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0일 월요일

캐나다 매니토바주 [Province of Manitoba],

캐나다 매니토바주 [Province of Manitoba],

캐나다 중앙부에 있는 주.




캐나다 매니토바주 주기,

캐나다의 5번째 주이며, 앨버타주서스캐처원주와 더불어 "프레리의 주"들로 알려졌다. 서부는 서스캐처원주, 동부는 온타리오주, 남부는 미국 미네소타주노스다코타주와 경계를 이루며 주도는 위니펙이다,

캐나다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접촉하기 전에 그들은 많은 세대 동안에 매니토바 지방에 살았다. 원주민이 아닌 첫 탐험가들과 모피 교역인들이 도착하여 단체들의 수가 지역을 통하여 살면서 사냥을 하였다. 치페와이언 딘 족은 북부 구역을 가로질러 순록을 사냥하였다. 비버, 순록과 말코손바닥사슴을 사냥한 우들랜드와 스웜피 크리 족들은 중부 산림과 해안 저지대들에 살았다. 애시니보인 족은 남서부 평원에 살고 들소를 사냥하였다. 또한 들소를 사냥한 치페와 족은 평원의 남동부 구역에 살았다.

위치경위도면적(㎢)시간대행정구분행정관청 소재지홈페이지꽃나무새주도인구(명),
주도대도시면적땅물인구인구밀도날짜순서시간대우편 약자ISO 3166-2웹 사이트,
위니펙
위니펙
647,797 km² (8 위)
553,556 km²
64,241 km² (14.5%)
인구 (2011년)
1,208,268 명 (5 위)
2.2 명/km² (8 위)
캐나다 연방 가입
1870년 7월 15일
5 번째
UTC-6
단축형
MB
CA-MB
www.gov.mb.ca
캐나다 중앙부
서경 97°31′, 북위 55°4′
650086
UTC-6
120 Rural Municipality
450 Broadway Winnipeg, MB R3C 0V8
http://www.gov.mb.ca/
크로커스
캐나다가문비
회색올빼미
위니펙(Winnipeg)
1,148,401(2006년)

위니펙의 야경

주도(州都)는 위니펙이다. 서쪽에 인접한 서스캐처원주(州)·앨버타주와 함께 캐나다의 밀 주산지인 프레리 3주를 이룬다. 남쪽은 미국과 접하고, 북쪽은 노스웨스트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동부는 허드슨만(灣)에 면한다. 남부의 3분의 1 정도의 지역이 평원이고, 로렌시아 대지가 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캐나다 최대의 호소군(湖沼群)이 있다.

기후는 대륙성으로 한서의 차가 심하다. 1881년 캐나다 태평양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농업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밀만을 재배했으나 농업의 다각화로 사탕무·통조림용 채소의 재배 및 낙농 등이 이루어진다. 평원의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주(州)에서 공업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총생산 중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원 3주 중에서도 가장 높다. 주된 공업은 식육가공·석유정제·철강·화학·전기 등이다.

이민,
잉글랜드의 탐험가 토머스 버튼 경과 그의 일원들은 매니토바 지방의 첫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1612년에 허드슨 만의 서부 해안으로 항해하여 내려왔다. 버튼과 그의 일원들은 넬슨 강의 입구에서 겨울을 보내고 매니토바에 대하여 잉글랜드의 토지선언을 하였다. 2명의 잉글랜드의 선원들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는 1631년에 허드슨 만과 그 서부 해안을 탐험하였다.

1670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지방에서 교역의 권리들을 잉글랜드 모험 회사와 총독에게 런던의 허드슨 베이 회사로 승인하였다. 지방은 루퍼트의 대지로 불리었다. 1690년으로 봐서 잉글랜드의 모피 교역인들은 허드슨 만 지방으로 향하여 서부로 밀고 나간 자신들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라이벌들과 많은 싸움을 벌였다. 회사는 서부 내륙 지방의 퍼스트 네이션즈를 따라 새로운 모피 교역 상대자들을 찾는 데 헨리 켈시를 원정에 보냈다. 켈시는 요크 공장에서 회사의 거류지를 떠나 1690년부터 1692년까지 매니토바와 서스캐처원의 중부와 남부의 퍼스트 네이션즈를 따라 여행을 하였다. 그는 많은 그들에게 모피들을 북부에 있는 회사의 교역지들로 가져오도록 설득하였다.

1731년 피에르 콜티에 드 바렌 드 라 베른드리가 몬트리올을 떠나 태평양으로 육상 인도 통로를 찾는 데 나섰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피 교역자들이었다. 그들은 슈피리어 호 지역과 서스캐처원 강의 저지대 사이에 여러 요새들을 세웠다. 이 거류지들은 1738년 오늘날의 위니펙의 대지에 라 베른드리가 지은 포트루지를 포함하였다. 그가 설립한 모피 교역은 허드슨 베이 회사의 교역으로 거대하게 삭감되었다.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캐나다 대지들을 영국에게 포기하였고, 매니토바 지방에서 프랑스의 탐험과 교역이 멈추어졌다. 1770년대에 노스 웨스트 회사는 허드슨 베이 회사와 함께 경쟁하는 데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그 새로운 회사는 곧 해산되었다. 1784년에발행된 새로운 동의서는 회사를 다시 설립하고, 공식적으로 노스 웨스트 회사의 이름을 채택하였다.
레드 강 식민지,

세븐옥스 전투 (1816년)

2개의 모피 회사들이 교역을 위한 경쟁을 하는 동안에 계획들은 매니토바 지방의 첫 농업적 정착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1811년 토머스 더글러스, 5대 셀커크의 백작은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 대지의 승인을 얻었다. 그 대지는 100,000 스퀘어 마일(260,000 스퀘어 킬로미터) 이상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매니토바 주, 노스다코타주와 미네소타주의 대부분을 덮었다. 1812년과 1816년 사이에 셀커크 백작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과 아일랜드인들의 몇몇의 파들을 오늘날 위니펙 주위의 레드 강으로 보냈다. 이민들은 레드 강 식민지를 창립하였다.

