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1일 토요일

박정희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
논바닥에서 펑펑 울던,
박정희전 대통령출생-사망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 - 1979년 10월 26일가족배우자 육영수, 딸 박근혜, 딸 박근령, 아들 박지만수상1963년 무궁화대훈장경력1978.12~1979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1972.12~1978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197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독재 업적
박정희 대통령 > 새마을운동/ 10.26사태,
전두환 대통령 > 5.18민주화운동,
5-9대 대통령 : 박정희 ( 1963년 ~ 1979년 )

5-7대는 직선/ 8-9대는 간접선거/ 강력한 리더쉽/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새마을운동,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농어촌 환경정비사업을 첫 단계로 한 농어촌의 새마을운동은 지붕개량·주택개량·농로개설·마을도로확충·하천정비·전기화사업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동(洞)·이(里)에 시멘트를 무상 지급함으로써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여, 볏짚지붕의 슬레이트 대체, 담장보수, 마을 진입로 정비 등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72년부터 주민지도자를 발굴, 훈련시킴으로써 낙후된 주민의 정신을 계도시켜 나갔고, 농어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정희 대통령,

도시,
도시새마을운동은 10대 구심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법질서의 준수, 건전소비풍토 조성, 도시녹화, 뒷골목과 가로 정비,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 생활오물분리수거, 시장새마을운동 전개, 도시환경개선, 낙후지역개발 등이 그것이다. ​

이와 같은 도시새마을운동 추진은 지역·부녀·공장·학교새마을운동 등으로 조직화되면서 점차 정부 주도를 탈피하였으며, 80년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설립과 함께 민간주도로 전환되었다.

성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앞서 언급했던 점 외에도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소득증대사업으로서는 영농의 과학화, 농가부업의 육성, 농산물가격보장, 새마을공장·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근로자 후생복지제도 및 시설확충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체계하의 농촌을 단기간 내에 현대적인 것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했다는 점이 특기할 성과라 할 것이다.

부정적영향: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성과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으나, 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자 농축산물 가격하락, 돼지파동, 쌀수매가 동결 등이 겹쳤고, 내무부가 새마을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하였다. 여기에 제 5 공화국이 들어서자 이 운동을 이용한 온갖 부정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침체되었다.

*1.21 사태,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 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향토예비군-향토방위를 위하여 조직된 한국의 비정규군.
*10.26사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을 종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20일 경남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건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車智澈)을 살해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그의 견제로 김재규가 진퇴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의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신체제-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
@위수령-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軍紀)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大統領令).

10대 대통령 : 최규하 ( 1979년 ~ 1980년 )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실권 없는 대통령, 군부에 의해 하야.
11-12대 대통령 : 전두환 ( 1980년 ~ 1988년 )

간선제. 강력한 리더쉽, 부정축재자, 경제안정에 기여한 대통령.​

*5.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등의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박정희, 전두환, 김정일,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나아가 불의의 독재를 거부하는 민주화운동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은 유신체재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여 끝내 그 체제를 붕괴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으며 50년만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결국 5·18은 과거의 역사적인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자주·민주·통일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민주주의 발전사를 빛낸 민권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민국역대 대통령,

*88올림픽유치,
​79년 정부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정식 발표한 기자회견이 있은 18일 뒤 <10.26사태>가 일어났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타계하자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다. 올림픽 유치계획을 구체화하는데 앞장선 박종규 위원장이 체육계 일선에서 밀려났다. 이어 올림픽 개최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올림픽 유치 계획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터다. 새로 소집된 KOC(Korean Olympic Committee)대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는 국가의 대외이미지 개선과 대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유치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88올림픽 개최는 사실 전두환 대통령의 3S(SCREEN, SPORTS, SEX)정책의 일환이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82년 새로 출범하게 될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로 쏠렸다. 올림픽을 치르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언론의 목소리는 국민들을 쉽게 현혹시켰다. 올림픽개최지의 국민이 된다는 기대감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소비심리의 확대로 이어져 경제규모를 급속히 성장시켰다. 88올림픽은 전두환 정권의 유지를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독재 업적,
​새마을운동/ 10.26사태/ 5.18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평가,

경 제​,
엄청난 경제발전의 바탕을 이룸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61년 21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79년 616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늘었다.
수-출입을 합한 교역규모는 3억6000만 달러에서 354억 달러로 100배나 증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다. 수출을 통한 대외지향적인 경제성장 전략의 성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북한과의 대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61~1979년 사이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서 1647 달러로 20배 이상 급증하는 동안 북한은 125 달러에서 720 달러로 6배 정도 늘어나데 그쳐 남-북한의 경제력은 완전히 역전됐다.

