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일요일

몽골 (Mongolia)

몽골 (Mongolia)

국가 몽골Mongolia/ 수도울란바토르

공식명칭 : 몽골(Mongolia)

인구 : 2,519,000 명

면적 : 1,564,116 km2

수도 : 울란바토르

공식언어 : 할하몽골어

독립년월일 : 1921. 3. 13

화폐단위 : 투그리크(tugrik/Tug)

국가(國歌) : Darkhan manai khuvsgalt uls("Our sacred revolutionary republic") [국가듣기]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외몽골, 몽고라고도 함. 몽골어로는 Mongol Uls.

북쪽의 시베리아와 남쪽의 중국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

몽골 지도(13K)

통계 자료

Area: 1,566,000 sq km (610,740 sq mi)

면적: 1,566,000 sq km (610,740 sq mi)

Population: 2.5 million

인구 : 2천 5백만명

인종 : 칼카몽골족(86%), 카자흐인(6%), 중국인(2%), 러시아인(2%), 그 외 수많은 소수인종언어:몽골어, 튀르크어, 러시아어, 중국어

종교: 티벳불교, 회교, 샤머니즘

정체: 의회민주주의

대통령: 나차긴 바가반디(Natsagiin Bagabandi)

수상: 린친냐민 아마르자르갈(Richinnyamiyn Amarjargal)

몽골국기,

몽골국기

빨강은 환희와 승리를, 파랑은 충성과 헌신을 나타낸다

수도 : 위치 : 울란바토르 (Ulanbaator) 중앙 아시아 고원지대 북부

언어 : 몽골어

기후 : 대륙성기후

종교 : 라마불교 90%, 이슬람교 5%

면적 : 156만 4160㎢

정체 : 공화제

시간울란바토르04:32:35 PM/ 환율1 MNT=0.39원/ 언어몽골어/ 면적1억 5,641만 1,600㏊ 세계17위/ (2017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332만 9,282명 세계134위 (2021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GDP138억 5,285만 259.5달러 세계124위 (2019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대만통계청 기준) 기후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혹한이 ... 종교라마교 53%, 이슬람교 3%역사

몽골의 주요 민족인 할하족(族)은 몽골제국기에 형성된...

몽골(Mongolia)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항상 징기스칸(Genghis Khan)장군, 고비사막을 떠도는 낙타,

대초원을 질주하는 야생 말과 같이 야성적이며 이국적인 광경이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몽골은 지구의 끝자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인 올란바토르(Ulaan Baatar)외곽에서는 다른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세기에 발을 들여 논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곳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모험이 남아있는 곳이다.

몽골이 독립국가로 남아있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한때 방대한 유라시아(Eurasian)대초원의 지배자였던 몽골은 여러 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식민속국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몽골인 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서 유목민족은 완전히 사라지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제 이 나라는 법령과 다수정당 투표방식을 채택하였고 민주연합여당이 있는 나라이다.

몽골로의 여행은 매우 힘들 것이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서로 격려하며 여행을 다니며, 따뜻한 겨울코트를 여밀 수 있고,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면 여행하는데 문제없다.

유목민의 땅으로 걸어서 여행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지리 및 기후

몽골은 거대하고 대륙에 둘러싸여 있으며 프랑스의 3배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징기스칸(Ginghis Khan)과 쿠빌라이칸(Kublai khan)의 몽골 정복시대에는 몽골의 영토는 끝없이 넓었다.

20세기까지 몽골의 국토면적은 지금의 2배였으며 시베리아의 커다란 땅과 몽골내륙(지금은 중국에 속해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라이기도 하며 평균고도가 1580m(5180ft)이다. 많은 높은 산이 서쪽 멀리 위치해 있다.

몽골알타이누루(Mongol Altai Nuruu)들은 만년설로 덮혀 있고 그것 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타반보그드울(Tabanbogd Uul)(4370m/14,350ft)로서 몽골, 러시아, 중국보다 높이 솟아오른 멋진 빙하가 있다. 봉우리들 사이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 있다.

몽골의 다른 지역에는 많은 염수호 와 담수호가 있다. 가장 큰 호수는 홉스굴누루(khovsgol nurr)로서 전세계 담수의 2%에 해당하는 물이 있다.

몽골 남부의 3분의 1은 고비사막(Gobbi Desert)이 자리잡고 있다. 비록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에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풀이 양, 염소, 낙타 때들에게 충분히 공급될 정도로 있다.

몽골의 나머지 대부분은 초원으로 유명한 타키(Takhi)말의 원산지이다.

이 타키(takhi)말은 징기스칸이 정복을 위한 원정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말이다.

비록 1년에 260일이 맑은 날씨를 나타내고 '푸른 하늘의 땅'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의 기후는 매우 극단적이다. 

대부분의 날씨가 긴 아 북극지방의 겨울기후의 영향을 받아 4월 말 까지도 고비(Gobbi)사막에서 눈을 볼 수 있다.

어떤 호수는 6월까지 얼어있다.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짧은 우기가 있지만 소나기는 짧고 조용히 내린다. 높은 고도 때문에 여름에도 밤에는 춥다.

울란바토르(Ulaan Baatar)의 겨울(10월부터 4월까지)은 길고 추우며 1월과 2월에는 기온이 -30℃(-22℉)까지 내려간다.

짧은 봄기간(5월에서 6월) 동안에는 끔찍한 모래폭풍이 발생한다.

역사

이미 알려진 대로 몽골인 들은 800년 전쯤에 문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들의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입으로 전해져 온 서사시로 기록하였다.

주변국가와의 많은 접촉(대부분 불행하였지만)으로 인해 몽골에 대한 역사가 주변국가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 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 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대략 1216-94)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몽골의 최고 전성기였다.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몽골의 원 왕조는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

그들의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사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대부분의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도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하에 놓였다.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 후에 청 제국은 점점 부패와 독재성을 띄게 되었다.

중국과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약간의 반항에도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야했다.