초기의 식민주의자들은 거대한 고생을 겪었다. 서리홍수와 메뚜기들이 많은 수확물들을 망쳤다. 처음에 정착자들은 고기를 위하여 들소와 다른 동물들에 엄하게 의지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는 운영들의 노스 웨스트 회사의 지역의 중심에 놓였다.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식량, 특히 들소고기를 위한 많은 경쟁들이 있었다. 회사는 식민지의 행정인들이 레드 강 유역에서 들소 사냥을 금지하는 데 시도한 페미칸 선언을 발행한 후 더욱 적대적으로 되었다. 그 선언은 메티스를 포함한 지방 거주민들을 식민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데 전향시켰다. 자신들이 아끼던 들소에 의지한 메티스들이 1815년 식민지를 공격하였다. 1816년 그들은 식민지의 총독 로버트 셈플을 살해하고, 세븐옥스 전투에서 다른 20명의 식민주의자들을 죽였다. 1821년 노스 웨스트 회사와 허드슨 베이 회사가 병합되면서 평화가 왔다.

4개의 주를 연합한 캐나다 자치령이 1867년에 창립되었다. 1869년 1.5 백만 달러와 대지의 양보를 위한 반환에서 루퍼트의 대지의 대부분을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의 이전을 계획하였다. 이 지역은 매니토바 지방과 레드 강 식민지를 포함하였다. 그 지역의 메티스들은 이전을 여기는 데 상담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이 캐나다 자치령의 일부가 된 후 서두를 정착자들에게 자신들의 대지를 잃을 것 같은 위협에 놓였다. 메티스와 다른 지방 거주민들은 전환에 반대하였다. 메티스의 지도자 루이 리엘은 1869년 반란을 지도하였다.

1870년 캐나다 정부는 매니토바 법령에서 권리들의 법안을 메티스들에게 승인하였다. 이 법령은 그해 7월 15일에 매니토바를 캐나다의 5번째 주로 만들었다. 새로운 주는 구 레드 강 정착지를 포함한 오늘날의 남부 매니토바 주의 작은 부분 만을 덮었다. 위니펙이 주도가 되고, 앨프레드 보이드가 초대 주지사였다.

1870년 이후 매니토바 주로 기대된 정착자들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1871년과 1881년 사이에 인구는 2배보다 많았고, 25,228명에서 62,260명으로 올랐다. 새로운 도착자들의 대부분은 온타리오주에서 왔다. 매니토바 주는 원주민의 주에서 백인 이민들에 의하여 통치된 주로 변형시켜졌다.

1876년 매니토바 주는 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레드 강 유역의 농부들은 레드 강을 따라 남부로 향하여 미네소타 주와 온타리오 주 토론토로 밀을 배에 실어갔다. 밀은 곧 모피를 대신하여 매니토바 주의 가장 가치적인 생산품이 되었다. 1878년 주에서 첫 철도가 위니펙과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을 이었다. 1881년 다른 철도선들은 위니펙을 캐나다 동부의 도시들과 슈피리어 호와 함께 한 밀생산 지방들과 이었다. 매니토바 주의 곡식은 그러고나서 오대호의 항구들을 통하여 캐나다와 유럽의 시장들로 실어나갈 수 있었다.

1890년대에서 시작에 매니토바 주는 새로운 정착자들의 주요 경향을 경험하였다. 많은 정착자들은 캐나다 동부에서 왔고, 많은 다른이들은 영국과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 왔다. 특히 1900년부터 1913년까지 곡식의 생산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이 번영의 세월 동안에 위니펙은 캐나다의 프레리 지방 전체를 위한 철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1년으로 봐서 매니토바 주의 인구는 1871년의 인구의 10배 이상이나 증가하였다. 캐나다 정부는 1881년에 현재 서스캐처원주로 향하는 서부, 1884년 온타리오 주로 동부의 주 경계를 넓혔다. 1912년 북부 경계선이 허드슨 만과 적도의 북부 60도선으로 넓혀져 매니토바 주에게 그 오늘날 크기와 모양으로 주었다.

매니토바 주의 경계선의 허드슨 만으로 연장이 미네랄 자원의 개발을 위한 대지들을 열고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사적 필요함이 탐험에 용기를 주었다. 1915년 투기자들은 매니토바 주 북동부에 있는 플린플론의 대지에서 구리와 아연의 큰 매장량들을 발견하였다. 광업의 운영들은 1930년에 완전히 발전하고 타운은 곧 재빠르게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값이 싼 전력, 풍부한 수자원과 노동의 유효성이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많은 산업들의 번창에 용기를 주었다. 펄프와 종이 공장 지대가 1927년 파인폴스에 개장되었다. 모피 가공과 의류 교역들은 1930년대 동안에 위니펙에서 재빠르게 발전하였다.

1878년과 1922년 사이에 매니토바 주는 보수당과 자유당에 의하여 교대로 다스려졌다. 토머스 그린웨이(1888~1900)의 자유당 행정부는 철도와 정착지의 확장에 지배하였다.

위니펙의 곡식 업자 로드먼드 P. 로블린에 의하여 지도된 보수당은 1900년부터 1915년까지 정부를 통치하였다. 정부는 경제적 발전과 경계선의 확장에 집중하였다. 토비어스 C. 노리스의 자유당 정부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주를 경영함 거의 개혁의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 개혁들의 어떤 것들은 여성의 참정권, 근로자들의 보수, 14세에게 의무적 교육과 시골 농장의 신용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위니펙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노동의 불안의 소굴을 남겼다. 도시의 노동 문제들은 한번 52개의 조합들이 파업을 일으킨 1919년의 위니펙 총파업으로 일어났다. 연방 정부와 시민 단체들은 주의 서비스들의 진행을 간직하는 일을 하고 파업을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 일은 최근에 생겨난 경제에서 근로자들의 권리들에 주의를 가져왔다.

