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30일 목요일

세계 종교,

세계  종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1. 지역이나 나라의 문화에 따라 명절과 기념일이 다릅니다.
2. 종교에 따라 다양한 명절과 기념일이 있습니다.
3. 세계 3대 종교의 대표적인 기념일을 알아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종교로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종교에 따라 명절과 기념일을 지내는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 종교에 따라 어떤 명절과 기념일,

기독교와 불교의 특별한 날
※ 기독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성경 책을 봅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명절인 크리스마스는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로 예수님이 탄생을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부활절에는 계란을 삶아 돌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수확을 감사드리는 추수 감사절에도 기독교의 대표적인 명절입니다.

※ 불교
부처님을 믿고 경전을 봅니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도 불교의 경전입니다. 가장 큰 명절은 음력 4월 8일로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예쁜 등을 만듭니다. 이 외에도 부처님께 도를 깨치신 날, 돌아가신 날 등이 불교의 기념일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연등
※ 용어
1. 신자 : 종교를 믿는 사람
2. 경전 : 종교의 중요한 내용을 담은 책
3. 도 : 종교에서 깨달은 매우 훌륭한 지식

민족종교와 세계종교


종교인의 현황
거의 모든 지역에서 종교인의 수가 비종교인(무신론자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수보다 많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신봉되고 있는 종교는 크리스트교이며, 다음으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순으로 신도 수가 많다.
종교는 크게 민족종교와 세계종교로 구분하는데 종교의 영향력이 한 민족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경우 이를 '민족종교'라고 한다.

민족종교는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되어 나타난다. 여호와를 믿는 유대교, 인도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힌두교 등은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유대교는 신의 소명에 따라 유대인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선민사상을 강조하여 배타적이고, 힌두교는 엄격한 신분제인 카스트제를 지키고 있어 민족을 초월하여 전파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유대교는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모태가 되었으며, 힌두교는 불교를 탄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세계종교인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불교는 비록 민족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지만 개방적인 자세로 전 인류 차원에서 보편적 진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민족종교가 민족 고유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세계종교는 세계성과 보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편 종교'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종교 분포도,

세계의 종교 분포
세계 3대 종교인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는 유럽·미국, 아시아, 서남아시아에서 각각 확고한 우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전통적으로 크리스트교가 강세인 유럽에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크리스트교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참선과 명상이 인기를 끌면서 불교도가 늘어나고 있다.(자료: 《내셔널지오그래픽 비주얼 아틀라스 오브 더 월드》, 2009)

크리스트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 1세기에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오랜 역사를 가진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에서 믿는 것/ 하느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
가톨릭교, 개신교, 정교회를 통틀어 크리스트교라고 불러요. 우리에게 크리스트교만큼 친숙한 종교는 없을 거예요. 꼭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 눈에 그만큼 성당이나 교회가 많이 보인다는 말이지요. 어느 곳을 가도 십자가가 세워진 성당이나 교회를 볼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신은 하느님이라고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말을 따르는 종교랍니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지요.

크리스트교는 약 200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가진 종교예요. 세계 여러 종교 중에 신자가 가장 많기도 하지요. 전 세계적으로는 15억 명 정도가 크리스트교를 믿고, 우리나라만 해도 1300만 명 정도가 크리스트교 신자예요. 그러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 크리스트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해요. 크리스트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의 탄생이 곧 크리스트교의 시작이에요. 예수가 탄생한 후 하느님의 계시가 적혀 있는 책이 신약 성경이고, 그 이전의 유대 민족에 관한 역사와 하느님의 계시 등을 적은 책이 바로 구약 성경이지요.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하느님이 내린 빛으로 예수를 잉태하는 성모마리아를 그린 그림크리스트교의 시작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해요.

크리스트교에서 믿는 것
크리스트교에서는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어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과일들이 열리는 곳,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여 미움과 다툼이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곳이죠. 반면 지옥은 천국과는 반대로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 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로 싸우기만 하지요.


크리스트교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 예수
천국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처음으로 한 말은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어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죽어서 가는 곳도, 정해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죠.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 알아 볼까요? 
예수님의 나이가 올해의 연도와 같다고요?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기원은 연도를 계산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해를 말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 기준을 예수가 태어난 것으로 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원전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 기원후는 예수가 태어난 후를 말해요. 처음에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서양에서 이렇게 연도를 계산했어요. 그러나 중세시대 이후 서양 강대국들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 달력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한 뿌리 종교?

분야
사회·문화
유목 민족 종교와 농경 문화 종고/ 유대인의 민족 종교, 유대교/ 구원자 예수를 믿는 종교, 기독교/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이슬람교/ 무엇을 믿든 존중이 첫째,

유대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이 하느님을 믿는 종교예요. 그러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에 큰 차이점이 있지요.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 인으로,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섬겨요.

