린더 및 캘리퍼(calliper) 등으로 구성되며 대형차의 경우 매우 큰 제동력이 요구되어 압축공기식 브레이크장치가 대부분 적용되고 있다.
현가장치
현가장치(懸架裝置)는 자동차가 주행 중 노면으로부터 바퀴를 통하여 받게 되는 충격이나 진동을 흡수하여 차체나 화물의 손상을 방지하고 승차감을 좋게 하며, 차축을 차체 또는 프레임에 연결하는 장치이다. 현가장치는 일반적으로 스프링과 쇼크 업소버(shock absorber)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며 노면에서 발생하는 1차 충격을 스프링에서 흡수하게 되고 충격에 의한 스프링의 자유진동을 쇼크 업소버가 감쇄시켜 승차감을 향상 시킨다. 최근에는 자동차의 주행속도 및 노면의 상태를 인식하여 감쇄력을 조절하는 전자제어식 현가장치가 적용되고 있다.
주 용어 및 관련 직업군
주요 용어
• 연소(燃燒): 물질이 빛이나 열 또는 불꽃을 내면서 빠르게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이다.
• 윤활(潤滑): 마찰면에 기름이나 그리스 등을 도포하여 마모, 열 발생을 막아 마찰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 공기저항(空氣抵抗): 자동차가 운행 중 공기로부터 받는 저항으로 자동차의 정면 면적에 비례하고, 자동차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 ECM(Electronic Control Module): 자동차의 엔진, 자동변속기, ABS(Anti-lock Brake System) 등의 상태를 컴퓨터로 제어하는 전자제어 장치이다.
• 공냉식(air cooling type): 공기에 의한 냉각방식이다.
• 수냉식(water cooling type): 별도의 물 펌프와 방열장치를 두고 냉각수를 순환시키며 냉각하는 방식이다.
• 3원 촉매장치: 배기가스 중의 질소산화물(NOx), 일산화탄소(CO), 탄화수소(HC) 등 3가지 유해물질을 동시에 정화, 처리하는 장치이다.
• 주행저항(走行抵抗): 자동차 주행 시 그 주행을 방해받는 힘을 말한다. 주행저항에는 차바퀴가 노면을 굴러갈 때 발생하는 구름저항, 주행 시 공기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공기저항, 언덕을 오를 때 중력의 힘에 의한 등판(구배)저항 등이 있다.
• 구동력(驅動力): 어떤 속도로 기계를 움직이거나 배나 자동차 등을 주행시킬 때 그 운동저항을 이기기 위한 힘이다.
• 가속능력: 자동차가 일반 평지에서 주행 시 가속할 수 있는 최대 여유 능력을 말한다.
• 등판능력: 자동차나 트럭 등이 비탈길을 오를 수 있는 능력이다.
• 연비: 자동차의 주행에 따라 소비되는 연료의 양의 비율이다.
• 하이포이드기어: 종 감속 기어의 일종으로, 테이퍼 롤러 베어링에 지지된 구동 피니언기어는 링 기어의 중심보다 낮게 설치되어 있는 베벨기어(spiral gear)의 일종을 말한다.
• 쇼크 업소버(shock absorber): 쇼크 업소버의 원리는 스프링의 수축력을 조절해, 노면 에서 충격을 받은 스프링이 위아래로 반복해서 상하운동을 하는 것을 감쇄 시켜 줌으로써 스프링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관련 직업군
• 기업체: 각종 기계 및 관련 장비 생산업체, 산업기계 제작회사, 자동차 생산업체, 자동차부품 설계 및 생산업체, 자동차
정비 및 검사업체 등
• 정부 및 공공기관: 기계직 공무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

자동차는 용도에 따라 승용차·버스·트럭·특수작업차 등.
1) 승용차
승용차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9년 당시 총리대신이 인력거를 탔다는 기록이 있고,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에서 1911년 미국산 포드형 승용차를 1대씩 구입하였다고 하므로 이 해에 처음 도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왕직에서 구입한 차는 고종이 탔는데, 윗덮개가 없고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큰 가솔린 승용차였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차는 미국산 캐딜락이었다.
