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Islam],1
이슬람교는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여기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자다가 날개가 600개 달린 대천사 지브릴(جبريل)이 전해준 계시에 의해 아내와 어린 조카에게 신의 말씀을 전한 것에서 시작되어, 현재 대략 18억 명의 신도가 있다.
기독교, 힌두교, 불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기독교, 힌두교, 불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슬람(اسلام)이라는 말은 아랍어 어근 'س ل م(S-L-M)'에서 온 것인데, 이는 아랍어로 (신에게의) 복종이라는 뜻이다. 평화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안식과 평온함'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의 인삿말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가 당신께 함께 하기를), 유대인들의 인삿말 "샬롬" 에 이 낱말이 들어가있다. 성경에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한 것도 이런 셈족 언어의 전통에서 이해하면 된다. 예수가 생전에 썼던 아람어도 셈어족에 속하므로.
한자로는 회교(回敎)라 표기한다. 회흘(回吃;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행정구역) 지방에서 건너온 종교라는 뜻으로 추정되며, 명나라 때에는 회흘 지방에서 건너와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이를테면 기독교인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자 명의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강제 하는 정책으로 이들을 한화시켜버렸고 이에 따라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 기독교와 유대교 회회인은 아예 한족과 동화되어 버리거나 차라리 중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결국에는 '회회'라는 말이 무슬림을 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다.
한국 이슬람중앙회에서는 ‘회교’라는 명칭은 잘못된 것이며, ‘이슬람’ 또는 '이슬람교(敎)'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므로 ‘마호메트교’라는 명칭도 쓰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한자로는 회교(回敎)라 표기한다. 회흘(回吃;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행정구역) 지방에서 건너온 종교라는 뜻으로 추정되며, 명나라 때에는 회흘 지방에서 건너와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이를테면 기독교인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자 명의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강제 하는 정책으로 이들을 한화시켜버렸고 이에 따라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 기독교와 유대교 회회인은 아예 한족과 동화되어 버리거나 차라리 중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결국에는 '회회'라는 말이 무슬림을 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다.
한국 이슬람중앙회에서는 ‘회교’라는 명칭은 잘못된 것이며, ‘이슬람’ 또는 '이슬람교(敎)'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므로 ‘마호메트교’라는 명칭도 쓰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
لَا إِلٰهَ إِلَّا ٱلله مُحَمَّدٌ رَسُولُ ٱلله
(라-일라-하, 일라-알라, 무함마둔 라술룰라)
이슬람권 국가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아잔의 "신은 위대하다" (알라-후 아크바르) 다음 나오는 2절의 기반이기도 하다.
이슬람에서 많이 쓰는 '알라'라는 호칭은 이슬람과 아랍계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아랍어 단어로 아브라함계 종교의 유일신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슬람의 유일신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과 동일하다는 것이 이슬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한국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을 '하나님'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알라 문서 참조.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린 천사는 지브릴(جبريل), 히브리어로는 가브리엘(גַברִיאֵל)이다. 이슬람에서는 천사에게는 종족 번식이 필요없다. 필요에 따라 신에 의해 생산이 된다 생각해 따로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경전은 쿠란이다. 번역으로 인한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쿠란은 번역이 금기시되어 있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주고, 무지한 인간을 위해 예언자들을 통해 약간의 특수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게 자꾸 곡해되고 왜곡되어 하나님의 말씀은 엉뚱하게 해석되고, 예언자인 예수를 신처럼 숭배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마지막으로 아예 '베껴적고 달달달 외우기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는 모범답안'으로 인간에게 쿠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쿠란의 번역을 금기시하는 동시에 사도 무함마드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건 아랍어로 된 쿠란만이 유일하게 정통성이나 종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까 번역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말로 번역한 쿠란은 쿠란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며, 번역본은 쿠란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설명서 정도의 지위만 차지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번역된 쿠란에는 항상 '의미의'라는 수식어가 붙거나 '주해서'라는 단서가 달린다. 예를 들어 한국어 번역본의 이름은 '성 쿠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만약 번역본을 아랍어로 된 쿠란과 동급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독특한 지역적 차이로 간주된다.[11]
무슬림이 되는 방법은 무슬림이 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아래의 샤하다(신앙고백)의 의미를 이해한 상태에서 아랍어로 샤하다를 낭송하는 것이다. 샤하다를 혼자 해도 유효하지만, 아무개가 샤하다를 했음을 확인해줄 무슬림 증인들 앞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근처에 있는 성원의 이맘 앞에서 이맘이 샤하다를 천천히 낭송하면, 입교자가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기도나 신앙 행위를 할 적에 신앙을 위해 한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어야만 유효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전혀 무슬림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입으로만 샤하다를 했다고 무슬림이 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일반인들의 상식상으로는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대교를 뿌리로 두고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정작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아담 때부터 시작된 종교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원래의 순수한 유일신 신앙이 변조된 것이고 따라서 이슬람은 인류 창조로부터 시작된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과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무함마드부터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표현을 적극 사용하고 확산시킨 장본인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슬람 신학의 시선에선 아담, 이브,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리아 모두 무슬림이었고, 무하마드는 이 계보의 예언자들 중 마지막 예언자이다. 즉, 무슬림들 본인들의 신학적 시각에선 '태초부터 이슬람교, 즉 온전한 아브라함의 유일신의 종교는 존재했고, 무하마드로서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이 유일신의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까지 온전하게 알려짐에 따라 최후의 예언자와 함께 완성되었을 뿐이다.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린 천사는 지브릴(جبريل), 히브리어로는 가브리엘(גַברִיאֵל)이다. 이슬람에서는 천사에게는 종족 번식이 필요없다. 필요에 따라 신에 의해 생산이 된다 생각해 따로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경전은 쿠란이다. 번역으로 인한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쿠란은 번역이 금기시되어 있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주고, 무지한 인간을 위해 예언자들을 통해 약간의 특수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게 자꾸 곡해되고 왜곡되어 하나님의 말씀은 엉뚱하게 해석되고, 예언자인 예수를 신처럼 숭배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마지막으로 아예 '베껴적고 달달달 외우기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는 모범답안'으로 인간에게 쿠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쿠란의 번역을 금기시하는 동시에 사도 무함마드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건 아랍어로 된 쿠란만이 유일하게 정통성이나 종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까 번역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말로 번역한 쿠란은 쿠란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며, 번역본은 쿠란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설명서 정도의 지위만 차지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번역된 쿠란에는 항상 '의미의'라는 수식어가 붙거나 '주해서'라는 단서가 달린다. 예를 들어 한국어 번역본의 이름은 '성 쿠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만약 번역본을 아랍어로 된 쿠란과 동급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독특한 지역적 차이로 간주된다.[11]
무슬림이 되는 방법은 무슬림이 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아래의 샤하다(신앙고백)의 의미를 이해한 상태에서 아랍어로 샤하다를 낭송하는 것이다. 샤하다를 혼자 해도 유효하지만, 아무개가 샤하다를 했음을 확인해줄 무슬림 증인들 앞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근처에 있는 성원의 이맘 앞에서 이맘이 샤하다를 천천히 낭송하면, 입교자가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기도나 신앙 행위를 할 적에 신앙을 위해 한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어야만 유효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전혀 무슬림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입으로만 샤하다를 했다고 무슬림이 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일반인들의 상식상으로는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대교를 뿌리로 두고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정작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아담 때부터 시작된 종교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원래의 순수한 유일신 신앙이 변조된 것이고 따라서 이슬람은 인류 창조로부터 시작된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과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무함마드부터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표현을 적극 사용하고 확산시킨 장본인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슬람 신학의 시선에선 아담, 이브,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리아 모두 무슬림이었고, 무하마드는 이 계보의 예언자들 중 마지막 예언자이다. 즉, 무슬림들 본인들의 신학적 시각에선 '태초부터 이슬람교, 즉 온전한 아브라함의 유일신의 종교는 존재했고, 무하마드로서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이 유일신의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까지 온전하게 알려짐에 따라 최후의 예언자와 함께 완성되었을 뿐이다.
오 성서의 백성들아 너희가 모세오경과 복음과 너희의 주님께서 너희에게 지금 내려주신 것(쿠란)을 따라 행할 때까지 너희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오 성서의 백성들아 왜 너희가 진리를 허위와 뒤섞어 의도적으로 진리를 은폐하느뇨? 그리고 스스로 ‘우리는 기독교인이요’라고 하는 자들로부터도 내가 약속을 받았으나 그들은 그들에게 보내어진 메시지 중에서 선한 부분을 저버렸노라. 그리하면 부활의 날(저들이 하나님의 책을 버리고 하나님의 메신저들과 그분의 질서들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율을 범하였을 때)까지 그들 가운데에 증오와 대립을 내가 심었노라 그리하여 곧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들이 행해온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릴 것이니라.
성서의 백성들 가운데 (1)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2) 최후의 날을 믿지 아니하며, (3)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도께서 불법이라 한 것을 불법으로 지키지 아니하며, (4) 진실의 종교(이슬람)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이 세금을 기꺼이 납부하고 그들 스스로 복종할 때까지 싸우라 그리고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우자이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기독교인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노라 그들은 그들 이전에 믿지 아니한 자들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니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있으니라 얼마나 저들이 진리로부터 벗어나 미혹되어 있는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에 대한 해석이 기독교와 꽤 다르긴 하지만, 유대교가 예수를 사칭이니 사기꾼 예언자니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예수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본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25명의 정식 예언자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예언자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급, 신이 보낸 중요한 예언자 3명 중 1명으로 대우받는다. 여기서 모세와 예수를 무함마드와 동일하게 보는 게 아니라 두 예언자도 신의 예언자가 맞지만, 신이 완전하게 만들 목적으로 무함마드라는 예언자를 보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교리상으로는 무함마드가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예언자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인정하고, 예수가 행했던 모든 기적도 인정하며, 최후의 심판일에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애초에 무함마드가 '예수 바로 다음에 온 최후의 예언자'라고 광고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삼위일체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믿지 않는다는 데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이슬람에서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 신이 권능을 발휘하여 예수 대신 이스카리옷 유다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여 예수를 구해줬다고 해석한다.
그렇다고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를 기독교에서의 예수와 같은 위치에 두는 것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예수는 성삼위 중 성자 포지션이므로 참 인간인 동시에 참 하느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아무리 위대하든 말든 그냥 인간에 불과한 존재이며 인간으로서의 약점 역시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때문에 주류 수니파 이슬람은 기독교를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면서 자기네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깐다. 특히 가톨릭의 성모 공경으로 인한 마리아상의 존재 같은 것은 영 좋지 않게 본다. 다수의 수니파와 소수의 시아파 및 기타 등이 있는데 나라마다 파의 비율은 다르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인구의 대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이란은 시아파 국가이고, 이라크는 시아파 인구가 절반을 약간 넘는다. 교파가 갈리는 건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 자리를 놓고 일어난 분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몇몇 교리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근데 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격차 따위는 상대도 못 할 만한 수준이라. 거기다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분파를 인정하기 때문에 분파도 꽤 많은 편이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었을 때 "내가 죽고 난 뒤에 이슬람이 72개로 쪼개질 것이다"란 말을 했다는 썰이 있는데, 진짜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아무튼 저런 이유로 나름 잘 싸우고 사이도 영 좋지 않다. 중동을 고향으로 하며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렇다고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를 기독교에서의 예수와 같은 위치에 두는 것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예수는 성삼위 중 성자 포지션이므로 참 인간인 동시에 참 하느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아무리 위대하든 말든 그냥 인간에 불과한 존재이며 인간으로서의 약점 역시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때문에 주류 수니파 이슬람은 기독교를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면서 자기네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깐다. 특히 가톨릭의 성모 공경으로 인한 마리아상의 존재 같은 것은 영 좋지 않게 본다. 다수의 수니파와 소수의 시아파 및 기타 등이 있는데 나라마다 파의 비율은 다르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인구의 대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이란은 시아파 국가이고, 이라크는 시아파 인구가 절반을 약간 넘는다. 교파가 갈리는 건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 자리를 놓고 일어난 분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몇몇 교리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근데 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격차 따위는 상대도 못 할 만한 수준이라. 거기다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분파를 인정하기 때문에 분파도 꽤 많은 편이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었을 때 "내가 죽고 난 뒤에 이슬람이 72개로 쪼개질 것이다"란 말을 했다는 썰이 있는데, 진짜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아무튼 저런 이유로 나름 잘 싸우고 사이도 영 좋지 않다. 중동을 고향으로 하며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마드하브(이슬람의 주요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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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위파, 드루즈파 -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별도의 종파. 사실 원리적인 무슬림들의 대다수는 알라위파는 시아파보다 더 사악한 이단으로, 드루즈파는 아예 '별도의 종교'로 본다. 심지어 드루즈파는 20세기 말 레바논에서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당시 이에 개입한 이스라엘군과 동맹을 맺고 다른 무슬림들과 싸웠을 정도. 알라위파는 '알리를 섬기는 이들'이라는 뜻으로 눗사이리라고도 하는데 용어로서는 알라위는 레바논 지역을 프랑스인이 통치하면서 생긴 말이다. 시아파의 주요 세 종파에서 열두 이맘파에 가까운데, 알리를 중히 여기는 시아파라서 알리를 따른다는 말이 자기들도 좋았던 듯. 이란은 이들을 시아파로 인정하고 있으며, 알라위는 현재 시리아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논란거리인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알라위이며, 그를 떠받치는 군사, 정치 엘리트가 거의 알라위라고 보면 된다.
- 수피즘 - 위의 종파 구분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즉 수니파 수피도 있을 수 있고 시아파 수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수피즘 분파에선 관용을 우선시 하면서 비이슬람이나 무신론자와도 교류를 해왔기에 같은 이슬람에게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 또한 오스만 제국 당시 예니체리들이 가장 많이 따르던 종단이 바로 이 수피종단이었다. 특히 벡타쉬파 같은 경우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통을 융합시켜 발전해왔기 때문에 원래 기독교인이었던 예니체리들이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파였다. 그래서 예니체리가 사라지고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한동안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이 계속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주장하며 충돌을 일으키자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이들의 춤을 금지했다. 그나마 이들의 심벌이 되어버린 세마댄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금지정책을 폐지했다.
종교의 특징,
일단 경전 자체가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고 전도와 성전으로 국가를 이륙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타 종교들에 비해서도 독보적으로 정치적이다. 신정에 입각한 정책, 도덕관, 외교 및 전쟁까지 굳이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쿠란=교리 그 자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한번 전향하면 배타적 신정사회를 형성한다는 특징이 있다. 다른 종교들은 대부분 영향력 내지는 명분만 제공하지만 이슬람은 경전이 교리 그 자체인데 그 경전이라는 게 사실상 신정 지도자의 전기와 후일담이기 때문에 종교를 국가화하는 데 못을 박아놓는다.
이슬람의 기본 가치는 크게 (알라에 대한) 숭배, (타 문화/사회에) 전파, (개인적 유혹과 외부 사회의 정치/종교적 압박에 대한) 저항이라 기본적으로 유화주의나 교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편이고 강경 배타주의성이 강한 편이다. 하술하듯 아브라함 계열 신앙인들에게 (그나마 좀) 관대했던 것도, 당시 지정학적으로 따지자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로 사실상 포위된 상황에서 막나가면 곤란하니까(...) 그랬더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며, 결국 교리상의 궁극적 목표는 그 일대와 나아가선 세계를 개종시켜서 하나의 통일 신정사회를 이륙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시각에 따라선 꾸란이 신정사회의 세계정복 설명서로 보일 수도 있고, 이걸 진짜로 실행하려는 국가 내지는 집단들이 창시 이후로 그 폭력성/극단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꾸준히 있어왔다.
뿐만 아니라 경전에 성전을 명분화하고, 딱 한번 개종을 권유한 뒤 거부하면 "신의 위용을 보여서" 개종을 강제하거나,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단(카프르)로 간주해서 신에게 심판받게 올려버린다는 식으로 외교전략과 전술적 견해까지 제공한다. 현대에 들어서 살생과 전쟁을 지양하는 대부분의 타 주류종교에 비해 자의적으로 이슬람의 권위가 실추되었거나, 무슬림들의 삶, 신앙, 영토가 위협된다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식의 교리로 해석되었고,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이를 정책, 심하면 국론으로 채용했거나,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아니, 다른걸 다 떠나서 전도 중에 저항하지 않고 순교하는 걸 미덕으로 보는 기독교와는 달리 유혈 저항중에 전사하는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정의하며, 조건부이긴 하지만 전도의 수단으로 국가 단위의 전쟁이란 개념 자체를 긍정한다는거 부터가 스케일이 다르다.
우상숭배를 매우 배척하는 게 특징. 물론 이건 유대교, 기독교 역시도 공유하는 특징이지만 이들보다 이슬람은 조금 더 철저하게 우상숭배로 오해될 수 있는 것마저도 매우 싫어한다. 이에 성화와 성상은 물론 기독교의 십자가 같은 상징마저도 만들지 않는다. 그 덕택에 발전한 예술이 아라베스크 양식과 아랍식 서예다, 이 우상에 대한 배척은 다른 어떤 종교도 못 따라갈 정도로 매우 강력한 수준. 그래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어서 좀 덜한 곳도 있다고 한다. 특히 시아파는 이런 면에서 좀 더 관대한편이다.
이란에서는 알리와 그 아들 하산, 후세인의 초상화 등의 성상이 있는 경우도 보이며 무함마드가 들어간 우편이나 초상화를 팔기도 한다. 무함마드 얼굴이 직접 나온 그림이 보면 십중팔구 시아파 신자가 그린 그림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예 징표가 없으면 곤란한지라, "알라(الله)"를 적은 아랍어나 무함마드의 달, 초승달과 별 정도는 사용한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탈출할 때 빛이 되어서 앞을 밝혔다고 한다.
과거 상대적으로 타종교인에게 관대했다고 하는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달랐다. 사실 다른 종교보다 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066년 그라나다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말살되었고, 1126년 안달루시아에는 수천~만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 주민들이 모로코에 노예로 팔려갔다. 10~11세기 코르도바의 학자이자 시인인 이븐 하심(994~1064)은 기독교를 반박하기 위해 『분파의 서(Kitab al-Fistal)』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후 12세기 모로코에서 등장한 알모하드 왕조는 안달루스를 장악하고 나서 딤미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든지, 나라를 떠나든지, 아니면 순교하든지 선택할 것을 강요하여 많은 비무슬림들이 북쪽의 기독교 국가나 동쪽의 관대한 타 이슬람 국가들로 이주하였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개종하거나 죽음을 택해야 했다. 훗날 스페인이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뒤 무슬림 및 유대인에게 행한 조치와 비슷해서 더 씁쓸한 부분.
이슬람 통치하의 타 종교인들은 이슬람 당국의 허가없이 새 교회 건물을 짓거나 개축 및 보수할 수 없었고 공적인 종교 행렬도 거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의 경우, 밀레트(종교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 외에도 쿠란에 기독교와 유대교 신자들에게 대한 차별 조항을 명시해 놓는 등 타 종교에게 마냥 관용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전체 역사적으로 볼 때 중근동의 수만 개의 타종교 교회나 시설들이 점진적으로 파괴당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이슬람 전성기가 막 시작될 때만 해도 중근동 지역에 매우 많던 기독교 신자들이 지금은 소수를 빼면 다 어디 갔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과거 상대적으로 타종교인에게 관대했다고 하는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달랐다. 사실 다른 종교보다 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066년 그라나다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말살되었고, 1126년 안달루시아에는 수천~만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 주민들이 모로코에 노예로 팔려갔다. 10~11세기 코르도바의 학자이자 시인인 이븐 하심(994~1064)은 기독교를 반박하기 위해 『분파의 서(Kitab al-Fistal)』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후 12세기 모로코에서 등장한 알모하드 왕조는 안달루스를 장악하고 나서 딤미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든지, 나라를 떠나든지, 아니면 순교하든지 선택할 것을 강요하여 많은 비무슬림들이 북쪽의 기독교 국가나 동쪽의 관대한 타 이슬람 국가들로 이주하였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개종하거나 죽음을 택해야 했다. 훗날 스페인이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뒤 무슬림 및 유대인에게 행한 조치와 비슷해서 더 씁쓸한 부분.
이슬람 통치하의 타 종교인들은 이슬람 당국의 허가없이 새 교회 건물을 짓거나 개축 및 보수할 수 없었고 공적인 종교 행렬도 거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의 경우, 밀레트(종교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 외에도 쿠란에 기독교와 유대교 신자들에게 대한 차별 조항을 명시해 놓는 등 타 종교에게 마냥 관용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전체 역사적으로 볼 때 중근동의 수만 개의 타종교 교회나 시설들이 점진적으로 파괴당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이슬람 전성기가 막 시작될 때만 해도 중근동 지역에 매우 많던 기독교 신자들이 지금은 소수를 빼면 다 어디 갔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따뜻한 관용'과 '관용의 상징인 견딜 만한 세금'이 있었다면 절대 지금처럼 비이슬람 소수종교가 괴멸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단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슬람권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인을 박해 및 차별하지 않았다거나 평등하게 대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타종교인들은 무슬림만 보이면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야만 했고, 말을 타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현대로 치면 타종교인은 자동차를 못 타게 하는 수준이다.) 근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가시적인 차별은 많이 사라지는 듯 했으나, 사실상 타종교에 대한 이슬람의 극심한 불관용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서 현대에 와서도 현재진행형이며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소위 관용의 상징으로서 타 종교인에게 세금(지즈야)을 부과했다는 것도 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차별조항이지만, 이슬람 측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지배자들과 비교하면 차별수위가 낮고 상대적으로 적은 세금을 징수했기에 이 장점이 원동력이 되어 주변 종교보다 늦게 창시된 불리함을 극복하고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다" 고 변론한다. 당시 이슬람 정권은 25%가량의 토지세를 내는 조건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개종자에겐 약 10%의 인두세를 추가로 면제해줬다. 이 같은 정책은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던 주민들에게 대량 개종의 길을 열어줬다.