유대교 신자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려요. 예배를 드리는 곳은 '회당'이라고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랍비'라고 부르지요.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유대교 신자들은 예배를 드릴 때,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성경을 읽고 랍비의 설교를 들어요. 크리스트교와 비슷하다,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둔 종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혹은 '토라'라고 불러요. 토라는 구약 성경 맨 앞에 있는 다섯 권의 책을 말해요. 이 책들에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든 이야기와 유대 인 조상들의 이야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나와 있어요.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요.
더 알아 볼까요? 
랍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랍비란 히브리어(유대 인의 언어)로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이에요. 이들은 유대교 율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유대 인들에게 가르치는 학자랍니다.

매주 금요일에 해가 지면 유대 인들은 회당으로 모여들어요. 회당에서 집회를 가지고 예식을 치르면서 율법을 공부하지요. 랍비는 이 집회를 이끌어요. 랍비들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모아 책으로 엮기도 했어요. 이것을 '탈무드'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정치, 문화, 경제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유대 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들이 들어 있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학년/ 단원
중학교
1학년
지역마다 다른 문화
고등학교
1학년
사회 변동과 문화
고등학교

「사회·문화」일상생활과 사회 제도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원래 한 뿌리에서 나왔다면서요? 모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섬기고 이들이 말하는 ‘신’은 언어만 다를 뿐 모두 ‘신’이라는 뜻이라면서요? 게다가 최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개념도 똑같고요.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가 그렇게 항상 싸움을 할까?

유목 민족 종교와 농경 문화 종교
지구상에 있는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농경 문화 종교와 유목문화 종교입니다. 농경 문화 종교로는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를 들 수 있습니다. 농경 사회는 쌀을 주식으로 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모계 사회도 자주 나타납니다. 이들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소를 무척 중시하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태도를 지닙니다.

유목 문화 종교로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막 지역을 이동하는 유목 민족은 철저한 부계사회로 지배와 종속 관계도 엄격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힘을 가진 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죠. 그래서 유목민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아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며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10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조로아스터(BC 630 ~ BC 553?)가 중동 지방에서 창시한 종교입니다. 지혜의 상징인 불을 숭배한다고 해서 ‘배화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종말론, 최후의 심판,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 체계는 유대교의 교리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인도 봄베이 지방의 ‘작은 페르시아 마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답니다.

유대교
유대인의 민족 종교, 
유대교는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시조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섬기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입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선사하는데 십계명의 첫 번째 계율이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여러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유대인은 유일신인 야훼를 섬겼습니다. 약3500년 전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라고 명령을 하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릅니다. 야훼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창과 비옥한 땅을 약속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자 사라는 하녀 하갈을 시켜 아이를 잉태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99세 때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자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내쫓습니다. 아랍 민족의 역사는 바로 쫓겨난 이스마엘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한 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품에 안은 기쁨도 잠시,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야훼에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놓고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한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창을 약속하고 언약의 징표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할례를 치릅니다. 이 의식에서 유례하여 유대인 남자아이는 모두 할례식을 치릅니다.

세월이 흘러 극심한 가뭄 때문에 고향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됩니다. 모세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유대인은 추격해오는 이집트 군사들을 따돌리고 홍해를 갈라 바다를 건넌 날을 유월절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왕과 솔로몬왕 통치 시절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하고 남쪽 유대 왕국만 남게 되어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왕국도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한 후 유대인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1) 신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 흡수되면서 유대인 포로 3분의 1이 유대 땅으로 귀향하고 나머지는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됩니다.2)

이들은 기원전 515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지원으로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을 재건하면서 경전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 신앙에 도입됩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5세기 후반에 구약성서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고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생활 신조로 삼고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면, 유대교는 야훼한테 받은 율법을 기초로 바빌론 유수 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교리를 정립한 민족 종교입니다. 유대교 성서 총 여덟 권 중에서도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장을 중시해 이를 모세 5경이라고 하며, 모세 5경에는 613가지 계율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어머니가 유대인인 사람은 자동으로 유대인이 되지만 유대인이 아니어도 유대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유대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와 유대교 계율을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기독교, 구원자 예수를 믿는 종교, 
지구의 65억 인구 가운데 약 3분의 1인 21억 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기독’이란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기한 말로 ‘구원자 예수’를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교파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갈릴리 지방은 무역이 활발하고 부유한 곳으로 관용과 세계주의 정신이 퍼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때로 예수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진실하게 하느님을 믿던 예수는 경전과 율법에 얽매여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교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는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애가 구원의 길이라고 설교하였고, 예수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면서 추종자도 급속히 증가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고발해 예수는 결국 십자가형을 받고 숨을 거두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했고 제자들 앞에 40일 동안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는 인간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대신 피를 흘렸고, 인간은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사랑, 부활과 영생, 인간으로 온 신, 희생 정신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 사후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든 일등 공신은 바울입니다. 유대인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갑자기 시력을 잃었고 하늘에서 전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여 자신의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고 새사람이 됩니다. 그는 시리아, 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편지를 씁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칙령(313년)으로 공인을 받으면서 성경이 성립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 모두에게 중요한 성서입니다. 두 종교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행적이 담긴 신약성서도 인정하지 않지요.