박 대통령의 18년 통치기간은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경제지표의 양적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 70년대 후반의 중화학 공업화는 이후 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으로 결실을 맺으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으로 진입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

정부는 국내 재정의 부족을 보충하려고 외자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부는 공공 차관뿐만 아니라 민간 차관까지, 즉 모든 해외 차관을 정부가 지급 보증한다는, 외국에 그 예가 없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박정희는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은 기술과 선진 경영 기법의 습득 및 해외 시장 진출에서 득이 훨씬 많다는 신념 아래 이를 지지하였다. 특히 우방의 대기업의 직접 투자는 국가 안보상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정부는 외국 차관의 도입을 효율적으로 건전하게 관리했으며 외채 관리도 매우 잘 했으므로 일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국내 자본의 해외 도피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정희는 자기 스스로 5개년 계획상의 공공·민간을 불문하고 모든 사업의 진도를 항상 점검했다. 5개년 계획은 매년 심사 분석되고 수정되었으며, 관계 부처는 자기 소관의 연차별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하였다.

한국 경제는 자유시장경제이지만 5개년 경제발전계획의 집행에 있어서는 계획경제의 특징을 약간 띠고 있었다. 또한 한국 경제의 기본은 사유기업제도였고, 공기업들은 기간산업 및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개발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화학공업화 - 수출증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경공업 중심 수출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고 경제가 불황에 처하자 박정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 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사이의 상 호연계성을 보완하여 한국의 수출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향 으로 제3차 계획을 작성했다.​

정부는 1965년부터 수출특화산업중점육성책을 세웠으며 한국 상 품의 국가 경쟁력과 기업의 체질 강화를 위하여 그간 수입 대체 또는 유치산업 보호를 위하여 실시하고 있던 저금리와 과대 평가된 환율의 현실화와 수입의 자유화를 단행하여 이후의 수출신장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수출은 국력의 총화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박대통령은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사진)를 주최하여 수출실적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해결해나가며 정책을 제도화해 나갔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불이라는 결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국력배양은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 이며, 이는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박정권의 의지 때문이었다.

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한일협정체결이 경제에 미친 영향,
한일협정(韓日協定)의 체결로 한국으로 흘러들어온 대일 청구권 자금이 한국의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하는 주요자금원이 되어 경제적 기적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건국 후 미국이 한국의 안전보장을 보호해주고 식량·의류 등 생필품을 대주는 데 기여하였다면 한국의 산업화의 자금과 기술은 상당부분이 일본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 미국·일본에 종속적 발전을 가져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이 후진적 농업국가로부터 중진적 공업국가로 탈바꿈하는데 한일회담의 성사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새마을 운동 - 농촌의 발전
박정희는 군사쿠테타 성공 직후부터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중 농정책’을 내걸고 농촌의 지지를 획득하려 했다. 그러나 공업화 중 심의 경제개발정책의 결과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심화 되었 다. 박정권은 이러한 농촌의 열악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경제적의 이유로 하여 토양 개량, 경지 정리, 다목적 댐 건설을 비롯한 수리 시설의 확충, 영농의 기계화, 다수확 미곡 종자의 개발, 온상 재배 보급,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중 곡가제, 단지별 농어민 소득 증대 특별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농촌 부흥의 결정적 요인은 박정희가 스스로 창시하여 농민들의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각성시킨 새마을 운동이었다.
박정희는 근면·자조·협동의 자각을 일깨우는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의 정치적 이용을 엄금시켰고 중점을 농민의 소득 증대에 두었다. 새마을 운동이 농민을 위한 잘 살기 운동이라는 것을 농민 스스로가 자각하고 믿게 되자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돼 나갔다.

