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일요일

노무현 대통령, 1

노무현 대통령, 1

노무현전 대통령출생-사망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 2009년 5월 23일가족배우자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형노건평학력부산상업고등학교수상2008년 무궁화대훈장경력2003.02~2008.0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사이트공식홈페이지,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노무현사료관,
노무현 대통령 부산상고 졸업장,
청남대에 처음 갔을 때,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졸업장이 전시되어 있길래 카메라에 담았다. 이 위대한 인물이 고교 졸업 후 37년하고도 이틀 뒤에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엄청난 인생역정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는 멋진 졸업장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밤을 새웠던 신영복 선생님은 5년 내내 청와대 초빙 강사 1순위였지만 끝까지 고사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부산상고 졸업장,
청와대의 요구에 임하는 순간 더 이상 1순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특유의 농담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보다 다섯 살 위인 신영복 선생님은 대통령의 고교 7년 선배였다. 대통령과 동갑인 삼성의 이학수가 1년 선배인 것 또한 소년 노무현의 가정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훗날 개성고등학교로 바뀌고 건물도 이전했지만 지금도 부산 롯데호텔 후문에는 옛 학교터 표석이 남아 있다. 봉하마을 <노무현의 집>에 걸린 '우공이산'과 '사람 사는 세상'은 물론 묘소에 새겨진 '민주주의 최후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처럼 그 또한 신영복 선생님의 직접 쓰신 글씨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생가,
김해 봉하마을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김해 봉하마을 은 노무현 대통령님이 태어나 고시에 합격한 후 법조인이 되어 떠나기 전까지 오랜 세월을 머무셨던 곳이에요. 투신하신 곳도 바로 이곳이었구요(ㅠㅠ)

봉하마을은 원래 조용한 마을이었으나 노무현 대통령께서 퇴임하시고 귀향하여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면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해요. 볼거리로는 대통령님이 퇴임 후 거주하던 사저와 생가, 전시관, 숲길과 공원, 자전거 대여소(자전거로 마을 산책 가능)등이 있는데 가볍게 둘러보는데만 1시간 정도가 소요됐으니 자전거 타고 봉하마을 막걸리까지 한잔하실 생각이라면 3~4시간 정도 잡고 방문하시면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이 곳은 노무현 대통령 의 어린시절 추억이 담긴 생가를 복원해놓은 곳이에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서 봉하마을을 떠나자 새 주인에 의해 양옥으로 개조됐었는데 김해시의 도움으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고 하네요. 달라진 점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꾼 정도. 대통령님은 생가를 복원하면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하되, 생가를 방문한 사람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박제되지 않고 사람들의 삶의 향기가 나는 쉼터가 되길 바랬다고 해요.
노대통령 추모기간동안 봉쇄되었던 시청앞 서울광장이 영결식날 겨우 열렸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책자를 보며 이동. 책자가 잘 되어 있어서 크게 헤매지 않고 둘러볼 수 있었어요.