결국 몽골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하였을 때 몽골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였고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몽골은 젭준담바(Jebtzun Damba: 살아있는 부처)의 지도하에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정부를 세웠다.

1915년 5월25일 몽골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카야카다조약(Kyakhta)에 몽골, 중국, 러시아가 서명했다.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은 몽골의 귀족정치에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은 1919년 몽골로의 진격명령을 내렸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1921년 초에 후퇴한 백러시아(White Russian)의 반공산주의 군대가 몽골로 진군했고 중국을 내몰았다. 

야만적인 중국과 러시아군대로 인해 몽골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타올랐다.

시베리아에서 백러시아군대에 비해 러시아 공산당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에 도움을 청했다. 같이 힘을 합쳐 1921년 6월에 올란바토르를 다시 되찾았다.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명목상의 대표로서 계속 유지되었고 새롭게 구성된 몽골인민당(몽골역사에서 첫 번째 정당이었고, 그후 69년 동안 유일한 정당이었다)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1924년 11월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MPR)을 선포하였고 몽골은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몽골 공산주의는 1920년대 후반 스탈린(Stalin)이 절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소련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충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숙청은 곧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앞잡이인 코루지니초이발상( Khorloogiyn Choibalsn)이 몽골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초이발상은 스탈린의 지휘에 따라 토지와 가축을 몰수한 후 소작인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32년 700명 이상(대부분 승려였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압류 당하고 공영화되었다.

농부들은 협동농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개인사업은 무너졌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무역상들은 추방당했고 모든운송수단은 국유화되었다.

정부의 종교반대운동은 특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공포의 시간이 수도원에 도래하였고 수천의 승려들이 체포되거나 사형 당했다.

1939년에 27,000명 정도의 시민이 사형에 처해졌으며(그 당시 몽고 인구의 3%에 다다른다) 그중 17,000명은 승려였다고 알려졌다.

1980년대 초기에 소련정부가 침체상태로 흔들리고 있을 때 몽골은 잠빈밧몽크(Jambyn Batmonkh)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의해 재정비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밧몽크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와 글라스노스트정책의(몽골에서는 일토드(il tod)로 알려졌다) 조심스러운 시도를 종용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었고, 1989년 완전한 외교상의 관계가 다시 확립되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몽골의 자치권인정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소련의 붕괴정도에 신경을 쓰거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0년 3월 올란바토르의 국회건물 앞 광장에서 과거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밧몽크는 권력을 상실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났고 격렬한 시위와 항의는 계속되었다. 

5얼에 정부는 헌법을 수정하여 1990년 6월부터 다수정당 선거제도를 허용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올란바토르의 유권자들은 다른 정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으나 외곽의 시골지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여러 명 의 젊은 민주주의 자들과 힘을 나누겠다고 발표하였다.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었다.

4년 후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화

몽골인의 생활방식은 유목생활이며 가축들의 이동경로와 친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초원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몽골 인은 이동하기 쉽고, 크며 흰 펠트천으로 만든 텐트의 일종인 게르(Ger)에서 산다. 

보편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즉,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하게 트고, 뒤를 향하고 약간 서쪽에는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 있으며 저의 뒤쪽에는 연장자나 가치 있는 소유물을 두는 곳이 있다. 

그리고 검정색의 벽에는 부처상과 함께 가족제단, 가족사진 그리고 옷장이 있다.

전통적이고 종교적이며 미신적인 수많은 규칙과 게르에 관련된의상에 대한 설명을 지방주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몽골인 들은 티벳불교를 독실하게 믿고있으며 몽골과 티벳과의 연계는 깊고 오래되었다. 

모든 독실한 몽골의 불교신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신성한 도시인 라사(Lhasa) 에 가보려고 시도한다.

티벳인들은 그들의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의 지원을 번갈아 가며 받고 있다.

1921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몽골에는 110,000명의 라마승려가 700 여러 곳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930년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승려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현장으로 보내졌으며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약탈당했으며 모든 종교적인 제례와 축제는 금지되었다.

1990년이 되어서야 종교의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 후로 불교(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띄었다. 

수도원은 다시 문을 열었고 심지어 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중 일부가 라마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수도원과 사찰(sum)은 항상 티벳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주목할 만한 소수 수니회교파(Sunni Muslim)는 대부분 카자크(Kazaks)종족으로 되어있는 몽골의 서쪽멀리 있는 지역에 발달하였다.

몽골의 그림, 음악 그리고 문학은 티벳불교 와 유목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타삼(Tsam)춤은 악마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한 춤이며 유목생활과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공산정권시절엔 금지되었다가 다시 충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전통음악에는 방대한 종류의 악기와 노래형식이 사용된다.

몽골 구미(Khoomi)노래는 매우 정성 들여 연습한 남성들이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사용하여 고음을 내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한번에 여러 개의 음을 발성하기도 한다. 

고대 몽골의 전통곡예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통음악과 춤의 행위는 완벽하지 못하다.

공식언어인 몽골어는 우랄알타이어(Ural-Altaic)계 언어중 하나이며 필란드어, 터어키어, 카자흐어, 우즈벡어 와 한국어도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

1944년부터 러시아 시릴문자(Russian Cyrillic alphabet)가 몽골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으며 그것들 중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최근에서야 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이며 몽골의 위대했던 날들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몽골루니푸차토치얀(몽골의 숨겨진 역사)을 번역하였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몽골의 격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침식사는 너 자신을 위해 먹고 점심식사는 친구들과 나눠먹고 저녁식사는 적들에게 적선하여라. 가장 잘 차려지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이다.

보통 기름기가 많은 끓인 양고기와 밀가루가 식탁에 올라오며 때때로 약간의 낙농식품과 쌀이 곁들여 지기도 한다. 

몽골 서부의 카자크족의 식사에는 말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다.

몽골인들은 차를 매우 즐겨 마시며 일반적으로 수테차이(suutei tsai (소금차))가 있다. 

아르히(arkhi)(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가축들이 그들의 집을 만드는 기간동안에는 발효시킨 말 우유에 3%의 알콜을 넣어 만드는 아이락(aikag)을 양조한다. 