소위 관용의 상징으로서 타 종교인에게 세금(지즈야)을 부과했다는 것도 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차별조항이지만, 이슬람 측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지배자들과 비교하면 차별수위가 낮고 상대적으로 적은 세금을 징수했기에 이 장점이 원동력이 되어 주변 종교보다 늦게 창시된 불리함을 극복하고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다" 고 변론한다. 당시 이슬람 정권은 25%가량의 토지세를 내는 조건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개종자에겐 약 10%의 인두세를 추가로 면제해줬다. 이 같은 정책은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던 주민들에게 대량 개종의 길을 열어줬다.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개종자가 너무 급증하자, 이슬람 정부는 한때 세수 확보를 위해 개종금지백서를 발효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종을 하지 않고 인두세를 포함해도 비잔틴제국이나 페르시아제국 등 기존의 비이슬람 국가들에게 착취당하던 세금에 비하면 그 액수가 가벼운 편이었으므로 이슬람이 이렇게 급속도로 널리 퍼져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물론 기존의 동로마, 페르시아 양국이 장기전을 치루느라 세율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할 것이고, 이슬람이 세수확보를 위해 조세부담을 분산하기보단 딤미들에게 부담이 편중되어있던 기존 구조를 유지시키는 개종금지정책 등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부분은 한계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관용이라는 것은 시대, 지도자, 사회에 따라 달랐으며, 소위 '관용'이라는 기준도 들쭉날쭉이어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을 때도, 우리가 생각하는 관용과는 한참 멀거나 가혹했을 때도 많았고, 타종교인을 그럭저럭 대했던 시기만큼 타종교에 폭력적이고 가혹했던 시기도 많았다. 이슬람 초창기 우마이야 왕조는 당대에 박해받던 마니교를 향해서도 해꼬지 없이 내버려뒀고 오히려 학자나 칼리프 중에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동조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나이롱이었지만 바로 다음의 압바스 왕조에선 그들을 악마숭배자 취급하여 씨를 말려버렸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관용이라는 것은 시대, 지도자, 사회에 따라 달랐으며, 소위 '관용'이라는 기준도 들쭉날쭉이어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을 때도, 우리가 생각하는 관용과는 한참 멀거나 가혹했을 때도 많았고, 타종교인을 그럭저럭 대했던 시기만큼 타종교에 폭력적이고 가혹했던 시기도 많았다. 이슬람 초창기 우마이야 왕조는 당대에 박해받던 마니교를 향해서도 해꼬지 없이 내버려뒀고 오히려 학자나 칼리프 중에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동조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나이롱이었지만 바로 다음의 압바스 왕조에선 그들을 악마숭배자 취급하여 씨를 말려버렸다.
무굴 제국의 경우 악바르대제 당시 유럽에서 온 기독교 성직자가 "그건 좀 아니라고" 뒤에서 비판할 정도로 무신론자도 우대했고, 지즈야가 폐지되기도 했다. 그러다 이후 이슬람 광신도 황제였던 아우랑제브 황제 때에 재정 부족을 메우려 지즈야를 부활시키자 힌두교, 시크교를 비롯한 비무슬림들이 농민부터 토호까지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진압하는데 애를 먹었고 이것이 그의 사후 제국의 걷잡을 수 없는 쇠퇴와 분열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한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도 기존의 동로마와 같은 기독교국가가 있던 땅에 자리잡다보니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등 기독교인을 즐겨 등용하기도 했다가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망해갈 때가 되자 기독교도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일으켜 수십만에서 백만에 이르는 기독교도들을 대학살했다.
주류 학파인 하나피파는 법정에서 짐미(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즉 통치를 받는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의 증언이 무슬림과 동일한 위력을 갖는다고 보았던 반면에 샤피파와 말리키파는 짐미의 증언은 무슬림에 비해 1/2밖에 안 되는 효력, 가장 이교도에 배타적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한발리파는 1/8밖에 안 되는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 역시 역사적으로 힘이 있을 때면 주변국을 침공해 쓸어버리는 것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다.
주류 학파인 하나피파는 법정에서 짐미(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즉 통치를 받는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의 증언이 무슬림과 동일한 위력을 갖는다고 보았던 반면에 샤피파와 말리키파는 짐미의 증언은 무슬림에 비해 1/2밖에 안 되는 효력, 가장 이교도에 배타적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한발리파는 1/8밖에 안 되는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 역시 역사적으로 힘이 있을 때면 주변국을 침공해 쓸어버리는 것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다.
이슬람 탄생 때부터 다신교도들과 마니교, 야지디교를 비롯한 소수종교, 무신론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고, 조로아스터교 대학살을 자행한 적도 있으며, 초기 이슬람과 오스만 제국 말기는 탄압의 강도가 장난 아니었다. 유럽 기독교 왕국들의 유대인 처우가 들쭉날쭉했던 것처럼 이슬람의 종교정책 역시 지도층의 필요나 사회분위기에 따라 관용과 억압 사이를 오갔다. 또한 이슬람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배교자에 대한 살해, 즉 비이슬람 종교로의 개종하는 사람에 대한 살해를 경전에 명문화하고 상당수 신자들이 이를 실제로 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근대에야 개종자에 대한 가혹한 박해와 살해는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있어왔으나,
21세기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이런 극심한 논란을 일으키는 종교는 이슬람뿐이다. 배교자에 대한 살해 논란은 현대 세계 4대 주요 종교 중 이슬람이 거의 유일하다(현대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에서는 개종자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경우는 있어도 이를 죽이는 행위를 '교리적으로' 명문화하고 실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알제리, 파키스탄, 예멘, 이라크, 브루나이,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북부지역 등을 비롯해 이슬람 국가들 거의 대부분의 '국민 정서'가 타 종교로의 개종을 죽을 죄 로 보며, 많은 무슬림들이 개종자는 죽어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정부나 집권층 차원에서 개종자에게 가혹한 처벌을 현재까지도 시행하는 국가가 매우 많다. 또한 이들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이 아니더라도 가까이는 비이슬람 문화권에 이민온 이슬람 가정에서부터 터키 같은 세속적 이슬람 국가들에서까지 잊을만 하면 개종자에 대한 살인/살해위협과 가혹한 박해가 이어지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런 극악무도한 교리는 현대사회에서는 옴진리교같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짓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교리다. 진보적이거나 온건한 무슬림들이 어떻게 변명하든지, 21세기 현재에도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이슬람권 정부와 공동체, 신자들을 막론하고 상당수 무슬림들은 비이슬람 종교로의 개종자에 대한 각종 박해와 살해, 명예살인을 실천하려 하고 있다.
이집트의 한 판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슬람은 최종적이고 완전한 진리이기에 무슬림은 이미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 때문에 비이슬람 문화권,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인권단체 및 비무슬림들과의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으며 굉장한 비판을 받고 있다.
사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는 신과 인간은 감히 만날 수 없다 생각하여 그 사이를 연결해 줄 뭔가가 필요 없다 여기며, 이슬람이 주류인 지역에서 태어나면 부모님들이 알아서 관련 교육을 해주기 때문에 사제가 필요하지 않다. 때문에 무슬림은 전부 다 전도사나 사제가 될 수 있다. 다만 예배 인도 역할을 이맘이 하는데, 신도들은 이맘보다 예배를 먼저 거행해선 안 되고 순서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 예배를 할 때는 자기가 이맘이 되고, 가족이 함께 예배를 할 때는 제일 웃어른이 이맘이 되는 등 비교적 유연하다. 엄밀히 따지면 이슬람 외에도 사제가 없는 종교가 몇 있다. 예를 들어 개신교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기에 목사는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로 분류된다.
이슬람의 경우 수니파는 예배시 일반 신도들 중 한 사람이 맡는 '이맘'이라는 사회자를 맡지만, 시아파에서의 '이맘'은 분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준 예언자 수준의 의미를 갖는다. 율법 공부를 전문적으로 해서 경전 해석에 큰 영향을 주는 율법학자가 있긴 하지만, 이들 역시 이슬람에서는 평신도다. 무함마드와 같이 예언자는 신이 계시를 내리기 위해 일부러 파견한 경우가 있지만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사제가 없다는 게 명시되다 보니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같은 신 아래에서 평등성이 강조되어, 종교적인 문제라면 말단 직원이 사장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럼 없이 지적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노예가 왕에게 "이건 이슬람에 저촉됩니다!!"라고 비판하는 것이 허용될 정도였다. 그 때문에 라마단 금식 등 종교적인 계율을 종교에 대한 신념을 떠나 남의 눈과 지적이 따가워서 잘 지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이 당시 각 분야에서 미친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학자의 위치와 영향력은 성과 속이 통합되어 있는 이슬람의 특성상 오히려 많든 적든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다른 종교문화권의 성직자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 자체는 사제를 두지 않고 모두 평신도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권한은 다른 어느 종교 문화권보다도 막강하다.
한 예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이슬람 율법이 헌법을 대신하고 있는 정교일치 국가이기 때문에 이슬람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법을 만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이 어떻게 이슬람 교리를 해석하냐에 따라 국법이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이슬람 학자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일반 무슬림들과 이슬람 얘길 하다가 쿠란 구절을 두고 논란이 발생하면[40] 대개 자신들보다 더 잘 아는 이슬람 학자들의 책을 읽어보거나 만나서 얘길 해볼 것을 권하고 본인들은 더이상 논의를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자기들은 권위있고 신망있는 이슬람 학자들의 해석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사제가 없다는 특징은 초기 이슬람의 전파 양식이 상좌부 불교나 초기 기독교와 같은 문화적인 전파가 아닌 지배이념으로써 무력에 의한 정복 형태에 주로 의존하게 하였다.
무슬림들은 육신오행이라 부르는 하나님, 천사, 성전(쿠란), 사도, 최후의 심판, 정명을 믿을 것(육신)과 따라야 할 5가지 의무(오행)를 갖는데,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메카를 향해 매일 5차례씩 올리는 기도) 자카트(자선기부), 사움(라마단 기간 해가 떠있는 동안 금식하는 것. 그냥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핫지(일생에 한 번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하루에 5번 이상 "라 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둔 라술룰라"(하나님 외에는 경배받을 존재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예언자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신앙 고백이라고 하며, 이는 이슬람의 첫 번째 의무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유목민이나 노동자들도 샤하다는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고.
하루 5번 드리는 예배(살라트) 시간은 해의 위치와 그림자의 길이를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계절마다 예배 시간이 달라진다. 아랍인들이 시간 감각이 매우 무딘 편인데 이는 아랍인들이 시간을 우리처럼 1시 2시 이렇게 24시각을 기준으로 계산하기보다는 예배 시간에 맞춰서 시간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 5번 예배는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하면 되지만, 제 시간이 되자마자 기도하는 것을 신자로서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로 여긴다.
사제가 없다는 특징은 초기 이슬람의 전파 양식이 상좌부 불교나 초기 기독교와 같은 문화적인 전파가 아닌 지배이념으로써 무력에 의한 정복 형태에 주로 의존하게 하였다.
무슬림들은 육신오행이라 부르는 하나님, 천사, 성전(쿠란), 사도, 최후의 심판, 정명을 믿을 것(육신)과 따라야 할 5가지 의무(오행)를 갖는데,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메카를 향해 매일 5차례씩 올리는 기도) 자카트(자선기부), 사움(라마단 기간 해가 떠있는 동안 금식하는 것. 그냥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핫지(일생에 한 번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하루에 5번 이상 "라 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둔 라술룰라"(하나님 외에는 경배받을 존재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예언자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신앙 고백이라고 하며, 이는 이슬람의 첫 번째 의무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유목민이나 노동자들도 샤하다는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고.
하루 5번 드리는 예배(살라트) 시간은 해의 위치와 그림자의 길이를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계절마다 예배 시간이 달라진다. 아랍인들이 시간 감각이 매우 무딘 편인데 이는 아랍인들이 시간을 우리처럼 1시 2시 이렇게 24시각을 기준으로 계산하기보다는 예배 시간에 맞춰서 시간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 5번 예배는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하면 되지만, 제 시간이 되자마자 기도하는 것을 신자로서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로 여긴다.
- 파즈르(Fajr): 동쪽 지평선에 빛줄기가 보이고 검은 실과 흰 실을 구분할 수 있을 때부터 일출 전까지. 규정 자체가 모호한 만큼, 현대 이슬람계에서 정확한 파즈르 시작시간은 주요 이슬람 공동체마다 의견이나 기준이 다르다.
- 두흐르(Duhr): 태양이 한낮에 남중하여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부터 아스르 기도 전까지.
- 아스르(Asr): 어떤 물체의 그림자가 정오 때의 그림자 길이+물체의 높이만큼 되었을 때부터 일몰 전까지. 하나피 학파에서는 시작시간이 물체의 그림자가 정오 때의 그림자 길이 + 물체 높이의 2배가 되었을 때의 그림자 길이라고 본다. 한국어로 이 기도시간을 설명한다면 '늦은 오후 예배'라고 이름 붙여야 할 듯?
- 마그립(Magrib): 일몰 후 박명 시간 중에 드리는 예배. 즉 해가 졌지만 아직 빛이 보이는 때에 드리는 예배이다. 아직 빛이 보이는 시간이 언제인지는 역시 주요 이슬람 공동체마다 기준이 다르다.
- 이샤(Isha): 마그립 후, 즉 완전히 어두워진 후부터 밤의 중간까지. 여기서 밤의 중간이란 이샤가 시작할 때부터 다음 파즈르까지의 중간이다. 파즈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내부적으로 정확한 시작시간에 대하여 꽤나 이견이 많다.
자카트는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구빈 희사세로 대개 순수익의 2.5%를 지불하며, 비슷한 개념으로 원하고 싶을 때 기부하는 사다까라는 기부 개념도 있다.
라마단은 1달 동안의 단식으로, 1달 내내 단식을 하면 사람이 당연히 죽으니까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을 행한다. 대략 새벽 3시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흡연하지도 못한다. 여담으로 《흡연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이란에서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결국 이란의 유력한 이슬람 분파 시아파 내에서 라마단 중에 흡연을 해도 된다는 율법 해석이 나왔다. 물론 시아파를 싫어하는 다른 아랍 나라에서는 이 일로 이란과 시아파를 엄청 비난했다.
핫지는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규칙을 거쳐 메카에서 순례를 하는 것으로써, 정해진 기간 이외에 다른 기간에 방문한 것은 소순례로만 인정된다. 현재 성지 순례의 기착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인구 1,000명당 순례자 1명으로 각 나라당 순례자를 제한한다. 귀화인 포함 한국인 무슬림 15만 명이고, 그 중 순수 한국인 신자만 2만 명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잘못 보고된 덕택에, 한국에서 성지순례 가기는 굉장히 쉬운 편이다.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외국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성지순례를 갈 신도가 없어서 못 보내며, 덕분에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 국가 재외국민들은 하지를 몇 번이고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매년 갈 수 있는 한국이 좋은 나라라고 한다나.
단, 예외적으로 하지는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안 해도 된다고 한다. 모든 신자가 매년 메카로 순례를 올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 하려고 한다. 늦더라도 죽기 전에는 다들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매년 수많은 순례 인파가 메카에 몰린다. 때문에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렸던 때에는 개인 위생 문제 때문에 뉴스가 되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니 질병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하며 신경을 안 썼기 때문. 순례를 마치면 자기 이름 앞에 '하지'라는 호를 붙일 수 있고, 그 사람은 많은 존경을 받는다.
살라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무함마드가 천국에 있는 동안 신에게 한 가지 맹세를 했는데,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에 50번씩 기도를 드린다'라는 내용이었다. 뭔 깡으로 이런 맹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모세가 어이가 없었는지 "게으르고 건망증 심한 백성들이 그런 걸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태클을 걸어 다행히(?) 하루 50번 기도는 무산되었고, 무함마드는 신과의 협상을 통해 하루에 드리는 기도의 횟수를 지금과 같이 5번으로 줄였다.
메카의 방향과 거리를 나타내주는 iOS, 안드로이드 어플도 나와있다.
라마단은 1달 동안의 단식으로, 1달 내내 단식을 하면 사람이 당연히 죽으니까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을 행한다. 대략 새벽 3시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흡연하지도 못한다. 여담으로 《흡연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이란에서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결국 이란의 유력한 이슬람 분파 시아파 내에서 라마단 중에 흡연을 해도 된다는 율법 해석이 나왔다. 물론 시아파를 싫어하는 다른 아랍 나라에서는 이 일로 이란과 시아파를 엄청 비난했다.
핫지는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규칙을 거쳐 메카에서 순례를 하는 것으로써, 정해진 기간 이외에 다른 기간에 방문한 것은 소순례로만 인정된다. 현재 성지 순례의 기착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인구 1,000명당 순례자 1명으로 각 나라당 순례자를 제한한다. 귀화인 포함 한국인 무슬림 15만 명이고, 그 중 순수 한국인 신자만 2만 명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잘못 보고된 덕택에, 한국에서 성지순례 가기는 굉장히 쉬운 편이다.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외국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성지순례를 갈 신도가 없어서 못 보내며, 덕분에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 국가 재외국민들은 하지를 몇 번이고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매년 갈 수 있는 한국이 좋은 나라라고 한다나.
단, 예외적으로 하지는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안 해도 된다고 한다. 모든 신자가 매년 메카로 순례를 올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 하려고 한다. 늦더라도 죽기 전에는 다들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매년 수많은 순례 인파가 메카에 몰린다. 때문에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렸던 때에는 개인 위생 문제 때문에 뉴스가 되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니 질병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하며 신경을 안 썼기 때문. 순례를 마치면 자기 이름 앞에 '하지'라는 호를 붙일 수 있고, 그 사람은 많은 존경을 받는다.
살라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무함마드가 천국에 있는 동안 신에게 한 가지 맹세를 했는데,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에 50번씩 기도를 드린다'라는 내용이었다. 뭔 깡으로 이런 맹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모세가 어이가 없었는지 "게으르고 건망증 심한 백성들이 그런 걸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태클을 걸어 다행히(?) 하루 50번 기도는 무산되었고, 무함마드는 신과의 협상을 통해 하루에 드리는 기도의 횟수를 지금과 같이 5번으로 줄였다.
메카의 방향과 거리를 나타내주는 iOS, 안드로이드 어플도 나와있다.
이슬람의 성원과 예배,
이슬람 성원은 아랍어로는 마스지드(مسجد)라고 하는데, 영단어 모스크(Mosque)로도 알려졌다. 보통은 성원 옆에 세면장이 있는데 예배 전에 '우두'라 불리는 세정의식을 하고 들어가게 한다. 이 의식의 목적은 노폐물, 분비물 등의 더러운거 묻은 손, 몸으로 예배드리지 말고 씻고 기도하라는 의미다. 이 우두는 얼굴ㆍ입 안ㆍ귀ㆍ콧속ㆍ머리, 그리고 팔다리를 흐르는 물로 씻으며 이뤄지는데 '아흐다쓰'라는 불결함의 상태가 될 때에는 무조건 하루 5번 기도 전에 해야 된다.
이슬람에서 예배 전에 세정의식을 해야 되는 더러움의 조건이란 방귀#, 소변, 개를 만졌을 때, 여자와의 의도적이고 사심 있는 접촉, 피 흘림, 잠이 들었을 경우 등이다. 성관계 등을 하거나 금요일 정기 예배에 갈 때는 구쓸이라고 불리는 샤워를 무조건 해야 된다. 아랍어 쿠란을 만지려면 위의 세정 의식을 해야 되고 생리 중인 여자는 맨손으로 쿠란을 만지는 것도 안 된다. 다치거나 물이 귀하든지 해서 씻기가 어렵다면 '따암뭄'이라고 해서 돌이나 모래로 씻는 시늉만 해도 되긴 한다. 그래서 모스크엔 돌이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며 교회에 예배를 드리거나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고,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이라 하여 아무 노동도 하지 않는다면, 이슬람에서는 금요일을 '주무아'라고 부르며 합동 예배를 시행한다. 이 예배는 금요일 오후 1시 즈음부터 이맘이 나와서 민바르라 불리는 나무 계단 위에 앉아서 교리나 일상생활 도덕과 관련한 훈화를 경청한 뒤 예배를 근행하게 된다. 그런게 없으면 그냥 의자에 앉아서 하기도 한다.
모스크에서의 기도와 분위기는 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같은 이슬람이라도 학파에 따라, 모스크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옆 사람과 줄을 맞추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고 기도를 할 때 앞에 사람이 지나가지 않도록 표를 세워두기도 한다. 기도에도 학파나 모스크에 따라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어 알제리계 위주의 모스크에서 익힌 합동 예배 기도법으로 터키인 위주의 모스크에 가면 약간의 차이에 당황 할 수도 있다.