이곳은 노무현대통령 님의 일대기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이에요. 기념관과 추모의 집이 함께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아저씨의 사진과 영상, 주요 유품과 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었어요. 화려하고 멋스러운 건물보다 가건물 식으로 지어진 이 곳이 더 친숙하게 느껴졌어요.
 노무현 대통령님 기타치는모습,
봉하마을 공영주차장 주변에는 산책하기 좋은 공원(산책로)도 마련되어 있었어요. 이번 가을에는 국내 여행도 많이 못가고..제대로 즐기지도 못한채 겨울을 맞이했는데, 여기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었어요.
봉하마을에 오면 엄청 한산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어요. 요즘 나라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더 많은 분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겠지요. 부산에서의 저녁 약속이 없었다면 막걸리에 맛있는 밥까지 먹었을텐데! 여유롭게 머물다 오지 못한 점이 아쉬웠어요.
노무현재단, 신영복 교수와 노무현 대통령 ‘우공이산’ 만남 공개,
노무현재단(이사장 이해찬)은 20일 지식인들로부터 ‘참스승’이라는 존경을 받았던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우공이산’에 관한 인연을 공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노무현재단은 “퇴임을 앞둔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신영복 교수와 만찬을 함께 했다”며...
거실에 걸른 '우공이산' 현재 모습.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의 닉네임을 '노공이산'이라 명했다,
노 전 대통령 묘비문 원본, 청와대 문 대통령 관저에 있다,
"고 신영복 교수가 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묘역 공사 관계자, 청와대에 최근 전달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의 관저에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비석 받침판에 적힌 고 신영복 성,
봉하마을 응접실에 걸린 '사람 사는 세상'도 신영복 선생님 글씨다,
노 대통령 유서에 나온 것처럼 비석도 아주 작은 비석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비석에는, ‘대통령 노무현’과 함께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만 적힌다고 한다. 역시 노무현 대통령답게 소박하지만 강렬하다.
50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충격적인 일을 많이 보아왔지만 노 대통령의 서거는 가장 큰 충격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한 때 인터넷 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타살설이 음모론과 함께 그럴듯한 추리소설화 되어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노무현대통령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청난 상실감을 그렇게라도 해서 채우려는 마음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추측성 음모론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인생이 허무해져서 스스로 죽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우리 국민들을 강하게 소리쳐 깨우고 싶었고 지금까지 정의롭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상대로 당신 한 몸 스스로 꽃잎이 되어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그는 부엉 바위 전설의 부엉이가 되어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 역사를 지켜보고 싶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묘역,
물론 당신의 잃어버린 명예와, 갈갈리 찢겨나간 자존심 그리고 가족과 측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 한 목숨 희생 시킨 이유도 어느 정도 작용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지냈고 그 어떤 정치인 보다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그가 단지 자신 개인의 자존심이나 주변인들의 안위를 위해서만 죽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없다. 
부산 롯데 호텔 후문 쪽 화단에 위치한 구 부산상고(개성고등학교) 옛터 표석,
그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당신이 원하는 것만큼의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거기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우리나라 기득권층들의 엄청난 두꺼움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당신의 죽음으로 역사를 향해 씨를 뿌렸다.
우리는 그 소중한 씨를 잘 살려내야 한다. 이번만큼은 우리나라 특유의 냄비 근성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49제까지 끝났다고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식으로 잊어서는 더욱 안 된다.
기득권층은 우리 국민들의 냄비근성을 너무 믿기 때문에 항상 두려움 없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기득권층은 누가 뭐래도 역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우리 오천년 역사가 그들에게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 역사를 살펴보아도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 거의 모두가 그들이 추구했던 개혁을 끝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는 그 개혁의 여파는 엄청난 반동이로 되돌아오곤 했다. 궁예, 묘청, 만적, 정여립, 광해군, 소현세자, 전봉준, 김옥균, 오늘의 노무현....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기 위한 온 몸을 받친 처절한 시도이자 우리에게도 강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앞으로 더 이상 우리 역사 속에서 개혁적이고 앞서간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비극적인 삶을 살게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그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한 방법으로 피를 부르는 혁명이나 투쟁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유언 중 ‘운명이다. 원망하지마라’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주고 여러 가지 해석도 나올 수 있지만 난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기득권층과 과감하게 투쟁하고 싸워왔지만 그것은 피를 부르는 싸움은 아니었다. 그는 지는 것으로서 이기는 게임도 할 줄 아는 우리나라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당장은 뻔히 지는 싸움이지만 길게 보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지난 겨울, 봉화산에서 내려다 본 봉하마을,