​70년대 중반부터 농민 소득은 도시 근로자의 소득을 초과하게 되었고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새마을 운동 후 농민들의 저축 의식이 고조되어 드디어 1970년대 말에 가서는 농민들의 저축이 농협 대출 재원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사회·문화,
​새마을 운동,
박정희 시대가 남긴 사회 문화적 업적 중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그럼에 도 가장 주목해야 할 업적은 국민 모두에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근로의지를 불어넣은 것이다. 박정희 시대 이전까지 세계의 빈국이었던 우 리는 당시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가난을 타파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변변한 공업기반 조차 없이 식량의 자급자족조차 어려운 극빈 층이 국민의 다수였고 이들은 그저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을 것인 가 하는 단순히 먹는 문제조차 해결 못하여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국민들에게도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극대화되어 다시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킨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당시 성장 거점 정책으로 인해 발달한 대도시와 달리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 놓인 농촌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읍면단위로 벌인 생활 개선 운동이다. 정부는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해 각 읍면의 개선의지에 따라 차등하여 집중 지원하였으며 이는 우리 마을도 발전하고 싶다는 경쟁심리를 자극시켜 단기간에 경이적인 농촌발전 효과를 내었다.
새마을 운동의 효과는 다방면에서 나타났다. 우선 가시적으로 농촌의 교육과 문화환경이 개선되었다. 도로개발, 교량건설, 농가에 수도 설치, 지붕의 슬레이트화, 전기공급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구각에 매달리던 기존의 의식을 자립의지로 전환시켰다.
농촌주민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위해 마을공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해결하게 되고, 새마을지도자라고 하는 자신에게 성실하고 이웃에 묵묵히 봉사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였다. 또한 새마을회관을 주민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여 그곳에서 마을 일을 토론하였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보면 결국 새마을 운동이 민주주의의 생활화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근대적이고 진취적인 의식구조의 변화로, 주민간의 협동을 통한 집단적 노력의 엄청난 성과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있었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의 업적 뒤에는 정부의 올바른 방향 제시와 적극적 지원이 있었으며 이는 농촌출신 지도자가 농촌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 부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 치,
​베트남 파병
박정희가 쿠테타로 이루어진 정부이라는 이유로 미국은 그 동안 해오던 원조를 차단했다. 배고픔에 굶주렸고 일자리 또한 없었다. 경제성장, 우리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나 성장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대한민국뿐이다.​ 다른 나라처럼 땅을 파면 석유가 나오고 다른 쇠붙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우리나라는 땅을 파고 내다 팔 자원조차 없는 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외국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그 경제적 이유에 의해 베트남 파병도 결정하게 되었다.

전쟁터로 보내는 소수 인원을 보내면서 당신들이 가지 않으면 국민이 굶어서 죽게 됨을 그렇기에 역사가 쓸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파병을 하고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왼), 김재규, 박정희대통령,

국 방,
​자립경제 - 자주국방
박정희는 우리 국가에 관한 책을 애독하고 그 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우리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전통, 제도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무력침투를 대비하기 위해 국방역량을 꾸준히 배양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민족의 실현가능한 통일방법론을 정립하게에 이른다. “통일의 길이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라는 3단계 목표를 설정하여 우선 자립경제 건설을 주도하였다.

평화통일 문제
첫째, 박정희의 통일 안보정책정책은 북한의 무력적화노선에 대하 여 자주평화통일정책을 일관되게 운영하였다.

둘째, 평화통일의 실 현을 위한 방법으로 자주외교정책을 구축하였다.

셋째, 박정희의 평 화통일 기본 정책은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 을 마련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인간 박정희 - 리더십
박정희는 아침점심·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소박하였고 나라 경제를 염려하였다. 비록 그는 독재자였지만 그가 집권한 정권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시대,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못해 쓰레기가 넘쳐나는 지금 우린 그 시절 그 사람들에게 욕할 수 없다. 이렇게 그를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주인공에 올려놓았던 리더십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박정희는 한민족사가 혼미한 가운데 5·16군사혁명을 단행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소극적·타율적인 근대화로부터 적극적·자율적인 근대화로 기틀을 다져 나갔다.

​혁명 후 18년 5개월 동안 집권하면서 북한의 남침위협에 대응하면서 우선 남북한의 평화를 정착 시키고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구심운동의 중심에 박정희의 지도성이 있었다.