많은 몽골인들은 이것을 증류하여 알콜 함량이 12%로 증가한 쉬밍아르히(Shimiin Arkhi)를 만든다.

축제 및 행사

연중 가장 큰 행사는 나담축제(Naadam Festival)로서 에린거반나담(eriyn gurvan naadam)으로 알려져 있고 레슬링, 활쏘기, 경마의 "사내다운 스포츠"를 펼친 후 열린다. 

축제는 보통 7월 11일부터 13일 사이에 전국에 걸쳐 열리며 1921년 몽골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행사는 축제의 첫날과 둘째 날 에 주로 열린다. 차강사르(Tasgaan Sar(백월))은 1월이나 2월에 있는 음력신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끔찍한 겨울철을 보낸 후에 몽골인 들은 3일 동안 많은 음식과 술과 노래로 축제를 여는 것이다.

경비 및 환전

Currency: togroog (T or MNT)

통화 : 투그릭(togroog)(T or MNT)

저렴한 식사: US$3-5

일반 식사: US$5-10

고급 식사: US$10-20

저렴한 숙소: US$5-10

일반 호텔: US$10-20

고급 호텔: US$20이상

만약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을 한다면 하루에 US$100 정도를 쓰게 될 것이다.

관광상품과 똑같은 풍경, 같은 숙소, 같은 장소를 혼자서 여행할 경우 하루에 US$80으로 관광할 수 있다.

비용을 개인지프차 와 야영에 지출하면 값비싼 저에서 지내는 것보다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숙박과 식사는 하루에 최소 US$10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2배정도의 예산을 짜두는 것이 좋다.

시골지방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호텔에 머문다면 하루에 US$15가 소비될 것이고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한다면 하루에 US$7정도 소비될 것이다.

미국 달러로 된 여행자수표와 약간의 현금을 미국달러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몇몇의 호텔과 공항에서는 편리하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면 신용으로는 어떠한 것도 살 수 없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8년 이전에 발행된 미국달러는 사용할 수 없다. 아마도 울란바토르의 고급식당과 호텔에서는 필수적으로 10%의 세금이 징수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계산서에 세금을 포함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세금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곳도 있다.

고급식당에서는 봉사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저렴한 물건은 공공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몽골현지인 보다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한다.

개요/ 국기/ 국가/ 지도/

몽골 외뵈르한가이 남서부 고비 사막의 가장자리부터 시작되는 고비알타이 ...

자연환경 중앙 아시아 북부에 속하며, 면적은 아시아에서 6번째로 넓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편이다.

북위 42~52°, 동경 87~120°에 걸쳐 있는 이 나라의 모양은 길쭉한 타원형이며, 동서 길이는 2,392km이고 남북길이는 가장 긴 곳이 1,259km이다.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면적 1,564,116㎢, 인구 2,493,000(2003 추계).

몽골은 국토의 약 4/5가 기복이 완만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초지가 좋아 몽골인들은 수백 년 동안 가축을 키우는 유목생활을 했다.

평균 고도가 해발 1,580m인 몽골은 지형에 따라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시베리아에서 북부와 서부 지역으로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온 산맥, 그 산맥 사이에 있는 산간 분지 지역, 남부와 동부에 있는 거대한 고원과 사막 지역이 그것이다.

북부에는 3개의 주요산맥이 있다.

알타이 산맥은 가장 길고 높은 산맥으로, 빙하로 뒤덮인 산도 있다. 이 산맥은 다시 몽골알타이 산맥과 고비알타이 산맥으로 나뉘고, 몽골의 북서쪽 끝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산봉우리들의 높이는 약 3,350~4,250m에 이른다.

2번째 산맥은 한가이 산맥인데, 이 산맥 역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고 높이 3,650m를 넘는 산봉우리가 있다. 

한가이 산맥은 몽골의 중심부 근처에서 단층 지괴를 이룬다.

3번째 산맥인 헨틴(헨테이) 산맥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에 있으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다. 

헨틴 산맥은 가장 규모가 작은 산맥으로 산봉우리들의 높이도 1,800~2,400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북서부 지역의 아름다운 분지 복합체인 대호수 지역에는 300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그보다 더 북쪽의 한가이 산맥 북부에 있는 호르고 지역에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수많은 호수가 있으며, 중북부 국경 근처에는 거대한 지하동굴들로 유명한 회브스괼 호가 있다.

국토의 약 1/3은 나무가 없는 반건조 지대인 고비 사막으로 덮여 있다.

고비 사막은 돌이 많으며, 일부만 모래로 덮여 있다.

오르혼 강의 본류에 해당하는 셀렝가 강이 몽골에서 가장 대표적인 강으로 중북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알타이 산맥의 빙하에서 발원하는 호브드(코브도) 강은 북서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의 강들은 가끔 홍수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상당한 수력발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브스 호는 면적이 거의 3,370㎢에 이르는 함수호(鹹水湖)이다. 회브스괼 호는 주요한 담수호(2,620㎢)이며, 수심이 240m가 넘는 가장 깊은 호수이다.

몽골은 지질활동이 활발해서 때로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

몽골의 뚜렷한 대륙성기후는 강수량이 매우 적고 기온변화가 잦으며 기온차가 큰 것이 특징이다. 겨울은 춥고 맑으며 건조하여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여름은 따뜻하고 짧다. 겨울평균기온은 -26~-18℃이고, 여름평균기온은 17~23℃이다. 

연간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대는 350㎜이고 고비 사막은 100㎜인데, 강수량의 3/4이 7~8월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의 뚜렷한 특징은 해가 비치는 맑은 날이 많다는 것인데 연평균 220~260일이 된다.

몽골 북부지역에 자라는 식물로는 시베리아낙엽송·시더·소나무류·자작나무류·가문비나무류 등이 있다.

북부 삼림에는 스라소니·큰뿔사슴·말코손바닥사슴·흰표범·멧돼지·담비와 아시아산 붉은사슴 등이 서식한다.