이번 싸움도 마찬가지 이다. 그에게는 다른 무기가 없었다. 단지 국가와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명분과 진정성뿐이었다. 많은 사람의 뜻이 같이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에서 승리 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주 작은 비석에도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그의 정신이 쓰여 지게 된 것이라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나 자신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내 자신도 변화되어야 함을 느낀다. 엄청난 변화는 아니다. 단지 내가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무현의 정신을 살려내는 것이다. 노무현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깨닫고 그 정신을 우리 실생활 구석구석에서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명분과 진정성이다.
1주기 때는 비가 참 많이 내렸었지요.
우리 모두 또한 바꿔나가야 한다. 명분 있는 일에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지금 당장 손해가 있더라도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내는 일 바로 그 일 만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값있게 만들어 내는 일 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득권층을 한 순간이 아닌 영원히 이겨내고 역사상 모든 개혁가들이 꿈꾸어왔던 모두가 함께 잘 살아 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일 것이다.
이번만큼은 고인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껴안고 오랫동안 그가 바라는 세상이 올 때가지 우리 함께 한 번 가보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 지금으로부터 90년전 고종이 승하한 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 고종의 죽음을 슬퍼했다.
친문 핵심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일 고민정 전 청와대 대변인, 윤건영 전 청와대 상황실장과 함께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의 '문재인 대통령 총선 승리 후 탄핵' 발언에 대해 또 다시 경고하고 나섰다.
​고 전 대변인은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최 의원과 윤 전 실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입장문을 낭독했다.
​입장문에서 이들은 "16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탄핵을 도모한 이들의 후예들이 다시금 역사를 반복하려고 한다"며 "3년 전 탄핵을 당한 국정농단 세력에 경고한다.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반민주적인 탄핵 기도가 어떤 파국을 맞이했는지 되짚어보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언급하며 "통합당은 정권 심판을 내세우지만, 본질은 총선 후 탄핵 추진"이라며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의원은 기자회견 이후 "선거를 의도적인 탄핵으로 몰고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며 "지금 상황을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 원내대표의 '탄핵 발언'을 미래한국당 차원의 입장이라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한국당 전체 의원의 목소리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발언되고 시도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최 의원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 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언급"이라며 "의원이 어디 농담 삼아서도 해서는 안 될 얘기를 반복적으로 대통령 탄핵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행위는 월권"이라고 했다.
​앞서 심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울산시장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저희가 1당이 되거나 숫자가 많아지면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10일에도 대통령 탄핵 발언을 해 최 의원이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레적으로 문 대통령의 입과 호위무사로 활약했던 고 전 대변인과 윤 전 상황실장을 동행한 것은 민주당 내부 여론을 보여주고, 이탈 조짐을 보이는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최 의원은 이에 대해 "이미 탄핵 추진을 기정사실화하고 총선을 발판으로 삼겠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기 때문에 지금 민주당 의원들과 출마자들이 많은 걱정을 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다"며 "그래서 두 분도 그 과정에서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왔다"고 전했다.
​윤 전 실장은 "심 원내대표가 두 번에 걸쳐서 탄핵 운운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면서 "정치에도 금도가 있는데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었다. 국민들이 엄중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했고, 고 전 대변인은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발언들은 대한민국 국민에겐 큰 상처"라고 했다. 이날 회견 동참을 최 의원이 제안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고 전 대변인은 "뜻이 같이 맞았던 것"이라고 답했다.
​최 의원은 향후 당 차원의 대응 방안으로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제소 가능성에 대해선 "이건 단순히 윤리특위 차원의 문제를 넘어섰다"며 "이런 것 만큼은 여야 정쟁이나 선거를 떠나 이런 주장을 발붙이지 못하도록 호소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고 했다.
이에 따라 여권에선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야당에 역공을 펼치는 것이 자칫 '탄핵 공방'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by 향토문화전자대전
[김해 봉하마을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by 향토문화전자대전
[심재철의 탄핵 발언'에 최재성 "노무현 대통령 역사 반복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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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박근혜, 대통령 탄핵가담???