한국 최초의 운전사는 윤권으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운전기술을 익힌 뒤 황실의 운전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무렵 상류층 사람들은 주로 인력거를 이용했고(1911년 현재 전국에 1,217대), 서울의 경우 서민들은 전차를 타고 다녔다.
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승용차가 서울의 상류층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도로사정이 나빴던 데다가 한강 인도교 조차 없어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도교 가설 이듬해(한강 첫 다리는 1917년 10월 7일 준공됨)인 1918년 212대로 불어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승용차는 꾸준히 증가해 1926년 1,587대, 1931년 4,331대에 이르렀다. 한편, 각 지방도시에서는 1910년대 말부터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이에 따라 승용차도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되어 1919년에는 전국의 자동차가 4,535대로 불어났으며, 1945년에는 7,326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승용차는 관용·자가용·영업용·특수용 등으로 나누어졌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승용차는 크게 줄어 1951년의 경우 자가용이 787대, 관용이 633대였으나, 10년 뒤인 1961년에는 관용이 1,095대, 자가용이 1,925대로 불어났다. 1972년 3,063대였던 관용승용차는 1983년에는 5,812대가 되었다. 1987년 1월 말 기준으로 승용차는 전체 자동차의 50.8%인 67만 2493대에 이르렀다.
외제자동차는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진 1987년 하반기부터 1989년 11월 사이 1,181대가 판매되었다. 서울의 경우 1989년 6월 말 기준 등록된 외제차량대수는 2397대였으며, 이는 1988년 말의 2,088대에 비해 14.8%나 늘어난 것이었다.
2)영업용 승용차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운행된 것은 1912년이다. 운행자는 일본인 오리이[織居加一]였고(일본인 近藤와 한국인 李逢來라는 설도 있다.), 요금은 1시간에 5원이었으며 전화로 불러 이용했다. 당시의 요금은 매우 비싼 편이어서 일부 부유층이나 특수직업을 가진 사람이 탔다. 영업용 승용차를 오늘날처럼 ‘택시’라고 부른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매우 귀해서 승용차의 경적 소리만 나면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뛰어나올 정도였다.
자동차 경적이 클랙슨으로 바뀌기 전에는 바람이 찬 고무공을 꾹꾹 누르면 작은 나발에서 ‘뿡’ 하는 소리가 났다. 이무렵에 퍼진 「오줌 찔금 진고개, 방구 뿡뿡 자동차」라는 동요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승용차 속도는 매우 느려서 자동차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솔린 냄새를 맡으려고 어린아이들이 달음박질로 따라갈 정도였다.
택시운전사들은 제복을 입지 않고 양복을 입었는데 헌팅모자를 반드시 뒤로 돌려서 썼다. 이무렵에 차양이 뒤로 가도록 모자를 돌려서 쓴 사람은 야구 포수와 운전사 뿐이었다. 이것은 1921년 제작된 미국영화 「생지옥」의 주연배우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헌팅모자를 뒤로 젖혀 쓴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달리는 차의 스피드 감각을 더 잘 느끼게 해주었다.
택시는 점차 이용자가 늘고 대수도 증가하자 요금이 떨어져 1928년에는 서울시내 어디나 4인 기준 1원이었고, 한 사람이 느는 데에 따라 20전씩 더 받았다. 그러나 교외는 별도의 요금을 적용했다. 예컨대 망우리는 4원 50전, 신촌역과 청량리역은 2원, 우이동은 5원이었고, 인천이나 수원은 15원이었다. 한편, 대기요금은 30분에 2원을 받았다.
1931년에는 택시요금이 80전으로 내려갔다(당시 인력거의 하루 요금은 4원). 택시는 점점 불어나서 1947년 말 전국 81개 사업자가 1,090대의 면허를 받아 영업했으며, 이 가운데 54개 업자의 949대는 서울에서 운행되었다.