나중에 기독교는 성상숭배 문제로 동방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게 되었고 로마가톨릭은 착취와 부패가 심화되면서 16세기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열풍을 맞게 됩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고도 말하는데, 프로테스탄트는 당시 부패했던 가톨릭(천주교)에 항거하고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항의’, ‘반대’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슬람교,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세계에서 둘째로 큰 종교는 교인이 13억 명이나 되는 이슬람교입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탄생했습니다. 유복자였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다 나중에는 작은아버지가 키우게 됩니다. 성장한 무함마드는 무역상들과 예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를 돌며 여러 종교를 접합니다. 스물다섯 살 때 열다섯 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한 무함마드는 마흔살에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암송하라. 알라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한 것을!”이라고 외치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진 알라의 말씀은 나중에 모두 기록되어 ‘코란’이라는 경전이 됩니다. 코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었고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의 권위를 지니는 원문이 다르게 바뀌는 걸 막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슬람교가 해외로 전파되면서 코란도 번역이 되기 시작했는데 반드시 아랍어를 같이 싣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법에서는 아랍어로 된 코란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이 세계 제2의 종교로 빠르게 전파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성직자가 따로 없으며 모든 신자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모두 신 앞에 평등하며 누구나 똑같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합니다. 둘째, 복잡한 이론이나 예식 같은 것이 없는 실천 중심의 종교입니다. 셋째, 이슬람교가 성립되던 시기는 비잔틴 제국의 부패와 착취가 심해 이슬람 군대를 침략자보다는 해방자로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넷째, 정복민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관용적 태도를 가졌으며,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을 주어 자발적 개종자가 많았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을 뜻합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알라를 믿고 그의 뜻에 복종함’을 의미합니다. 무슬림들에게는 다섯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① 신앙 고백(샤하다) ② 하루 다섯 번 예배(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 ③ 희사 즉 기부 행위(자카트) ④ 메카 순례(하지) ⑤ 금식(라마단)입니다.

코란과 성경은 아담과 이브를 인류의 첫 조상이자 첫 부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긴 뒤 수치심과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경에서는 신이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고, 코란은 아담처럼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또 성경은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이 타락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데, 코란은 어머니의 은혜와 감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알라께서 명령하시기를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고 2년간 젖을 먹임으로써 허약해졌느니라. 그러므로 내게 감사하고 너의 부모에게 감사하라”라고 코란에 명시하였습니다.

성경은 첫 인간들의 죄로 인간이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고 보지만, 코란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행위가 바로 용서되기 때문에 원죄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원죄가 없으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에 의한 구원도 필요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저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라에게 직접 고백하면 되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신이 아닌 한 사람의 신도이자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들을 알라의 예언자로 여기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여깁니다. 그중에서도 무함마드를 가장 포괄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 계시를 전한 예언자로 여깁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으로 완전한 계시를 전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의 종교를 올바르게 복원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이슬람교를 적대시합니다.

존중이 첫째, 무엇을 믿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랑을 전하지만 종교로 인한 전쟁으로 큰 희생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충고라도 하는듯 불교를 믿었던 인도의 아소카왕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는 불교 신자?

무엇을 믿든 존중이 첫째.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종교는 존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높일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실천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종교를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교도 해치게 된다.
만약 누군가 자기 종교를 영광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종교를 비하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종교를 해치는 것이다.
-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의 비석.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는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
크리스마스는 350년경부터 12월 25일로 채택되었으며 이는 로마에서 축제로 지키던 ‘태양신의 날인 12월 25일’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치아(Lycia)의 빠따라(Patara)시에서 출생한 니꼴라오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니꼴라오 성인은 자선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후에 미라(Myra)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옷 색깔이 빨간 것은 주교들의 옷 색깔이 빨간 데에서 연유합니다. 산타클로스의 이름은 라틴어로 쌍뚜스 니꼴라우스인데 폴란드 사람들은 ‘싼 니콜라우스’라고 발음했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싼 데 끌레아스’라고 발음했습니다. 그 발음이 그대로 미국화해 ‘산타클로스’로 변한 것이랍니다.

메시아, [ messiah ]
성서에서 구주(救主) ·구세주(救世主)를 가리키는 말.
헤브라이어의 (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a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리스어화 한 말(Christos)로 ‘그리스도’의 어원()이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의 왕은 물론, 사제나 또 사울왕의 방패와 같은 물건도 메시아라고 부르다가, 장차 나타날 왕으로서의 ‘구세주’에 대한 기대()로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이 행하여졌다.

메시아를 ‘구세주’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중간 시대의 유대인으로 다윗을 계승한 왕으로서의 구세주를 소망하여 부른 호칭이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왕의 즉위와 제사장의 구별시에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과 관련하여 39회 사용되었고(레위기 4:3, 5, 16, 6:22, 사무엘상 24:6, 10, 사무엘하 19:21, 23:1), 메시아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메시아 사상의 역사를 구약성경, 중간시대, 신약성경 순으로 고찰해 본다.