노무현 & 박근혜, 대통령 탄핵가담 찬반의원들?
노무현 & 박근혜대통령 탄핵찬반의윈들의 정치적운명, 
노무현 대통령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13대총선 출마당시 선거홍보물에 저서를 하나 소개했는데 제목이 "정치인의 진로연구(근간)" 였다. 정치인들에 진로에서 정치인의 미래를 나름 볼수 있다는 관심으로 책까지 내려했으니 관심에 정도를 알수 있을것 같다. 책은 당시 낙선후 여가저기 다니다가 원고를 잊어버려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런 관심은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탄핵찬반 의원들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될것인가?
노무현대통령의 탄핵 결과는 나온 상태고 박근혜대통령탄핵은 현재진행 형으로 최소한 이번선거로 의문이 풀리지 않을 경우 한차례 더 선거를 치르면 한쪽은  노무현대통령탄핵에 가담후 사라진 의원들에 운명을 맞게될 가능성이 많다. 

현대사비극 두현직 대통령탄핵 찬반의원들 운명갈려,
두대통령 탄핵중 노대통령은 헌재에서 기각 박대통령은 인용되었다. 헌재에서 다른 결과가 나왔지만 이는 법율적문제고 최종결과는 정치적 심판인 선거로 나오게 된다. 노무현대통령탄핵시 Tv에 비친 지지자들에 울부짖음과 박대통령은 탄핵이 되어 지금까지 지지자들이 억울함을 호소 정치적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와국민은 억울한 정치인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것 그리고 가해자와 핍박자를 결코 그냥두지 않는다는걸 명심하며 하늘이 국민에 선택을 통해 내리는 준엄한 심판앞에 겸허해 져야한다. 