1922년 결성된 농부들의 단체는 자유당 정부를 꺾었다. 그들은 매니토바 농업 칼리지의 교장 존 브래켄 아래의 새로운 진보적 정부를 형성하였다. 그는 당들의 연합을 몰아냈다. 이 일은 1932년 자유당과 진보당이 자유진보당을 형성하는 데 합병되 때 일어났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매니토바 주에서 많은 곤란을 창조하였다. 농산물, 특히 곡식을 위한 가격들이 극단적으로 낮았다. 아직도 농업에 의존하는 이 주는 넓게 퍼진 실업을 겪었다.
1930년대에 2개의 새로운 정당들이 나타났다. 후에 신민주당으로 불린 협동연방연합이 농부와 공장 근로자들로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은 사회신용당이었다. 그 당원들은 정부들이 경제적 생산에 기지를 둔 분배금을 모든 시민들에게 내야 할 것을 믿었다.

1900년대 중반,
제2차 세계 대전은 매니토바 주의 가축, 금속, 밀과 목재를 위한 거대한 요구를 창조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많은 산업들이 주에서 새로운 공장들을 지었고, 제조업은 1940년대 후반에 지속적으로 빠르게 번창하였다. 1950년으로 봐서 매니토바 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제조업이 주의 주요 소득의 근원으로서 농업보다 지위가 높아졌다.

전쟁이 끝난 후, 매니토바 주는 늘어난 기계들의 사용과 새로운 농사 방법들의 이유로 약간의 농부들을 필요하기 시작하였다. 수천명의 주민들이 시골 지역들로부터 도시들로 이주하여 공장과 서비스업들에서 직업을 찾았다.

지질학자들 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에 매니토바 주에서 중요한 미네랄 자원의 매장량들을 발견하였다. 구리니켈과 아연이 1945년 북서부 지역에서 찾아졌다. 석유 회사들은 1950년대 초반에 버든 근처에 풍부한 유전들을 개발하였다. 1956년 투기자들은 모크레이크-미스터리레이크 지역에서 큰 니켈의 매장량들을 찾았다. 캐나다 국제 니켈 회사 유한 책임(현재 베일 인코)이 톰슨에 단지를 지어 니켈 체굴이 1960년 거기서 시작되었다. 톰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니켈 생산의 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는 지속적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력의 풍부한 근원들을 개발하였다. 1954년으로 봐서 모든 시골 지역들은 전기 서비스가 있었다. 1963년 첫 실험소들이 위니펙 근처에 있는 피나와에서 화이트셸 원자력 연구소에서 개장되었다. 원자로는 1965년에 운영으로 들어가고 1985년에 폐문하였다.

가장 큰 번창은 서비스와 공공 부문에 있었다. 1970년으로 봐서 연방, 주와 지방 정부들이 매니토바 주에서 가장 큰 고용주들이었다.

자유진보당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대부분에 매니토바 주를 다스렸다. 진보보수당은 1958년에 권력을 이겨 1969년까지 있었다. 그해에 투표인들은 서스캐처원 주 외부의 캐나다에서 사무소를 보유하는 데 처음이자 마지막 사회주의 정부를 선출하였다. 정부는 신민주당의 에드워드 R. 슈라이어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진보보수당원들이 1977년까지 정부의 통치를 다시 얻었다. 스털링 R. 라이언이 주지사가 되었다.

언어의 권리,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치솟은 문제들이 프랑스어 사용 권리들을 근심시켰다. 프랑스어는 1890년 매니토바 주의 공용어로서 이동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이 이동은 캐나다 대법원에 의하여 비헌법적이라고 밝혀졌다. 1980년 영어 만으로 발행된 속력 벌금의 헌법적은 법원에서 도전되었다.

1981년 하워드 R. 폴리가 주지사로서 신민주당이 권력에 돌아왔다. 정부는 주요 입법의 프랑스어 사용 공동체의 번역과 헌법적 도전들을 끝내기 위한 반환에서 어떤 프랑스어 서비스들의 연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타협의 일괄을 제정할 수 없었다. 1985년 캐나다 대법원은 영어 만으로 제정된 매니토바 주의 모든 4,000개의 법률들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다스렷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 연장된 서비스들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토론은 지속되고 있다.

그시기의 다른 발전들,
1980년대 초반으로 봐서 소홀의 세월들은 위니펙 중부의 거의가 버려지게 되는 지도를 하였다. 그때 이래, 개발 의안제출권들은 도시의 다운타운 지역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의안제출권들은 1990년에 관광객들에게 문을 열은 포크스로 알려진 역사적 지역의 개발과 역사적 거래 구역의 개발을 포함하였다.
1988년 게리 필먼이 주지사로서 진보보수당이 권력에 돌아왔다. 게리 도어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1999년2003년과 2007년에 선거와 정부의 통치를 이겼다.
오늘날 매니토바 주에서 생활비는 캐나다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주에서 실업은 노동력의 10 퍼센트 아래에 적절하며, 인구는 1980년대 이래 착실하게 번창하였다.
지역 경제의 발전들,

서비스업,
서비스업은 매니토바 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용의 대략 4분의 3을 차지한다. 서비스업들은 위니펙에 집중되어 있다.
주도인 위니펙은 정부 활동의 중심지이다. 캐나다의 큰 금융 회사들 중의 어떤 회사들은 위니펙에 자신들의 본부를 두었다. 몇몇의 트럭 회사들 또한 거기서 운영된다. 도시는 캐나다의 유일한 농산물 거래소의 본거지이다. 위니펙은 캐나다에서 가장 큰 대중 매체 복합 기업인 캔웨스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과 매니토바 주의 가장 큰 공립 대학인 매니토바 대학교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제조업,
제조업은 매니토바 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욕의 대략 10분의 1을 차지한다. 제조업의 대다수는 위니펙 혹은 그 근처에서 운영된다.
식료품 가공업은 매니토바 주에서 주요 제조업 활동이다. 지도적인 식품 가공 설립들은 제과류, 낙농제품, 정육 제품, 냉동 감자 제품과 채소 기름을 포함한다.
위니펙은 캐나다에서 지도적인 버스와 항공 우주 요품의 생산지이다. 톰슨에 있는 니켈 제련소와 플린플론에 있는 구리와 아연 제련소는 기초적 금속들을 생산한다. 매니토바 주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창문부엌 장식과 가구 제조업의 본거지이다. 또한 서부 캐나다에서 단 하나의 생물약제학 제조업의 본거지기도 하다.