쿠르드인들은 성원에 예배할 때 복잡한 절차, 예를 들어 필수는 아니지만 양말을 벗어야 하는 행위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성원에 앉아서 노가리를 까건 말건 상관 안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예배 행위를 방해하는 데 대해서는 꽤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남이 뭘 하건 상관 안 하는 분위기다. 당연하지만 사람사는 종교모임이 다 그렇듯 늘 보는 사람 보는 시골 모스크에선 유럽인도 아닌 동아시아인이 모스크에 들어오면 다들 누군가 싶어 슬쩍슬쩍 보면서 물어오며 대도시의 모스크에서는 물론 그런거 없다. 어쨌든 성원 내부를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방석 비슷한 융단과 비치된 쿠란, 기도 중 앞에 사람이 지나가지 못하게 세워두는 표 뿐이다. 자세한 것은 모스크 문서 참고.
그 외에도 하루에 5번 기도를 해야 하니 게으른 사람은 절대 못 할 종교 같지만, 아라비안 타임으로 약간은 봐준다. 만약 빠뜨릴 경우 바로 전에 예배를 합쳐서 더 예배를 보면 된다. 또한 금요일엔 여건이 된다면 반드시 합동 예배를 보아야 한다. 중요한 건 기도고, 이것만은 빼먹으면 안 된다. 굳이 사원이 아니라도 그냥 카펫 하나 가지고 다니다가 길바닥에서 메카를 향해 절만 하면 되니까 다른 종교에 비해 예배를 올리는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기도 시간 동안 관공서까지 전부 쉬다 보니 말이 많아서 약식으로 대체하는 곳도 많다. 항공기 내부에서는 안전을 위해 앉아서 하라고 권한다.
예배 방법은 먼저 얼굴과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이를 '우두'라고 하며, 사막의 경우 깨끗한 모래로 씻어도 인정해준다. 그 다음 쿠란의 제1장인 알 파티하(개경장)을 외우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무릎을 꿇고 절하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이 예배는 몇 분 만에 끝나는 게 보통이다. 기독교 식으로 1~2시간씩 끌지 않는다. 금요예배에서는 이맘, 호자, 아야톨라 같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가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나마도 그리 길진 않은 편이다.
이슬람에도 불교의 염주, 기독교의 묵주 같은 성물인 미스바하가 있다. 페르시아어로는 타스비흐 tasbih, 터키어로는 테스피흐 tespih라고 한다. 기도할 때나 경전 또는 경구를 암송할 때 주로 사용한다.
그 외에도 하루에 5번 기도를 해야 하니 게으른 사람은 절대 못 할 종교 같지만, 아라비안 타임으로 약간은 봐준다. 만약 빠뜨릴 경우 바로 전에 예배를 합쳐서 더 예배를 보면 된다. 또한 금요일엔 여건이 된다면 반드시 합동 예배를 보아야 한다. 중요한 건 기도고, 이것만은 빼먹으면 안 된다. 굳이 사원이 아니라도 그냥 카펫 하나 가지고 다니다가 길바닥에서 메카를 향해 절만 하면 되니까 다른 종교에 비해 예배를 올리는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기도 시간 동안 관공서까지 전부 쉬다 보니 말이 많아서 약식으로 대체하는 곳도 많다. 항공기 내부에서는 안전을 위해 앉아서 하라고 권한다.
예배 방법은 먼저 얼굴과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이를 '우두'라고 하며, 사막의 경우 깨끗한 모래로 씻어도 인정해준다. 그 다음 쿠란의 제1장인 알 파티하(개경장)을 외우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무릎을 꿇고 절하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이 예배는 몇 분 만에 끝나는 게 보통이다. 기독교 식으로 1~2시간씩 끌지 않는다. 금요예배에서는 이맘, 호자, 아야톨라 같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가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나마도 그리 길진 않은 편이다.
이슬람에도 불교의 염주, 기독교의 묵주 같은 성물인 미스바하가 있다. 페르시아어로는 타스비흐 tasbih, 터키어로는 테스피흐 tespih라고 한다. 기도할 때나 경전 또는 경구를 암송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이슬람의 사제,
원래 이슬람에서는 공식적으로 가톨릭에서와 같은 사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배가 있고 경전의 내용을 풀이해서 전해주는 역할은 필요하기에 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 사제에 대한 부분도 종파에 따라 다르다. 이슬람의 사제하면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직책 이름이 이맘인데, 이 이맘의 지위와 권한이 수니파이냐, 시아파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다. 일단, 수니파에서 이맘이라면 그저 예배를 진행하는 사람 정도로 보면 된다.
원칙적으로는 그냥 신자들 사이에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뽑아 시키지만 대개는 수니파의 율법학자(울라마)가 맡는다. 가끔 금요 정오 집단예배처럼 특별한 예배에선 전문 설교사(하티브)가 정치성이 가미된 설교(쿠트바)를 실시하는데, 이맘이 이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하자면 수니파의 이맘은 개신교의 목사와 비슷하다. 게다가 요즘엔 수니파 이맘을 한 모스크 당 한명씩 두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 더욱 비슷하다. 반면, 시아파에서의 이맘의 위상은 수니파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시아파의 이맘은 알리와 그의 후손들 만을 칭한다. 또한 호메이니도 이맘의 칭호를 받았긴 하지만, 교리적인 12이맘 안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호메이니가 이맘으로 칭해진 건 이란에서 그정도로 굉장한 존재로 삼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시아파 내의 가장 다수파인 '12이맘파'에서는 알리와 그의 후손 11명만을 이맘으로 칭한다. 시아파에서는 12대 이맘인 '무하마드 알 하산'이 872년에 4살의 나이로 속세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하며 그를 '숨은 이맘'이라고 부른다.
시아파에서는 이 최후의 이맘이 바로 마디(마흐디)이며 이 세상의 종말 때에 다시 나타나 이슬람을 이끌어 주리라 믿는다. 이맘은 이렇게 사실상 현존하지 않는, 엄청나게 고귀한 직책이다. 시아파에서 현존하는 사제 계급은 '호자톨 이슬람'이라는 직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호자톨 이슬람'은 율법학자로 수니파에서의 이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수니파와는 다르게 호자톨 이슬람 위에도 직책이 있는데, 바로 '무즈타히드', 다른 말로 아야톨라이다. 이 아야톨라에 오르면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대해 독자적인 유권해석을 할 수 있다. 이를 '이즈티하드'라고 하는데, 이는 수니파에선 금지된 행동이다. 이 아야톨라들 중 가방 높은 사람을 '대 아야톨라(Grand Ayatolla)' 혹은, '마르자 에 타클리드 무틀락'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르자 에 타클리드(대 야야톨라)는 가톨릭의 추기경, 대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처럼 정해진 규범절차에 따라 서품받는 형식으로 임명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 율법학자, 호자톨 이슬람으로 활동하다 점점 본인들의 영향력과 힘을 늘려나가고 그러다 시아파 신자들 대중에게 훌륭한 성직자로 인정받기 시작하면 마르자에 타끌리드로 되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때문에 시아파의 마르자 에 타클리드(대 아야톨라)들은 좀 시대에 따라 숫자가 들쭉날쭉한 편인데, 현대에는, 이란의 콤이나 이라크의 나자프 등 시아파의 주요 성지의 고위 율법학자들이 특정 율법학자를 마르자 에 타끌리드로 인정해주면 국가나 대중들도 인정을 하는 식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유명한 대 아야톨라는 이라크의 알리 알 시스타니, 이란의 루홀라 호메이니와 알리 하메네이 등이 있다.
교와 식품,
إِنَّمَا حَرَّمَ عَلَيْكُمُ الْمَيْتَةَ وَالدَّمَ وَلَحْمَ الْخِنزِيرِ وَمَا أُهِلَّ بِهِ لِغَيْرِ اللَّـهِ ۖ فَمَنِ اضْطُرَّ غَيْرَ بَاغٍ وَلَا عَادٍ فَلَا إِثْمَ عَلَيْهِ ۚ إِنَّ اللَّـهَ غَفُورٌ رَّحِيمٌ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말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도 먹지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늘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쿠란 알 바카라 Juz 2 (2:173)
금지된 음식은 '하람(haram)'음식이라고 하는데 이 '하람'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금지'란 뜻이다. 무슬림이 못 먹는 하람 식품으로는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개고기, 및 맹금류의 고기와 병사한 동물의 고기가 있으며, 심지어는 사냥한 고기도 화살이나 총알로 잡은 동물의 고기는 먹을 수 없고, 오직 개나 매, 치타를 이용한 동물이 잡아서 물어온 동물의 고기만 먹을 수 있다.
이 하람에 관한 율법이 유대교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데 쉽게 설명하자면,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것은 유대교와 같지만 유대교의 경우에는 장어나 미꾸라지 같이 비늘이 없는 물고기와 해초, 토끼고기와 낙타고기, 고기의 상체를 제외한 하체부분을 전부 못 먹는다. 참고로 이란의 주류인 시아파는 비늘이 없는 해산물 즉, 오징어, 문어 등도 먹지 않는다. 단, 새우 같은 갑각류는 먹을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해산물은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을 수 없으며(단 본인이 속한 마드하브나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것은 다르다. 자세한 것은 할랄 푸드 참조.) 채소와 농산물은 모두 허용. 고기는 상체만 먹고 하체는 못 먹는 식의 율법은 없다. 구분 영역이 생기는 부분은 오직 날짐승과 들짐승 고기로, 무슬림이 이슬람식으로 도축한 고기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 즉 돼지를 제외한 소, 닭, 양, 염소의 고기라도 이슬람 도축법에 의해 도축되지 않았을 경우 돼지고기랑 똑같이 금지사항이라는 것. 때문에 이슬람의 세력이 작게나마라도 있는 나라에는 거의 항상 할랄 푸드를 다루는 가게가 있다. 이태원 이슬람 성원 옆에도 할랄 육류 판매점이 있다. 그리고 유명한 이슬람 관련 음식금기로 '금주'가 있다. 사실상 세계 주요종교 중 가장 강력하게 음주를 철저히 금지하는 걸로 유명한데, 술과 관련하여 쿠란에서는 세 가지 계시가 나와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술과 도박에 대해서 물으면 다음과 같이 말하라. '이는 커다란 죄악으로서, 약간의 좋은 점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 해악은 그 이익보다도 훨씬 크다'라고 (쿠란 2:219)
그대 신앙인들이여.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는 예배드리지 마라. 적어도 스스로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쿠란 4:43에서 발췌)
그대 신앙인들이여. 취하게 만드는 것과 도박하는 것, 돌들(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 화살(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것), 그리고 맹목적인 증오는 사탄의 작품이다. 이러한 것들을 멀리한다면 너희는 번영하게 될 것이다. (쿠란 5:90)
생각보다는 간접적인 금지 문구를 담고 있다. 다만 몇몇 아랍 국가들에서는 포도주와 맥주를 계속 금하는 대신, 오래 전부터 마셔오던 대추야자술인 아락 같은 토속주라든지 양젖이나 염소와 낙타 젖을 발효시킨 술은 예외로 쳐주는 경우도 많다. 사막권 유목민들에게 술은 생명수 같은 존재나 다를 게 없어서 무작정 금지했다면 이슬람은 "아니? 이슬람 저것들이 술 못 마시게 하는데, 우리더러 죽으라고 할 놈들이다!"라며 아랍 지역에서 비난 속에 소수 종교로 사라졌을 것이다. 대추야자 말고도 온갖 동물 젖을 발효시킨 술은 물과 같은 유일한 마실 것이었기에, 이거 마시지 말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도 상당수 유목민들은 생필품이 부족한 사막에서 여전히 발효된 술을 물처럼 마시는데, 이거에 대해선 할랄 같은 인정을 하는 편이다.
와하비즘 같은 근본주의적 이슬람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비무슬림에게 술을 선물하는 행위도 금지다.
술은 어느 정도 풀어주는 나라도 있지만, 개와 돼지고기는 기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 먹는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같이 아주 널널하게 믿는 나라 사람들은 있으면 먹기도 하는데 이슬람권에서는 특이 케이스. 물론, 사막 한 가운데서 남은 음식이 돼지고기 밖에 없는 경우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안 먹고 굶어죽으면 또 다른 이슬람의 금기, 자살이므로 먹어도 된다는 이슬람계의 공식적인 율법 해석이 있다. 단 나중에 회개 기도를 올릴 것. 이 때문에 식재료에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요리들은 이슬람 사람들에게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혹시 친구나 지인등이 무슬림일 경우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꼭 사전에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대한민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슬람은 돼지 못지않게 개도 혐오하는 종교로 유명하다. 이유는 개를 극도로 싫어했던 무함마드의 개인취향과 개는 더러운 동물이라는 가르침 때문. 개고기 역시도 돼지고기처럼 하람(금지)이며, 개의 침은 일곱 번 닦아내야 깨끗해진다고 교리로 정할 정도로 혐오한다. 말레이시아 등지의 사례처럼 개를 만지거나 기르는 것 자체에 제재를 가하려는 국가도 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개를 매우 기피하는 편. 물론 사람에 따라 케바케로 집 밖 등지에서 개를 기르는 무슬림들도 있기는 하다. 개고기 역시 이슬람권 지역들의 경우 먹는 이력도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경우 일부 오지 부족들이 즐겨먹기도 하며, 1990년대 초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슬람 보스니아인과 정교회 세르비아인과의 내전으로 먹을 게 고갈되자 전시 상황에서 개, 여우 등 개과 동물을 잡아먹는 보스니아인들도 있었고, 시리아도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직후 개고기를 정부에서 전시 비상 식품으로 허용해주기도 했다.
한국이나 일본, 미국, 유럽 등 비이슬람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서 사는 무슬림 외국인들과 현지의 무슬림 개종자 대부분은 돼지고기나 술 등 하람 음식을 먹는다. 안 먹으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지인, 형제들과 생활하고 부대끼는 데 무리가 있기도 하거니와, "구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잖아!!!"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물론 일부 무슬림 사람들은 돼지고기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서방 등 비이슬람 문화권 국가들에 와서도 쇠고기나 닭고기, 생선 등만을 먹거나 육식을 못 하고 과일이나 채소 등 채식을 하기도 하니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특히 개방적인 터키나 북아프리카 튀니지, 모로코, 이집트, 동유럽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의 무슬림들은 거리낌 없이 술과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다. 그 밖에도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지역에서도 가끔 약용이라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는 일도 드물게나마 있다는 등 반드시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술에 대해서는 그 엄격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들도 할 말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우디 사람들도 모로코나 바레인, 요르단 같이 술 판매가 허용되는 다른 이슬람권 나라들로 가서 술 마시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바레인
술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랍 반도 근방의 술 조제 기술은 상당히 쇠퇴해 버렸다. 그러나 의료용 알콜을 얻기 위해 술을 증류하는 기법은 발달했으며, 이 증류기술이 서구로 전파되어 브랜디, 위스키, 보드카 같은 증류주가 등장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술 문제 때문에 커피를 무지하게 마셨다고 한다.
캐나다 등 비이슬람권 국가에 온 젊은 무슬림 유학생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사례도 있다. 유학 오기 전까지는 돼지고기 맛을 몰랐을 텐데 어찌 맛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중국인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돼지고기 맛있는 줄 알게 되었다"나. 또한 널리 알려진 것 중 '단식' 문화인 '라마단'도 있다. 이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9월을 의미하는데, 이날 금식을 하는 이유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 달이기 때문이다. 단식해야 하는 시간은 이른 새벽부터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의 약 12시간 정도. 이 시간 동안에는 음식이나 음료수 등을 일체 섭취하지 말아야 하고, 성행위도 금지되고 흡연도 피해야 한다. 하지만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면 정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먹는다. 이것을 이프타르라고 부르는데, 비무슬림도 이 때는 꽤 배불리 얻어먹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기간 동안은 다들 살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찐다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 터키에 놀러가면 야시장이 굉장히 볼 만하다고 한다. 하지만 좀 빡빡한 중동권 국가들은 라마단 기간에 여행온 신혼부부에게 '사람들 눈에 띄니까 식사하려면 화장실에서 하라'고 한다나. 물론 이것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저런 나라에서도 좀 봐주는 이도 있다. 라마단 기간 중 이집트를 여행하던 어느 여행자는 이집트인 친구가 낮에 거침없이 밥먹는 걸 보기도 했다고 한다. 국가와 지방마다 케바케다. 터키와 이집트 대도시들은 세석적이기도 하거니와 관광객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부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고 싶다면 안에 들어가서 먹는 것이 좋다. 라마단 기간에 터키 투어를 돌면 관광지를 제외하곤 시골로 들어갈수록 해가 떠있는 중, 보는 눈이 있는 자리에서 간식, 담배, 심지어는 물(!)의 섭취를 자재하라는 말을 귀따갑게 들을것이다.
2015. 9월의 유럽 난민 사태 때 헝가리를 지나는 시리아 난민들에게 준 식량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다고 버리고 간 사진이 공개되어, 비이슬람권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이 일었다. 이슬람 계율의 엄격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굶어죽지 말라고 음식 보내줬으면 아무거나 쳐먹을 일이지 저렇게 뻗대고 거부하다니 배은망덕하다"라는 취지로 분개한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돕고자 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보고 그에 맞춰서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옹호도 있었지만 오히려 분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우리한테 맞춰줄 필요도 없다는 거냐?"고 더 폭풍까임을 받았다.
와하비즘 같은 근본주의적 이슬람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비무슬림에게 술을 선물하는 행위도 금지다.
술은 어느 정도 풀어주는 나라도 있지만, 개와 돼지고기는 기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 먹는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같이 아주 널널하게 믿는 나라 사람들은 있으면 먹기도 하는데 이슬람권에서는 특이 케이스. 물론, 사막 한 가운데서 남은 음식이 돼지고기 밖에 없는 경우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안 먹고 굶어죽으면 또 다른 이슬람의 금기, 자살이므로 먹어도 된다는 이슬람계의 공식적인 율법 해석이 있다. 단 나중에 회개 기도를 올릴 것. 이 때문에 식재료에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요리들은 이슬람 사람들에게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혹시 친구나 지인등이 무슬림일 경우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꼭 사전에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대한민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슬람은 돼지 못지않게 개도 혐오하는 종교로 유명하다. 이유는 개를 극도로 싫어했던 무함마드의 개인취향과 개는 더러운 동물이라는 가르침 때문. 개고기 역시도 돼지고기처럼 하람(금지)이며, 개의 침은 일곱 번 닦아내야 깨끗해진다고 교리로 정할 정도로 혐오한다. 말레이시아 등지의 사례처럼 개를 만지거나 기르는 것 자체에 제재를 가하려는 국가도 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개를 매우 기피하는 편. 물론 사람에 따라 케바케로 집 밖 등지에서 개를 기르는 무슬림들도 있기는 하다. 개고기 역시 이슬람권 지역들의 경우 먹는 이력도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경우 일부 오지 부족들이 즐겨먹기도 하며, 1990년대 초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슬람 보스니아인과 정교회 세르비아인과의 내전으로 먹을 게 고갈되자 전시 상황에서 개, 여우 등 개과 동물을 잡아먹는 보스니아인들도 있었고, 시리아도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직후 개고기를 정부에서 전시 비상 식품으로 허용해주기도 했다.
한국이나 일본, 미국, 유럽 등 비이슬람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서 사는 무슬림 외국인들과 현지의 무슬림 개종자 대부분은 돼지고기나 술 등 하람 음식을 먹는다. 안 먹으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지인, 형제들과 생활하고 부대끼는 데 무리가 있기도 하거니와, "구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잖아!!!"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물론 일부 무슬림 사람들은 돼지고기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서방 등 비이슬람 문화권 국가들에 와서도 쇠고기나 닭고기, 생선 등만을 먹거나 육식을 못 하고 과일이나 채소 등 채식을 하기도 하니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특히 개방적인 터키나 북아프리카 튀니지, 모로코, 이집트, 동유럽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의 무슬림들은 거리낌 없이 술과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다. 그 밖에도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지역에서도 가끔 약용이라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는 일도 드물게나마 있다는 등 반드시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술에 대해서는 그 엄격하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들도 할 말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우디 사람들도 모로코나 바레인, 요르단 같이 술 판매가 허용되는 다른 이슬람권 나라들로 가서 술 마시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바레인
술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랍 반도 근방의 술 조제 기술은 상당히 쇠퇴해 버렸다. 그러나 의료용 알콜을 얻기 위해 술을 증류하는 기법은 발달했으며, 이 증류기술이 서구로 전파되어 브랜디, 위스키, 보드카 같은 증류주가 등장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술 문제 때문에 커피를 무지하게 마셨다고 한다.
캐나다 등 비이슬람권 국가에 온 젊은 무슬림 유학생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사례도 있다. 유학 오기 전까지는 돼지고기 맛을 몰랐을 텐데 어찌 맛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중국인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돼지고기 맛있는 줄 알게 되었다"나. 또한 널리 알려진 것 중 '단식' 문화인 '라마단'도 있다. 이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9월을 의미하는데, 이날 금식을 하는 이유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 달이기 때문이다. 단식해야 하는 시간은 이른 새벽부터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의 약 12시간 정도. 이 시간 동안에는 음식이나 음료수 등을 일체 섭취하지 말아야 하고, 성행위도 금지되고 흡연도 피해야 한다. 하지만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면 정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먹는다. 이것을 이프타르라고 부르는데, 비무슬림도 이 때는 꽤 배불리 얻어먹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기간 동안은 다들 살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찐다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 터키에 놀러가면 야시장이 굉장히 볼 만하다고 한다. 하지만 좀 빡빡한 중동권 국가들은 라마단 기간에 여행온 신혼부부에게 '사람들 눈에 띄니까 식사하려면 화장실에서 하라'고 한다나. 물론 이것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저런 나라에서도 좀 봐주는 이도 있다. 라마단 기간 중 이집트를 여행하던 어느 여행자는 이집트인 친구가 낮에 거침없이 밥먹는 걸 보기도 했다고 한다. 국가와 지방마다 케바케다. 터키와 이집트 대도시들은 세석적이기도 하거니와 관광객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부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고 싶다면 안에 들어가서 먹는 것이 좋다. 라마단 기간에 터키 투어를 돌면 관광지를 제외하곤 시골로 들어갈수록 해가 떠있는 중, 보는 눈이 있는 자리에서 간식, 담배, 심지어는 물(!)의 섭취를 자재하라는 말을 귀따갑게 들을것이다.