노무현대통령 을 탄핵했던 찬반국회의원들의 운명,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외 당시 집권당쪽 민주당의원들중 탄핵에 가담한 52명의 의원들의 비참한 운명에서 노대통령의 탄핵에 부당성이 증명되었다고 볼수 있다. 탄핵후 17대총선 열린우리당 압승후에도 탄핵세력의 반격등으로 탄핵후유증은 계속되었다. 결국 노무현대통령의 자살로 이어지면서 노무현대통령의 정의는 두번이나 역사의 심판대에서 국민의선택으로 한국정치의 지배자와 주도 세력이 되었다. 당시 노무현대통령탄핵에 찬성한 의원중에 현재 남은 의원은 추미애의원뿐이다. 그도 17대낙선과 혹독한 대가를 치른후 살아 남을수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부정한 투쟁이 국민에 심판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볼수 있게 된것이다.
청남대 길,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찬반의원들 심판대에 올라,
역사는 억울한 정치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그냥 두지 않았다. 박대통령지지자들도 억울하겠지만 이같은 교훈을 생각 탄핵에 찬반으로 가담한 국회의원들의 심판결과를 같은 자격으로 지켜봐야 한다. 한국당국회의원들중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은 자신들의 탄핵으로 탄생한 민주당과문대통령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동지인 박대통령을 탄핵한 그들의 정의를 당내 탄핵 반대의원들과 치열한 논쟁과투쟁 경쟁으로 국민에 심판과 선택을 받아야 한다. 둘중 한쪽은 노무현대통령탄핵에 가담결과 처럼 혹독한 대가를 받게 될것이 분명하다. 이는 의석이나 당선경쟁이 아닌 정의에 경쟁으로 숭부를 가려 제일야당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놓고 저항과 투쟁으로 피해자와가해자가 생긴다. 핍박받고 감옥에 갔던 사람들이 등장 모습에서 가해자의 불의가 심판받고 정의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정치인들 진로에 중요성을 알게 된다. 이런 관심에서 세번의 선거출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정치적 핍박과 박해경험이 없는 탓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박대통령지지지들에게 우리가 옳다면 하늘이 돕는다는 말로 위로하면서 정책연구로 수십년 보낸 자부심으로 선거따가 되면 기회와선택을 기다려 본다. 
노무현 & 박근혜 대통령탄핵 찬성의원들의 정치적운명 어제와오늘,
노무현 박근혜대통령을 탄핵한 의윈들의 운명 88년 총선에 출마 당시 선거홍보물에 저서를 하나를 기재했는데 제목이 "정치인의 진로연구(근간)"였다. 정치인들에 진로에서 정치인의 미래를 나름 볼수 있다는 관심으로 책까지 내려했으니 관심에 정도를 스스로 알수 있을것 같다. 책은 당시 낙선후 여기저기 다니다가 원고를 잊어버려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아시다 시피 참여정부 5년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탄핵과 열린우리당 창당과 분당등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했습니다.
노대통령님은 강고한 원칙주의자 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 요소중 대화와 타협을 중요시하는 타협주의자 였습니다.
개헌작업과 대연정 제안이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 기저에는 노대통령님의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철학이 녹아있습니다.
퇴임후 완성하시려던 '민주주의 2.0'은 민주주의 원칙주의자 이자 타협주의자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유품이 되었습니다.
정무기획 행정관에서 비서관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5년은 제가 민주주의란 무었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
늦은 밤, 잠을 청하기 전에 서재 앞에서 문득 고 김대중 대통령님과 노무현 대통령님을 떠올립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 인하여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의로움과 뚝심, 순수하고도 강력한 리더십에 매료되어 여러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면서 오늘날까지 달려 왔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날, 정치적 동료들과 오래된 민주당 당원들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노사모와 함께 분노했고, 바보 노무현이라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숱한 고난을 이겨내왔던 우리 민주당원들, '내가 노무현이다'라고 말하는 외침들과 함께 하며, 촛불혁명이 탄생시킨, 문재인정부까지 기어코 달려왔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우리, 민주세력, 아니 국민모두에게 중요한 21대 국회의원 선거!
그간의 민주화 운동, 시민사회 활동, 시의원 및 국가재정 및 예산정책 연구활동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작금애 우리의 민주 동지들과 '민주화'를 외쳤던 그 목소리, 시대의 양심이자 민주화 기수의 상징이었던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겸손과 투지를 기억하며, 비례대표 본질을 다져봅니다. 또한 온갖 적폐 세력들의 침노에도 굴함이 없이 올곧게, 오롯이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전 대통령들의 깊은 상념과 인내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이내용이 현재 당과는 비교가 안되는것을???
백성과 민중과 함께한 민주화의 열망! 국민주권을 실천하기 위해 온갖 싸움을 이겨낸 정신!
그리고 고 노무현의 친구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국민을 제대로 섬기고 있나???, 국민과 함께 어려운 난국을 이겨내고는있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직의 정치적인 깃발이자 마음의 밭이되고는있나???. 전에 대통령들과는 차원이 영???!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 서거 애프터 10년을 맞이해서 여러 신간들이 나오고 매체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내가 구독중인 주간지 시사In 에서는 커버스토리를 노무현으로 잡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실어 주었는데, 그 중 감명깊게 읽었던 부분..
‘국민소득 5만 달러’나 ‘양극화 없는 세상’ ‘복지국가’ 같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다. ...
그런 정치 환경을 만들어 두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은 자연히 수렴될 것이라고 봤다. P21,시사인,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누구나 말하는 국민소득 5만달러, 복지국가 같은 목표가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정치, 오늘의 소수정당이 다음 투표의 거대 정당이 될 수 있는 정치 토양.. 그런걸 만들어 두면 사회는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         
진짜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생각도 못하는 그런 커다란 목표.. 소름...
첨부한 사진을 보면 시사인 잡지 테두리가 노란색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시사인은 커버 스토리는 테두리를 빨간색으로 둘러서 표시를 한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색이 노란색이니까, 이번 커버스토리는 노란색으로 표시를 했다. 섬세해..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여러 커버스토리 중 ‘나와 노무현’ 을 주제로 독자들이 보낸 글 가운데 여섯편을 선정해서 보여 주는 코너도 있었는데 여섯개의 글 중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지나가는 글이 한 편 있었다. 여기서 소개해 본다. 전문은 아니고 내가 감동먹은 포인트만...
개인적으로 글쓴이 최직경님은 이렇게 글을 마음에 닿게 잘 쓰시는 걸로 봐선 등단해야한다고봄. 그냥 슬퍼서 눈물이 났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을 “바위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흐릿해져가는 것을 막을 방법을 나는 10년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라고 표현해버림..묘사력 무슨일이야... 이세상 묘사력 아니잖아요 이거... 이 한 문장 속에서 “바위” “10년” 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만 느낄 수 있는 가슴 묵직함, 뻐근함...