농업,
농업은 매니토바 주 남부에서 대부분의 시골 공동체들을 위한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다. 육우와 돼지는 지도적인 축산물이다. 낙농업은 위니펙의 남동부에서 가장 중요하다. 과 달걀도 또한 주에서 중요한 농산물이다.
카놀라와 은 매니토바 주의 가장 가치적인 수확물로서 순위권에 들어와있다. 감자와 귀리도 그 다음의 권위에 들어와있다. 감자는 매니토바 주의 남부와 서부에서 재배된다. 밀과 귀리 생산은 위니펙이 남서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카놀라, 아마 씨와 해바라기는 기름을 얻기 위하여 재배된다.

광업,
구리니켈석유와 아연은 매니토바 주의 주요 광물이다. 구리는 니켈 체굴의 부산물로서 획득된다. 또한 아연과 함께 일어나기도 한다. 큰 구리-아연 광산들은 플린플론과 스노레이크 근처에서 운영된다. 톰슨은 매니토바 주에서 니켈 생산의 중심지이다. 매니토바 주에서 체굴된 석유의 전부는 주의 남서부에서 왔다.

주민,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매니토바 주의 인구가 1,148,401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1,119,583명에서 대략 2.5 퍼센트나 증가하였다.
매니토바 주민들의 대략 70 퍼센트는 도시 지역에 산다. 대략 60 퍼센트는 위니펙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산다. 위니펙은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다.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규정된 주의 단 하나의 인구 조사 메트로폴리탄 지역이 있다.
브랜던은 매니토바 주에서 두번째로 가장 큰 도시이며, 톰슨과 포태지라프레리가 그 다음이다.

매니토바 주민 100명 중의 대략 86명은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매니토바 주민들은 영국 계통이다. 다른 주요 민족들로는 큰 순서대로 독일우크라이나프랑스폴란드네덜란드 계통의 주민들이다. 위니펙의 세인트포니페이스 구역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문화의 지방적 중심지이다. 그 외 해외에서 온 주민들로는 아시아계 주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니토바 주에는 대략 72,000명의 메티스들이 있다. 주에는 대략 100,000명의 퍼스트 네이션즈 주민과 대략 600명의 이누이트 족들이 있다. 매니토바 주는 대략 80개의 인디언 보호 구역들이 있으며, 이누이트 족의 대부분은 처칠 근처에 산다.

캐나다의 행정 구역주준주


주기
1965년부터 사용
- 영국 상선기(Red Ensign)를 바탕으로 만든 깃발
- 우측 문양은 매니토바주의 Shield of Arms를 상징

연방정부 가입연도
1870년

면적
649,950km2

주도
위니펙(Winnipeg)

인구
약 130만 명(2015)

재외동포 인구
약 7천 명

GDP
640억 캐불(2014)

주요 산업
매니토바주의 경제는 다양한 산업을 바탕으로 발달,
- 제조업은 매니토바주의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GDP 총 생산량의 11%),
- 캐나다 최대 규모의 △가구 △문 △창문 제조업 공장들이 위치,
- 캐나다 최대 규모의 금융 기업 Great-West Lifeco와 IGM Financial의 본부가 위치,
- 캐나다 최대 규모의 미디어 기업 중 하나인 CanWest Global Communications Corp.가 위치,

한국과의 관계
- 경남 진주시와 위니펙시 자매결연,

마지막 수정일
  • 2018. 5.

유의사항
  • 위 내용은 2017년 2월 기준으로 작성된 캐나다 개황 외교간행물 정보이며. 2018년 5월​ 이후 수정 된 내용 중 반영되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마지막 수정 정보는 마지막 수정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최근 캐나다 개황 정보는 외교부 자료실 "외교간행물"에서 확인바랍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매니토바주 [Manitoba] (두산백과)
[캐나다 매니토바주 [Province of Manitoba] (캐나다 개황, 2017. 2.)


곰탕 [GOMTANG]

곰탕, [ Gom tang , 精熬牛肉汤 ],
모방할 수 없는 신비한 국물, 
가마솥에서 푹 끓여낸 곰탕은 뼈와 살이 시간과 함께 녹아 내려 뽀얀 국물로 재창조된 맛이다. 곰탕은 설렁탕과 함께 한식 중 국물 요리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쇠뼈의 시원한 맛과 한우 고기의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동시에 지닌 곰탕은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해 기력을 돋우는 데 최고로 꼽힌다.
고기를 진하게 푹 고아서 끓인 국물은 영양성분이 국물에 우러나 훌륭한 영양식일뿐만 아니라 노화방지와 피로회복, 빈혈예방에도 좋은 음식이다.
곰탕은 여러 부위의 고기를 한데 모아서 끓일수록 맛이 있다. 각각의 부위마다 달라지는 미묘한 맛의 특징이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쇠고기의 부위를 세분화하여 먹는 능력에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앞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 부위별 살을 아프리카 보디 족은 40부위, 영국인은 25부위 정도로 구분하는 반면 우리는 125부위 정도로 세밀히 구분할 만큼 탁월한 미각을 가지고 있다.

걸랑, 고거리, 고들개, 곤자소니, 꾸리, 다대, 달기살, 대접살, 도래목정, 둥덩이, 떡심, 만하바탕, 만화, 멱미레, 발채, 새창, 서대, 서푼목정, 설낏, 설밑, 수구레, 홀떼기, 이보구니 등이 소의 대표적인 부위별 살 이름. 이보구니는 소 잇몸살, 수구레는 쇠가죽안에 붙어있는 아교질을 일컫는다.
사골을 푹 고아서,,
곰탕이란 고기를 맹물에 넣고 끓인 국이라는 의미의 공탕(空湯)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고기를 푹 곤 국이라는 의미의 곰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시의전서』에는 '고음(膏飮)은 소의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떼기, 꼬리, 양, 곤지소니, 전복, 해삼을 큰 그릇에 물을 많이 붓고 약한 불로 푹 고아 맛이 진하고 국물이 뽀얗다'라고 오늘날의 곰탕을 설명하고 있다.