2015. 9월의 유럽 난민 사태 때 헝가리를 지나는 시리아 난민들에게 준 식량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다고 버리고 간 사진이 공개되어, 비이슬람권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이 일었다. 이슬람 계율의 엄격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굶어죽지 말라고 음식 보내줬으면 아무거나 쳐먹을 일이지 저렇게 뻗대고 거부하다니 배은망덕하다"라는 취지로 분개한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돕고자 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보고 그에 맞춰서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옹호도 있었지만 오히려 분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우리한테 맞춰줄 필요도 없다는 거냐?"고 더 폭풍까임을 받았다.
이슬람 율법에서도 정말 급할 때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다 살려고 도망쳐온 사람들이 저 따위로 행동하고 있으니 비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이는 난민 수용 반대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외부인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인이 그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정작 자기들은 존중받기만 원하고 존중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애초에 난민들이 온 곳은 이슬람 문화권도 아니고, 난민들은 이슬람 문화권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니 난민들이 맞춰주는 것이 상식적이다. 게다가 경제력도 그렇게 높지 않은 동유럽 지역이라 지원도 별로 좋진 않은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슬람에서의 성관념,
남녀 할것 없이 매우 보수적이며, 동시에 기독교나 힌두교 문화권과 달리 남성만이 4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이슬람에서 여성만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쿠란은 남성도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야동이나 자위행위 같은 행위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원체 현 중동 분쟁 지역에 지하드 알 니카와 같은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성범죄가 만연해서 무슬림 남성은 비무슬림 여성과는 프리섹스를 즐겨도 문제가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간음으로 간주된다. 각종 율법 소개 사이트 등에서는 비이슬람 여성이 머리카락이나 신체 일부를 내보였다면 그것을 보아도 상관은 없으나 속으로 음탕한 생각을 하거나 옷으로 가리고자 했던 부분을 보고자 하는 행위는 죄악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원리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상당수는 고등교육은커녕 중등교육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해 율법에 대한 이해도가 그다지 높지 못하다. 무아트 알 카사스베 중위 분살 같은 짓을 저질렀는데 ISIL이 저질렀다고 해서 이걸 이슬람 율법을 따랐다고 볼 수 없듯, 왜곡된 성관념과 욕구불만에 싸인 몇몇 무슬림 남성들이 성범죄와 삐끼짓을 한다고 해서 샤리아 자체가 무슬림 남성의 비무슬림 여성과의 성관계를 눈감아주는 것은 아니다.
터키에 거주하고 있고, 터키에서 문화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이맘이나 모스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에 대해 문의했으나 적어도 터키의 이슬람 주류 해석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라도 혼전 관계나 결혼 후 (이미 배우자가 있는 가운데) 비무슬림과의 연애조차도 간통(Zina)으로 간주되며, 터키 공화국 형법으로는 간통죄 조항이 없으므로 세속적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나, 이슬람적 관점에서는 간통자로 여겨지며, 이슬람에서 벗어난 자(즉 불신자)로 간주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터키는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종교국가가 아닌 세속국가이므로 이슬람차원에서 이들을 비난만 할 뿐, 처벌할 방법도 딱히 없기는 하다. 그러나 중혼이나 조혼은 터키 공화국 헌법으로 분명히 금지하고 있으며 상당히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초창기 이슬람, 즉 9~14세기의 이슬람 세계만 해도 동성애에 관해서 타 문화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였다. 샤리아법에 동성애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는 못하지만, 동성애를 해도 거의 처벌을 받지 않고 쉬쉬하는 분위기였으며 상류층의 경우에는 동성 애인을 갖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18~19세기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함께 배척받고 처벌받기 시작했다. 현재 들어와서는 자유주의의 확대로 비교적 처벌이 느슨해져 요르단, 터키 등 몇몇 세속 국가에서는 처벌을 하지 않지만 아직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심각한 사회적 터부 내지는 중범죄로 감옥행이고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주의 국가에서는 채찍형에 처한다. 간통까지 했을 경우에는 사형이다. 이란에서는 국가 주도로 투석형까지 시행했을 정도.
이슬람에서 여성만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쿠란은 남성도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야동이나 자위행위 같은 행위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원체 현 중동 분쟁 지역에 지하드 알 니카와 같은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성범죄가 만연해서 무슬림 남성은 비무슬림 여성과는 프리섹스를 즐겨도 문제가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간음으로 간주된다. 각종 율법 소개 사이트 등에서는 비이슬람 여성이 머리카락이나 신체 일부를 내보였다면 그것을 보아도 상관은 없으나 속으로 음탕한 생각을 하거나 옷으로 가리고자 했던 부분을 보고자 하는 행위는 죄악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원리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상당수는 고등교육은커녕 중등교육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해 율법에 대한 이해도가 그다지 높지 못하다. 무아트 알 카사스베 중위 분살 같은 짓을 저질렀는데 ISIL이 저질렀다고 해서 이걸 이슬람 율법을 따랐다고 볼 수 없듯, 왜곡된 성관념과 욕구불만에 싸인 몇몇 무슬림 남성들이 성범죄와 삐끼짓을 한다고 해서 샤리아 자체가 무슬림 남성의 비무슬림 여성과의 성관계를 눈감아주는 것은 아니다.
터키에 거주하고 있고, 터키에서 문화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이맘이나 모스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에 대해 문의했으나 적어도 터키의 이슬람 주류 해석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라도 혼전 관계나 결혼 후 (이미 배우자가 있는 가운데) 비무슬림과의 연애조차도 간통(Zina)으로 간주되며, 터키 공화국 형법으로는 간통죄 조항이 없으므로 세속적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나, 이슬람적 관점에서는 간통자로 여겨지며, 이슬람에서 벗어난 자(즉 불신자)로 간주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터키는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종교국가가 아닌 세속국가이므로 이슬람차원에서 이들을 비난만 할 뿐, 처벌할 방법도 딱히 없기는 하다. 그러나 중혼이나 조혼은 터키 공화국 헌법으로 분명히 금지하고 있으며 상당히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초창기 이슬람, 즉 9~14세기의 이슬람 세계만 해도 동성애에 관해서 타 문화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였다. 샤리아법에 동성애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는 못하지만, 동성애를 해도 거의 처벌을 받지 않고 쉬쉬하는 분위기였으며 상류층의 경우에는 동성 애인을 갖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18~19세기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함께 배척받고 처벌받기 시작했다. 현재 들어와서는 자유주의의 확대로 비교적 처벌이 느슨해져 요르단, 터키 등 몇몇 세속 국가에서는 처벌을 하지 않지만 아직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심각한 사회적 터부 내지는 중범죄로 감옥행이고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주의 국가에서는 채찍형에 처한다. 간통까지 했을 경우에는 사형이다. 이란에서는 국가 주도로 투석형까지 시행했을 정도.
이슬람의 여성 인권,
아래의 글을 읽기 전에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에서 타 종교 지역에 비해 여성에 대한 차별이 크게 심각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교에서는 오히려 여성 인권이 지금보다도 많이 존중되는 편이었고, 현재 이슬람교의 문제를 통해 이슬람 전체에 대한 혐오성 인식으로 이어지면 안된다. 일반적인 예만 들어도 무함마드는 남녀가 함께 자신의 교리를 들을 수 있게 하였고, 남녀 간의 동등한 교육을 주장하였으며, 꾸란 4:32에는 남녀에게 동일한 경제적 권리를 줄 것을 명시해 놓았다. 하지만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들도 분명 이슬람교의 커다란 문제점이고, 고쳐야 나가야 할 점이기에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어느정도는 참작하여 읽기를 바란다.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써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적으로 남성을 따를 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 파하드 국왕 쿠란 출판청에서 쓴 '성 쿠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4장 34절. 마침표는 원문에도 없음.
이슬람은 그 당시의 아랍권 민족의 문화 혹은 관습(사실은 인습)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존중했던 편이었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도 여전히 그 시대에 머물면서 21세기가 된 현재는 다른 종교보다도 더 여성을 혹독하게 차별한다는 논란을 받고 있다.
꾸란 4:3 만일 너희들이 고아에게 공정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면 누군가 마음에 드는 두 명, 세 명,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해도 좋다. 만일 공평하지 못한 생각이 들게 된다면 한 명으로 하든가 너의 오른손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하라. 그러는 것이 불공평하게 될 염려가 없다.
꾸란 4:43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아프거나 여행 중일 때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여성을 만졌을 때 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깨끗한 흙위에 따이얌뭄(이슬람식 세정의식)을 하고 너희 얼굴과 양손을 문질러 깨끗이 하라.
이를 토대로 현실에서 적용되는 샤리아 율법에서도 아내에 대한 체벌을 포함한 성차별 논란이 되는 규율들을 규정하기도 한다. 일단 이론적으로는 위의 조항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성에 비해 우월한 육체적 조건을 이용하여 여성을 부양하는 반대급부로서의 권리 보장이며, 여성이 남성에 헌신하는 것도 이러한 남성의 역할에 대한 보답 형태라고 경전에 규정되어 있긴 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중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듯한 대목까지 있어 타 종교로부터의 비난 대상이 됨은 물론 무슬림끼리도 견해가 갈리는 등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내를 때릴 때에도 에티켓이 있을정도이다,
경전상에 이와 같은 차별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오히려 아라비아 반도 지역의 여성 인권을 크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이슬람 교리 이전부터 중동지방의 민족 전통이었다. 이슬람 이전에는 여성은 남성 소유의 물건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남성은 재력이 허용하는 한 아내를 원하는 만큼 거느릴 수 있었다. 이를 무함마드가 "너희는 그 많은 아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다"라며 4명까지로 제한하자 아라비아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은 불만을 가지고 이슬람에 반대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 밖에도 쿠란 4장의 니싸아에서 결혼시 지참금 지급, 재산상속, 분명한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학대 금지, 아내 편애 금지,
경전상에 이와 같은 차별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오히려 아라비아 반도 지역의 여성 인권을 크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이슬람 교리 이전부터 중동지방의 민족 전통이었다. 이슬람 이전에는 여성은 남성 소유의 물건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남성은 재력이 허용하는 한 아내를 원하는 만큼 거느릴 수 있었다. 이를 무함마드가 "너희는 그 많은 아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다"라며 4명까지로 제한하자 아라비아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은 불만을 가지고 이슬람에 반대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 밖에도 쿠란 4장의 니싸아에서 결혼시 지참금 지급, 재산상속, 분명한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학대 금지, 아내 편애 금지,
여성을 간음죄로 고발 시 4명의 증인 필요 등 여러 구절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보장하였고,[87] 심지어 이를 지키지 못할 거면 결혼을 하지 말라고까지 못박아뒀다. 히잡, 니캅, 부르카 등 현대에는 반대 여론이 심각한 여성 옷차림도 당시 기준으론 무슬리마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러나 보호의 순기능이 불필요한 현대사회에까지도 수구적으로 계속되는 강요로 여성들을 옥죄는 탄압의 굴레라는 평가가 많다.
7차 십자군 전쟁 때 이집트에서는 여성 술탄 샤쟈르 알 두르(Shajar al-Durr)가 즉위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청산하고 맘루크 시대를 열기도 했었다. 샤쟈르 알 두르의 재위기간은 80일로 극히 짧았는데 이는 7차 십자군 전쟁중 남편이던 원 술탄이 병사하자 병사의 사기를 고려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대리 정치를 행한 것.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녀를 기준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끝나고 맘루크 시대가 열렸으며 학자에 따라선 그녀가 맘루크 시대의 첫 번째 술탄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술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현대로 나아가며 과학과 학문이 발전할수록 인간들은 이성과 두뇌를 활용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현대에 비교하여 당시에는 전사, 즉 남성의 몸을 가진 이들만이 약육강식의 강자였다. 그러나 현대로 오며 육체적인 폭력이 제한됨과 동시에 사람들은 육체의 힘이 아닌 두뇌의 힘을 활용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여성의 인권의 부분이 크게 성장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옛날 옛적, 전사들의 전쟁이 숱하던 당시 육체가 남성에 비해 약한 여성들은 부속품이나 동물 취급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 것들은 그 당시 여성의 인권을 한 단계나마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다고 봐야 한다.
7차 십자군 전쟁 때 이집트에서는 여성 술탄 샤쟈르 알 두르(Shajar al-Durr)가 즉위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청산하고 맘루크 시대를 열기도 했었다. 샤쟈르 알 두르의 재위기간은 80일로 극히 짧았는데 이는 7차 십자군 전쟁중 남편이던 원 술탄이 병사하자 병사의 사기를 고려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대리 정치를 행한 것.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녀를 기준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끝나고 맘루크 시대가 열렸으며 학자에 따라선 그녀가 맘루크 시대의 첫 번째 술탄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술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현대로 나아가며 과학과 학문이 발전할수록 인간들은 이성과 두뇌를 활용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현대에 비교하여 당시에는 전사, 즉 남성의 몸을 가진 이들만이 약육강식의 강자였다. 그러나 현대로 오며 육체적인 폭력이 제한됨과 동시에 사람들은 육체의 힘이 아닌 두뇌의 힘을 활용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여성의 인권의 부분이 크게 성장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옛날 옛적, 전사들의 전쟁이 숱하던 당시 육체가 남성에 비해 약한 여성들은 부속품이나 동물 취급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 것들은 그 당시 여성의 인권을 한 단계나마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다고 봐야 한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뛰는 것은 비교적 타협이 가능하지만, 1단계에서 갑자기 4단계로 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문명권이 여성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거나 최소한 개선하려는 시늉이라도 내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했던 때에 정작 이슬람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대표되는 수구사상에 빠져들어 개혁과 인권상승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다는 것이다.
여성 인권 문제가 제대로 해동되기 시작한 현대에 와서는 이슬람의 교리가 오히려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다고 비판 받고 있다. 이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한 제도들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한 채 남성 이슬람 학자들이 "경전에 명시된 것이 여성에 대한 권리의 전부"라고 주장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에 혁신적이었던 여성 보호 조치들의 시대와 동떨어지게 된 요소들을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함에 따라 오히려 여성차별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특히 샤리아 정교일치 체제인 이슬람 국가에서는 국법 자체에 이러한 여성차별적 논란이 되는 요소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슬람 외부에서 볼 때는 여성 인권에 대해 큰 비판과 우려를 가지고 있다. 사실 근본주의가 대세인 이슬람 주류 대중에게 씨알도 안 먹혀서 그렇치 여성의 권리부분을 재해석하는 학파들이나 학자들도 존재는 하며, 이슬람 페미니즘도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정치와 주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종종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문제가 되고 있다. 명예살인의 경우 2010년 명예살인의 세계적 추세 연구에 따르면 현재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고 국가별로 제대로 집계도 되지 않아 신뢰할 수 있는 추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전까지(2000년도 UN 추산) 1년에 무려 약 5천 명의 무슬리마들이 이슬람과 가부장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전 세계 명예살인의 90%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여성 인권 문제가 제대로 해동되기 시작한 현대에 와서는 이슬람의 교리가 오히려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다고 비판 받고 있다. 이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한 제도들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한 채 남성 이슬람 학자들이 "경전에 명시된 것이 여성에 대한 권리의 전부"라고 주장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에 혁신적이었던 여성 보호 조치들의 시대와 동떨어지게 된 요소들을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함에 따라 오히려 여성차별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특히 샤리아 정교일치 체제인 이슬람 국가에서는 국법 자체에 이러한 여성차별적 논란이 되는 요소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슬람 외부에서 볼 때는 여성 인권에 대해 큰 비판과 우려를 가지고 있다. 사실 근본주의가 대세인 이슬람 주류 대중에게 씨알도 안 먹혀서 그렇치 여성의 권리부분을 재해석하는 학파들이나 학자들도 존재는 하며, 이슬람 페미니즘도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정치와 주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종종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문제가 되고 있다. 명예살인의 경우 2010년 명예살인의 세계적 추세 연구에 따르면 현재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고 국가별로 제대로 집계도 되지 않아 신뢰할 수 있는 추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전까지(2000년도 UN 추산) 1년에 무려 약 5천 명의 무슬리마들이 이슬람과 가부장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전 세계 명예살인의 90%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 성폭행 당한 여성은 자살하는 불문율 이슬람의 잔다르크 (문화)
- 자살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족이 살해하는 명예살인 '명예살인' 유린되는 이슬람 딸들 (경향) 및 이를 옹호하는 정부 체첸 이슬람 정부의 명예살인 옹호 (워싱턴 타임즈 원본) 체첸 이슬람 정부의 명예살인 옹호 (워싱턴 타임즈 번역)
- 선진국으로 이민한 무슬림이 그 나라 법률을 무시하고 명예살인 아프간 이민 가족 세 딸 '명예살인'
애초에 인권이 뭐고, 민주주의가 뭐고, 평등이 뭐고, 생명 존중 사상이 뭔지를 알면 악습이 줄어들겠지만 이런 상식적, 인권적인 관점조차 서구 세력의 반이슬람 사상으로 여기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슬림이 많기 때문에 현실은 안습 그 자체다. 오히려 서구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적은 탓에 민주주의 도입이 오히려 차별을 더 낳는 결과까지 보여주고 있다. 당장 무슬림 여성들조차 쿠란은 남성의 길과 여성의 길을 딱딱 나눠서 가르치고 있으니 쿠란의 가르침대로만 살아야 하며 서구 문화에 물든 남녀평등운동이나 페미니스트들의 선동에 놀아나지 말라고 주장하는 답이 없는 상황이 계속 심해지고 있다.
세속적인 국가에서 비무슬림 가정에서 자라다가 정상적인 신앙 활동을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의 경우 어릴 때 국가에서 받은 세속주의적 교육에 의해 자기 스스로 교리와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여 개방적인 인식을 보인다. 한 한국인 무슬림 개종자의 증언에 의하면 전근대적인 이슬람권에서 자란 무슬림보다는 비무슬림인 한국인과 사상적으로 훨씬 더 동질성을 느낀다고 한다. 뭐 같이 종교 민족이 달라도 같은 나라에 살면서 부대끼는 만큼 당연한 일이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갤럽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샤리아를 실정법으로 반영해야 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찬반 비율이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남녀간의 차이는 크지 않아, 무슬리마는 샤리아로 인해 특별히 차별을 받고 있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갤럽은 이를 통해 무슬림의 여성 인권에 대한 태도는 생활 수준이나 취업률 등 경제적, 사회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청할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지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여성 인권에 대한 견해에 종교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응답한 쪽은 찬반 의견이 5:5였으나 종교가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한 쪽은 7:3으로 나와, 대다수 무슬림들은 이슬람 교리에 따른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이 보다 여성 인권을 보장한다고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문조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종교가 가치판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의 가치관과 종교 사이의 갈등을 겪지 않은 사람(즉 응답자인 이슬람권 상당수 여성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이슬람 및 남존여비적인 문화에 젖어있어 자기들이 명백히 이슬람 교리에 따라 불합리한 처우를 받고 있음에도 이슬람이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2015년 3월 발표된 여성 인권에 대한 UN 보고서에서도 이슬람 국가와 비이슬람 국가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례들을 나열하며 극단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두가 여성 인권의 장애라고 명시하였고, 이를 인용한 많은 기사가 "이슬람이 아닌"이라는 설명을 제목에 달았다. 여성 인권 침해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러한 침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마련하는데, 그 핑계가 어디에서는 게임이나 동영상이고 이슬람권에서는 쿠란이라는 차이일 뿐이다. 결국 문제는 이슬람 자체가 만악의 근원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남성 우월주위에 기반한 악습에 따라 극단적인 행동을 벌인 뒤 종교를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하는 쓰레기 같은 무슬림 남성들과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힌두교 신자가 80% 이상인 인도에서도 명예살인의 양상은 이슬람권에서의 그것보다 덜 악랄하고 드물지 않다. 반대로 이슬람 국가인 튀니지나 우즈베키스탄은 명예살인의 오명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이 비교적 잘 정착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무슬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역시 별 관련이 없는 데 반해 비교적 세속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터키, 모로코, 요르단에서는 명예살인 뉴스가 간간이 들린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이슬람 이전부터 중동 일대에 존재하던 악습이 현재도 행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란만 하더라도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지금보다 여권이 보장된 팔라비 왕조 때에도 여전히 명예살인은 있었다.
이슬람 학자나 지도자들은 명예살인은 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Khamenei)는 명예살인은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되며, 만일 간음과 같은 죄를 저지르더라도 관대한 처벌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집트 아즈하르 대학교 신학자 셰이크 아티야 사끄르(Sheikh Atiyyah Saqr)는 "이른바 명예 살인이라고 불리는 행태는 도덕과 법을 무시한 무지의 소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행은 일벌백계로 다스리지 않으면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질책의 목소리를 높였다. (출처) 하메네이가 저 말을 한 게 06년 이전인데 그때는 이란에 투석형이 남아있던 시절이다.
명예살인이 가장 빈번한 파키스탄에서 최근에 처벌 강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이 명예살인을 뿌리뽑는 단초가 될지, 여성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 개선이 없는 채로 진행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할지는 지켜봐야 할 일.