택시대수는 2년 뒤 1,312대로 늘었으나 당시의 업자들은 5∼10대의 차량을 가진 영세업자들로서 경험이 부족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특히, 1949년 4월 1일 운임규정이 고시되기까지 요금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한때 사라졌던 승합마차와 인력거가 다시 등장하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한국전쟁 직전 전국택시는 1,570대였으며, 이들은 모두 외국산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국산차인 6기통의 세단형 ‘시발(始發)’차가 양산되면서 택시대수도 늘어났다. 1957년에는 322명의 업자가 3,864대를 보유(서울 1,576대)했다. 이무렵부터 택시에 요금표나 이정표를 비치, 문제점이 개선되어 대도시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서 위치를 점점 굳혀갔다.
1987년에는 전국의 택시가 4만 1200대로 늘었났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PATT 총회를 계기로 664대의 콜택시가 등장했으나 1988년 4월 15일 이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형택시가 나왔다. 또, 1985년부터는 일부 대도시에서 시간·거리 병산제도가 채택되었다.
서울시내의 경우 1950년대 초부터 합승택시가 운행되었다. 1957년에는 24개 노선에 900대가 움직였으며, 차량도 점차 대형화되어 1960년에는 9인승이 11인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16인승의 마이크로버스가 나타났다. 이 합승택시가 차지하는 운송비율은 매우 높아서 1960년 기준 3,000여 대가 운행되었으며, 차체가 작아서 대형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비교적 좁은 도로에서도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3) 버스
버스는 사용목적에 따라서 정기수송용의 노선버스, 장거리고속버스, 관광용의 관광버스로 나뉘며, 이밖에 관청이나 학교 등에서 출퇴근에 쓰는 자가용버스, 정기버스 정거장에서 멀리 떨어진 인구조밀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운행하는 새마을버스도 있다.
노선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으로, 일본인 오쓰카[大塚金次郎]가 경상북도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는 부정기버스를 운행했다. 이어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오리이 등에 의해 황해도 사리원에서 해주, 평안남도 평양에서 진남포, 진남포에서 광량만,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의주, 충청남도 천안에서 온양 및 공주에서 조치원·청주,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에서 상주 사이에 버스가 등장했다.
버스운행은 도로의 신설과 교통량 증가에 따라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1917년에는 업자 10명에 영업노선 1,000㎞를 넘어섰고, 5년 뒤에는 업자 154명에 1만㎞를 돌파했다. 1934년에는 233명에 3만여 ㎞로 확대되었으나 1940년경에는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연료부족사태가 벌어져 업자 151명에 2만 5000여 ㎞로 줄어들었다. 1937년에는 연료를 카바이드로 대신한 버스도 나타났다. 이때까지의 버스는 대부분 중형이어서 승차정원이 35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40년대에 이르러 50명이 되는 대형버스가 등장했다. 서울의 버스운행은 1928년 부영(府營)버스가 나타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승합자동차’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버스’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의 버스노선은 러시아워선과 임시운전선의 2개선으로, 러시아워선의 경우 서울역에서 시청을 거쳐 중앙청에 이르는 제1구와 중앙청에서 안국동·종로를 거쳐 을지로 3가로 돌아서 필동에 이르는 제2구에서 운행되었다(임시운전선은 4구간).
버스는 모두 30대로 12인승의 초미니 상자형이었으며 요금은 5전이었고, 그나마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 및 오후 5시에서 10시까지만 움직였다. 1929년에 들어와 요금은 전차요금과 같은 5전으로 내린 반면 버스는 50여 대로 늘었으며 노선도 9개 노선으로 확장되었다. 여러가지 문제점이 많아 1932년 운영권이 전차 운영회사인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넘어갔으며, 이에 따라 버스와 전차를 갈아탈 수 있는 승환제가 생겨났다.