곰탕의 '곰'은 원래 고기나 생선을 천천히 푹 삶은 국을 뜻하는데 '고다'의 '고'는 기름지다는 뜻이라고 한다. '고음'은 기름진 음식이고 그 말이 줄어서 '곰'인데 여기에 국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곰국, 탕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곰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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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곡대체 이름유형원산지주요 성분
곰묵의 한 종류 인 콕리 곰탕
쇠고기 뼈 수프
대한민국
쇠고기 뼈, 소꼬리 , 머리, 족쇄 , 무릎 연골, 삼겹살 , 내장 및 / 또는 양지머리
한글한자로마자 수정맥쿤-라이 샤 우어IPA
한국 이름
곰국 / 곰탕
-/ -湯
곰곡 / 곰탕
komkuk / komt'ang
[kom.k͈uk̚] /[kom.tʰaŋ]
곰국 ( 곰국 ), 곰탕  ( 곰탕 ) 또는 소고기 뼈 수프 는 갈비뼈 , 소꼬리 , 양지머리 , 소의 머리 또는 소 뼈와 같은 다양한 소고기 부분으로 만든 한국 요리 의 스프 를의미합니다낮은 화염에 끓인. 국물은 풍부하고 푸짐한 맛을 가진 유백색의 경향이 있습니다
Hyeonpung는 gomtang  :의 지역에서 Hyeonpung . 국물은 황소 꼬리, 양지머리, 소의 발 및 내장으로 만들어집니다. 
나주는 gomtang  :의 지역에서 나주 . 익힌 굽 고기와 양지머리가 국물에 추가됩니다.
사골국,
눈/ 대/ 중량/ 칼로리량/
1인분
700g
580kcal
성분 별, 
사골 곰탕 ( 사골 곰탕 ) : 소 다리 뼈가 주성분/ Kkori-gomtang (꼬리 곰탕 ) : 소꼬리 수프 / Toran gomtang (토란 곰탕)에 기반 쇠고기 양지머리,/ 갈비 탕 (갈비탕)로 만든 갈비 (쇠고기 갈비)/ 육개장 ( 육개장 ) :매운 양념을 더한 곰탕/ Doganitang (도가니탕) : 쇠고기 무릎 연골은 추가 성분입니다,
추포탕 (추포탕) : 잘게 썬 들깨 가 첨가된다,
설렁탕 : 수프가 유백색이 될 때까지 소 다리 뼈 수프를 10 시간 이상 끓였다. 일반적으로 솜연 (얇은 밀가루 국수)과 쇠고기 조각이들어있는 그릇에 담아 제공합니다. 얇게 썬 파와 후추가 조미료로 사용됩니다. 때로는 국수 대신 쌀과 함께 제공됩니다. 
곰탕 영양성분표,
탄수화물
7.3g
단백질
70.1g
지방
30g
식이섬유
1.3g
비타민 B1
0.00㎎
비타민 B2
1.49㎎
나이아신
6.95㎎
비타민 C
0.00㎎
레티놀
0.00㎍
베타카로틴
124.99㎍
콜레스테롤
197.94㎎
sucrose
0.0g
glucose
0g
fructose
0.0g
lactose
0.0g
maltose
0.0g
당류
0.0g
나트륨
822.77㎎
칼륨
288.41㎎
칼슘
48.87㎎

47.81㎍

229.68㎎
포화지방
8g
트랜스지방
0.7g
*쇠고기 사태, 도가니 등 진하게 푹 과서 끓인 영양식이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향신료를 사용하고 소스 문화가 익숙하기 때문에 찍어먹을 수 있는 연겨자 소스를 곁들여 냈다.
재료 및 분량 (10인분)
쇠고기 사태 700g, 소 도가니 2kg, 곱창 500g, 밀가루 200g, 굵은 소금 100g, 물 15L, 통 마늘 80g, 굵게 썬 무 600g, 월계수잎 2개, 올스파이스 2g, 정향 2g, 가는 국수 200g, 고수 100g, 둥글게 선 파 100g, 후춧가루 20g, 소금 30g
연겨자 소스 발효겨자 90g, 소금 10g, 설탕 60g, 식초 100ml, 물 50ml
• 산출량 1인분 약 550g
• 적정배식온도 섭씨 80도
• 총조리시간 180분(사전조리 후 서빙 시간 5분 소요)
가물치의 gomtang  : 만든 독사 물고기 와 찹쌀 , 생강, 인삼 과 대추
장국밥, 설렁탕, 곰탕,
우리나라의 밥상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으로 구성되는데 밥과 국 한 가지는 기본적으로 갖춘다. 국에는 콩나물국, 뭇국, 미역국, 시금치·아욱·배추·시래기 등을 넣은 된장국 그리고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이 있고, 쇠고기의 양지머리나 사태를 넣고 끓인 고깃국이나 곰탕, 설렁탕, 육개장 등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급식이었던 장국밥.
우리나라 사람은 탕민족이라고 불릴 만큼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국에다 밥을 만 음식을 탕반(湯飯) 또는 장국밥이라 하며, 특별히 다른 찬을 갖추지 않아도 깍두기나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장국밥의 탕은 대개 고기로 끓인 설렁탕, 가리탕, 곰탕, 육개장 등이다.

장국밥은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와 『규곤요람』에 나오며, 궁중 의궤에 잔치나 행사 때 군인이나 악공, 여령들이 먹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규곤요람』의 장국밥은 “국수 대신 밥을 만 것으로,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려서 그 장물을 밥 위에 붓는다”고 하였다. 장국밥은 그 유용함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있었으나 너무 일반적인 음식이라 굳이 음식책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도 자연히 외식이나 단체 급식용 또는 손쉬운 일품요리가 필요해졌다. 전통 음식점으로 상밥집(床食家(상식가))이 있기는 하였으나 보다 간단한 장국밥집이 많이 생겨났다. 조선조 풍속화 중 주막이나 장터에서는 으레 주모가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떠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국밥은 예부터 전쟁터나 노역장, 행사 때에 많은 사람에게 간편하게 급식할 수 있는 식단이었다.