결론적으로, 21세기 현재 많은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사실이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서 여성들이 큰 활약을 하면서 이들의 발언권이 어느 정도 커졌고 덕분에 여권 신장이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 혼란을 틈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뿌리를 내리는 지역이 많아지는 데다가, 진작에 깊게 뿌리 내린 견고한 남존여비, 이슬람 근본주의의 벽은 쉽게 깨지지 않고 있어 한숨을 내쉬게 한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갤럽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샤리아를 실정법으로 반영해야 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찬반 비율이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남녀간의 차이는 크지 않아, 무슬리마는 샤리아로 인해 특별히 차별을 받고 있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갤럽은 이를 통해 무슬림의 여성 인권에 대한 태도는 생활 수준이나 취업률 등 경제적, 사회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청할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지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여성 인권에 대한 견해에 종교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응답한 쪽은 찬반 의견이 5:5였으나 종교가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한 쪽은 7:3으로 나와, 대다수 무슬림들은 이슬람 교리에 따른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이 보다 여성 인권을 보장한다고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문조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종교가 가치판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의 가치관과 종교 사이의 갈등을 겪지 않은 사람(즉 응답자인 이슬람권 상당수 여성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이슬람 및 남존여비적인 문화에 젖어있어 자기들이 명백히 이슬람 교리에 따라 불합리한 처우를 받고 있음에도 이슬람이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2015년 3월 발표된 여성 인권에 대한 UN 보고서에서도 이슬람 국가와 비이슬람 국가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례들을 나열하며 극단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두가 여성 인권의 장애라고 명시하였고, 이를 인용한 많은 기사가 "이슬람이 아닌"이라는 설명을 제목에 달았다. 여성 인권 침해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러한 침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마련하는데, 그 핑계가 어디에서는 게임이나 동영상이고 이슬람권에서는 쿠란이라는 차이일 뿐이다. 결국 문제는 이슬람 자체가 만악의 근원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남성 우월주위에 기반한 악습에 따라 극단적인 행동을 벌인 뒤 종교를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하는 쓰레기 같은 무슬림 남성들과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힌두교 신자가 80% 이상인 인도에서도 명예살인의 양상은 이슬람권에서의 그것보다 덜 악랄하고 드물지 않다. 반대로 이슬람 국가인 튀니지나 우즈베키스탄은 명예살인의 오명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이 비교적 잘 정착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무슬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역시 별 관련이 없는 데 반해 비교적 세속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터키, 모로코, 요르단에서는 명예살인 뉴스가 간간이 들린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이슬람 이전부터 중동 일대에 존재하던 악습이 현재도 행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란만 하더라도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지금보다 여권이 보장된 팔라비 왕조 때에도 여전히 명예살인은 있었다.
이슬람 학자나 지도자들은 명예살인은 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Khamenei)는 명예살인은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되며, 만일 간음과 같은 죄를 저지르더라도 관대한 처벌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집트 아즈하르 대학교 신학자 셰이크 아티야 사끄르(Sheikh Atiyyah Saqr)는 "이른바 명예 살인이라고 불리는 행태는 도덕과 법을 무시한 무지의 소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행은 일벌백계로 다스리지 않으면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질책의 목소리를 높였다. (출처) 하메네이가 저 말을 한 게 06년 이전인데 그때는 이란에 투석형이 남아있던 시절이다.
명예살인이 가장 빈번한 파키스탄에서 최근에 처벌 강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이 명예살인을 뿌리뽑는 단초가 될지, 여성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 개선이 없는 채로 진행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할지는 지켜봐야 할 일.
결론적으로, 21세기 현재 많은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사실이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서 여성들이 큰 활약을 하면서 이들의 발언권이 어느 정도 커졌고 덕분에 여권 신장이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 혼란을 틈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뿌리를 내리는 지역이 많아지는 데다가, 진작에 깊게 뿌리 내린 견고한 남존여비, 이슬람 근본주의의 벽은 쉽게 깨지지 않고 있어 한숨을 내쉬게 한다.
여성 인권을 강조하는 이슬람 일파 및 조직, 비록 주류 이슬람에서 이단 취급당하는 소수이지만, 이슬람권에서도 여성 인권을 강조하며 여성에 대한 교육과 권리 향상 등을 주장하거나 정책적으로 시행한 지도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지휘관이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 튀니지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 전 알제리 대통령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 전 오만 국왕인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등이 있다.
대체로 석유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을수록 여성의 위상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자원의 이득 없이도 국가경제를 꾸려나가야 하므로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도 늘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민속,
사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이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 공동체의 문화는 결코 단 하나의 동일체가 아니다. 많은 무슬림들이 무함마드 시절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이상향으로 여기고,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기는건 사실이지만, 당장 민족감정이나 지역감정, 부족감정도 심하기 때문. 심지어 학파에 따라 율법을 적용하는 방법이나 기준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 현지의 토착관습과 이슬람 교리가 융합하면서 실제 현지인들의 종교관은 쿠란, 하디스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제도권 이슬람과는 영 딴판으로 변했다. 이를테면 아이를 잉태하면 무함마드에게(...) 아기의 순탄한 출산과 산모의 건강을 비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이나, 쿠란을 아무 페이지나 넘겨서 거기 나온 구절에 따라 점을 치는 풍습, 터키를 비롯한 레벤트 지방에 널리 퍼져있는 푸른색 눈모양의 부적(나자르본주), 신비한 숫자와 글자를 종이에 적어서 만드는 부적(무스카) 등은 이슬람 율법학자들이나 지하디스트들이 없애고자 애를 쓰는 '민속이슬람'이다. 즉 이론과 실재는 이 바닥에서도 구분된다. 어떤 풍습들은 "얘네 무슬림 맞아?"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민속이슬람 자세히 보기
심지어 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식 무당인 빠왕(20:30초 부터)도 있다. 정확히는 퇴마사에 가까운 듯 보인다.
여기에 현지의 토착관습과 이슬람 교리가 융합하면서 실제 현지인들의 종교관은 쿠란, 하디스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제도권 이슬람과는 영 딴판으로 변했다. 이를테면 아이를 잉태하면 무함마드에게(...) 아기의 순탄한 출산과 산모의 건강을 비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이나, 쿠란을 아무 페이지나 넘겨서 거기 나온 구절에 따라 점을 치는 풍습, 터키를 비롯한 레벤트 지방에 널리 퍼져있는 푸른색 눈모양의 부적(나자르본주), 신비한 숫자와 글자를 종이에 적어서 만드는 부적(무스카) 등은 이슬람 율법학자들이나 지하디스트들이 없애고자 애를 쓰는 '민속이슬람'이다. 즉 이론과 실재는 이 바닥에서도 구분된다. 어떤 풍습들은 "얘네 무슬림 맞아?"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민속이슬람 자세히 보기
심지어 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식 무당인 빠왕(20:30초 부터)도 있다. 정확히는 퇴마사에 가까운 듯 보인다.
종교 용어의 차이,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 시절의 아랍어인 '푸스하'만을 예배용어로 사용한다. 하지만 애초에 아랍 문자의 특성상 모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구분이 어렵기도 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아랍어 음운도 지방에 따라 매우 이질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꽤 크게 차이가 난다. 특히 과거 페르시아 문화권이었던 이란과 페르시아를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인 터키, 위구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통용되는 종교용어는 아랍과 비교했을 때 매우 차이가 크다. 개중 간단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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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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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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Ṣalāt(살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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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âz(나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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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z(나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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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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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sūlullāh(라술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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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yqambar(페이감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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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ygamber(페이감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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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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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ḍūʼ(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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Âbdast(업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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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est(압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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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ḍān(라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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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zân(라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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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zan(라마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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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ḍḥā(아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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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bân(고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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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ban(쿠르반)[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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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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ʿĪd(에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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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d(에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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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ram(바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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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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Šahāda(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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Šahâdat(샤허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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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ime-i Şehadet(켈리메이 셰하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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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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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jr(파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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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bh(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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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ah(싸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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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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Ẓuhr(주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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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hr(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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Öğle(외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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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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ʿAṣr(아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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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r(아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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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indi(이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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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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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ġrib(마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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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ğreb(마그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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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şam(악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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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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ʿIšāʾ(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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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šâ(에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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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sı(야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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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jid(메스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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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jed(마스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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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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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생활 율법???
- 연관 항목 : 샤리아
흔히 사람들이 유대교를 엄청나게 복잡한 생활 율법수행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종교라고 보고 이슬람은 돼지고기 금지나 하루 5번기도를 제외하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잘못된 인식이 많은데, 이슬람도 유대교 못지않게 FM대로 따를 경우 일상생활 전반에 어마어마한 제약이나 규정들이 많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슬람이 유대교보다 더 심한 부분도 있을 정도. 샤리아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슬람 율법은 대단히 많고 법학파들에 따른 해석, 명령(파트와)도 복잡하다.
하디스를 통해 정해진 율법이다. "낭비하지 말라"(쿠란 7장 31절)라는 구절 하나의 해석 및 실천(...) 때문에 정해진 율법인데, 여성의 치장목적을 제외한 금,은의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무슬림이라면 남성을 상대로 금은방을 운영하는 것도 금지이다. 또한 금반지, 금으로 된 식기, 침대와, 각종 비단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이며(하나피 학파에서는 까다로운 조건 하에 허용, 대다수 학파에서는 금지) 말리키 학파에서는 쿠란과 칼을 제외하고 다른 물건이나 책을 금은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지된다. 금으로 된 만년필, 향수병, 화장연필, 빗, 거울, 수저, 향로를 전부 금지한다. 와하브파와 살라프파에서는 남성이 치과에 가서 금니를 때우는 것까지 종교적 죄악으로 본다. 근데 우스운 사실은 여자들은 치장 목적으로 금 장신구를 쓰는 것을 허용하는데, 이는 오직 여성 본인의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조건을 전제로 허용되는 것이다. 비단이 허용되는 예외가 있는데, 안감에 비단을 덧대는 경우나, 아주 작은 비단 천, 또는 피부가 아프거나 염증이나 이가 생겨서 비단옷이 필요할 때는 비단이 조건부로 허용된다.
- 담배 금지
담배 항목의 이슬람 관련 항목 참조. 학파에 따라 혐오되는 대상이지만 죄는 아닌 것(마크루흐)부터 조건부 허용, 또는 완전금지까지 갈린다. 아마 이슬람의 샤리아 율법 중에 무슬림들에게 가장 무시당하는 게 하나 있다면 이 규정일 것이다, 실제로 95% 이상이 무슬림인 터키만 해도 골초의 국가로 유명한데, 길빵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서도 담소를 나누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고 심지어 히잡을 두른 여성까지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애초에 터키가 강력한 세속국가였으니 이상할 게 없긴 하지만.
소변, 대변, 개의 침 등을 '나지스'(Najis)라고 부른다. 이것들이 조금이라도 튀기거나 옷이나 몸에 묻으면 그 상태에서의 기도와 예배가 무효화된다. 이것들이 묻으면 반드시 예배 전에 구쓸(이슬람식 샤워)를 해야 된다. 예외로 아주 어린아이의 소변은 나지스가 아니라서 깨끗하다고 한다..때문에 서서 소변을 보는 것에 공포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 일단 이에 대한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공식 파트와는 스스로 소변을 옷에 안튀길 자신이 있다면 서서 소변봐도 된다고 규정하긴 했다.
- 개가 있는 장소에서는 예배 무효,
개가 살고있는 장소는 즉각 더러운 장소로 규정된다. 이는 가정집도 예외가 아니다. 애완견이든, 식용견이든 어떤 종의 개이든, 강아지이든 노견이든 모두 하람이다. 보통 "개가 사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 라고들 한다. 개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려면 나가서 기도해야 한다. 또 예배(살라트) 중 개가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예배는 무효가 된다. 상기한 이슬람권의 돼지, 개 혐오와 연관되는 율법.
왜냐하면 하디스에서 무함마드는 턱수염을 길렀다는 전승이 있고, 이를 교리적으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편이며, 면도를 옳지 않은 이교도적 관습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자들 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근본주의자들이나 원리주의를 따르는 무슬림들은 풍성하게 턱수염을 기르는 것을 옳게 보고, 완전 강요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무슬림들에게 이를 매우 강조한다. 유명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절대다수는 위장을 위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최소한 턱수염 내지는 풍성한 수염을 달고 있다. 탈레반같은 막가파 광신도들은 남자가 수염을 안기르면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짓도 저지른 역사가 있다.
1970년대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슬람 유학생 신분으로 가 있던 명지대 최영길 교수가 본인 저서 초반부에 밝힌 일화에 따르면, 사우디에 와서도 한국 관습대로 매일 면도를 하였더니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동료 학생들이 수군수군거리며 넌씨눈스러운 눈치를 주고 급기야 최영길 교수 앞에서 대놓고 수염을 기르라고 소리치고, 결국엔 학교 학장에게 불려가서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학사경고를 먹이겠다는 압박을 받고 나서 반강제로 수염을 길러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우디 와하브파 근본주의자들도 일부 왕자들이나 외교관들은 수염을 깨끗이 면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슬람 학교나 종교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은 자유에 맡기는 분위기인듯 하다. 반면 비근본주의 - 개방적인 무슬림들은 수염에 대해서는 서구 스타일로 깔끔하게 면도하는 것을 묵인하며, 율법학자나 독실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수염에 대해서는 별말 안하는 분위기다. 한국인 무슬림들도 종교적으로 독실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수북한 수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염소 수염정도는 기르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대표적으로 이태원 성원의 이주화 이맘) 반면, 겉으로 보이는 수염을 제외한 다른 몸의 체모(겨드랑이털, 음모의 털) 등은 제모하거나 뽑아야 한다고 본다. 위생이 이유라고.
집이나 공중화장실이나 동일하다. 다만,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에 쿠란을 다운로드하는 행위는 일부 율법학자에 따라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
- 무슬림 남성이라면 여성의 권리를 무시하고 아내에게 3번의 이혼통보만으로 즉시 이혼 성립 가능,
상위 문단의 '이슬람과 여성인권' 문제와도 연관되는 부분으로,트리플 탈라크(Triple talaq)라고 부른다. 무슬림 남성이 아내에게 '탈라크'라는,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는 말을 세 번 외치면 이혼이 성립되어 아내를 집에서 내쫓을 수 있다(!). 또 아내에게는 이런 권리(?)가 허용되지 않으며, 오직 남성만이 행할 수 있는 권리여서 대표적인 이슬람의 악습이자 여성 차별 제도로 꼽힌다.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홧김에 ‘탈라크’를 세 번 외치거나, 부인의 얼굴도 보지 않고 SNS 메신저를 이용해 ‘탈라크, 탈라크, 탈라크’ 단어 3개를 전송해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 2017년~2018년 인도에서는 무슬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트리플 탈라크를 불법화하였고, 이를 어기는 무슬림에게는 징역 3년을 구형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 무슬림 부부가 이혼하거나 사별하였을 경우, 여자는 3개월~4개월 10일동안 재혼 금지.
이 샤리아 규정을 '잇다'라고 부른다. 목적은 재혼한 새 남편이 전남편의 아이를 기르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여자 쪽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이유다. 재혼 금지 기간은 이혼녀의 경우 3개월, 사별한 여자의 경우 4개월 10일이다. 임신한 여자는 출산 때까지 재혼 금지다.(쿠란 2장 228~234절, 65장 4절) 폐경기 여성이나 어린아이는 3개월이다.
이슬람에서는 이자를 '리바'라고 부르며, 근친상간보다 더 심한 죄라고 규정한다.[102] 그러나 각종 편법으로 사실상의 이자를 주고받는 것은 이슬람적인 행위로서 허용된다. 이자를 배제한 이슬람 금융을 '수쿠크'라고 부른다.
- 다른 사회와 달리 이슬람권에서는 식사 후에 대놓고 트림을 해 대더라도 ‘비스밀라(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만 하면 예의있는 행위로 간주된다.이슬람의 상식 및 예절
근거는 쿠란의 구절 중 하나인, "(말세가 되면) 무리 가운에 향락을 사(추구)는 자들이 있어 이들을 하나님께서 방황케 하리라." (45:23)라는 구절,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무슬림 중에서도 악기 연주를 허용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는 무함마드의 하디스 구절 때문이다(...) 주류 이슬람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음악은 '나쉬드'(찬가) 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슬람 음악은 종교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아잔(Adhān:기도할 때를 고하는소리)과 쿠란의 낭독음뿐이다. 유일하게 허용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아카펠라 개념인 나쉬드 마저도 할랄, 즉, 이슬람 기준에서 적합하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반주는 오직 북소리만으로, 보컬은 남자 목소리만으로 해야 하며, 그 이상의 다른 음악적 장치나 효과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 예외적으로 총 소리나 칼, 폭탄 소리같은 비악기의 소리는 인정한다. 가사를 명료하게 전달하되, 비 이슬람적인 내용을 담으면 안 된다. 신비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사가 아닌 가락 자체에 집중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설령 합당한 나쉬드라고 해도 여자가 불러서는 안 된다.
이런 이슬람의 기준에 따르면 대중가요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아노로 친 뉴에이지음악이나 고전 클래식 음악, 각종OST, 동양 악기를 이용한 음악, 심지어 세계 각국의 국가(노래)들, 아리랑이나 요들송같은 각국의 민요나 동요 등도 모조리 금지된다. 사실상 소수의 이슬람 나쉬드를 제외한 전 세계의 모든 음악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진짜 독실한 근본주의자들만 지킬 뿐, 많은 무슬림들도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대놓고 어기는 경우가 많다(이슬람권 국가들의 노래나 국가들을 버젓이 부르고, 아랍권 시장이나 식당에서도 아랍가요들을 대놓고 틀어주고 다니는것만 봐도...) 또 몇몇 무슬림들은 이런 나쉬드의 빡빡한 조건에 반발해서 조건을 조금 무시한 나쉬드를 만들기도 하는데, 유튜브에서 이런 나쉬드 영상에는 '이건 하람(금지된 것)이다.'라고 근본주의자 무슬림들의 타박하는 댓글이 달린다(!). 여담으로, 앱스토어나 구글 플레이 스토어등에서 이러한 근본주의 이슬람의 기준에 맞춘 '할랄 음악 어플'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엔 몇몇 나쉬드들과 자연소리(새소리나 강물소리)들이 전부다. 반대로 말하면 근본주의 무슬림들에게 평생 음악이라곤 이런 것들밖에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이슬람권에서 발달한 수피즘 음악, 셰마댄스나 시아파의 종교극 음악들은 이슬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계열과 근본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이단 사이비 취급 받으면서 명맥을 이어온 상황이고, 오스만 음악같은 이슬람권의 전통 가요 역시 이슬람 학자들을 세속 권력으로 때려잡으면서 세속주의 분위기를 유지한 끝에 발달한 것이다.
이는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따라서 이슬람 교리를 엄격하게 따르면 미술관에 인물화를 보러 가거나, 사람의 초상화를 보거나 그리는 것, 화가가 되는 것도 다 죄악으로 금지된다. 다만, 자연 그림이나 기하학적인 서예를 이용한 그림은 허용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아닌 이상 비종교적인 그림은 알음알음 넘어가주는 분위기다.
- 하나님 외의 어떤 누구에게라도 고개를 숙이는 것 금지.
보수적 무슬림들 상당수가 이를 실천한다. 인사 차원의 고개숙임도 우상숭배로 간주되어 금지다(...) 2018년 제주 난민 사태 당시, 난민 출신의 예멘 무슬림 중 일부가 이 원칙을 칼같이 따라 음식점에 고용되었으면서도 한국인 손님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기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시끄러운 논쟁이 일어난 적도 있다. 다만 이건 나라마다 다소 다르다.
- 인도 문화권과 비슷하게, 오른손은 깨끗하거나 좋은 일에 쓰고, 왼손은 더러운 일에 쓰는 원칙이 있다.
- 용변 후에는 휴지보다는 물로 씻어내는 문화가 발달해 있다. 소변 이후에는 물로 깨끗이 씻고 닦아내라고 규정하며, 대변 이후에도 물로 청결히 할 것을 규정한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은 역사적으로 비데가 발달하는 원조 문명권이 되었다.
일단 FM대로 규정된 이슬람 생활 율법이 이렇게 대단히 빡빡하긴 하지만, 터키나 튀니지, 중앙아시아 등 율법 해석이 널널하고 국민들도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도되지 않은 이슬람권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이런 생활율법에 개의치 않거나 이슬람학자들도 조금 가벼운 해석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온건 이슬람이 많고 세속주의가 자리잡은 역사도 긴 터키에서의 해당 율법적용은 다음과 같다.
- 무슬림의 금 장식 사용에 대해서, 터키에서의 해석을 따르면 남성이라도 금이 12k(50%)이하로 함유된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은 메크루(허용도 금지도 아님)로 보고, 비단옷도 전통적으로 가로실을 면으로 하고 세로실을 비단으로 한 쿠트누(kutnu) 옷감은 비단으로 보지 않아 허용했다. 식기도 금, 은도금인 경우, 혹은 순은재질이라도 입이 닿는 부분은 금이나 은이 아닐 경우, 자기 것이 아니라 다른 집에 손님으로 갔는데 금은식기에 담은 음식을 받았을 경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본다.
- 타인에게 고개숙이기를 금지하는 율법은, 터키에서는 기본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하는 인사가 상대방이 자기보다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없을 때 하는 조심스러운 인사이다. 다만 고개를 숙이되 한국, 일본처럼 허리까지 숙이지는 않는다.