산간 분지의 초원과 강유역에는 마못과 몽골가젤영양이, 반(半)사막지역에는 낙타·야생양·야생말·곰 등이 산다. 

또한 광물 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구리·아연·몰리브덴·인회암·텅스텐·금·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목초지이다. 또한 광물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국민

인구의 약 4/5가 할하어를 사용하는 몽골족이다. 나머지 1/5은 기타 몽골족·카자흐족·러시아인·중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할하몽골어가 공용어이며, 튀르크어·러시아어·중국어도 쓰인다.

전통적으로 지배적 종교였던 티베트 불교는 공산당 집권하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1990년 이후 되살아나고 있다.

몽골의 인구는 높은 자연증가율을 보여 1952~84년 사이에 전체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세계 평균증가율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1978년에 시작된 몽골 정부의 인구정책은 기존의 높은 출생률을 더 높이고 사망률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몽골의 사망률은 비교적 높지만 평균수명은 남자가 64세, 여자가 67세이다.

몽골 정부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와 울란바토르 북서쪽에 있는 다르한이 몽골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경제

1900년까지 소비에트 모델에 의한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를 채택했던 몽골은 이후 1992년 새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화 개혁 과정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된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생필품 부족, 식량배급 등의 결과를 낳았다.

전체 노동력의 거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해 왔으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 정도에 불과하다.

축산물이 전체 농산물 수익의 약 70%를 차지한다. 가축의 약 2/3는 양이며, 염소·소·말·낙타도 기른다.

농경지는 국토의 1% 미만으로 밀이 주요작물이다. 

국토의 약 1/10은 숲으로 덮여 있고, 이 삼림에서 나오는 통나무는 공업용과 연료로 쓰인다.

석탄은 몽골 전역에서 채굴된다. 

주요 탄광지역은 울란바토르 남동쪽에 있는 날라이와 다르한 남동쪽에 있는 샤린골이다.

다르한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에르데네트 광산 단지에서는 구리와 몰리브덴이 채굴된다. 광물이 전체 수출액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노동력의 1/5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하며 GDP의 1/4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재와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해야 한다. 

공업은 대부분 울란바토르에 몰려 있다. 주요공산품은 가공식료품·의류·신발·판재·목제품 등이다. 

전기는 국내 연료와 수입 연료로 생산한다.

광물 외에 기타 원자재·식품·소비재 등을 수출하며, 기계류·운송장비·연료·금속 등을 수입한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러시아이다.

울란바토르와 다르한을 잇는 도로와 북쪽 국경 근처의 일부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만 지방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흙길이다.

울란바토르는 모스크바 및 베이징[北京]과 철도로 이어져 있으며 국제공항이 있다.

정치·사회

1992년 채택된 헌법은 몽골이 독립 주권 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입법권은 단원제인 국가대후랄(의회)에 있으며, 보통선거로 선출된 4년 임기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 역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정부수반인 총리는 의회 다수당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다.

1990년까지는 몽골인민혁명당(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MPRP)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1992년 조직을 개편했다. 이밖에 몽골국민민주당, 몽골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재판은 최고법원과 아이마그(지역) 법원 및 시(市)법원에서 담당한다.

복지제도로 질병·임신·신체장애에 대해 보상금을 제공하고, 노인과 신체장애자에게 연금을 준다.

의료비는 무료이며 국가가 요양소조직을 운영한다.

보건시설과 의료종사자의 수는 차츰 늘어나고 있다.

천연두·티푸스·콜레라·디프테리아 등과 같은 질병은 퇴치되었고, 전염병 발생률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교육은 무료이며, 대부분의 아동은 8~10년 동안 학교교육을 받는다.

유목민의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도 있다. 고등교육의 주요중심지는 몽골국립대학교(1942 설립)이다.

10여 개의 일간지(중앙 2개)와 20여 개의 지역 신문이 발행되고 있으며, 수십 종의 대중·전문 잡지도 발간된다.

몽골은 국토가 넓고 도시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매우 중요한데,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중계를 활용한다.

문화

몽골의 문화생활은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전통과 새로 나타나고 있는 근대적 요소가 섞여 있다.

몽골의 전통축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해마다 건국기념일인 7월 11일에 시작되는 나담 축제이다. 이 축제에서는 남자들을 위한 씨름·활쏘기·경마 등 3가지 경기를 벌인다.

몽골의 전통 문학에는 영웅서사시·전설·옛날이야기·유롤(행운을 비는 시)·마그탈(찬미하는 시) 등이 있다.

20세기 작가로는 다쉬도르진 나차고르즈와 G. 나반남질이 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국립극단·오페라단·발레단이 전통 및 고전 연극과 오페라·발레를 공연한다.

역사

신석기시대에 몽골에서는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 및 유목민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BC 3세기에 몽골은 흉노족(匈奴族)이 세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4~10세기까지는 오르혼 돌궐족이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

745~840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이 몽골 북부지역에 제국을 세웠지만, 이 제국은 키르기스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13세기에 칭기즈 칸(테무친)이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타타르족을 무찌른 뒤,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 및 카프카스 남부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234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41 재위)는 중국의 금(金)나라를 정복했다.

중국의 원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1259~94 재위)이었다.

원이 멸망한 1368년부터 수백 년 동안 몽골족은 원래의 고향인 초원지대를 떠나지 않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몽골족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는 리그단 칸(1604~34 재위)이었다.

리그단 칸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몽골족은 만주족에 정복되어 중국 청(淸)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몽골의 민족의식이 나타났다. 1912년에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때인 1920년에 벨로루시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다. 그러자 담디니 쑤흐바타르가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도움을 얻어 벨로루시군을 격퇴시켰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들마저 몰아냈다.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경제·문화·이념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몽골은 1990~91년 동유럽과 소련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주요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몽골인 들은 800년 전쯤에 문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들의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입으로 전해져 온 서사시로 기록하였다.