그분의 나라사랑 정신에 감사를.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
작금에 문제인 반일을 부추켜 정치적으로 이용할려고 하다 국가적인 낭패를 당하게된 짓거리를 보면서 진정한 극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나라의 위정자들은 꼭 읽고 성찰 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965년 한일회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역사적인 담화문을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읽어보며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껴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일국교정상화회담 결과에 대한 국민담화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어제 일본 동경에서 한일양국의 전권대표 사이에는 양국 국교정상화에 관한 제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어렵고도 커다란 외교 숙제였으며, 또한 내가 총선거 때에 공약으로 내건 바 있는 이 문제가 마침내 해결을 본 데 즈음하여,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평소 소신의 일단을 밝혀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얻고자 합니다. 한 민족, 한 나라가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국제정세와 세계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대세에 역행하는 국가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 오고야 말았는가는 바로 이조 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국제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은 국제공산주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어느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겨서는 안되지만, 더욱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손잡을 수 있고 벗이 될 수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내일의 조국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입니다. 더구나 중공의 위협이 나날이 증대하여 가고 있고, 국제사회가 이른바 다원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반세기 전에 우리가 겪은 민족의 수난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현명한 판단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아니 수백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속에서 지난 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함에 있어서 나와 현정부가 크게 배려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통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호혜평등, 협동, 전진의 앞날을 다짐하는 기본관계의 설정이었고, 다음으로는 대일평화조약에 규정된 청구권 문제, 한국 연안의 어족자원보호와 100만 어민의 장래를 보장하는 어업협정문제, 일본땅에 버려진 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60만의 재일교포의 처우문제, 그리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돌려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문제가 우리만의 희망과 주장대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제반여건과 선진제국의 외교관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데 선의를 다 했다는 사실입니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또 일방적 강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치와 조리를 따져, 상호간에 납득을 해야 비로소 타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한일간의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안전과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읍니다. 양국은 비단 지리적으로 가깝다든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극동의 같은 자유국가로서 공동운명의 길을 걷고 있읍니다. 이 공동의 관계는 호혜평등의 관계요, 상호협력의 관계이며 또한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한일 양국간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이 순간에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깊이 다짐할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이 더욱 확고해야 하겠다는 것이며, 아시아에 있어 반공의 상징적인 국가라는 자부와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협정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국적이라는 극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협상의 입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 것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러한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제부터는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민족국가가 새로이 부흥할 때는 반드시 민족 전체에 넘쳐흐르는 자신과 용기와 긍지가 있어야 하고 적극성과 진취성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불일치주의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자신은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민족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입니다. 응당한 노력을 지불함이 없이 공짜로 무엇이 되려니, 또는 무엇이 생기려니 하는 생각은 자신력을 완전히 상실한 비굴한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일부 국민들 중에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이러한 열등의식은 버려야 하는 동시에 이와 반대로 국교정상화가 되면 당장에 우리가 큰 덕을 볼 것이라는 천박한 생각도 우리에게는 절대 금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마디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바르고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굳으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고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문화인이나를 할 것 없이 국리민복을 망각하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일이 있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는 것을 2,700만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다같이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밝혀 둘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그대들간에 이루어졌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린으로써 다시 손을 마주잡게 된 것은, 우리 양국 국민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 선도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무조인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침통한 표정과 착잡한 심정으로, 과거의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이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두 나라 국민이 참다운 선린과 우방이 될 수 있고 없는 것은 이제부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체결된 협정문서의 조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그대들의 한국이나 한국 국민에 대한 자세와, 성의 여하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불신 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제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의 비준입니다. 물론 국회는 국회대로 충분한 논의를 하겠지만, 국민 여러분께서도 특별한 관심과 참여의식으로 이 문제의 마지막 매듭에 현명한 판단과 아낌없는 협조가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 않습니다.
1965년 6월 23일, 대통령 박정희,

출처 & 참고 문헌,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 업적 새마을운동 10.26사태 5.18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의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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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0일 금요일

12·12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叛亂 ]

12·12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叛亂 ]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주동하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이 일련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9사단장 노태우를 비롯하여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이다.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정승화 총장의 신변안전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裁可)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고, 그 외에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은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그 후로 12ㆍ12사태의 진상은 비밀로 묻혀 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사실규명에 나서 사법적 심판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되고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ㆍ노태우는 구속된다. 그 후 김영삼정부는 전두환ㆍ노태우를 특별사면 한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전두환 경남 합천 출생. 군인 출신으로 한국의 제11대,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군사정권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무력 진압함으로서 많은 시민들을 희생시키고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 경제면에서 기여한 바가 크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사법처리되었다. 
"전두환(全斗煥, 1931년 3월 6일 (1931년 음력 1월 18일) - )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

임기/ 국무총리/ 신상정보/ 출생일/ 출생지/ 거주지/ 정당/ 학력/ 별명/ 배우자/ 자녀/ 부모/ 서명/ 복무/ 복무기간/ 소속/  최종계급/ 지휘참전/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남덕우 (1980년 ~ 1982년)
유창순 (1982년)
김상협 (1982년 ~ 1983년)
진의종 (1983년 ~ 1985년)
노신영 (1985년 ~ 1987년)
김정렬 (1987년 ~ 1988년)
전임: 최규하(제10대)대통령
후임: 노태우(제13대)대통령
1931년 3월 6일 (89세)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민주정의당 (1980-1988)
무소속 (1988- )
육군사관학교 학사
호: 일해(日海)
자: 용성(勇星)
이순자
3남 1녀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군사 경력

육군 대위 시절의 전두환 (1959년)
대한민국 국군
1955년 2월 ~ 1980년 8월 22일
대한민국 육군
호: 일해(日海)
자: 용성(勇星)
 대장(大將)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파월 육군 백마부대 29연대장
1공수특전여단장
1사단장
국군 보안사령관
베트남 전쟁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3일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였으나, 활동 과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1997년 12월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노태우,