역사,
이슬람의 탄생: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자세한 사항은 무함마드 문서 참고,
무함마드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활동했는데, 메카에서 말로 13년 동안 설파하고 설득해서 얻은 개종자는 150명뿐이었으나, 메디나에서 하층민들과 소외자들을 규합해 메카 귀족들을 향해 정복전쟁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고 한다.
초기~중세 이슬람,
무함마드 사후, 선지자와 친했던 장로 중에서 후계자&교황이라 할 수 있는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56년 사이에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교세를 크게 넓혔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동쪽은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부까지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 근방까지 진출하여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가 이끈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자세한 역사는 무함마드, 이슬람 팽창,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적 등의 문서 참고.
중앙아시아와 인도로의 이슬람 세력의 침공과 이슬람의 확산은 가즈니 왕조, 구르 왕조, 델리술탄왕조, 무굴 제국 참고.
스와힐리 (동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방면으로의 포교는 무역으로 이루어졌다.[106] 중국 서부의 위구르 자치구도 마찬가지. 이렇듯 이슬람교는 황금기를 이루기까지 그야말로 무서운 기세로 아시아 동부 지역으로 이곳 저곳에 전파되었으나 한자 문화권 및 인도차이나 반도 방면에서는 맥을 못 췄다. 왜냐하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이루어진 동아시아는 중국의 중화 문명이라는 거대한 문화권이 가로막고 있었던 대다가 중앙아시아와의 사이에는 톈산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 등 험준한 자연지대가 존재했으므로 이슬람의 전파도 주변부 위구르 지역이 한계였다.
동남아시아도 육지를 통한 전파는 인도 문화권을 거쳐야 해서 상당히 제약이 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기세를 떨치지 못했고 그나마 남부 지역인 말레이시아 반도, 인도네시아 제도 및 필리핀 남부 지역에는 해양 무역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이슬람 황금기 시대, (Islamic Golden Age)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식을 탐구하라
- 아랍 속담
진리가 어디서 오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 진리가 과거 세대나 이방인들로부터 온 것이라 해도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 진리 자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ㅡ 9세기 철학자 알 킨디
유럽의 의료 체계는 기원뿐만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도 아랍식이다. 아랍인은 유럽인의 지적 조상이다.
- 20세기 학자 도널드 캠벨의 평가.
그라스도교 학생을 가르치는 안달루스의 대학자 이븐 루시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8 ~ 13세기의 이슬람권은 문화권과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한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은 무엇이든 배워서 더욱 발전시켜나갔고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비 무슬림 학자들도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융통성있는 사회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산을 계승한 지적 결과물들은 서유럽 세계로 번역되어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무슬림들은 이단의 지식이든 뭐든 싸그리 무시하고 필요하다 싶으면 다 받아들이던 세대였다. 요즘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비교하면 이때가 전성기였던 이유가 있었던 셈. 오히려 이때가 타 문화권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때라 요즘보다 더 낫다고 봐도 될 정도.
중세 중기까지는 멸망 이후 퇴화해버린 서유럽에 비해 아랍의 이슬람 문화권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들을 받아들여 매우 발전되어 있었다. 위상이 이렇다보니 서구권의 교회에서도 이븐 시나, 이븐 루슈드 같은 무슬림 저자의 주해서를 읽을 수 있게 허용했다. 당장 알코올과 알칼리, 알고리즘 등의 단어가 아랍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시기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하는 무타질라 학파의 융성으로 인해 대놓고 무신론임을 선언해도 처벌받지 않는 매우 관용적인 사회였고 과학, 철학, 사회 등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세 유럽이 바이킹의 침공으로 기록물이나 연대기조차 제대로 쓰이지 않을 시기였고 중국은 당나라 말기 ~ 5대 10국 혼란을 겪을 때였다.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도시 바그다드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지성의 요람,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워 세계 3대 도시에 등극하는 위엄을 보여준다. 특히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세워진 지혜의 집은 중세 지중해 권역과 페르시아, 인도의 학문이 집대성된 곳이었고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시칠리아, 스페인, 모로코, 알제리 등 (당시 기준으로) 이슬람 지역의 학교에서 천문학, 철학, 수학, 화학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피보나치.
8 ~ 13세기의 이슬람권은 문화권과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한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은 무엇이든 배워서 더욱 발전시켜나갔고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비 무슬림 학자들도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융통성있는 사회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산을 계승한 지적 결과물들은 서유럽 세계로 번역되어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무슬림들은 이단의 지식이든 뭐든 싸그리 무시하고 필요하다 싶으면 다 받아들이던 세대였다. 요즘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비교하면 이때가 전성기였던 이유가 있었던 셈. 오히려 이때가 타 문화권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때라 요즘보다 더 낫다고 봐도 될 정도.
중세 중기까지는 멸망 이후 퇴화해버린 서유럽에 비해 아랍의 이슬람 문화권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들을 받아들여 매우 발전되어 있었다. 위상이 이렇다보니 서구권의 교회에서도 이븐 시나, 이븐 루슈드 같은 무슬림 저자의 주해서를 읽을 수 있게 허용했다. 당장 알코올과 알칼리, 알고리즘 등의 단어가 아랍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시기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하는 무타질라 학파의 융성으로 인해 대놓고 무신론임을 선언해도 처벌받지 않는 매우 관용적인 사회였고 과학, 철학, 사회 등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세 유럽이 바이킹의 침공으로 기록물이나 연대기조차 제대로 쓰이지 않을 시기였고 중국은 당나라 말기 ~ 5대 10국 혼란을 겪을 때였다.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도시 바그다드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지성의 요람,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워 세계 3대 도시에 등극하는 위엄을 보여준다. 특히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세워진 지혜의 집은 중세 지중해 권역과 페르시아, 인도의 학문이 집대성된 곳이었고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시칠리아, 스페인, 모로코, 알제리 등 (당시 기준으로) 이슬람 지역의 학교에서 천문학, 철학, 수학, 화학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피보나치.
8 ~ 14세기 이슬람 학자들그 외에 시칠리아 왕국의 로제르 2세의 부탁으로 제작된 알 이드리시 지도도 이슬람 지리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고 그 지식은 바닷길을 통해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칠정산 역시 이슬람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15세기 르네상스 이전까지 유럽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의학서 역시 이슬람권의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서유럽의 과학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에야 이슬람 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외에 과학자 알 비루니 (973 ~ 1048년), 대수학을 집대성한 우마르 하이얌 (1048 ~ 1131년)과 기야스딘 하산, 신학자 겸 천문학자 나시룻딘 투시 (1201 ~ 1274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알 파라비, 신학자 알 아시리 등이 활약하였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이 종교에서 벗어나 점차 각성하기 시작한 반면, 아랍 지역은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입 등으로 큰 고난을 겪고 사막화로 인한 식량 생산 감소로 인한 경제 침체와 인구 감소를 겪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대규모 번역 사업 및 학술 연구 지원도 점점 줄어들었다. 즉 유럽은 11세기 이후로 나름 평화를 유지하며 농업이 부흥하고 인구가 증가하며 상공업과 학문이 부흥하기 시작하는 등 각성이 시작되었지만 이슬람권은 11세기에 튀르크, 12세기에 프랑크(십자군), 13세기에 몽골 등의 민족 이동 및 침략을 겪으며 보수화된 것이다. 몽골군에 의한 마디나트 알 살람 (바그다드) 함락은 알 무스타심 문서 참고.
그럼에도 이슬람화 당시 이미 3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던 지중해 세계의 기독교 문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알 안달루스에선 11세기까지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가톨릭 신자였고 레콘키스타와 함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세가 약했던 마그렙 지방도 12세기까지 교회 공동체가 있었고 수단 지역에서도 16세기까지 유지되었다. 15세기 이집트는 여전히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도였고 이라크 북부, 레바논, 시리아와 함께 지금도 기독교 공동체가 남아있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이 종교에서 벗어나 점차 각성하기 시작한 반면, 아랍 지역은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입 등으로 큰 고난을 겪고 사막화로 인한 식량 생산 감소로 인한 경제 침체와 인구 감소를 겪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대규모 번역 사업 및 학술 연구 지원도 점점 줄어들었다. 즉 유럽은 11세기 이후로 나름 평화를 유지하며 농업이 부흥하고 인구가 증가하며 상공업과 학문이 부흥하기 시작하는 등 각성이 시작되었지만 이슬람권은 11세기에 튀르크, 12세기에 프랑크(십자군), 13세기에 몽골 등의 민족 이동 및 침략을 겪으며 보수화된 것이다. 몽골군에 의한 마디나트 알 살람 (바그다드) 함락은 알 무스타심 문서 참고.
그럼에도 이슬람화 당시 이미 3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던 지중해 세계의 기독교 문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알 안달루스에선 11세기까지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가톨릭 신자였고 레콘키스타와 함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세가 약했던 마그렙 지방도 12세기까지 교회 공동체가 있었고 수단 지역에서도 16세기까지 유지되었다. 15세기 이집트는 여전히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도였고 이라크 북부, 레바논, 시리아와 함께 지금도 기독교 공동체가 남아있다.
근대~현대의 이슬람,
근대 이후 과학적, 사회적 발전은 전부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중요시했던 서구 중심으로 일어났기에 새로운 가치관들과 분쟁은 많아 보여도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토론을 통하여 상호간의 합의점을 나름이나마 밟아가고 있다. 반면 종교 중심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는 이슬람 사회의 경우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을 통하여 나온 가치관들은 그들의 종교적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근본에서 나온 것들이기에 배척하기가 훨씬 더 쉽고,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와 관련한 교리적인 발전은 기타 서구 종교들에 비해 한참 미진하다고 볼 수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무슬림의 순진함. 물론, 이 작품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감독의 신성모독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동안 타 종교들이 신성모독적인 매체에 보인 태도와는 격이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라는 권위가 약해지고,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지만, 그러한 풍자화는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보다 유연한 적응이 필요해보인다. 웬만해선 타종교인들은 종교 비판/왜곡, 풍자 매체에 반대할망정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일부 진보적 무슬림들은 이런 현대 사회와 교리 사이의 모순점을 풀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도 하는데, 이중에는 쿠란을 '신의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신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쓴 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도 생겼다.
이 논리는 무함마드는 예언자로 선택될 만큼 비범한 인물이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이라서 신의 말씀을 완벽하게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신의 말씀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쿠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 쿠란은 신의 말씀 그 자체라기 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만한 신의 말씀의 '번역본'같은 셈이므로 세월이 꽤 지난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모순점이 생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도 가장 기초적인 신에 대한 자세 등에서 딴지를 걸지는 않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주요 종교 교리, 그러니까 과거부터 내려온 종교법이 현대 사회와 안 맞을 수 있으니 현실에 맞게 재해석 해도 괜찮지 않냐...는 것이다. 허나 이 사고방식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진보적 무슬림들과 보편적인 무슬림들 세계에서 논란이 될 만한 문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 이전에 신의 말씀을 전한 이사(=예수) 등의 예언자들이 있었는데도 또다시 무함마드와 쿠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 전에 전해진 '말씀'들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왜곡 변형되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식이면 쿠란도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되거나 쿠란 자체가 원래 온전하게 전해진 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슬람의 정체성 자체를 뒤흔들게 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류가 아닐 수밖에 없다. 영국의 Quilliam Foundation만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의 이슬람 교리 해석을 반박하고 도덕적으로 옳고 진보적인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사상적으로 극단주의를 몰아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당수 영국 무슬림들로부터 무시 또는 비난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창립자인 마지드 나와즈는 저널리스트 무르타자 후세인으로부터 베란다 원숭이(porch monkey; 미국 흑인을 상대로 한 멸칭)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무렵부터다. 실제로 와하브파를 창시한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부터가 18세기 사람이고, 이슬람주의에서 중요한 이념가들인 사이트 쿠틉이나 아불알라 마우두디 등은 아예 20세기 사람이다. 따라서 '근대적 이슬람'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IS같은 놈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밀어주는 막장스런 와하비 이슬람도 비교적 근대적인 현상이다. 전통적 이슬람이라 칭해지는 것들이 오히려 온건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있다. 전통적 이슬람이 온건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슬람의 전통적 교리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초창기에는 신도 상당수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에 관련한 계시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쿠란/논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교도에 대한 살인을 직접적으로 명하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성노예를 인정하고, 지하드 등을 통해 순교한 남자들은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구절이 있는 등 분명히 현대의 도덕 관념과 명백히 상충되는 교리들이 있다. 이를 볼 때 전통적 이슬람과 근대 이슬람을 애써 구분하고 옛날은 더 좋았지라고 너무도 간단하게 생각해버리는 것은 큰 착각이다.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통적 이슬람과 근대 이슬람 간에 흐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교리 자체에 있는 전근대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이쪽에 대해선 전통적인 교리야 애초에 현대적인 가치관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진 교리였다는 것을 일단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이러한 교리들이 시대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득세하는 극단주의적 흐름에선 오히려 변화한 시대에 비해 교리의 해석은 교조적으로 변하고, 해석의 흐름도 시대에 역행하는 흐름을 띄게 되었다는 게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극단적이고도 악의적인 집단들이 코란을 왜곡시켜 본래 선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코란이 오히려 자신들이 싫어하는 성경보다 더 좋지 않은 책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슬람이 스스로 이것을 개혁하거나 코란을 정비해 틀을 맞추어 더 이상 고치지 말라고 선을 긋지 않으면 앞으로 이슬람권 국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주변 국가 사람들은 이슬람권 국가를 비롯한 타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사람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바뀌지 않는 등의 이것은 그들의 스스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테러리즘으로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4개 조직인 ISIL, 보코 하람, 탈레반, 알 카에다는 모두 이슬람 계통이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무렵부터다. 실제로 와하브파를 창시한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부터가 18세기 사람이고, 이슬람주의에서 중요한 이념가들인 사이트 쿠틉이나 아불알라 마우두디 등은 아예 20세기 사람이다. 따라서 '근대적 이슬람'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IS같은 놈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밀어주는 막장스런 와하비 이슬람도 비교적 근대적인 현상이다. 전통적 이슬람이라 칭해지는 것들이 오히려 온건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있다. 전통적 이슬람이 온건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슬람의 전통적 교리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초창기에는 신도 상당수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에 관련한 계시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쿠란/논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교도에 대한 살인을 직접적으로 명하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성노예를 인정하고, 지하드 등을 통해 순교한 남자들은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구절이 있는 등 분명히 현대의 도덕 관념과 명백히 상충되는 교리들이 있다. 이를 볼 때 전통적 이슬람과 근대 이슬람을 애써 구분하고 옛날은 더 좋았지라고 너무도 간단하게 생각해버리는 것은 큰 착각이다.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통적 이슬람과 근대 이슬람 간에 흐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교리 자체에 있는 전근대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이쪽에 대해선 전통적인 교리야 애초에 현대적인 가치관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진 교리였다는 것을 일단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이러한 교리들이 시대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득세하는 극단주의적 흐름에선 오히려 변화한 시대에 비해 교리의 해석은 교조적으로 변하고, 해석의 흐름도 시대에 역행하는 흐름을 띄게 되었다는 게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극단적이고도 악의적인 집단들이 코란을 왜곡시켜 본래 선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코란이 오히려 자신들이 싫어하는 성경보다 더 좋지 않은 책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슬람이 스스로 이것을 개혁하거나 코란을 정비해 틀을 맞추어 더 이상 고치지 말라고 선을 긋지 않으면 앞으로 이슬람권 국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주변 국가 사람들은 이슬람권 국가를 비롯한 타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사람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바뀌지 않는 등의 이것은 그들의 스스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테러리즘으로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4개 조직인 ISIL, 보코 하람, 탈레반, 알 카에다는 모두 이슬람 계통이다.
다른 문화권 & 종교와의 관계,
꾸란 22:19-21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 속에서 옷이 찢기며 그들의 머리 위에는 끓는 물이 부어지리라.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내장과 피부가 녹아내릴 것이라. 그 외에도 저들을 징벌할 철로 된 회초리가 있노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보는 소리를 듣노라.
꾸란 3:56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가혹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
꾸란 3:61 그대에게 지식이 이른 후에도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논쟁하는 자가 있다면, 거짓말 하는 자들 위에 하나님의 벌이 있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라.
꾸란 3:118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를 친구로 택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들은 단지 너희가 파괴되기를 바랄 뿐이라. 그들의 입들에서 증오가 발산되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사악하도다.
꾸란 5:57믿는 자들이여 너희의 종교를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 이들은 너희 이전에 성서를 받은 자들로 믿음을 배반했노라 너희가 믿는 자라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꾸란 5:72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일 뿐이라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꾸란 5:73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믿지 아니한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벌이 내릴 것이라.
함께 체스를 두는 안달루스의 기독교인과 무슬림,
기독교보다 뒤에 나온 종교로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실제로 기독교의 구/신약 성경의 일부를 인용하기도 하고, 예수를 무함마드 바로 이전의 예언자로 인정하는 등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이슬람 교리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이슬람의 진리를 곡해하는 쉬르크(우상숭배자)인 '성서의 백성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하며 이들을 무슬림 공동체 주도로 2등시민 취급하며 권리와 생활에서 무슬림들과 철저히 차별하라고 명한다.
무슬림들과 이슬람법 옹호자들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를 '구분' 내지는 '보호'하라는 식으로 이러한 차별을 미화하지만, 종교세인 지즈야의 강요와 지즈야를 안 낼 시 교리적으로 지하드를 통한 섬멸과 정복의 대상으로 구분된다는 점, 개종 시도를 죽음으로 처벌하는 점, 무슬림보다 열등한 대우 및 결혼 등에서의 차별, 이슬람적 질서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는 등 당시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명백히 불합리함을 느꼈던 종교 차별이 맞다. 흔히 타 문화권의 타종교 배척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며 양비론적 논리를 쓰는 무슬림들이 많은데, 이는 차별이 아니었음을 논증하는 변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흔히 알려진 이슬람의 종교적 관용정책은 후발주자로 출발하여 이미 타 종교가 뿌리박고 있는 지역들을 다스려야 했던 초기 이슬람의 입장에 기초한 것으로 통치가 완벽하게 확고해진 이후(대략 무함마드 사후 200년 정도부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무함마드는 '성서의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박해하고 차별하되 형식적으로는 존중하라고 했으나, 무슬림들은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교도에 대한 강제 개종과 탄압, 심하게는 학살이 잊을만 하면 일어나곤 했다. 세금 정책은 지즈야 항목을 보면 나오다시피 도시민들에게는 심각하지 않은 부담이었으나 화폐 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힘들었던 전근대 농촌 공동체에는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명제는 역사상 많은 시대에서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지역 피정복민들에게 무함마드의 세가지 선택, 즉 개종/복종/죽음을 제시했다. 딤미 신분 피정복민들이 가장 많이 개종하였는데, 이슬람만이 생존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딤미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감안한다면 그들 중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다수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강요에 의한 개종은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슬람이 무력에 의해 전파되지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는 분명 맞는 말이다. 무력에 의해 전파된 것은 이슬람 체제의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이다.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이슬람 체제가 전파된 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이) 비참한 삶을 견디지 못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위 경전의 백성들이라 한 기독교와 유대교 한정으로 '관용'을 베풀었던 시기에도 교회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신축을 금지하거나, 기독교 교회나 성당인데도 십자가를 못걸게 하고 종교 행렬도 금지했으며,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집은 무슬림의 집보다 크게 못짓게 하고, 말과 노새를 타는 게 금지된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무슬림들의 앞에서 굴욕감을 느끼라는 목적으로 여자들이 타는 모양새로 당나귀만을 타야 했다.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오스만 제국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관직에 진출하기 힘들었으며(사실상 권력 자체를 박탈당함) 무슬림보다 낮은 지위를 상징하는 터번이나 허리띠를 강제로 두르고 다녀야 했다. 거리나 목욕탕 등지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마주치면, 아무리 신분이 낮은 무슬림일지라도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먼저 길을 비켜주거나 공손히 절해야 했다. 또한 법정에서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증언은 효력이 무슬림보다 못 하거나 아예 없었고 그나마도 증언이 무슬림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채택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뜯어보면 현대인이 생각하는 관용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리아로 비무슬림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허용하면서 무슬림 여성과 비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사형이나 양육권 박탈로 처벌하는 결혼 차별에 종교 세금인 지즈야까지 강제했으니 결국 1,40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반강제로 이슬람화가 되어갈 수밖에없었다.
이슬람 치하에서 소수파는 주로 특정한 쓰임새가 있을 때, 혹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정치적이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에는 관용되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자주 배격되었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세금과 뇌물 공세를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다른 한 편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의 고향 카프카스에서는 기독교인 노예가 이슬람권으로 꾸준히 유입되던 상황이기도 했다. 위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및 기타 비무슬림에 대한 학살이나 추방, 또는 노예화가 번번히 일어났다.
이슬람은 성립 당시부터 무슬림 아랍인이 유목민이었던 특성 때문에 동로마와 중근동에 대한 침략을 통해 확장했다. 몽골 제국 수준의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피정복지의 문화가 과거와 점차 단절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중세 5대 주교구가 위치하였던 다섯 도시 중 안티오크와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면서 고대 기독교의 중심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가 아랍인의 정복 이후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아랍인, 투르크인의 침략에 도시가 약탈되고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서술이 동로마 사서에 수없이 나온다.