그리스어로 그리스토스(그리스도)라고 번역되었다. 성서적 전통에 의하면 신의 개입에 의해서 변모한 역사내 세계에 세워진 신의 지배의 대행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메시아에 의한 종말적 구제에 의해서 초래된 새로운 세계질서의 도래를 대망하는 세계관을 메시아니즘이라고 한다. 메시아 사상은 고대 오리엔트의 우주론적인 세계변모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데, 특히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의거해서 성립했다고 설명된다.

주유(注油)는 본래 이집트의 파라오(왕)가 관리, 봉신을 직에 임명할 때의 관습이었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 야훼가 어느 인물을 성별해서 왕으로 임명한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지고, 주유된 자=메시아라고 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후대에 확대되어서 제사장이나 족장에도 이용되었다.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하는 제도가 단순히 한 사람의 왕의 즉위의례가 아니라, 다윗왕가의 통치를 부정하고 신의 개입에 의한 새로운 천적 왕자와 이상적 질서의 출현을 고지하듯이, 현실의 왕 지배를 부정 매개해서 성립한 것이 매우 강렬한 역사변혁의 의식을 가진 헤브라이 예언자의 독특한 사상이었다.

그후 민족의 위기, 고난시 때마다 메시아를 자인하는 자, 그 도래를 예언하는 예언자가 출현했다. 헬레니즘기 후기와 로마제국의 압정하에서, 유대 민중의 강한 메시아 출현의 소망을 배경으로, 유대교단, 특히 과격파 중에서 메시아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서 권력에 저항했는데, 탄압ㆍ숙청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의 모순, 고통,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대상사(代償死)를 이룬 고난의 업 중에 현실세계와 인간의 궁극의 구제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에게서 참된 메시아(그리스도)와 참된 메시아니즘의 완성을 보았다.

《구약성서》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판관 8:22, 사무상 8:7)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대제사장(히브 9:23~28)으로, 예언자로, 왕으로 믿은 것(마태 16:16)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계약 관계에서 그 중간을 다리 놓는 것으로, 영()을 받은 자, 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죄를 씻는 제사의 희생제물 공여자, 재판장,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점차로 개인에 대한 기대가 부각되고, 각 집단이 각기 다른 내용을 강조하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변이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와 고난이 오히려 메시아 신앙을 강건하게 하고 신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메시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17세기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체비이다.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기대는 유대교의 교리로 굳어졌으며, 유대교의 현대화 운동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고 구원된 세계와 메시아적 미래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는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구약성경의 메시아
구약성경의 메시아는 주로 왕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및 전지역에 확립된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선택된 백성이며(출애굽기 19:5-6),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진정한 지배자인 왕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어져 정의와 공정으로 전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다윗의 가계에서 나온다고 하는 약속이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지고(사무엘하 7:11-17), 다윗에게 강력한 인상을 새겼다(사무엘하 23:1-7). 특히 사무엘하 22:51(시편 18:50)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다윗 왕조의 지배가 한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다윗의 언약은 구약성경에서의 메시아 사상의 구체적인 제1단계이다.

솔로몬의 사후 왕국은 이분되지만 그 후의 선지자들에 의해 다윗 가의 재 부흥과 통일지배, 근린제국의 합병 희망이 예언된다(이사야 11:10, 예레미야 23:5-8, 에스겔 34:23-31, 37:24-28, 호세아 3:5, 아모스 9:11-12, 미가 5:2).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의 선지자들은 적극적인 왕의 메시아 상을 그리고는 있지 않지만 결코 다윗계의 메시아라는 약속을 잊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 내의 메시아 상은 일관되게 왕으로서의 지배권을 제일로 하는 것이지만 제사장과의 관계(스가랴 3:8, 6:11-15, 시편 110편)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유명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이사야 52:13-53장)도 개인적으로 해석하면 메시아의 제사장적인 활동과 관련을 가진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 사상도왕, 제사장, 나아가 선지자로 복잡해지며 중간시대로 넘어간다.

중간시대의 메시아
이미 스가랴서에서 볼 수 있었던 메시아적 왕과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상은 랍비 문서 속에서도 계속 나온다. 특히 사해 부근에서 생활하던 쿰란 종단은 다윗계 왕보다 종말적인 대제사장을 더욱 소망했다. 나아가 사해 사본은 대제사장, 왕과 더불어 종말의 날에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난다고 기록하고 이상적인 유대 국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존재한다고 하였다(마카베오상 14:41 참조). 이러한 사해 사본이나 경외의 기술은 다윗 왕조의 계속성보다는 이상화, 질적 충실에 대한 기대로 메시아 사상이 옮겨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마카베오 시대에는 다시 정통 왕조로서의 다윗계 메시아를 추구 하였고 특히 B.C. 63년 이후 로마의 지배하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소망하였다. 또한 종말적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술은 구약 위경『시빌의 신탁집』(B.C. 140년경) 제 3권이고 위경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제 3부『비유의 서』(37-71장)에는 ‘인자’를 정점으로 한 메시아론이 기재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메시아
신약성경에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올 뿐이고(요한복음 1:41, 4:25) 대신 ‘그리스도’([헬라어] 크리스트)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상,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아 의식도 구약시대와 중간 시대의 메시아 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우선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왕의 메시아로 생각하고(마태복음 21:9, 22:42, 누가복음 2:25, 30, 38), 다윗의 아들로서 맞이했다. 또한 사람들은 선지자적 메시아로도 기대하고 있었다(요한복음 1:45, 4:25, 6:14-15).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마태복음 26:63). 제자들도 그렇게 불렀다(마태복음 16:16, 요한복음 1:34, 49, 11:27).