노무현에 대한 기사라도 읽어 보시라고 시사인 url 첨부함.
노무현의 꿈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노란 종이 네 귀퉁이를 안으로 접었다. 귀퉁이의 꼭지를 가운데로 모으고 핀을 이용해 수수깡에 고정시켰다. 부드럽게 잘 휘어지는 핀은 따로 제작했다. 수수깡 뒤쪽에는 글씨도 인품을 담는다는 게 정말인가보다를 붙였다...
www.sisain.co.kr
시사인 읽기 전에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년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냥 이상하게 노무현 대통령 관련 책들이 갑자기 많이 나오네..? 싶었고, YES24굿즈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충동구매를 했는데.. 서거 10년이었을 줄이야...
알라딘 악개인 내가 YES24에서 굿즈때문에 책을 살 정도로 이번 노무현대통령 굿즈 너무 잘뽑음.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이라는 노무현대통령 친필이 각인된 철제 북엔드.... 심지어 모양도 책 모양이야.... 진정한 덕후라면 이것은 사야만 한다! 라는 의지로 사고야 말았다.
새삼 든 생각인데 유명인들은 어떻게 저렇게 글씨도 멋진지 모르겠다. 글씨도 인품을 담는다는 게 정말인가보다.
“지붕낮은집” 이라는, 노무현 대통령 사저에 대해 설명해 주는 책.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에서 펴 낸 책이다. 내가 산 책 수익금이 노무현재단으로 쏘옥 들어가서 재단 더 흥해라 막 흥해라!!!!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노무현 대통령 사저는 대통령께서 지붕 낮은 집, 부끄러운 집을 주문하셔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집 자체가 노무현대통령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할 정도로 집 곳곳에 대통령님 향기가 스며 있음.. 언제 읽을진 모르겠지만 정말 재밌고 흥미로운 책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업적 imf위기 88올림픽 노벨평화상,
대통령, 생애 업적.
imf위기/ 88올림픽/ 노벨평화상,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13대 대통령 : 노태우 ( 1988년 ~ 1993년 )
직선제, 우유부단한 대통령, 부정축재자, 군부통치 완화, 3당합당, 올림픽 주최, 3당야합.         
14대 대통령 : 김영삼 ( 1993년 ~ 1998년 )
직선제, 3당야합, 군부통치 종식, 금융실명제, 금융위기 IMF사태 등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함에 있어 실지명의에 의한 금융거래를 실시하고 그 비밀을 보장하여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한 제도이다. 한국의 금융실명제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에 의거, 1993년 8월 12일 이후 모든 금융거래에 도입되었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긴급명령을 발동,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한국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국내 저축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예금주의 비밀을 보장하고 가명·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차츰 경제가 성장하고 금융거래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하경제를 부추기게 되었고 완전한 종합소득세제 실시가 불가능해졌다.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대통령,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등 각종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982년에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그 폐혜가 극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같은 해 '7·3조치'를 발표해 1983년 7월 1일부터 종합과세와 자금출처 조사가 포함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83년 7월 제정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은 핵심사항이 모두 빠진 채 통과되었으며,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 의무화 시기도 연기되어 부동산 투기와 저축 감소현상 등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말 정부는 다시 한 번 금융실명제의 전면적인 실시를 천명했으나 1989년부터 경제가 어려워지자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기습적인 금융실명제 실시 선언이 있고서야 이 제도가 실행되었다. 실명제의 실시 이후 우려했던 부작용들이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실명제의 궁극적 목적인 세금탈세 근절, 검은 돈 흐름의 차단, 지하자금의 양성화 등에 대해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15대 대통령 : 김대중 ( 1998년 ~ 2003년 )
직선제, 민주화 완성, 노벨상 수상자. *민주화의 완성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그리고 남북교류,
아시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서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의 진정한 민주주의 리더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끊임없는 모함과 40년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끈기 있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화해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다 합쳐도 이산가족 상봉 숫자가 300명 이하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5000명이 넘는 이산가족의 상봉을 도왔으며 개성공단 조성을 통해 우리 중소기업의 활로를 찾았고 남북 간 철도 연결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철의 실크로드 계획을 실행 시켰다.
16대 대통령 : 노무현 ( 2003년 ~ 2008년)
직선제, 국민참여형 정치,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2004년 3월 12일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대통령 탄핵사태.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제16대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새천년 민주당이 탄핵 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였으며,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여당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무현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 소추안 가결이었다. 탄핵 소추안 통과는 그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 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한편,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광화문 일대 등에서 촛불 집회가 열렸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 생중계 방송을 통하여, 탄핵심판을 기각하였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즉시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탄핵사유의 조사가 부족했다는 주장과, 탄핵소추의 적법 절차 위반 주장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라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의 소수의견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를 공개하여야 한다는 소수의견이 있었다.
 무었이던 기초가???.  글구 한가지더 -^0^- 이젠 구의원은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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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1일 토요일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대통령 노무현, (鉉),