주변국가와의 많은 접촉(대부분 불행하였지만)으로 인해 몽골에 대한 역사가 주변국가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 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 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 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대략 1216-94)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몽골의 최고 전성기였다.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몽골의 원 왕조는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

그들의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사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대부분의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도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하에 놓였다.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 후에 청 제국은 점점 부패와 독재성을 띄게 되었다.

중국과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약간의 반항에도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야했다. 

결국 몽골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하였을 때 몽골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였고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몽골은 젭준담바(Jebtzun Damba: 살아있는 부처)의 지도하에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정부를 세웠다.

1915년 5월25일 몽골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카야카다조약(Kyakhta)에 몽골, 중국, 러시아가 서명했다.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은 몽골의 귀족정치에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은 1919년 몽골로의 진격명령을 내렸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1921년 초에 후퇴한 백러시아(White Russian)의 반공산주의 군대가 몽골로 진군했고 중국을 내몰았다. 

야만적인 중국과 러시아군대로 인해 몽골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타올랐다.

시베리아에서 백러시아군대에 비해 러시아 공산당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에 도움을 청했다. 같이 힘을 합쳐 1921년 6월에 올란바토르를 다시 되찾았다.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명목상의 대표로서 계속 유지되었고 새롭게 구성된 몽골인민당(몽골역사에서 첫 번째 정당이었고, 그후 69년 동안 유일한 정당이었다)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1924년 11월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MPR)을 선포하였고 몽골은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몽골 공산주의는 1920년대 후반 스탈린(Stalin)이 절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소련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충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숙청은 곧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앞잡이인 코루지니초이발상( Khorloogiyn Choibalsn)이 몽골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초이발상은 스탈린의 지휘에 따라 토지와 가축을 몰수한 후 소작인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32년 700명 이상(대부분 승려였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압류 당하고 공영화되었다.

농부들은 협동농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개인사업은 무너졌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무역상들은 추방당했고 모든운송수단은 국유화되었다.

정부의 종교반대운동은 특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공포의 시간이 수도원에 도래하였고 수천의 승려들이 체포되거나 사형 당했다.

1939년에 27,000명 정도의 시민이 사형에 처해졌으며(그 당시 몽고 인구의 3%에 다다른다) 그중 17,000명은 승려였다고 알려졌다.

1980년대 초기에 소련정부가 침체상태로 흔들리고 있을 때 몽골은 잠빈밧몽크(Jambyn Batmonkh)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의해 재정비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밧몽크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와 글라스노스트정책의(몽골에서는 일토드(il tod)로 알려졌다) 조심스러운 시도를 종용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었고, 1989년 완전한 외교상의 관계가 다시 확립되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몽골의 자치권인정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소련의 붕괴정도에 신경을 쓰거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0년 3월 올란바토르의 국회건물 앞 광장에서 과거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밧몽크는 권력을 상실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났고 격렬한 시위와 항의는 계속되었다. 5얼에 정부는 헌법을 수정하여 1990년 6월부터 다수정당 선거제도를 허용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올란바토르의 유권자들은 다른 정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으나 외곽의 시골지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여러 명 의 젊은 민주주의 자들과 힘을 나누겠다고 발표하였다.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었다. 4년 후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석기시대에 몽골에서는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 및 유목민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BC 3세기에 몽골은 흉노족(匈奴族)이 세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4~10세기까지는 오르혼 돌궐족이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

745~840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이 몽골 북부지역에 제국을 세웠지만, 이 제국은 키르기스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13세기에 칭기즈 칸(테무친)이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타타르족을 무찌른 뒤,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 및 카프카스 남부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234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41 재위)는 중국의 금(金)나라를 정복했다.

중국의 원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1259~94 재위)이었다.

원이 멸망한 1368년부터 수백 년 동안 몽골족은 원래의 고향인 초원지대를 떠나지 않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몽골족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는 리그단 칸(1604~34 재위)이었다.

리그단 칸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몽골족은 만주족에 정복되어 중국 청(淸)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몽골의 민족의식이 나타났다.

1912년에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때인 1920년에 벨로루시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다. 그러자 담디니 쑤흐바타르가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도움을 얻어 벨로루시군을 격퇴시켰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들마저 몰아냈다.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경제·문화·이념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몽골은 1990~91년 동유럽과 소련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주요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한국과의 관계

몽골과 북한은 1948년 10월 수교를 합의한 직후부터 상호 상주공관을 두었으며 여러 가지 협조조약을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6년 11월에는 몽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6일 정식 국교를 수립했으며, 1991년 10월 오치르바트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수교 이전부터도 체육 분야 등 민간차원의 교류가 있었으나, 수교 이후 인력 교류, 예술단 상호 교류 등 각종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1996년의 대한수입액은 2,601만 7,000달러, 대한수출액은 206만 4,000달러이다.

경제

GDP: US$5 billion

GDP: US$ 5 십억

GDP per head: US$1970

일인당 GDP : US$1970

Annual growth: 6%

년간성장율: 6%

물가상승률: 53%

주요산업: 구리, 가축, 캐스미어 실, 울

주요수출국: 구 소련 과 동유럽, 중국, 호주

문화

몽골인의 생활방식은 유목생활이며 가축들의 이동경로와 친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초원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몽골 인은 이동하기 쉽고, 크며 흰 펠트천으로 만든 텐트의 일종인 게르(Ger)에서 산다.

보편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즉,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하게 트고, 뒤를 향하고 약간 서쪽에는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 있으며 저의 뒤쪽에는 연장자나 가치 있는 소유물을 두는 곳이 있다. 그리고 검정색의 벽에는 부처상과 함께 가족제단, 가족사진 그리고 옷장이 있다.

전통적이고 종교적이며 미신적인 수많은 규칙과 게르에 관련된의상에 대한 설명을 지방주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몽골인 들은 티벳불교를 독실하게 믿고있으며 몽골과 티벳과의 연계는 깊고 오래되었다. 모든 독실한 몽골의 불교신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신성한 도시인 라사(Lhasa) 에 가보려고 시도한다.