관광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이다. 이 해 6월 22일부터 경성명소유람승합자동차(京城名所遊覽乘合自動車)가 운행된 것이 그것으로, 하루 오전 8시와 오후 1시에 두 번 떠났다. 14개소를 들르는 데 4시간이 소요되었고, 요금은 2원 20전이었으며, 버스는 16인승이었다.
1923년에는 서울과 양평 사이에 시외버스가 매일 운행되었고, 1928년에는 서울-인천간(1일 12회, 요금 95전), 1929년 1월부터 서울-원주간, 9월에는 서울-춘천간에 버스가 투입되었다.
1930년에는 서울과 포천 사이에 직통자동차가, 이듬해 3월부터는 서울-수원간에도 버스가 운행되었다. 광복 후 서울의 버스는 100여 대로 늘었으나 연료부족 등으로 운휴되기 일쑤였다.
1949년 8월 31일 처음으로 시내버스운수업자가 지정됨에 따라 105대가 움직였으며 연말에는 521대로 늘었다. 이때의 버스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것으로서, 뒤쪽에 붙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승객은 좌우 양쪽의 나무의자에 앉거나 중간에 서 있어야 했다.
한 노선의 예를 들면, 독립문에서 출발해 을지로 입구가 종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버스운행은 점차 되살아나 1953년 말 전국의 버스는 2년 전보다 2배가 늘어난 1만 8000여 대에 이르렀다. 이듬해 3월 3,000여 대로 불어나면서 버스운송은 철도의 여객운송(4700만 명)을 능가하는(5500만 명) 실적을 올렸으며, 수입면에서도 철도(20억 환)보다 훨씬 앞질렀고(35억 환), 1957년에는 135명의 업자가 4,560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의 서울시내버스는 타고 내리는 문이 앞뒤 두 곳에 있었고, 남자 차장이 요금을 받았다. 뒤에 차장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뒤쪽의 문은 가운데로 옮겨졌다. 그러나 1982년 자율버스제도가 시행되면서 부분적으로 안내양이 줄어들다가 1985년 말에는 완전히 없어지고 운전사가 요금을 받는 현재의 제도로 굳어졌다. 1984년 5월 말 기준 3만 2863대였던 전국의 버스는 이듬해에 11만 5000여 대로 급증했으며, 1987년 1월말에는 15만 6000여대가 되었다.
4)화물자동차
화물자동차의 영업은 1926년부터 본궤도에 올랐다. 당시의 사업자는 45명이었고 연장노선은 3600㎞였다. 2년 뒤에는 1만㎞로 확장되었고(업자 129명) 1934년에는 2만 7500㎞(업자 234명)에 이르렀다.
버스의 경우처럼 화물자동차도 1940년에는 정기화물업자 23명에 영업노선은 4,800㎞로 축소되었고, 부정기화물은 업자 99명에 노선은 1만 8000여 ㎞였다. 광복이 되면서 생활필수품의 대도시 운반 등 화물자동차의 운송량이 대폭 늘었다.
이에 따라 1947년에는 178명의 업자가 2,551대의 트럭으로 126만 84t의 화물을 수송해 5억 2000여 원의 수입을 올렸다. 1950년 5월에는 242개업자가 3,130대의 트럭을 운행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트럭의 78%가 피해를 입었고, 나머지도 군용으로 징발되는 등 화물운송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휴전 무렵부터 징발차량이 해제되고 850대의 트럭이 수입되면서 화물운송업계는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54년 1월 15일 기준 전국의 화물트럭은 4,211대(업자 334명)였으나, 3년 뒤에는 2배에 가까운 8,713대(업자 401명)로 늘었다.