이어서 예수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정치적,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 보편적 내용의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 적으로부터 구해내고 사랑과 평화의 세계적 왕국을 수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이나 제자들의 메시아 기대, 메시아 이해를 바꾸기 위해 교육하고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

특히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메시아 성율 독특한 것으로서 제시했다. 예수의 마음에는 다니엘 7:13이 의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마가복음 8:38, 13:26, 14:62). 그러나 동시에 ‘인자’라는 표현에 의해 십자가상의 고난도 나타내고(마가복음 8:31), 그 죽음이 메시아적 지배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마태복음 20:28). 또한 이사야 53장을 자신의 일로서 해설했다(누가복음 22:37). 이와 같이 예수는 그 죽음에 의해 메시아로서의 행위로 왼성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이끌었다.

여기에 요한복음 12:34에 기록되어 있는 군중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속죄하기 위한 수난의 메시아라고 하는 개념은 유대인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제자들도 충분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 사건과 40일에 걸친 예수와의 교제에 의해, 십자가의 경지를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사도행전 3:13, 18-21, 4:27, 30, 10:36, 43).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약속은 더욱 새로운 메시아 상도 주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재림,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심판, 하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활동 등이며, 구약성경이 약속하고 예언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가르침과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교회의 분열, [ Schisma , 敎會分裂 ]
도시에서의 봉기와 농촌에서의 반란이 잇닿는 동안 러시아 교회는 분열되었다. 러시아 교회의 분열 과정에는 세 주인공이 개입되어 있었는데, 차르 알렉세이와 총주교 니콘(Patriarch Nikon)과 사제장 아바쿰(Archpriest Avvakum)이 그들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알렉세이는 러시아의 모든 차르들 가운데 가장 신앙심 깊은 차르로 평가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의 치세 때 교회가 분열되고, 니콘은 외로운 시골길에서 죽은 한편 아바쿰은 화형된다. 종교적 대결자였던 니콘과 아바쿰은 모두 주견이 강하고 광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의 분열을 재촉했던 것이다.

원래 차르 알렉세이는 니콘을 깊이 존경하여, 1652년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빌면서 총주교에 취임할 것을 부탁했다. 니콘은 차르가 자신을 차르의 으뜸 가는 목자이며 교리와 관습과 기강에서의 아버지로 섬길 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를 개혁하려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절대 지지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 총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니콘은 1654년에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종교 회의에서 전면적인 개혁안을 채택하고 이를 과감히 추진했다. 러시아적 전통을 중시하는 이른바 구교도들이 여기에 반발했다. 그 대표가 바로 아바쿰이었다. 차르는 니콘을 지지하는 반면, 아바쿰과 몇몇 추종자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구교도들은 굽히지 않았다. 몇몇 대귀족들도 구교도들의 운동을 지지했는데, 「러시아의 역사」에 따르면 "이들은 구습을 지키고, 차르의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운동을 이용했던 것이다. 많은 농민과 외곽 상공인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구교파 운동이 농노제와 차르 지방관들의 횡포에 대한 항의의 한 형태로 생각되었었다."

처음에는 굳게 단결되어 있던 알렉세이와 니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차르는 나이를 먹으면서, 차르 위에 서서 정부에 영향을 끼치려는 니콘에게 차차 반발하게 된 것이다. 대주권자(Great Sovereign)라는 칭호를 함께 쓰던 두 사람의 대립은 1658년 여름에 표면으로 나타났고, 차르는 결국 니콘에게서 총주교직을 박탈한 뒤 그를 수도원으로 쫓아냈다. 니콘은 알렉세이가 죽은 뒤에야 사면을 받아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되지만 길에서 죽는다.