현대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이자 제13대 국회 의원으로 활동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노판석이고, 어머니는 이순례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3년 권양숙과 결혼하여 아들 노건호와 딸 노정연을 두었다.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한 뒤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 
노무현 대통령
출생-사망/ 본관/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주요수상/ 주요저서/
1946.8.6(음력) ~ 2009.5.23
광주
대한민국
정치
경남 김해
영국 바스 대십자훈장(2004), 무궁화대훈장(2008)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운명이다》(2010)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1966년에 졸업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權良淑)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이후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저서에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다.
학업과 변호사 개업,

노무현(盧武鉉)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3년 3월 경상남도 김해시의 진영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2월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진영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 2월 제16회로 졸업하였다. 1963년 3월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2월 제53회로 졸업하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노무현은 독학으로 1975년 3월 제17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 정치학 및 국제 관계학 명예박사 학위, 2007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77년 8월 사법연수원을 제7기로 수료한 뒤 9월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부임한 노무현은 8개월가량 재직하였다. 노무현은 짧은 판사 생활을 마감하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노무현의 인생에서 1981년 부림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불법 감금과 살인적 고문으로 반국가 단체 ‘부림’을 조작 날조한 ‘부림 사건’은 전두환(全斗煥)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반국가 단체 조작 사건이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노무현은 참혹한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의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점차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에 노무현은 법조계의 새내기인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를 꾸려 동업에 나섰다.

인권 변호사로 활약,

1980년대 중반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4년 정권과 재벌에 맞서 환경과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전개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로, 1985년 부산 최초의 대중 정치 조직으로 설립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 위원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법률상담소를 부설하고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호 활동을 본격화한 것도 이해였다.

이 무렵 울산, 창원, 거제도에는 노동 문제 전문 변호사가 없던 탓에 이 지역에서도 의뢰가 들어와, 부산노동법률상담소는 경상남도 지역의 노동 인권 사건을 총괄하는 센터 같은 구실을 하였다. 무료 변론은 물론 노조 설립과 일상적인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강연을 하면서, 노무현은 점차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였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 2월 7일 박종철 추도 집회에서 추도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 집행 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이 일로 동료 변호사인 김광일, 문재인과 함께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 연행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노무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에 이어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무현은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거리로 사업장으로 뛰어다니며 현장을 누볐다. 그 결과 1987년 이석규의 사망으로 폭발한, 경찰의 폭력 진압 반대 투쟁인 대우조선 사건으로 이해 9월 2일 불구속 기소되어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활동,

6월 민주 항쟁으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자 노무현은 현실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1988년 4월 28일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10월 5공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단박에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노무현은 삼당 합당인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의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91년 개혁 신당과 함께 통합한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원칙과 신념의 정치인이란 평가와 함께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걸어야 하였다. 결국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부산광역시 동구],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97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SBS 라디오 ‘뉴스 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21일 제15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다시 국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노무현에게 2000년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는 낙선의 아픔과 노사모라는 정치적 자산을 동시에 안겨 준 사건이었다. 그는 당선이 유력시되던 서울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광역시 북·강서을에 출마하여 또다시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낙선은 당선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대의와 원칙을 위해 불이익을 무릅쓴 그에게는 ‘바보 노무현’, ‘아름다운 바보’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결성되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의 최대 자산이 되었다.