이후 화물자동차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972년 2만 1161대이던 것이 1980년 6만 4140대, 1983년 7만 5655대, 1985년 41만대, 그리고 1987년에는 47만 5615대로 늘었으며, 1990년에는 87만여 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1955년 시발자동차회사(始發自動車會社)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300대의 미국산 윌리스지프를 조립해 관용으로 납품한 것을 발판으로 이듬해부터 지프형의 ‘시발’차를 생산, 전국에 택시로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차 이름인 시발에는 이처럼 ‘첫걸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시발은 미군이 쓰던 지프의 부품과 4기통 엔진을 조립한 것으로, 1964년까지 3,000여 대를 생산했다.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최초의 자동차 공장은 재일동포인 박노정이 1962년 경기도 부천에 세운 새나라자동차공장으로서, 이 회사에서는 일본 닛산회사의 블루버드 승용차 400대분의 중간분해부품을 들여와 그 해 8월부터 ‘새나라’승용차를 조립, 판매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하동환(河東煥)자동차제작소(동아자동차회사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1963년에는 기아산업주식회사에서 세바퀴 화물자동차를 만들었다.
1963년에는 신진공업사가 미국산 불하품으로 승용차 ‘신성호(新星號)‘를 생산하다가 1965년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이듬해 신진자동차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조립한 코로나승용차를 선보였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회사는 이듬해부터 미국의 포드회사와 손잡고 코티나를 만들었으며, 아세아자동차회사는
1970년부터 피아트 124를 생산해 ‘신진‘·‘현대‘·‘아세아‘의 세 회사가 경쟁상태에 들어갔다.
1974년 기아산업주식회사가 일본의 마쓰다회사와 협력해 브리사승용차를 제작했다. 이와 같은 자동차공업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국내수요가 늘어 호황을 누렸으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1980년 이른바 「2·28조치」를 발표, 승용차는 현대자동차회사와 새한자동차회사로 이원화하고, 기아산업주식회사는 소형버스와 트럭만을 생산하도록 규제했는데, 1982년 기준 승용차 9만 3451대, 버스 2만 931대, 트럭 4만 8279대가 출고되었다. 경기회복과 수출증대에 따라 1987년 이 조치가 해제되면서 현대자동차회사와 대우자동차회사(새한자동차회사는 1983년 대우자동차회사로 바뀜) 그리고 기아산업주식회사의 세 회사가 전차종을, 동아자동차회사는 지프와 특수장비차를, 아세아는 버스와 특수장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전국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돌파했고, 현대자동차회사의 포니 2가 캐나다에 처음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에는 같은 회사의 엑셀이 미국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편 이듬해에는 대우자동차회사의 르망, 기아자동차회사의 프라이드(해외에는 페스티바로 수출)가 미국시장에 진출했다.
1987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130만 대에 이르렀고, 이 해에 50만여 대가 수출되어 한국은 자동차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해마다 늘어난 자동차 등록대수는 1990년 6월 말 기준 자가용 266만 1565대, 영업용 29만 4207대, 관용 3만 2178대로 모두 298만 7950대에 이르게 되었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생활이 그만큼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에 못지 않은 부작용도 생겼다. 대도시의 교통체증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대기오염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통사고이다.
1965년부터 20년간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8만 1000명에 이르고, 1985년 한해 동안 사고건수 14만 6000건에 7,500명이 죽고 1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의 교통사고율은 세계에서도 상위 수준으로, 1982·1983년의 1만 대당 사고율은 미국이 125건에 2.7명 사망, 일본이 112건에 2명 사망, 영국이 146건에 3.3명 사망이었으나 우리는 무려 1,500건에 88명 사망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사고율은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긴요성에 관계없이 자동차를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심지어 자동차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자동차 보급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넘처나는 차량들 때문에 이부제와 소형차도 등장하게 되었읍니다.
출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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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공학 개론 및 정비』, 오토테크. (2008년),
『자동차 공학』, 미전사이언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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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공학 [Automotive Engineering] (학문명백과 : 공학,)
『기본 자동차 공학』, 골든벨.  (2013년),
[자동차 [automobile, 自動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잡학사전』(정동출판사, 1989)
『서울600년사』 3·4·5(서울특별시, 1979·1981·1983)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 (세상을 바꾼 수레,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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