알렉세이와 니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구교도들의 개혁운동은 활발해졌다. 그러나 차르는 이들을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아바쿰도 처형되었다. 이에 그들은 볼가강 너머의 숲 속으로 들어가 종교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정부는 거기까지 쫓아가 구교도들을 화형에 처했으며, 이러한 탄압 속에서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기도소에 모여 기도문을 노래하며 불을 지르고 타 죽어 갔다. 「러시아의 역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장작불 집단 자살을 통해 1675~1695년 사이에 불에 타 죽은 사람이 20,000명이나 되었다."라고 전한다. 구교도들을 이렇게 박해했지만, 정부는 교회의 분열을 극복해 낼 수 없었다. 구교도들은 많은 농민과 수공업자와 상인 등의 지지를 받아 가며 신앙을 지켰고, 그리하여 18세기에 이르러 정부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의 유배는 종식되었다. 약 70여 년간 계속된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교회의 조직을 그 기초부터 상처입힌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에 의해 구성된 당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로써 아비뇽은 교회 분열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3개월 동안 인정하였으나, 갑자기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불만을 느껴, 프랑스 왕가 출신 가운데 어느 친척을 천거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즉시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는 아비뇽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두 교황이 대립하게 되었고, 두 교황은 서거 후 각기 다른 후임자를 남겼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상태는 교구, 수도회, 심지어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두 교황이 각기 따로 교황청 기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위기를 어느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렵 교회 개혁을 논구하던 많은 저술들은―개혁의 중심지는 파리 대학이었다―보편 공의회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마침내 두 교황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파리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 파리 공의회는 기존의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대신 새로운 교황―알렉산데르 5세―을 선출하여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두 교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세 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으로 반교회적인 인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Siegmund)는 교황 요한 23세를 움직여 독일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가 소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의 이단설과의 논쟁을 거쳐 후스를 단죄하였다. 특히 공의회는 분열의 종식,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자주 현안으로 떠오른 교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공의회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다른 사안이 뜻밖에도 해결되었다. 즉 교황 요한 23세와 베네딕토 13세―아비뇽에 거주―두 교황이 퇴위하였고, 그레고리오 12세 교황―로마 거주―은 자발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거쳐 교회는 다시금 일치를 회복하였고, 서구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그리스 정교 부분을 참조하라.

1378년에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죽은 뒤 로마에서는 우르반 6세, 아비뇽에서는 클레멘스 7세가 제각기 교황으로 즉위하여 두 교황이 대립하였다. 그 뒤로 독일, 영국 등은 로마의 교황을 지지하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하여 교회가 분열하였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제3자를 등위하게 함으로써 분열을 끝내려 하였으나 양자가 거부함으로써 세 교황이 병립하여 교황청과 교회가 혼란을 겪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제3자를 등위하게 함으로써 분열을 끝내려 하였으나 양자가 거부함으로써 세 교황이 병립하여 교황청과 교회가 혼란을 겪었다.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면서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고 유럽이 쪼개진다.

연도/ 저자
1378년 9월 20일
수잔 케네디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지난 70년간 위치했던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청을 다시 옮겼다.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로마 시민들은-이들의 싸움 때문에 1305년 교황이 로마를 떠났던 것인데-거리로 몰려나와 이탈리아인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추기경 회의에서는 바리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뽑았고, 그는 우르바누스 6세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기경 대다수가 이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새로운 교황은 너무 가혹한 규율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378년 9월 20일 추기경 회의는 새로운 교황인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고, 먼젓번 선거는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제 교황이 둘이 생긴 셈이었다. 우르바누스 6세는 로마에 기거했고,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었다. 이러한 전례 없던 상황은 교황권은 물론 교회의 명성에도 오래 지속되는 손상을 입혔다. 세속 군주들이 두 교황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할 입장이 되면서, 유럽은 두 개의 정치적 진영으로 나뉘었다. 교회 대분열은 최초의 두 교황이 모두 죽은 뒤에도 각 후계자 선출과 더불어 지속되었다. 1409년, 이 분열을 끝내기 위해 소집한 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인 알렉산드르 5세를 선출했지만(그는 곧 사망했고, 요한 23세가 뒤를 이었다), 다른 두 교황이 물러나기를 거부했으므로, 이러한 임시 조치는 분열을 더 오래 지속시켰을 뿐이었다.

"그들은 폭력과 공포감을 이용해 이탈리아인을 뽑으라고… 우리를 다그쳤다."
「반란을 일으킨 추기경들의 선언문」, 13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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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기독교, 유대교, 메시아주의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세계 3대 종교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6-2)
[세계 여러 지역의 자연과 문화
[세계의 다양한 문화
[민족종교와 세계종교 (살아있는 지리 교과서, 2012.., 전국지리교사연합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뿌리 종교?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2011.., 전국사회교사모임)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서양 종교의 뿌리, 유대교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2013..,
[학습용어 개념사전
[그리스도교 [Christianity]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메시아 [messiah] (두산백과)
[메시아 [Messiah] (종교학대사전, 1998.,.)
[메시아(신학) [Messiah]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교회의 분열 (러시아사, 2006..,위키미디어 커먼즈)
[교회 분열 [Schisma, 敎會分裂] (교황사전)
[교회의 대분열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교회 대분열의 시작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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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9일 수요일

피타고라스[ Pythagoras ]

피타고라스[ Pythagoras ]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으며,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 것이며, 그의 증명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출생-사망/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BC582~BC497?
그리스
종교, 철학, 수학
그리스 에게해(海) 사모스섬

정치가, 수학자, 철학자. 처음 사모스 섬에서 살다가, 사모스는 포류크라테스가 정적이었던 관계로 성년이 되어 이탈리아로 옮겨가서 크로톤 시에서 살았다. 이 당시(기원전 6세기 말) 이곳의 권력은 귀족계급의 손아귀에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질서'에 관한 반동적인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이 질서란 말은 사회생활에 적용할 경우 귀족권력의 의지대로 해석되고 있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질서' 파괴로 간주하였다.