탕반가(湯飯家)의 출입구에는 둥근 종이통에 하얀 종이 술을 붙여서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아 음식점임을 알렸다고 한다. ‘무교탕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헌종(1834~1849년)도 사복을 입고 먹으러 다녔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장 고급 대중음식점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양반들이 종에게 사방등(四方燈)을 들려서 이 탕반집에 드나들었다. 사방등을 들린 대감이 오면 뒤채로 따로 모시거나 일반 손님과 합석하게 될 때는 상민은 먹다 말고 자리를 피했다가 대감이 가고 나면 다시 들어와서 먹었다고도 한다.

문인 박종화는 ‘무교탕반’에 대하여 “양보국밥집이 있었는데 양보는 갑오경장 전후의 사람이었다. 이 집의 장국밥은 양지머리만을 삶아 맛이 좋은데 젖퉁이고기를 넣어 주고, 갖가지 양념으로 고명한 산적을 뜨끈뜨끈하게 구워서 넣어 주어 유통과 산적이 잘 어울려서 천하진미였다”고 칭찬하였다. ‘무교탕반’ 외에 수표다리 건너편의 ‘수교탕반집’과 ‘백목탕반집’도 유명하였다. 이 두 탕반집에 드나드는 손님은 계층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수교탕반집’은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가 많고, ‘백목탕반집’은 돈 많은 상인이나 오입쟁이가 단골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국집이 거의 없어지고 곰탕이나 설렁탕이 탕반의 주류를 이룬다. 장국밥 중에 특이한 향토 음식이 하나 있는데 함경도의 가리국이 그것으로 본고장 사람들도 가루국이라 부르기도 하는 더운 장국밥이다. 함경도 하면 회냉면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냉면집보다 가리국을 전문으로 파는 집이 훨씬 먼저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1970년경 향토 음식을 조사할 무렵 ‘명동칼국수’ 뒷골목에 함경도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가리국밥을 팔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가리국 만드는 법을 보면, 소의 사골과 석기살을 삶아서 푹 끓이면서 위에 뜨는 기름을 말끔히 걷어 낸다. 커다란 사기 대접에 밥을 담고 위에 삶은 고기를 결대로 찢어 얹고, 삶은 선지도 큼직하게 썰어 얹고, 두부 한 모를 통째로 장국에 넣어 따끈하게 데운 것과 연한 쇠볼깃살로 만든 육회를 얹고 뜨거운 장국을 부어 낸다. 제대로 먹으려면 먼저 국물을 죽 들이마시고 매운 다대기를 넣어 비빔밥처럼 비벼서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다시 그릇에 더운 장국을 부어 마신다. 선지를 삶을 때 끓는 물에 넣으면 구멍이 숭숭 나므로 낮은 불에서 서서히 삶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쓴다. 가리는 갈비를 말하지만 갈비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원래는 갈비를 넣고 끓였는데 차차 쇠갈비만이 아니라 사골과 갈비 밑에 붙은 석기살을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조리법,
특별히 다른 찬을 갖추지 않아도 깍두기나 김치 한 가지만으로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탕반(湯飯).
장국밥
재료(6인분)
양지머리 400g, 무 200g, 밥 6공기, 물 20컵(4리터), 고사리 200g, 도라지 200g, 콩나물 200g, 후춧가루·깨소금·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각 적량
(가) 소금 1작은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1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
(나) 간장(진간장) 1큰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다) 소금 1작은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2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양지머리를 덩어리째 찬물에 씻어서 펄펄 끓는 물에 무와 함께 끓인다.
2. 무가 무르게 익으면 먼저 꺼내서 나박썰기로 하고, 고기는 더 무르게 고아서 건져 얇게 저며 썰어 (가)의 양념으로 무친다.
3. 고사리는 (나)의 양념장으로 무쳐서 볶고, 도라지는 소금으로 주물러서 (다)의 양념 반 분량으로 무쳐서 볶고, 콩나물은 소금을 넣고 삶아서 (다)의 남은 양념으로 무친다.
4.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으로 장국 간을 맞추고 양념한 고기와 무를 다시 넣어 한소끔 끓인 다음 뚝배기에 더운 밥을 담고 더운 장국을 붓고 나물을 고루 얹는다. 기호에 따라 파, 깨소금, 고춧가루 등을 넣는다.
곰탕과 설렁탕,
요즘에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고기 부위와 간을 맞추는 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설렁탕은 사골과 도가니, 양지머리 또는 사태를 넣고, 우설(牛舌), 허파, 지라 등과 잡육을 뼈째 모두 한 솥에 넣고 끓인다. 이에 비하여 곰탕은 소의 내장 중 곱창, 양, 곤자소니 등을 많이 넣고 끓인다. 설렁탕에 허파나 창자를 넣기도 하나 곰탕보다 뼈가 많이 들어가서 국물이 한결 뽀얗다. 곤자소니는 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 많은 부분이고, 도가니는 무릎도가니와 소의 볼깃살 두 가지인데 보통 무릎도가니를 말한다. 곰탕은 다시마나 무를 넣어 끓이며, 국물이 진하고 기름지다. 또 설렁탕은 먹는 사람이 소금과 파를 넣고 간을 맞추어 먹지만, 곰탕은 국을 끓일 때 간장(진간장)으로 간을 맞추어서 낸다. 하지만 요즘은 설렁탕이든 곰탕이든 대부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을 모시는 제사로 선농제, 중농제, 후농제를 지냈으나 조선조 말에는 선농제만 남게 되었다. 지금도 서울의 동대문 밖 종암동에 선농단(先農壇)이란 곳이 남아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매년 경칩 후 첫 번째 해(亥)일 축(丑)시에,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신농에 제사를 지내거나 친히 논밭을 갈아 농사의 대본을 보이는 행사인 적전지례(籍田之禮)를 행하였으며, 가끔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농경제는 국가 규모로 지내는 큰 제사로 왕부터 정승, 판서, 문무백관 그리고 상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소를 제물로 올렸다.