대통령 당선 및 그 후,

이후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 7일~2001년 3월 26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한 뒤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2002년 일반 국민이 참여하여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제에서 노무현은 예상을 뒤엎는 돌풍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청문회 스타라는 명성과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얻은 신뢰, 그리고 국민 경선제라는 정치 실험을 통해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3월 12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탄핵 소추를 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하였지만, 참여 정부의 임기 내내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에 역점을 둔 정치를 일관되게 펼쳐 나갔다. 임기 말년인 2007년 10월에는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10·4 공동 선언을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 갔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

2008년 2월 25일 퇴임한 후 노무현은 고향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로 귀향하여, 농촌 마을 가꾸기와 친환경 생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의 삶으로써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런 퇴직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으며, 그에게 ‘노간지’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2009년 5월 23일 봉하 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 5월 29일 국민장이 엄수되고 7월 10일 유골이 봉하 마을에 안장되기까지, 500만~600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봉하 마을과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하여 죽음을 애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여보, 나 좀 도와 줘』[새터, 1994], 노무현 외,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1997], 노무현 외, 『마음먹었을 때 시작해라(사시·행시·외시 성공 Story)』[고시계사, 2000],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유시민 외, 『노무현-상식 혹은 희망』[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 외,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1·2[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이윤기 외, 『해인사를 거닐다』[옹기장이, 2003], 『로마의 논리와 감성-노무현의 논리 마광수의 감성』[우민OK논술교실, 2005] 등 노무현이 직접 쓰거나 관련 활동을 기록한 책들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에 있다. 2009년 8월 5일 국가 보존 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모여든 추모 인파(출처: 게티이),
상훈과 추모,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배스대십자 훈장, 2005년 코스타리카 명예로운 훈장, 2007년 스페인 시민 훈장, 2007년 카타프 독립 대훈장, 2007년 사우디 국가 최고 훈장 ‘킹압둘아지즈 훈장’, 2007년 쿠웨이트 국가 최고 훈장, 2008년 무궁화 대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의 사상과 정신,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약칭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해마다 기일을 즈음하여 봉하 마을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노무현 추모제가 열려 고인을 기리고 있다.
노무현을 기리며 2009년 『성공과 좌절』[학고재], 『진보의 미래』[동녘], 『내 마음속 대통령-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한걸음더]과 『사람 사는 세상-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학고재]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재단에서 『봉하 일기』[부키]를 출간하였고, 이외에 노무현을 추모하는 여러 종의 저작물이 있다. 2010년 5월 16일 대통령의 주요 유품과 사진, 기록,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추모 전시 공간으로 ‘추모의 집’이 봉하 마을에 건립되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이 름
재임기간
제1~3대 대통령
1948.07 ~ 1960.04
제 4대 대통령
1960.08 ~ 1962.03
제5~9대 대통령
1963.12 ~ 1979.10
제10대 대통령
1979.12 ~ 1980.08
제11~12대 대통령
1980.09 ~ 1988.02
제13대 대통령
1988.02 ~ 1993.02
제14대 대통령
1993.02 ~ 1998.02
제15대 대통령
1998.02 ~ 2003.02
제16대 대통령
2003.02 ~ 2008.02
제17대 대통령
2008.02 ~ 2013.02
제18대 대통령
2013.02 ~ 2017.03
제19대 대통령
2017.05 ~ .


전 대통령출생-사망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 - 2009년 5월 23일가족배우자 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형 노건평학력부산상업고등학교수상2008년 무궁화대훈장경력2003.02~2008.0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사이트공식홈페이지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노무현사료관
2005년 APEC 경제 지도자 회의 부산 선언 2005년 11월 18일부터 11월 19일까지 부산 벡스코 및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개최된 2005년 APEC 경제 지도자 회의에서 각국정상들과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선언의 요지를 담은 정상 선언을 발표 하는 모습이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인물과 사상사, 2001)
  •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 2011)
  • [네이버 지식백과]노무현 [盧武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게티이미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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