에게해(海)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므네사르코스(Mnesarchos)는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에게 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으며 아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어려서 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고 긴 여정의 장사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던 탈레스(Thales)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간 수학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섬에 학술 연구 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하였다. 그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온화와 겸손, 과묵을 덕목으로 추구하였으며, 신들과 양친,친구,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一絃琴)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數比例)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매우 다양하며 가장 대표적인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사모스의 상인 무네사르코스가 아내와 함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참배했을 때 준 자식으로, <아폴론의 대변자>라는 의미로 피타고라스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철학을 공부하고, 친구인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개혁에 임했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폴리크라테스가 점차로 독재자가 되어가는 것을 비판해서 고국을 버렸는데 30세 전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후 30년 동안 세계각지의 밀의전수를 구해서 편력하고, 이집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카리아, 인도 등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당시의 모든 학문을 몸에 익혔다고 전해지며, 그 박학다식은 많은 고대 작가에게 경탄받았다.

60세 전후,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거주를 정하고, 거기에 밀의 학교로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창립했는데 이 교단은 즉시 부흥하고, 그 영향하에 크로톤은 남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90세 때, 교단과 세속권력의 확집이 격렬해져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메타폰티온으로 추방되어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사후에도 탄압이 계속되고 교단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결국 비밀결사화하였고 피타고라스 교단에서는 일체의 교설이 피타고라스의 것이 되었는데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교조였다. 여기에서 남녀는 평등하게 취급되고, <피타고라스적 생활>을 보내도록 지도되었으며 청정을 유지하고 육식을 끊고, 침묵 중에 자기혼을 응시하는 수행이 부과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혼은 원래 불사, 즉 신적인 존재인데, 무지로 자신을 더럽게 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육체라는 묘에 매장되고 있으며 우리들이 생이라고 하는 지상의 생활은 실은 혼의 죽음이며, 그 죽음에서 부활해서 다시 신적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그에 실패해서 무지한 인생을 계속 살면, 윤회전생의 틀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혼은 지혜(소피아)를 구하고, 그로써 본래의 순수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지혜의 탐구(필로소피아)>야말로 해탈을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인데 이 교단에는 종교적 해탈을 구하는 청문생과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는 학문생의 두 파가 있었다고 하며 여기에서 학문은 종교적 해탈과 불즉불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두 파는 현교와 밀교, 또는 신참자와 숙달자로 구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지혜에 이르기 위한 준비적 과정으로서 네 개의 학문이 있었다. 첫 번째에 <수의 학>, 두 번째로 <형의 학>, 세 번째로 <별의 학>, 네 번째로 <조화의 학>이다. 이 4학은 후에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유럽학문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근대적 의미에서의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는 현상적으로는 어찌되었든,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고대적인 <수>의 관념에 의거한 일종의 명상체계였다.

1은 최초의 자연수 또는 단위수일 뿐만 아니라, 시원, 전체, 궁극, 완전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2는 2개의 단위수가 아니라 대립, 분열, 투쟁, 무한을, 3은 조화, 미, 질서, 신성을, 4는 사물, 현실, 배분, 정의 등을 의미한다. 수는 양이 아니며 존재의 원형적 형상 이었다. <만물의 원리는 수이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세계는 양적 관수관계로 이루어진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물은 수의 존재분절기능에 의해서 질서가 확립되고, 존재의 각 층에는 동일한 수의 유비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다음에 제시하는 <4원소>이다. 이 1, 2, 3, 4로 된 10개의 점은 대우주와 소우주에 공통하는 세계질서(코스모스)를 나타내는 만다라로 되어 있으며, 피타고라스 교단에서는 이 도형 앞에서 서약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와 같은 <수>의 중시는 수학사상에서 피타고라스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돌려지는 많은 업적을 낳게 되었다. 삼평방의 정리(피타고라스의 정리), 피타고라스의 수, 무리수의 발견 외에, 수론과 결부된 음계이론이 특히 유명한데, 최근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의 영향도 주목되며, 그 독창성에 대한 평가는 정하기 어렵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보는 피타고라스주의는 이후의 유럽사상사, 과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엠페도클레스의 사대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도 그 권내에 있다. 한편 지동설의 최초의 제창자라는 피롤라오스, 입방체의 배적문제의 해결로 유명한 아르키타스 등은 피타고라스 학도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신(新)피타고라스주의가 일어나 종교적 전통에 수학적 빛을 비추었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가 이 대표이며, 이안브리코스에도 신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결합이 인정된다. 또한 근대를 연 상징적 사건이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이나 케플러의 우주 모델도 피타고라스 학파 사상의 힌트가 되었으며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은 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분을 16~17세기의 피타고라스 부흥운동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또한 르네상스는 어느 의미에서 플라톤과 함께 피타고라스의 재생운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당시의 음악, 회화, 건축, 문예 등에도 피타고라스적 우주론이 반영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多面體)'로 불리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中外比)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하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을,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년 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우주는 코스모스(Cosmos)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 b라 하고, 빗변의 길이를 c라 하면 a2+b2=c2이 성립한다.
[참고]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끼고 있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변의 길이의 제곱과 같다.