『성종실록』에 보면 성종 6년에 원산대군과 재상 신숙주 등을 대동하고 선농단에 제사 지낸 뒤, 백성을 위로하여 함께 음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신하가 임금께 바친 헌시(獻詩) 중에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하여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퍼져······”라는 시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선농단에서 탕을 끓여 함께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제사는 1908년 일본의 입김으로 중단되었는데 마침 그 해에 몹시 가물었다. 그래서 순종은 신농이 제사를 받지 못하여 노여워했기 때문이라 여겨 따로 대궐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설렁탕을 끓였다는 기록을 남긴 임금으로는 태조, 태종, 세종 등이 있다. 『조선요리학』(1940년)에서는 “세종대왕이 친경할 때 갑자기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까지 견딜 수 없게 되자 친경 때 쓰던 농우(農牛)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는데 이것이 설농탕(設農湯)이 되었다”고 하였다.

제물로 생쌀과 생기장, 소와 돼지를 희생하여 통째로 놓고 차례를 올리는데, 행사가 끝나면 미리 준비한 큰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갈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서 썰어 놓고 친경 때 소를 몰던 노농(老農)과 예순 살 이상 노인에게 우선 먹이는데 그릇은 근방 농가에서 빌려 온 뚝배기를 쓰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파로 양념하였다. 임금 근처에는 원래 일반 백성이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이 때만은 임금이 쟁기를 세 번 민 다음 정승 이하도 쟁기를 밀어 농사 짓는 시범을 보이는 모습을 근방의 농부들이 구경하도록 하락했다고 한다.

설렁탕은 집에서 만든 것보다 전문점 것이 훨씬 맛있다. 곰탕이나 설렁탕은 집에서 적은 양을 끓여서는 제맛이 안 난다. 구색 맞추어 고기 부위를 고르기도 어렵고, 큰 솥에 많은 양을 푹 끓여야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개화기에는 설렁탕 전문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하며, 이들 설렁탕집은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 옆에 피 묻은 쇠머리를 놓아 간판으로 삼았다. 설렁탕집에서는 소 한 마리를 우피와 오물만 빼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 한 시까지 끓였다. 자정 무렵이면 푹 고아져 진국이 되므로 그 때쯤 단골 손님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때 이름난 설렁탕집이 여러 곳 있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화신 뒤의 이문 설렁탕집이다. 손님이 오면 바로 앞에서 찬밥을 담은 뚝배기에 국물을 부어 토렴하여 데우고 그 위에 국수 한 사리와 얇게 썬 편육 조각을 손으로 집어 얹고 다시 끓는 국물을 부어 말아 준다. 손님은 상 위에 놓인 소금과 고춧가루, 후춧가루, 파를 적당히 넣어 먹는다. 입이 짧은 서울 손님들은 기호에 따라 혀밑, 지라, 만하, 우랑, 우신, 혹살 등 원하는 고기 부위를 따로 찾기도 했다고 한다. 반찬으로는, 새우젓국을 넣지 않고 소금으로 간을 한 깍두기를 함께 낸다. 남은 국은 모아서 돼지먹이로 썼는데 돼지와 새우젓이 상극이라 일부러 새우젓을 넣지 않고 담갔다고 한다.

이처럼 맹물에 고기만 넣어 끓이는 아주 간단한 음식인 설렁탕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 같지는 않고, 훨씬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 말 몽골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게 되었는데, 몽골에서는 고기를 맹물에 끓여서 만드는 음식이 가장 보편적이었으므로 그 무렵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끓여 선농탕이라 하다가 나중에 음운이 바뀌어 설렁탕이 되었다고도 하며, 설농탕(雪農湯)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국물 색깔이 눈처럼 흰색이라 나중에 붙여진 듯하다. 설렁탕이라는 음식 이름이 처음 나온 문헌은 『조선요리학』(1940년)이고,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옛날 책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곰탕은 곰국이라고도 하는데,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고음국(膏飮(고음))’은 “큰 솥에 물을 많이 붓고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넣고 은근한 불로 푹 고아야 국물이 진하고 뽀얗다”고 하였다. 이후의 음식책에도 모두 ‘곰국’으로 나오며 일반 가정에서도 곰탕보다는 곰국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곰국’은 “고기를 데친 쇠족, 꼬리털, 무를 통으로 넣어 곤 후 꺼내어 네모지게 썰어 진장 간을 하고, 고기는 육개장같이 썰어 장, 기름, 후춧가루, 깨소금을 쳐서 한참 주무른 후에 먹을 때 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하였다.
조리법,
설렁탕
곰탕에 비해 뼈를 많이 넣고 끓이기 때문에 국물이 한결 뽀얗다.
재료(20인분)
쇠머리 2kg, 쇠족 1개, 사골 1개, 도가니 1개, 사태 500g, 양지머리 500g, 물 20리터, 파 4뿌리, 마늘 1통, 생강 1톨, 파·소금·고춧가루·후춧가루 적량,