노태우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1979년 12월 12일
한국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
군사반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음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유형/ 시대/ 성격/ 발생/ 시작/ 일시/ 관련인물/ 단체/
사건
현대
군사충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 출생 ~ )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대장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崔圭夏)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12·12군사반란·12·12하극상·12·12쿠데타·12·12쿠데타적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대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정병주(鄭炳周, 특전사령관) 등을 중용하여 지휘계통을 개편하였으며, 10·26사태에 직접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하였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역할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가 4년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신군부)이 기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하게 되었던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게 한 대립의 쟁점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10·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하였으며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물론 정승화가 10·26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일 명백히 밝혀졌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뒤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하였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지휘하의 육군 수뇌부는 이 사실을 확인하여 전군(全軍)에 비상을 발동하고 합동수사본부측에 정승화의 원상회복을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미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였으며 9사단 병력 등은 중앙청으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하였던 육군수뇌부(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李建榮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文洪球 합참본부장)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되었다.

이와 같은 반란군의 정승화 연행과 병력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돈을 받는 등)을 발견하였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 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서 당시 전두환도 500만 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었다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실패한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鄭鎬溶)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미국은 12·12사태를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을 적절한 통고없이 사용한 데 대하여 한국 군부에 항의하였다.

12·12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건은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김영삼(金泳三)정부가 출범한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하였으며, 1994년 5월 13일 정동년(鄭東年) 등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에 같은 해 10월 29일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1995년 1월 19일에 헌법재판소에서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1월 16일 비자금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에 5·18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국민들의 요구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로 부응하였던 것이다.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12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12월 19일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사건 및 5·18사건, 비자금 사건 관련 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의 과정에서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정부이며, 내란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태우는 이 사건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재판부가 1997년 4월 17일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내란목적살인 행위였다고 단정함으로써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은 배척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 벌금 2626억 원 추징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양인 등은 석방되었다. → 십이륙사태, 오일팔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 처벌은?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졌고, 이에 김영삼 정부는 12·12 군사반란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다. 그리고 1994년 5월 13일에는 정동년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1994년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반면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1995년 7월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1월 비자금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와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그리고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 및 5·18, 비자금 관련 공판이 진행됐다.

그리고 1996년 12월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과 2,626억 원이 추징이 선고됐다. 이후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이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인 그해 12월 두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재판부는 1997년 4월 17일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 목적 살인행위였다."고 단정,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하극상,[ 下剋上 ] 
계급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부당한 방법으로 높은 사람을 물리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16세기)에는 중세적인 질서가 크게 파괴되었다. 중세적인 질서란 봉건적인 토지소유를 기초로 할거한 군사적인 지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통치자는 토지소유 귀족의 가이드맨이었던 무사군단이었다. 할거한 영지 내에 갇혀진 경제활동은 큰 구속이 되며, 통신, 교통 등의 기술 수준이 향상되어 시야에 넣은 큰 경제활동이 증가하였으며 또한 동아시아와의 교역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군사적 통일이 기도되어 그 대부분이 좌절된다. 그 과정 속에서 군사적인 강함과 개인의 명예만이 기준이 된다. ‘야-야-, 우리야말로 000씨 아무개의 혈통, 누가 뭐라 하든 장남’이라는 전투 개시의 구호가 있다. 지위가 낮아도 실력과 명예가 모든 것을 규정하였다. 여기에 아래가 위를 이기고 올라오는 현상이 발생한다. 나중의 시대에도 경쟁이 치열해져 지금까지의 경위라든가 전례가 경시되는 경우에는 하극상적인 상황이 된다.

참조항목,
전두환, 노태우, 5ㆍ18광주민주화운동, 제5공화국, 최규하, 쿠데타,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까치, 1987)
  • 「제5공화국 정치비사 2」(중원문화, 1987)
  • 「12·12쿠데타와 나」(명성출판사, 1993)
  • 『체제변동의 정치사회학』(한울출판사, 1995)
  • 『12·12, 5·18 실록』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1997)
  • 「신군부 권위주의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
  • 「군부 권위주의체제의 내부모순과 변화의 동학」(『한국 정치·사회의 새흐름』, 1986)
  • 『12·12와 미국의 딜레마』(존 위컴, 중앙 M&B, 1999)
  • 『알려지지 않은 역사』(윌리엄 글라이스턴, M&B, 1999)
  • [12·12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叛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두산백과)
  • [12·12 군사반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네이버 지식백과] 12ㆍ12사태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하극상 [下剋上]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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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480 [살맛 나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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