남프랑스와 남이탈리아,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들은 북아프리카가 무슬림 해적 기지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서기 7~8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동로마 제국에 무자비한 침략을 가하여 기록상으로 수백만 명 에 달하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끌고갔다. 846년에는 심지어 로마시마저 대규모 이슬람 해적의 공격에 불타고 성 베드로 성당이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827년에 무슬림 해적 집단에 의해 점령된 크레타는 961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십자군 전쟁 역시 무슬림들이 8세기부터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인도에, 아프리카에 자행한 만행에 비하면 더 특별히 잔인할 게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공존하고 함께 반영했다고 칭송받던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 통치자들과 십자군은 잔인성과 배타성 측면에서 보면 사실 십자군이 더 자비로운 수준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기 수백년 전부터 알-안달루스의 무슬림들은 이슬람 신앙을 거부하는 기독교인을 공개 참수하였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무슬림들은 또한 교회를 허물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건립했으며 기독교인 여성들을 첩과 성노예로 취하여 그들의 자식을 무슬림으로 만들었다. 이슬람 신앙을 거부하는 기독교 여성의 자식들 또한 가차없이 처형당했다. 더욱이 무슬림들은 알 안달루스 내 유태인들에게 이슬람 근본주의 율법을 강요하는 한편 그들을 다수인 기독교인을 통제하기 위한 앞잡이, 주구로 사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런 환경에서 장장 7백년 동안을 핍박과 압제에 시달려 온 기독교인들이 궐기하여 성립된 스페인이 가장 강경한 가톨릭 국가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이슬람 침략자들이 자비로웠다면 어째서 수 세기 동안 기독교가 다수로 남았겠는가?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했던 일은 자신들이 몸으로 겪고 배운 것을 이교도에게 똑같이 돌려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이 시칠리아 점령 당시, 그리고 점령 후에 했던 짓이랑 노르만에 의한 탈환 과정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더 신사적이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역사상의 최대 피해자는 사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에 거주하던 불자들과 인도와 힌두교도들인데, 그래도 유럽은 이슬람과 적당히 치고받은 관계인 반면, 인도는 9세기부터 매번의 침략마다 무슬림들에 의한 사원 방화와 도시 초토화는 기본이고, 수십만이 비무슬림 이교도라며 학살당하고 수백만이 노예로 끌려갔는데도 힌두교도들은 마라타 동맹이 무굴 제국에 반격한 것 외에는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조직적인 노예무역도 이슬람 세력이 원조였는데, 이는 이슬람 율법에서 같은 무슬람끼리는 서로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유럽의 노르드 인들을 통해서 슬라브인 노예를 주로 수입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무슬림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조직적으로 노예를 납치했으며 이를 불신자들을 신앙의 길로 이끈다.라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서구 열강이 신대륙에서 노예 노동을 통한 플랜테이션을 체제를 확립하기 수백년 전인 서기 9~10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세계는 흑인 노예 노동을 통해 이라크 남부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역사가 있다. 이슬람 세력에 저항다운 저항과 반격다운 반격을 했던 거의 유일한 지역인 유럽에 한정하더라도, 동로마 사서에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도시가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는 구절은 연례행사처럼 나온다.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오스만 제국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관직에 진출하기 힘들었으며(사실상 권력 자체를 박탈당함) 무슬림보다 낮은 지위를 상징하는 터번이나 허리띠를 강제로 두르고 다녀야 했다. 거리나 목욕탕 등지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마주치면, 아무리 신분이 낮은 무슬림일지라도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먼저 길을 비켜주거나 공손히 절해야 했다. 또한 법정에서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증언은 효력이 무슬림보다 못 하거나 아예 없었고 그나마도 증언이 무슬림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채택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뜯어보면 현대인이 생각하는 관용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리아로 비무슬림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허용하면서 무슬림 여성과 비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사형이나 양육권 박탈로 처벌하는 결혼 차별에 종교 세금인 지즈야까지 강제했으니 결국 1,40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반강제로 이슬람화가 되어갈 수밖에없었다.
이슬람 치하에서 소수파는 주로 특정한 쓰임새가 있을 때, 혹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정치적이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에는 관용되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자주 배격되었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세금과 뇌물 공세를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다른 한 편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의 고향 카프카스에서는 기독교인 노예가 이슬람권으로 꾸준히 유입되던 상황이기도 했다. 위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및 기타 비무슬림에 대한 학살이나 추방, 또는 노예화가 번번히 일어났다.
이슬람은 성립 당시부터 무슬림 아랍인이 유목민이었던 특성 때문에 동로마와 중근동에 대한 침략을 통해 확장했다. 몽골 제국 수준의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피정복지의 문화가 과거와 점차 단절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중세 5대 주교구가 위치하였던 다섯 도시 중 안티오크와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면서 고대 기독교의 중심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가 아랍인의 정복 이후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아랍인, 투르크인의 침략에 도시가 약탈되고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서술이 동로마 사서에 수없이 나온다.
남프랑스와 남이탈리아,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들은 북아프리카가 무슬림 해적 기지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서기 7~8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동로마 제국에 무자비한 침략을 가하여 기록상으로 수백만 명 에 달하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끌고갔다. 846년에는 심지어 로마시마저 대규모 이슬람 해적의 공격에 불타고 성 베드로 성당이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827년에 무슬림 해적 집단에 의해 점령된 크레타는 961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십자군 전쟁 역시 무슬림들이 8세기부터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인도에, 아프리카에 자행한 만행에 비하면 더 특별히 잔인할 게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공존하고 함께 반영했다고 칭송받던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 통치자들과 십자군은 잔인성과 배타성 측면에서 보면 사실 십자군이 더 자비로운 수준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기 수백년 전부터 알-안달루스의 무슬림들은 이슬람 신앙을 거부하는 기독교인을 공개 참수하였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무슬림들은 또한 교회를 허물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건립했으며 기독교인 여성들을 첩과 성노예로 취하여 그들의 자식을 무슬림으로 만들었다. 이슬람 신앙을 거부하는 기독교 여성의 자식들 또한 가차없이 처형당했다. 더욱이 무슬림들은 알 안달루스 내 유태인들에게 이슬람 근본주의 율법을 강요하는 한편 그들을 다수인 기독교인을 통제하기 위한 앞잡이, 주구로 사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런 환경에서 장장 7백년 동안을 핍박과 압제에 시달려 온 기독교인들이 궐기하여 성립된 스페인이 가장 강경한 가톨릭 국가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이슬람 침략자들이 자비로웠다면 어째서 수 세기 동안 기독교가 다수로 남았겠는가?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했던 일은 자신들이 몸으로 겪고 배운 것을 이교도에게 똑같이 돌려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이 시칠리아 점령 당시, 그리고 점령 후에 했던 짓이랑 노르만에 의한 탈환 과정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더 신사적이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역사상의 최대 피해자는 사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에 거주하던 불자들과 인도와 힌두교도들인데, 그래도 유럽은 이슬람과 적당히 치고받은 관계인 반면, 인도는 9세기부터 매번의 침략마다 무슬림들에 의한 사원 방화와 도시 초토화는 기본이고, 수십만이 비무슬림 이교도라며 학살당하고 수백만이 노예로 끌려갔는데도 힌두교도들은 마라타 동맹이 무굴 제국에 반격한 것 외에는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조직적인 노예무역도 이슬람 세력이 원조였는데, 이는 이슬람 율법에서 같은 무슬람끼리는 서로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유럽의 노르드 인들을 통해서 슬라브인 노예를 주로 수입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무슬림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조직적으로 노예를 납치했으며 이를 불신자들을 신앙의 길로 이끈다.라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서구 열강이 신대륙에서 노예 노동을 통한 플랜테이션을 체제를 확립하기 수백년 전인 서기 9~10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세계는 흑인 노예 노동을 통해 이라크 남부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역사가 있다. 이슬람 세력에 저항다운 저항과 반격다운 반격을 했던 거의 유일한 지역인 유럽에 한정하더라도, 동로마 사서에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도시가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는 구절은 연례행사처럼 나온다.
8세기부터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무슬림 침략자들은 시칠리아, 남프랑스, 남이탈리아, 스페인, 동로마 제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동유럽 등지에서 약 2~300만의 유럽인을 노예로 납치하거나 수입했다고 추산된다. 그 이후 출현한 악명높은 바르바리 해적은 유럽인 150만, 그리고 동유럽의 기독교인들을 집중적으로 괴롭혔던 크림 칸국은 슬라브인 3~400만을 노예로 매매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록을 보면 크림 타타르인들은 침략한 지역에서 어린이들은 전부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이고 처녀들을 주로 납치해 수레에 끌고 갔다고 않는데, 아마 노예 납치된 인원 이상만큼 많은 인명이 학살당하는 것이다. 그 외에 인도도 있으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동유럽과 카프카스 다음으로 중요한 노예 공급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흔히 무슬림들과 친이슬람 옹호자들이 이야기하는 레퍼토리인, "이슬람은 타 종교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데도 탄압받았던 서구 제국주의의 선량한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은 근현대 이후 등장한, 심각한 역사왜곡 프레임이 들어간 관점이다.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면 과거 미국과 중남미의 흑인 노예 착취라던지 중세 몽골 제국의 중동 침략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오히려 이슬람 유목민 세력이 서구와 인접 타문화권을 주기적으로 침략하다가 시간이 지나 농경 민족에 대한 유목 민족의 전투력 우위가 사라지면서 서구에게 역으로 된통 두들겨맞고 쪽박이 나게 된 케이스에 가깝다.
상술한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마찬가지로 일부 무슬림들과 이슬람 옹호론자들이 쓰는 주된 레퍼토리인, "이슬람권이 박해 일변도였다면 아직도 중동에 적지 않은 규모로 있는 기독교인,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 각국에 많았던 유대인 커뮤니티들이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다."--->"따라서 이슬람은 박해가 크게 없고 온건한 종교다"는 식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다.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서구의 제국주의 식민통치나 일제 강점기 역시 문화 통치같은 온건한 통치기 역시 존재했고, 또 제3세계 국민들이나 상당수 한국인들도 말살당하지 않고 지금도 남아있으니 "서구 식민제국과 일제는 온건했다" 식으로 미화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지도자 성향에 따라 박해가 상대적으로 덜한 시기도 있었다는 것이라던지 아직도 아랍권에 남아있는 기독교인, 유대교인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 같은것이 아니라 비무슬림들이 이렇게 약자, 소수종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끈질기고 지속적인 탄압이(강약의 흐름은 있어도) 1400년간 이슬람이 장악한 중동 정치사에서 주기적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이 주도하는 박해는 거의 비슷하거나 더 악화된 수준으로 21세기인 지금도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무슬림들의 가장 배척하는 대상은 무신론자들로, 많은 무슬림들은 하디스에 따라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짐승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아랍인들이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을 하던 시절 이들은 현지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카피르”(불신자)라고 퉁쳐부르며 양심에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고 노예 무역을 해왔다. 오늘날에는 가장 서구색이 짙은 터키에서조차 무신론자를 뜻하는 'atheist'가 최고로 모욕적인 욕들 중에 하나로 쓰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흔히 무슬림들과 친이슬람 옹호자들이 이야기하는 레퍼토리인, "이슬람은 타 종교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데도 탄압받았던 서구 제국주의의 선량한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은 근현대 이후 등장한, 심각한 역사왜곡 프레임이 들어간 관점이다.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면 과거 미국과 중남미의 흑인 노예 착취라던지 중세 몽골 제국의 중동 침략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오히려 이슬람 유목민 세력이 서구와 인접 타문화권을 주기적으로 침략하다가 시간이 지나 농경 민족에 대한 유목 민족의 전투력 우위가 사라지면서 서구에게 역으로 된통 두들겨맞고 쪽박이 나게 된 케이스에 가깝다.
상술한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마찬가지로 일부 무슬림들과 이슬람 옹호론자들이 쓰는 주된 레퍼토리인, "이슬람권이 박해 일변도였다면 아직도 중동에 적지 않은 규모로 있는 기독교인,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 각국에 많았던 유대인 커뮤니티들이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다."--->"따라서 이슬람은 박해가 크게 없고 온건한 종교다"는 식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다.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서구의 제국주의 식민통치나 일제 강점기 역시 문화 통치같은 온건한 통치기 역시 존재했고, 또 제3세계 국민들이나 상당수 한국인들도 말살당하지 않고 지금도 남아있으니 "서구 식민제국과 일제는 온건했다" 식으로 미화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지도자 성향에 따라 박해가 상대적으로 덜한 시기도 있었다는 것이라던지 아직도 아랍권에 남아있는 기독교인, 유대교인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 같은것이 아니라 비무슬림들이 이렇게 약자, 소수종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끈질기고 지속적인 탄압이(강약의 흐름은 있어도) 1400년간 이슬람이 장악한 중동 정치사에서 주기적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이 주도하는 박해는 거의 비슷하거나 더 악화된 수준으로 21세기인 지금도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무슬림들의 가장 배척하는 대상은 무신론자들로, 많은 무슬림들은 하디스에 따라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짐승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아랍인들이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을 하던 시절 이들은 현지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카피르”(불신자)라고 퉁쳐부르며 양심에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고 노예 무역을 해왔다. 오늘날에는 가장 서구색이 짙은 터키에서조차 무신론자를 뜻하는 'atheist'가 최고로 모욕적인 욕들 중에 하나로 쓰인다.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 역시 1960년대 이후 국가공식적으로 무종교/무신론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터키나 중동 지역의 나라에서 '한국인들은 절반이 종교가 없고, 일본인들은 대부분 다신론자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중동에 한국인 근로자들을 파견보낼 때, 근로자들의 종교는 일괄적으로 불교로 지정되었던 때도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권의 반감과 적개심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물론 무슬림 중에서 무종교인에 좀더 개방적인 사람들도 있긴 해도 예나 지금이나 아랍-북아프리카-남아시아, 말레이시아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 다수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면 가능한 한 자신이 무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종교의 자유 실태. 빨간색 국가들은 이슬람에서 타종교로 개종했을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사형에 처하는 국가들, 갈색 국가들은 개종했을 경우 징역형에 처해 감옥에 보내버리거나 무슬림 남성과 이교도 여성의 결혼을 금지하고 비무슬림의 양육권을 박탈해버리는 국가들, 주황색 국가들은 무슬림을 타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불법인 국가들이다. 터키 같은 특수한 세속 국가나 중앙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들, 그리고 타종교인 비율이 높은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적인 종교의 자유 개념이 아예 없다. 오히려 (비무슬림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형식적으로나마 보장해주는 이슬람권 국가들마저 소수인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쿠란에 씌여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타종교와의 평화 공존 원칙이란?
과거에나 현재에나 쿠란에 씌여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타종교와의 평화 공존 원칙이란?
- 무슬림이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려 하든 말든 무슬림의 자유지만, 타종교인이 무슬림을 절대로 개종 시도해서는 안 되며,
- 이슬람 문화권 우위의 사회 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타종교인들은 이슬람 우위의 사회, 무슬림 가치관이 지배적인 사회를 철저히 존중하고 어떠한 신성모독도 하지 않으며,
- 타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대가로 무슬림에게 지즈야(인두세)를 납부하는 조건에서만 이슬람과 타종교의 평화와 공존을 어디까지나 철저한 무슬림 우월적 입장에서 허용해주는 것이다.
거기에다 상술했듯이 여기서의 '타종교'란 어디까지나 같은 일신교인 기독교, 유대교 정도이며 힌두교나 불교 등 다신교 성향의 종교와 무신론자들은 원리원칙대로라면 이슬람 율법에서 전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집단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종교의 자유 원칙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즉, 흔히 쿠란을 근거로 무슬림들이 제시하는 '평화와 관용' 원칙은 현대적 의미의 평화, 다종교 공존과 같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비무슬림들의 염원과 달리 여전히 많은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러한 전근대적 가치관과 종교 인식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무슬림들 사이에서 선민 사상이 뿌리박혀 있고 이는 걸프 산유국들의 근본주의 선교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기도 한다.
무슬림 남성이 기독교, 유대교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허용되나 무슬리마가 기독교, 유대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통념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남성우월적 가치관에 따라 이슬람 남성과 타종교 여성의 결혼을 전도의 일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무슬림 여성과 타 종교 남성의 결혼이나, 같은 이슬람이라도 종파나 국가가 다른 남성과의 결합은 반이슬람적이고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며 이것이 명예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국인 사랑한 이라크 여성 아버지가 살해 (한겨레) '명예살인' 영국 사회문제 (한겨레)
유럽에선 종종 샤리아를 유럽 법에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시위가 벌어지곤 하며, 특히 이슬람주의 정당의 자유가 보장받는 영국에서 그 빈도수가 높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무슬림 사회 일반에서 받아들여지는 샤리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둔 것이라, 선민 사상에 바탕을 둔 해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즉 극단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소위 '일반' 무슬림이 생각하는 샤리아의 가르침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의 가르침에 가깝다.
무슬림 남성이 기독교, 유대교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허용되나 무슬리마가 기독교, 유대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통념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남성우월적 가치관에 따라 이슬람 남성과 타종교 여성의 결혼을 전도의 일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무슬림 여성과 타 종교 남성의 결혼이나, 같은 이슬람이라도 종파나 국가가 다른 남성과의 결합은 반이슬람적이고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며 이것이 명예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국인 사랑한 이라크 여성 아버지가 살해 (한겨레) '명예살인' 영국 사회문제 (한겨레)
유럽에선 종종 샤리아를 유럽 법에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시위가 벌어지곤 하며, 특히 이슬람주의 정당의 자유가 보장받는 영국에서 그 빈도수가 높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무슬림 사회 일반에서 받아들여지는 샤리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둔 것이라, 선민 사상에 바탕을 둔 해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즉 극단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소위 '일반' 무슬림이 생각하는 샤리아의 가르침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의 가르침에 가깝다.
실제 프랑스 거주 35세-44세 무슬림들의 20%, 18-24세 무슬림 청년들의 27%, 영국 전체 35세-44세 무슬림들 중의 11%가 ISIL을 옹호하거나 지지했다. 참고로 이 수치는 파키스탄 같은 극단주의 이슬람 나라의 국민적 조사의 ISIL 호감 수치보다 높은 것이다(!). 거기다 더 답이 없는 충격적인 현실은 ISIL의 막장 행각(이교도에 대한 성노예화, 무수한 학살, 기독교 및 야지디 박멸, 세속 문화 파괴, 전통유산 파괴 등)들이 세계 언론들을 타고 적나라하게 알려지자, 오히려 그걸 보고 ISIL에 대한 무슬림들의 지지도가 예전보다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샤리아를 서구 국가들의 법에 적용시켜서 무슬림의 도덕규범을 반영하라는 것인데, 여기엔 일방적인 무슬림 선민 사상이 들어가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현대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다른 영국인들로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반응을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 중에는 샤리아 법을 법 전체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일정한 구역을 추장국(Emirate)으로 만들어 그 안에선 샤리아 법만 적용시킬 수 있게 하라는 것이어서, 이에 따라 반이슬람 시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등 마찰과 대립이 커지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샤리아를 서구 국가들의 법에 적용시켜서 무슬림의 도덕규범을 반영하라는 것인데, 여기엔 일방적인 무슬림 선민 사상이 들어가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현대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다른 영국인들로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반응을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 중에는 샤리아 법을 법 전체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일정한 구역을 추장국(Emirate)으로 만들어 그 안에선 샤리아 법만 적용시킬 수 있게 하라는 것이어서, 이에 따라 반이슬람 시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등 마찰과 대립이 커지고 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선 샤리아 요구 시위를 하지를 않나, 세속적 광고판에 먹칠을 하고, 자기네 거주지를 멋대로 샤리아 구역으로 선포하는 전단지를 도배하고 다니고, 독일과 동런던 등지에서는 이들이 임의로 '무슬림 자경단'을 구성하여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샤리아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다니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드는 식의 사건들까지 발생하며 유럽권에서 반이슬람을 넘어선 혐이슬람 기류 조성에 힘을 싣고 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중앙아시아나 유럽 지역 밖의 무슬림들의 종교적 자유에 관한 인식은 심각한 편. 가령 샤리아를 국법으로 하는 것을 지지하는 무슬림의 비율이 그래도 이슬람권에서는 제일 세속주의적이라는 카자흐스탄(10%)이나 터키(12%)에서도 10%대였으며, 중동권으로 가면 레바논(29%)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에서 과반수를 넘겼고 심지어 이라크(91%)나 아프가니스탄(99%) 같은 곳에서는 90%를 넘어갔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중앙아시아나 유럽 지역 밖의 무슬림들의 종교적 자유에 관한 인식은 심각한 편. 가령 샤리아를 국법으로 하는 것을 지지하는 무슬림의 비율이 그래도 이슬람권에서는 제일 세속주의적이라는 카자흐스탄(10%)이나 터키(12%)에서도 10%대였으며, 중동권으로 가면 레바논(29%)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에서 과반수를 넘겼고 심지어 이라크(91%)나 아프가니스탄(99%) 같은 곳에서는 90%를 넘어갔다.
말레이시아(86%)나 인도네시아(72%)와 같이 흔히 개방적이라고 알려진 나라들에서도 극단주의 성향의 나라들과 별다를 바 없는 압도적인 비율이었는데, 실제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은 와하비즘과 극단주의가 퍼지며 수구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꾸란에서는 기독교인, 유대인, 사비교인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계시가 담긴 구절들이 있다. 이에 따라 이슬람 온건파는 타 종교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 과격파에서는 해당 구절이 오직 예언자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기 이전의 경우에만 해당하며, 오늘날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전부 다 지옥에 갈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비교란 딱히 특정 종교나 종교 신자들을 부르는 말이 아니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인데, 아랍인 다신교도들이 보기에 무슬림들은 유일신 신앙에 따라서 단 한 분의 신만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무슬림들을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앗 사비이운”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슬람이 팽창하고 나서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온 그리스 고대 철학을 숭상하는 이교도 공동체가 이슬람 제국 안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자신이 “사비교인”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보장받았다.