레시피

구매하기
1. 쇠고기는 통 사태를 구매한다.
2. 신선한 도가니를 구매한다.
3. 손질된 곱창을 신선한 것으로 구매한다.
기초손질
1. 쇠고기 사태와 도가니를 냉수에 담아 1시간 간격으로 물을 3회 갈아주며 핏기와 불순물을 제거해 놓는다.
2. 곱창은 볼에 담고 밀가루와 굵은 소금을 뿌려 세차게 주무른 후 물에 씻어 다듬어 둔다.
3. 겨자가루에 40℃의 60ml의 물을 넣고 섞어 김이 오른 냄비 위에 엎어 10분 정도 발효시켜 발효겨자를 만든다.
재료 만들기
1. 냄비에 데쳐낼 재료인 소고기, 도가니, 곱창의 10배 양의 물을 준비하고 끓기 시작하면 재료를 넣어 약 5분 정도 데쳐낸다.
2. 깊이가 있는 냄비에 물 15L와 도가니를 넣고 센 불로 시작하여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낮추어 2시간 정도 은근하게 끓인다. 중간 중간 떠오르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3. 사태와 곱창을 도가니가 끓고 있는 냄비에 무, 마늘과 함께 넣고 1시간 더 끓인다.
4.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면 곱창과 소고기, 무를 꺼내 가로 3cm, 세로 3cm 크기로 각각 썰어 상온에 보관한다.
5. 국수를 끓는 물에 삶아서 1인분에 50g 정도 크기로 분리하여 물기를 빼서 마르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덮어 둔다.
6. 연겨자 소스 재료를 모두 섞어 소스를 만든다.
만들기
1. 곰탕을 끓일 때 고기의 잡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월계수잎, 올스파이스, 정향을 넣어 끓인다.
2. 곰탕 육수를 서빙 수에 맞추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3. 뜨거운 곰탕기를 준비하여 국수를 담고 그 위에 썬 소고기, 도가니, 곱창을 얹는다.
4. 곰탕 육수를 한번 끓인 후 곰탕기에 담고 마지막으로 썬 파를 올려 서빙한다.
5. 고수, 소금과 후추는 따로 서빙한다.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를 토막 낸 것으로 준비해서 찬물에 1시간 정도 담가 핏물을 빼서 건진다. 사태나 양지머리 등 국거리 고기는 덩어리째 씻어서 건진다.
2. 큰 솥에 분량의 물을 붓고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를 넣어 끓인다. 끓어오르면 불을 약하게 하고, 위에 떠오르는 기름과 거품을 걷어내고 끓이는 도중에 파와 생강, 마늘을 크게 썰어 넣는다.
3. 고기가 반 정도 물러지고 국물이 우러나면 양지머리와 사태를 덩어리째 넣어 약한 불에서 푹 끓여 건지는 건지고 국물은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낸다.
4. 뼈에 붙어 있는 고기는 발라내어 작게 썰고, 양지머리와 사태 고기는 건져서 얇게 편육처럼 썬다.
5. 따뜻하게 데운 대접에 편육을 담고, 국물은 간을 맞추지 않고 다시 데워서 붓는다.
잘게 썬 파와 소금, 후춧가루, 고춧가루를 따로 낸다.
곰탕
흔히 ‘곰국’이라고도 하며 은근한 불로 고아 국물 맛이 진하고 기름지다.
재료(10인분)
쇠갈비(탕거리)·양지머리·양·곱창·곤자소니 각 500g, 물 10리터, 무(소) 2개, 파 4뿌리, 마늘 5쪽,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소금 적량
(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2큰술, 소금 2작은술, 다진 파 4큰술, 다진 마늘 2큰술, 참기름 2큰술, 후춧가루 1작은술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양, 곱창, 곤자소니는 소금을 뿌리고 주물러서 깨끗이 씻는다. 양은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검은 막을 칼로 깨끗이 긁고 안쪽의 막과 기름 덩어리를 떼어 낸다.
2. 쇠갈비와 양지머리는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건진다. 펄펄 끓는 물에 국거리용 고기를 모두 넣고 센불에서 끓인다.
3. 국이 다시 끓어오르면 불을 줄이고 3~4시간 서서히 끓이고 도중에 무를 반으로 갈라서 넣고, 파와 마늘을 크게 썰어 넣는다. 위에 뜨는 기름과 거품은 말끔히 걷어낸다.
4. 고기와 무가 무르게 익으면 건져 내어 납작납작하게 썰어 (가)의 양념으로 고루 무친다.
5. 국물을 다시 불에 올려 펄펄 끓이다가 양념한 고기와 무를 넣고 끓여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이나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꼬리곰탕
쇠꼬리를 은근한 불에 푹 고아 낸 곰탕이다.
재료(10인분)
쇠꼬리 2kg(물 10리터, 파 3뿌리, 마늘 5쪽), 소금·후춧가루·파 적량
(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1큰술, 소금 2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후춧가루 약간

* 계량 단위
1작은술 - 5ml(cc) / 1큰술 - 15ml(cc) / 1컵 - 200ml(cc) / 1되 - 5컵(1,000ml)

만드는 법
1. 쇠꼬리는 4~5cm 폭으로 토막 내거나 덩어리일 때는 마디와 마디 사이의 연골 부분에 칼을 넣어서 끊어 쥔 겉의 질긴 막은 벗겨 내어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서 건진다.
2. 끓는 물에 쇠꼬리를 넣고 센불에서 끓이다가 불을 줄이고 3시간 정도 서서히 끓인다.
도중에 파와 마늘을 크게 썰어 넣고, 위에 뜨는 기름과 거품은 걷어낸다.
3. 살이 뼈에서 쉽게 떨어질 정도로 무르게 익으면 건져서 (가)의 양념으로 무치고, 국물은 식혀서 기름을 걷어낸다.
4. 국물을 다시 불에 올려 양념한 꼬리를 다시 넣고 끓여서 대접에 담고 소금, 후춧가루와 잘게 썬 파를 따로 담아 낸다.
tip: 참고사항
• 서빙할 때 온도를 섭씨 80도 정도를 유지하도록 한다.
• 국수대신 밥을 제공할 수 있다.
•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향신료를 사용하고 소스 문화가 익숙한 미국인을 고려하여 고기를 찍어먹을 수 있는 연겨자 소스를 곁들여 낸다. 
탕,
출처 & 참고문헌
[곰탕 [Gom tang, 精熬牛肉汤] - 모방할 수 없는 신비한 국물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이야기, 2013..)
[곰탕 (외식 음식 영양성분, 식품의약품안전처)
[곰탕 [GOMTANG] (LA에서 선호하는 한식 11선, 2017...)
[장국밥, 설렁탕, 곰탕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1, 초판 1998., 10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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