티벳인들은 그들의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의 지원을 번갈아 가며 받고 있다. 1921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몽골에는 110,000명의 라마승려가 700 여러 곳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930년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승려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현장으로 보내졌으며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약탈당했으며 모든 종교적인 제례와 축제는 금지되었다. 1990년이 되어서야 종교의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 후로 불교(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띄었다.

수도원은 다시 문을 열었고 심지어 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중 일부가 라마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수도원과 사찰(sum)은 항상 티벳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주목할 만한 소수 수니회교파(Sunni Muslim)는 대부분 카자크(Kazaks)종족으로 되어있는 몽골의 서쪽멀리 있는 지역에 발달하였다.

몽골의 그림, 음악 그리고 문학은 티벳불교 와 유목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타삼(Tsam)춤은 악마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한 춤이며 유목생활과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공산정권시절엔 금지되었다가 다시 충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전통음악에는 방대한 종류의 악기와 노래형식이 사용된다.

몽골 구미(Khoomi)노래는 매우 정성 들여 연습한 남성들이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사용하여 고음을 내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한번에 여러 개의 음을 발성하기도 한다. 

고대 몽골의 전통곡예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통음악과 춤의 행위는 완벽하지 못하다.

공식언어인 몽골어는 우랄알타이어(Ural-Altaic)계 언어중 하나이며 필란드어, 터어키어, 카자흐어, 우즈벡어 와 한국어도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

1944년부터 러시아 시릴문자(Russian Cyrillic alphabet)가 몽골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으며 그것들 중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최근에서야 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이며 몽골의 위대했던 날들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몽골루니푸차토치얀(몽골의 숨겨진 역사)을 번역하였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몽골의 격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아침식사는 너 자신을 위해 먹고 점심식사는 친구들과 나눠먹고 저녁식사는 적들에게 적선하여라. 가장 잘 차려지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이다.

보통 기름기가 많은 끓인 양고기와 밀가루가 식탁에 올라오며 때때로 약간의 낙농식품과 쌀이 곁들여 지기도 한다. 몽골 서부의 카자크족의 식사에는 말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다.

몽골인들은 차를 매우 즐겨 마시며 일반적으로 수테차이(suutei tsai (소금차))가 있다. 아르히(arkhi)(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가축들이 그들의 집을 만드는 기간동안에는 발효시킨 말 우유에 3%의 알콜을 넣어 만드는 아이락(aikag)을 양조한다. 

많은 몽골인들은 이것을 증류하여 알콜 함량이 12%로 증가한 쉬밍아르히(Shimiin Arkhi)를 만든다.

축제 및 행사

연중 가장 큰 행사는 나담축제(Naadam Festival)로서 에린거반나담(eriyn gurvan naadam)으로 알려져 있고 레슬링, 활쏘기, 경마의 "사내다운 스포츠"를 펼친 후 열린다.

축제는 보통 7월 11일부터 13일 사이에 전국에 걸쳐 열리며 1921년 몽골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행사는 축제의 첫날과 둘째 날 에 주로 열린다.

차강사르(Tasgaan Sar(백월))은 1월이나 2월에 있는 음력신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끔찍한 겨울철을 보낸 후에 몽골인 들은 3일 동안 많은 음식과 술과 노래로 축제를 여는 것이다.

여행자 정보

비자: 어는 국적의 사람이든지 출·입국 비자는 필요하다.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초대되거나 몽골인, 몽골회사 또는 주거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후원을 받아야 하며, 또는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에 참여하여야 한다.

어떤 상담소나 영사관에서는 다른 곳보다 까다롭지 않은 겨우도 있다. 비자 수수료는 US$25정도이다.

주의해야할 질병: 브루셀라병, 콜레라, 수막염, 선페스트

시간: UTC/GMT+8시간; 우스코브드(Uus Khovd)와 같은 바얀올지(Bayan-olgii), 우브스(Uvs) 와코브드의 서부지역-UTC/GMT+7시간

전기: 220V/50Khz

도량형: 미터법(환산표를 참고하여라

경비 및 환전

Currency: togroog (T or MNT)

통화 : 투그릭(togroog)(T or MNT)

저렴한 식사: US$3-5

일반 식사: US$5-10

고급 식사: US$10-20

저렴한 숙소: US$5-10

일반 호텔: US$10-20

고급 호텔: US$20이상

만약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을 한다면 하루에 US$100 정도를 쓰게 될 것이다.

관광상품과 똑같은 풍경, 같은 숙소, 같은 장소를 혼자서 여행할 경우 하루에 US$80으로 관광할 수 있다. 

비용을 개인지프차 와 야영에 지출하면 값비싼 저에서 지내는 것보다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숙박과 식사는 하루에 최소 US$10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2배정도의 예산을 짜두는 것이 좋다.

시골지방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호텔에 머문다면 하루에 US$15가 소비될 것이고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한다면 하루에 US$7정도 소비될 것이다.

미국 달러로 된 여행자수표와 약간의 현금을 미국달러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몇몇의 호텔과 공항에서는 편리하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면 신용으로는 어떠한 것도 살 수 없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8년 이전에 발행된 미국달러는 사용할 수 없다.

아마도 울란바토르의 고급식당과 호텔에서는 필수적으로 10%의 세금이 징수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계산서에 세금을 포함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세금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곳도 있다.

고급식당에서는 봉사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저렴한 물건은 공공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몽골현지인 보다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한다.

여행 시기

여행시기는 보통 5월에서 이른 10월까지이며 울란바토르는 지독한 추위를 견딜수 있다면 연중 방문할 수 있다. 