꾸란에서는 기독교인, 유대인, 사비교인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계시가 담긴 구절들이 있다. 이에 따라 이슬람 온건파는 타 종교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 과격파에서는 해당 구절이 오직 예언자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기 이전의 경우에만 해당하며, 오늘날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전부 다 지옥에 갈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비교란 딱히 특정 종교나 종교 신자들을 부르는 말이 아니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인데, 아랍인 다신교도들이 보기에 무슬림들은 유일신 신앙에 따라서 단 한 분의 신만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무슬림들을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앗 사비이운”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슬람이 팽창하고 나서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온 그리스 고대 철학을 숭상하는 이교도 공동체가 이슬람 제국 안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자신이 “사비교인”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종교가 타 종교 탄압 사례,
이슬람 초기에는 그 이후의 시대보다 소위 "성서의 백성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중세 말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는 몽골이 서부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들어닥치고 무슬림 세계가 큰 혼란에 빠졌던 것을 계기로 하여, 이슬람 지성계와 일반 민중 모두 타 종교에 대하여 보다 비타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유대교나 기독교가 일반적인 다신교나, 계통이 같지 않은 일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들 역시 신의 진리를 저버린[138] 불신자로서 이슬람의 깃발 아래 무릎꿇리고 강제로 개종시켜야 할 지하드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피차일반이었다.
오스만 시절에는 정교회 성당을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만들지 못하게 했고 문을 매우 낮게 만들도록 하여 성당 문을 반지하식으로 만들었다.(정교회 신자들에게 기다시피 성당으로 들어가게 하여 굴욕감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은 레반트 지역의 아랍 기독교인 상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술탄에게 무언가 불만이 생기거나 하면 분풀이로 상습 약탈을 가하였다. 또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기독교인 대학살 사례로는 오스만 투르크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유대교나 기독교가 일반적인 다신교나, 계통이 같지 않은 일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들 역시 신의 진리를 저버린[138] 불신자로서 이슬람의 깃발 아래 무릎꿇리고 강제로 개종시켜야 할 지하드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피차일반이었다.
오스만 시절에는 정교회 성당을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만들지 못하게 했고 문을 매우 낮게 만들도록 하여 성당 문을 반지하식으로 만들었다.(정교회 신자들에게 기다시피 성당으로 들어가게 하여 굴욕감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은 레반트 지역의 아랍 기독교인 상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술탄에게 무언가 불만이 생기거나 하면 분풀이로 상습 약탈을 가하였다. 또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기독교인 대학살 사례로는 오스만 투르크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과 교역했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같은 기독교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선호하였다. 서구 열강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간의 경제 교역이 늘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입지도 점점 강화되었다. 서구 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빈발하는 한 가지만으로도 서구 열강과 같은 종교를 믿는 소수자였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위험해질 요인이 다분했으며, 무엇보다 이들이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세에 맞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제국 내 무슬림들의 질투가 이들에게 몰린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근본 원인이었다.
불교는 불상을 우상숭배로 보아 불교 유적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뒤따랐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 대학이었던 날란다 대학이 무슬림들에 의해 함락당해 파괴된 사건은 불교사 내에서도 인도 불교의 몰락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는 불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있었다는 속설은 부정되고 있는데, 쿠샨 왕국과 파르티아에서 번영했던 중동의 불교는 서기 3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면서 적극적인 훼불 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기세가 많이 꺾인 상황이었다.
불교는 불상을 우상숭배로 보아 불교 유적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뒤따랐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 대학이었던 날란다 대학이 무슬림들에 의해 함락당해 파괴된 사건은 불교사 내에서도 인도 불교의 몰락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는 불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있었다는 속설은 부정되고 있는데, 쿠샨 왕국과 파르티아에서 번영했던 중동의 불교는 서기 3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면서 적극적인 훼불 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기세가 많이 꺾인 상황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융성했던 사마르칸드, 발흐, 부하라의 불교 사원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그대로 개조되고 불교의 출가자 체계가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을 보면 중앙아시아의 불교 신자들이 엘리트 계급부터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보통 외부인들이 힌두교나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진 계급 사회에 들어가면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인도에 새로 진출하는 부족들 같은 경우에는 불교로 개종했던 경우가 많았다. 이슬람이 유입되자 인도로 무력을 진출하는 부족들은 평화적인 불교보다 성전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이 덕분에 인도의 불교는 결정적으로 쇠퇴하고, 그 대신에 인도는 힌두교가 득세하는 곳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권과 강력하게 유착되어 있던 종교였으나, 사산조가 무너지고 나서 발원지인 페르시아에서 망했어요. 오히려 조로아스터교에서 갈라져 나온 마니교, 마즈타크교등의 신흥 종교들이나 페르시아 내에 잔존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적극 저항했지만, 정통파 조로아스터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다. 페르시아의 뒤를 잇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는 현재 15만여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고 그나마도 쉬아파 극단주의 세력의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에 맞서 심지어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하에서도 포교행위를 한 마니교의 경우에는 이슬람에 의해 '잔다크'(사악한 이단)라 불리우며 적극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마니교는 그나마 간신히 잔존이라도 한 종교들과 다르게 조직적인 학살과 박해로 결국 사멸하고 만다.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전통 종교들도 역사적으로 이슬람에게 어마어마하게 탄압받은 역사가 있다. 전근대 인도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출신 유목민들의 꾸준한 침략과 정착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중세 이후 힌두교의 역사는 북인도에 한정해서 무슬림 유목민들에 의한 탄압과 제노사이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대신 인도의 남부는 무슬림 유목민의 침략에 보다 자유로웠는데, 덕분에 똑같은 힌두교도라 하더라도 북인도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무슬림 유목민의 꾸준한 인도 침략은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들이 중국으로 침입하던 역사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힌두교 박해,
인도에서는 이슬람 왕조의 침략 때마다 수십만이 학살당하고 더 많은 수가 노예로 끌려가고 힌두교 신상과 신전들이 수도없이 박살났고,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가즈나 조의 마흐무드가 힌두교 신상을 파괴해서 모스크의 계단으로 재활용한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이슬람에서는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신자들을 교리상으로는 타협하여서는 안되었지만 인도의 비이슬람 인구수가 넘사벽이기 때문에 다른 다신교 민족들처럼 닥치고 학살+정복 및 강제 개종으로 이슬람화 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물론 지속적인 힌두교도와의 전쟁, 이슬람 왕조의 난립속에 학살은 계속되었지만) 전근대의 인도 사회는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산업이 분업화된 사회였고, 무굴제국의 무슬림 위정자들은 이러한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부를 항유하기 위하여 인도의 힌두교와 힌두교인들을 이슬람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용인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조로아스터교는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권과 강력하게 유착되어 있던 종교였으나, 사산조가 무너지고 나서 발원지인 페르시아에서 망했어요. 오히려 조로아스터교에서 갈라져 나온 마니교, 마즈타크교등의 신흥 종교들이나 페르시아 내에 잔존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적극 저항했지만, 정통파 조로아스터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다. 페르시아의 뒤를 잇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는 현재 15만여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고 그나마도 쉬아파 극단주의 세력의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에 맞서 심지어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하에서도 포교행위를 한 마니교의 경우에는 이슬람에 의해 '잔다크'(사악한 이단)라 불리우며 적극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마니교는 그나마 간신히 잔존이라도 한 종교들과 다르게 조직적인 학살과 박해로 결국 사멸하고 만다.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전통 종교들도 역사적으로 이슬람에게 어마어마하게 탄압받은 역사가 있다. 전근대 인도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출신 유목민들의 꾸준한 침략과 정착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중세 이후 힌두교의 역사는 북인도에 한정해서 무슬림 유목민들에 의한 탄압과 제노사이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대신 인도의 남부는 무슬림 유목민의 침략에 보다 자유로웠는데, 덕분에 똑같은 힌두교도라 하더라도 북인도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무슬림 유목민의 꾸준한 인도 침략은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들이 중국으로 침입하던 역사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힌두교 박해,
인도에서는 이슬람 왕조의 침략 때마다 수십만이 학살당하고 더 많은 수가 노예로 끌려가고 힌두교 신상과 신전들이 수도없이 박살났고,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가즈나 조의 마흐무드가 힌두교 신상을 파괴해서 모스크의 계단으로 재활용한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이슬람에서는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신자들을 교리상으로는 타협하여서는 안되었지만 인도의 비이슬람 인구수가 넘사벽이기 때문에 다른 다신교 민족들처럼 닥치고 학살+정복 및 강제 개종으로 이슬람화 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물론 지속적인 힌두교도와의 전쟁, 이슬람 왕조의 난립속에 학살은 계속되었지만) 전근대의 인도 사회는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산업이 분업화된 사회였고, 무굴제국의 무슬림 위정자들은 이러한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부를 항유하기 위하여 인도의 힌두교와 힌두교인들을 이슬람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용인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대표적으로 악바르 대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도의 자이나교는 유일신 신앙을 철저하게 반대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이지만, 자이나교 신자들은 무슬림이 다스리는 무굴 제국 하에서 상업을 장악하며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은 결국 광신적 무슬림인 아우랑제브 황제의 비무슬림도 인두세 부활 및 힌두교와 각종 인도 전통종교 핍박, 무수한 이슬람 개종 강요 등으로 인해 힌두교도의 거대한 반란까지 일어났고, 그걸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으로 억누르며 힌두교 및 인도 비무슬림 박해를 계속했다. 그러다 결국 대영제국이 무굴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에 넘사벽 힌두교와 세력위치가 뒤바뀌어 도로 이슬람이 비주류 소수파로 차별받는 위치가 되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토속신앙도 주 탄압의 대상이 되는데, 토속 신앙을 믿는 동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은 종교가 없으므로 인간이 아니다는 논리로(...) 많은 수가 노예로 납치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안에서의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가톨릭과 개신교)도 탄압의 대상이 된다.
이슬람 쉬아파에서 갈라져나온 드루즈교, 알라위파 같은 경우는 원래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많은 박해를 받던 종파였으나 오늘날에는 시리아의 드루즈교인들은 알라위파와 힘을 합쳐 순니파에 대항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알라위파와 드루즈교인들은 아예 이스라엘군에 복무한다. 마찬가지로 바하이교의 경우도 이슬람 쉬아파에서 갈라져나온 종교인데 현대 신흥 종교를 모조리 사이비 종교 취급하는 이슬람계 특성상 많은 탄압을 받고 있다.
이슬람 순니파와 힌두교 교리가 융합된 시크교는 초창기에는 무슬림 중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있었으나, 무굴 제국으로부터 이단 취급받고 숱한 학살과 박해받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고, 이후 이슬람과의 적대감이 계속 심해진 나머지 시크교인의 상당수는 아예 할랄 방식으로 도축된 고기를 전부 시크교 율법 상 금지시켜버리고 시크교 방식으로 따로 도축한 동물의 고기만 먹도록 율법을 바꿨다. 오늘날에도 시크교도와 파키스탄 무슬림들은 서로 과거사 문제로 이를 갈고 있는 사이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흐마디야 교파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슬람에서 같은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심한 박해와 따돌림을 가하고 있다.
현재도 대표적인 신정 국가 이란과 또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이집트, 파키스탄과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아체나 말루쿠, 수마트라를 비롯한 대다수 중동 및 이슬람권에서는 야지디교인이나 만다야교인들 기독교인들, 조로아스터교인 등 소수종교에 대한 사적인 차원에서의 각종 집단 괴롭힘과 폭력, 테러, 종교시설 방화가 빈발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중이다.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슬람에 의한 타 종교 탄압과 학살의 역사는 근대 이후 굉장히 온건해지고 순화된 여타 종교와는 달리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이슬람권이 세계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타 종교 탄압의 강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소수파에 대한 일방적 학살과 테러 역시 갈수록 제노사이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해져 가고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 이슬람 사회에서 이교도나 소수파들이 받는 억압과 탄압과 박해의 강도는 이슬람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고 평가되는 중세와 근대에 비해 오히려 더욱 악화된 실정이다. 심지어 같은 이슬람이라고 할 지라도 사상이나 종파가 소수종파이면 타 종교에게처럼 가혹한 탄압을 한다. 이슬람이 현대 사회에서 자행하는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인 타 종교 박해와 배척, 그리고 학살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곳도 옹호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의 이슬람이 비난받는 이유는 이러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토속신앙도 주 탄압의 대상이 되는데, 토속 신앙을 믿는 동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은 종교가 없으므로 인간이 아니다는 논리로(...) 많은 수가 노예로 납치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안에서의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가톨릭과 개신교)도 탄압의 대상이 된다.
이슬람 쉬아파에서 갈라져나온 드루즈교, 알라위파 같은 경우는 원래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많은 박해를 받던 종파였으나 오늘날에는 시리아의 드루즈교인들은 알라위파와 힘을 합쳐 순니파에 대항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알라위파와 드루즈교인들은 아예 이스라엘군에 복무한다. 마찬가지로 바하이교의 경우도 이슬람 쉬아파에서 갈라져나온 종교인데 현대 신흥 종교를 모조리 사이비 종교 취급하는 이슬람계 특성상 많은 탄압을 받고 있다.
이슬람 순니파와 힌두교 교리가 융합된 시크교는 초창기에는 무슬림 중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있었으나, 무굴 제국으로부터 이단 취급받고 숱한 학살과 박해받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고, 이후 이슬람과의 적대감이 계속 심해진 나머지 시크교인의 상당수는 아예 할랄 방식으로 도축된 고기를 전부 시크교 율법 상 금지시켜버리고 시크교 방식으로 따로 도축한 동물의 고기만 먹도록 율법을 바꿨다. 오늘날에도 시크교도와 파키스탄 무슬림들은 서로 과거사 문제로 이를 갈고 있는 사이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흐마디야 교파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슬람에서 같은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심한 박해와 따돌림을 가하고 있다.
현재도 대표적인 신정 국가 이란과 또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이집트, 파키스탄과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아체나 말루쿠, 수마트라를 비롯한 대다수 중동 및 이슬람권에서는 야지디교인이나 만다야교인들 기독교인들, 조로아스터교인 등 소수종교에 대한 사적인 차원에서의 각종 집단 괴롭힘과 폭력, 테러, 종교시설 방화가 빈발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중이다.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슬람에 의한 타 종교 탄압과 학살의 역사는 근대 이후 굉장히 온건해지고 순화된 여타 종교와는 달리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이슬람권이 세계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타 종교 탄압의 강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소수파에 대한 일방적 학살과 테러 역시 갈수록 제노사이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해져 가고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 이슬람 사회에서 이교도나 소수파들이 받는 억압과 탄압과 박해의 강도는 이슬람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고 평가되는 중세와 근대에 비해 오히려 더욱 악화된 실정이다. 심지어 같은 이슬람이라고 할 지라도 사상이나 종파가 소수종파이면 타 종교에게처럼 가혹한 탄압을 한다. 이슬람이 현대 사회에서 자행하는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인 타 종교 박해와 배척, 그리고 학살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곳도 옹호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의 이슬람이 비난받는 이유는 이러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타 종교 및 국가의 이슬람 탄압 사례,
- 16세기에도 이렇게 숨슬람하는 사람들이 아랍어나 스페인어로 많은 이슬람 저작을 남기고 스페인 각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었다. 이후 스페인 왕실은 이렇게 개종한 무슬림인 모리스코들조차 못미더워해서 기독교 코스프레 의혹을 제기하며 이슬람풍 복식 금지, 식생활 금지, 아랍어 출판 금지, 아랍어 사용 금지를 했으나 명목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 출신자들을 대놓고 갈구는데다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무슬림들에게 중노동 중과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주민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1600년대 초반에 개종자를 포함한 무슬림 후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강제 추방되었고 안달루시아 지역의 농업이 잠시 황폐화되었다.
- 프랑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통치는 어떻게보면 소련의 식민통치보다 더 악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나름 평등한 입장에서 대우하고자 한 소련과는 다르게 프랑스의 경우에는 자국민들에게는 인권과 민주, 학문을 강조하면서 정작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에서의 아랍인들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6%가 나올 정도로 철저한 우민화와 차별을 시행하였다. 원래는 알제리가 프랑스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프랑스 군인들보다 정복당한 알제리인들의 문해율이 더 높았었다 한다. 알제리 전쟁 문서를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은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거와 매우 유사한 양상이다.
이 쪽은 이슬람과 기독교를 탄압하는 대신에 이슬람에서 갈라져나온 드루즈교 같은 소수 종파는 우대해주고 있다.
- 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에서는 힌두교 신자와 무슬림들이 모두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국 식민 지배 시절 힌두교 신자들이 미얀마인들을 불가촉천민 취급하며 무시했고, 무슬림들은 자금력을 이용해서 미얀마 여자들을 현지처로 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것. 미얀마 정부의 묵인 하에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 등 소수민족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해당 문서에 나오다시피 로힝야족이 마냥 무결한 피해자라고 보긴 뭐하지만... 사실 그러나 미얀마에선 카친이나 카렌, 아라칸, 친, 샨족 등 비이슬람 계열 소수민족 부족들에 대한 박해와 억압도 지속되고 있다.
- 중국의 유교: 근대부터 중국의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있지도 않은 천당과 지옥을 가지고 민중들을 농락한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으며, 불교를 혹세무민의 종교라고 비판했었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관은 불교처럼 천국과 지옥 관념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와 이슬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 고려 시대에 들어와 개성에 살던 이슬람인 집단은 조선의 강력한 성리학 진흥 정책 속에 깡그리 동화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무슬림들은 무조건 한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혼혈법이 정해졌다.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는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는 않지만 무슬림이었던 조상들한테 제사 지내는, 사실상 한족이나 다름없는 회족들이 많이 존재한다. 무슬림은 중국에서 나름 사회 상류층에 많이 진출해 있었으나, 18세기 무렵 자흐리야 교단이라는 수피즘 분파의 폭동을 계기로 청나라 조정이 회족들에 대해 억압 정책을 펴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원나라때까지는 중국 무슬림들이 부유한 무역상이었다면, 명나라가 지나고 청나라 시절에 이르면 무슬림들은 가난한 도축업자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힘을 잃어버렸다. - 과거 중국의 무슬림들은 이슬람 교리와 유교와의 공통점을 찾는 형태로 조화를 추구하였으나, 무슬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이후에는 원리주의적이고 공격적인 교리가 회족 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19세기 간쑤성, 섬서성에서 대규모 회민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 전 백만명 단위로 밀집해 있던 해당 지역 회족은 진압 후 거의 다 죽거나 흩어져서 현재는 수가 급감하였다. 현재 중국에 있는 회족들이 대단위로 이주해 왔던 아랍 무슬림들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외양에서 한족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은 명나라 때부터 이루어진 혼혈 정책 및 청나라 때 교세를 늘리겠다고 한족 고아들을 입양한 정책 때문이다. 한편 청나라 조정은 19세기 회민 반란 진압을 위한 경비 지출로 인해 19세기 중반 발생한 대기근을 대처하지 못해 화북 지방에서 2천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현대 중국의 탄압: 2018년 8월 8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부 지역에서 모스크 폐쇄에 반대하기 위해 무슬림 3만 명이 참여했던 시위를 통해 중국이 ‘위구르족 분리주의’뿐만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소탕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방증됐다. “그들이 후이족을 잡으러 왔을 때” : 이슬람 박해 전면화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동투르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요구하며 중국의 라이벌인 미국을 대상으로 외교에 주력하고 티베트 망명정부와도 협력하는 탓에, 중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는 과정이 드러나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인들은 자원 체굴이나 관광 등에서 중국인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 때문에, 중국인 평균 소득의 절반도 안되는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 오늘날 반케말주의 성향의 이슬람 지식인들이 득세하는 것도 그 당시 세속주의 정책이 터키인들에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 1980년 케난 에브렌 장군의 군사쿠데타 이후로는 교육장소에서 히잡이나 종교적 상징을 하고 다니거나, 공무원이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완전히 금지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오늘날 터키의 학교들은 종교학교인 이맘 하팁학교조차도 남녀공학이 원칙이며, 2000년까지 히잡을 쓰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터키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행함에 따라 세속주의는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이 2015 총선에서 패배한 것을 보면 아직은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앙골라 - 이슬람을 금지했다고 한다. 적어도 모스크를 폐쇄하는 등 탄압 정책을 펼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참조항목
라마단, 무함마드, 메카, 미나레트, 사다카, 샤리아, 수나, 수니파, 수피즘, 술탄, 시아파, 아잔, 알라, 예루살렘, 와하브파, 움마, 이드알아드하, 이드알피트르, 이맘, 지하드, 핫즈, 헤즈볼라
역참조항목
골콘다 왕조, 교단, 나세르주의, 나스르 왕조, 알라위파, 다룰이슬람, 단식
카테고리
- 종교 > 이슬람교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교 [Islam] (두산백과)
[이슬람교 [Islam, ─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7)
[이슬람사상사』(김정위, 민음사, 1987)
[이슬람교」(김정위, 『한국인의 종교』, 정음사, 1987)
[이슬람철학사』(앙리 코르방, 김정위역, 대광문화사, 1986)
[이슬람문화사』(김정위, 문학예술사, 1981)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교 [Islam, ─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교 [Islam] (천사, 2000. 3. 31., 마노 다카야, 신은진)
[엄마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 = yutube/ 동영상볼수있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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