피타고라스, 공식,



                                           피타고라스 공식,

참조항목
무리수유클리드지동설피타고라스의 정리피타고라스학파하르모니아

역참조항목
다면체수학신피타고라스학파윤회측지카르다노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철학

카테고리
인물과학수학외국수학
역사유럽사그리스사
인물철학서양철학고대서양철학
인물종교그리스도교외국로마가톨릭교회

출처 ^ 참고문헌,
[피타고라스 [Pythagoras] (철학사전, 2009.,)
[피타고라스 [Pythagoras] (두산백과)
[피타고라스 [Pythagoras] (종교학대사전, 1998...)
[피타고라스의 정리 (Basic 중학생을 위한 수학공식 활용사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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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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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Pythagoras #인물 #과학 #수학 #외국수학 #역사 #유럽사 #그리스사 #철학 #서양철학 #고대서양철학 #인물 #종교 #그리스도교 #외국로마가톨릭교회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대각선의 길이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多面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中外比)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년 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섬에 학술 연구 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하였다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온화와 겸손 과묵을 덕목으로 추구 #신들과 양친 친구 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 복종을 설파하였다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 #음악에서는 일현금(一絃琴)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數比例)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매우 다양 #가장 대표적인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무리수 유클리드 지동설피타고라스의 정리#피타고라스학파 하르모니아 #다면체 #수학 #신피타고라스학파 윤회 #측지 #카르다노 #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 #수>의 중시는 수학사상에서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학파에 돌려지는 많은 업적을 낳게 되었다 #삼평방의 정리(피타고라스의 정리) 피타고라스 #무리수의 발견 외에 #수론과 결부된 음계이론이 특히 유명 #최근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의 영향도 주목 #독창성에 대한 평가는 정하기 어렵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보는 피타고라스주의는#유럽사상사 #과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엠페도클레스의 사대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도 그 권내에 있다 #지동설의 최초의 제창자라는 피롤라오스 #입방체의 배적문제의 해결로 유명한 아르키타스 등은 피타고라스 학도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신(新)피타고라스주의가 일어나 종교적 전통에 수학적 빛을 비추었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가 이 대표 #이안브리코스에도 신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결합이 인정된다 #근대를 연 상징적 사건이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이나 케플러의 우주 모델도 피타고라스 학파 사상의 힌트가 되었으며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 #중요한 일부분을 16~17세기의 피타고라스 부흥운동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르네상스는 어느 의미에서 플라톤과 함께 피타고라스의 재생운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당시의 음악 회화 건축 문예 등 #피타고라스적 우주론이 반영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사모스의 상인 #무네사르코스가 아내와 함께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참배했을 때 준 자식 #아폴론의 대변자>라는 의미로 피타고라스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철학을 공부하고 #친구인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개혁에 임했다 #폴리크라테스가 점차로 독재자가 되어가는 것을 비판해서 고국을 버렸는데 30세 전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후 30년 동안 세계각지의 밀의전수 #구해서 편력하고 $이집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카리아 #인도 등 발이 닿지 않은 곳 #당시의 모든 학문을 몸에 익혔다고 전해지며 #그 박학다식은 많은 고대 작가에게 경탄받았다 #60세 전후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거주를 정하고 @거기에 밀의 학교로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창립 #이 교단은 즉시 부흥하고 #그 영향하에 크로톤은 남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90세 때 교단과 세속권력의 확집이 격렬해져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메타폰티온으로 추방되어서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도 탄압이 계속되고 교단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비밀결사화 #피타고라스 교단에서는 일체의 교설이 피타고라스의 것이 되었는데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교조였다 #남녀는 평등하게 취급 #피타고라스적 생활>을 보내도록 지도되었으며 청정을 유지하고 육식을 끊고 #침묵 중에 자기혼을 응시하는 수행이 부과되었다

"검찰, '쯔양 협박 혐의' 유튜버들 오늘(11일) 수사 착수..'고발 당일' 이례적,쯔양, 5년간 조용한 기부…보육원장 “그간 힘든 내색 전혀 없었다”"두 아들 건다"던 유튜버, 쯔양 협박 비난에 "절대 그냥 못 죽지"쯔양 폭행·협박·갈취하던 前 남자친구, 극단적 선택… 고소 사건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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