이른 7월에 몽골의 남부지방은 최적의 날씨를 보이며 또한 몽골의 나담 축제가 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가 울란바토르의 부적절한 숙박시설과 형편없는 교통수단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6월과 9월은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이고 많지 않은 방문객이 있다. 고비사막을 가기에 가장 좋으며 뜨겁지 않은 시기는 9월과 10월이다. 10월 중순과 3월 중순 사이에는 눈보라 와 심한 추위로 비행기가 결항되고 도로가 끊길 수 있으며 몽골의 교통수단이 운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주요 여행지

울란바토르

외국인들에게는 UB라고 불리는 몽골의 조용한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이제는 한물간 1950년대 유럽풍의 도시형태와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구 소련제 자동차와 버스들은 서서히 새로운 일제 자동차와 버스로 교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들이 거리를 거닐고 염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척이며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몽골의 벼락부자들과 거리를 함께 거닌다.

툴(Tuul)강을 따라 세워졌으며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울란바토르는 공산국가형식의 고층아파트건물이 있는가 하면 약 250,000명의 지역주민이 도시주변의 확장된 게르가 밀집한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펠트천으로 만들어진 게르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가지고 있어 특히 봄철에 심한 바람을 막아준다.

지형 상으로 산중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기에 매우 좋으나 겨울철에는 공해로 인해 보기 어려우며 기온이 상당히 내려간다.

도시의 중심은 수헤바타르(Sukhbaatar) 광장이다. 이곳에서부터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헤바타르(Damdiny Sukhbaatar)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광장은 또한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집회의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한다. 평상시에 이곳은 조용한 곳으로 비둘기와 3류 사진사들만이 배회하고 있다.

회색의 주 의회건물이 광장을 마주하고있고 높이가 높은 현대적인 문화의 궁정(Palace of Culture)은 유용한 건물로서 인상적인 몽골아트겔러리와 다른 몽골문화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있다.

광장에서 한 블록 북서쪽에 있는 자연사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은 만약 시골로 가려면 한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몽골의 지리, 동물, 식물 에 관해 것들이 전시되어 있고, 최근의 몽골역사에 대한 전시물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2개의 공룡 뼈로서 고비에서 발굴된 것이며 고기를 먹는 거대한타보사우르스(Tarbosaurus)와 이것의 첫 번째 사촌으로서 오리너구리 부리를 가진 초목을 먹는 작은 사우로포스(Saurolophus)이다.

자나바자르 미술박물관(The Zanabazar Museum of Fine arts)에는 회화, 조각에 관련된 훌륭한작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이중에는 존경받는 조각가, 예술가 그리고 승려, 자나바자르들의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탕카스(tangkas; cloth painting)와 불상 등과 같이 보기 힘든 종교적 색채의 전시물들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100여 개 이상의 티벳 불교 썸(sum; 사원)과 키이드(khiid; 수도원)가 50,000명 이상의 울란바토르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부분의 사원과 수도원 및 그것들에 속한 소유물들은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한 숙청작업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간단테친렌 키이드(Gandantegchinlen Khiid)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 하에 파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대략적인 의미로 ' 완전한 즐거움을 위한 최상의 장소'인 간단(Gandan)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사원이 여러 개 있다. 이곳에 사는 150명 이상의 승려들이 많은 찬불과 의식을 행하며 사원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트칸(Bogd Khaan)의 겨울별궁(Winter Palace) 역시 가 볼만한 곳이다 1893년과 1903년 사이에 세워진 이곳은 몽골의 8번째 복트칸(살아있는 부처)과 마지막 왕이 2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어떤 역사책을 보는 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트칸은 육식과 술등의 불경스러운 즐거움에 취해있었고 매독으로 맹인이 되었다고 쓰인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그가 신통한 예언자였으며 민족주의자라고 쓰인 역사서가 있다.

그가 1924년 죽었을 때 소련이 이끌던 몽골의 공산당은 그를 대신하는 어떠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게 금지하여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울별궁에는 6개의 사원이 있으며 복트칸에게 바친 선물들이 수집되어있고 박제한 동물들을 환상적으로 세워놓은 곳도 이곳에 있다.

Four Holy Peaks

신성한 4봉우리

울란바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봉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테스트시검(Testseegum), 친겔타이(Chingeltei), 송지노카이르칸(Songino Khairkhan) 과 바얀거크(Bayansurkh)산은 나침반상의 4위치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하이킹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고 유명한 낙엽수림, 대초원과 매력적인 조류와 아이벡스(야생염소)와 검은담비 등과 같은 동물들이 있다. 테스트시검울(Tsetseegum Uul)은 가장 장엄한 봉우리로 취급된다. 테스트시검울의 높이는 2260m(7400ft)이며 울란바토르의 남쪽을 내려다보는 복트칸울(Bogdkhan Uul)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으로의 여행은 6월 초순부터 9월 말까지 만 가능하며 입산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울란바토르에서 15km(9mi)정도 떨어진 복트칸국립공원의 입구에서 얻을 수 있다.

산의 남쪽에서 테스트시검으로 가는 만츠쉬르키히드(The Manzshir Khiid) 코스는 가장쉬운 코스이다. 이 코스를 따라서 넓은 목초지, 암석, 오보스(ovoos)(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남겨진 돌무더기)가 많은 지역이 펼쳐져 있다.

자이산(Zaisan)코스는 가장 풍경이 좋은 코스이며 가장 어려운 코스이기도 하다. 6시간정도 걸리며 길을 따라서 위험스럽게 보이는 가파르게 놓인 돌들이 있다. 언제나 등산할 수 있으나 항상 허가가 필요하며 나침반과 많은 물, 음식, 보온용 옷가지 등을 가져가야 하며 갑작스러운 폭우와 냉풍으로 인해 여름에도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Khustain Nuruu Nature Reserve 쿠스타인누루 자연보호구역

쿠스타인누루(Khustain Nuruu)자연보호구역은 1993년에 몽골의 야생 타키말과 그것들이 살고있는 스텝초원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타키말은 가장 확실하게 인식되었고 명성을 얻은 몽골의 다양하고 진기한 야생동물의 상징이다.

프르체발스키(Przewalski's)말( 이 말에 흥미를 느낀 첫 번째 사람인 폴로(Polo)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로도 알려진 타키말은 많은 가축이 떼지어 있는 시골을 돌아다닐 때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대부분 멸종되었는데 밀렵꾼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마구 사냥하였고 개발과 가축들이 풀을 다 뜯어먹어 먹이가 부족해 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에 국제환경보호단체의 도움으로 많은 타키말 들이 쿠스타인누르의 90,000ha(222,300acre)에 달하는 넓은 특별보호구역과 고비 남쪽에서 다시 도입되었다. 이제 200필 정도가 이 보호구역과 야생에서 살고 있다.

자연보호구역은 울란바토르에서 약 100km(62mi)북서쪽에 떨어져있다.

울란바토르의 남쪽으로 40km(25mi)떨어진 준모드(Zuunmod)에서 쿠스타인(Khustain)으로 여행하는 편이 쉽다.

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미니버스 그리고 공용택시가 울란바토르에서 준모드까지 운행된다.

준모드에서 자연보호구역으로 가려면 지프차가 필요할 것이다.

Kharkhorin (Karakorum) 카라코람

1220년 징기스칸은 카라코람에 그의 방대한 몽골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건물은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오그다이칸(Ogedai Khan)에 의해 완공은 되었으나 카라코람이 수도로서 사용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0년간만 사용되었다.

수도를 옮긴 후 몽골제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카라코람은 버려졌으며 나중에 약탈자들과 같은 만주족 군인 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남아있던 것들은 16세기에 에르덴주(Erdene Zuu)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숙청작업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카라코람의 현대적이고 적막한 도시는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에르덴주(수많은 보물 이라는 뜻)는 몽골 라마교의 본산지였다.

수도원은 1586년에 짓기 시작했으나 300년 후가 되어서야 완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60에서 100개의 사원과 외곽벽안에 위치한 300여 개의 게르가 있으며 매우 높은 곳에 있어서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

카라코람과 같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사원은 버려진 후 파괴되었다. 스탈린의 암살단원에 의해 에르덴주에 있는 사원 중 3곳을 제외한 모든 사원이 파괴되었고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승려들이 살해당했다.

수도원은 1965년에 종교적 장소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 다시 개방할 때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야 수도원은 제 기능을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그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대한 벽이 복합적으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고 3개의 사원 안에는 유년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성년시절의 3단계 부처 생애를 기리기 위해 헌납되어있다.

주 사원이며 중심사원은 부처의 주(Zuu of Buddha)라 불리며 어릴 때의 부처 상이 있다. 수도원 벽의 외곽은 2개의 '거북 돌'이다. 이것들 중 4개는 한때 고대 카라코람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근형태의 돌로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수도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언덕중의 작은 계곡사이에 숨겨져 있다. 이 돌을 보고 온 모든 여자는 24시간 내에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그 지방의 전설이 있다.

카라코란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70km(230mi) 떨어져 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도시사이를 운항하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여러 번 있다. 년 중 운행하는 버스는 7-8시간 정도 걸리며 자주 있는 편이다.

Khovsgol Nuur 홉스굴누르

2760sq km(1080 sq mi)넓이에 물이 너무나 깨끗해서 마실 수 도 있는 고산지대호수를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나서 2000m(6560ft)높이를 가진 많은 산과 무성한 소나무 숲 과 싱싱한 목초지 와 그곳에 방목하여 기르는 야크 와 말을 상상해 보아라 그러면 심장이 멎도록 웅장한 몽골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가진 홉스굴누르(Khovsgol Nuur)에 대한 막연한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상수원지역이다.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이곳을 '어머니'로 취급하는 지역 몽골인들 에게 신성시되고 있다. 이곳은 물고기로 가득 차 있고 주위에는 양, 아이벡스, 공, 무스, 2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호수주위에는 안내자 없이는 찾기 힘들지만 수많은 동굴이 있다. 이 지역에는 다크해드몽골족(Darkhad Mongols), 부리아트족(Buryats) 과 타스탄(Tsaatan)와 같이 3개의 독립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경탄할 만한 90개의 강이 호수로 흘러들어 오지만 한 개의 강만이 호수에서 흘러 나간다. 에진골(Egiin Gol)이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Baikal)에 다다른다.

홉스굴누르는 겨울에 얼고, 그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가로질러 오는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거대한 도로로 사용된다. 이 호수가 녹았을 때 방문객들을 카약을 즐길 수 있고 그 주변에서는 하이킹이나. 말타기(또는 야크타기)를 즐길 수 있다.

홉스굴누르의 남부 경계는 울란바토르에서 775km(480mi) 북서쪽으로 떨어져 있고 임시항공기나 버스 또는 지프를 손수 운전하여 갈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은 춥고 호수가 얼어있기는 하지만 봉(4월부터 5월까지)이다.

여름(7월과 8월)은 따뜻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호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카트갈(Khatgal)시의 남쪽입구에 도착하기 몇 킬로미터 전에 있는 홉스굴누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주도로에서 얻을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Amarbayasgalant Khiid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

카라코란의 에르덴주키히드(Erdene Zuu Khiid)이후에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Amarbayasgalant Khiid) 은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으로 인식되었다.

이곳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북부 중앙몽골에 위치한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은 1737년 몽골의 위대한 불교신자로 봉헌되었을 뿐 아니라 조각가이며 만주족왕인 칸수자나바자르(Kansu Zanabazar) 에 의해 세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이곳에서 그들의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37개의 사원과 불상 중 10개를 파괴하였다.

오늘날 사원은 평소에는 문을 닫고있으나 수장승려에게 개방하기를 요청할 수 있고 또한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30여명의 승려들의 환영과 매일의 의례를 볼 수 있다.

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자주 운행하는 특급열차가 울란바토르와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219km(136mi)떨어진 다크한(Darkhan)까지 연결되어있다.

수도원은 다크한에서 남동쪽 140km(87mi)떨어져있으며 다크한에서 수도원까지 가려면 지프가 필요할 것이다.

Gurvansaikhan National Park

거반사이칸

고비사막의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거반사이칸(Gurvansaikhan)에는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많이 있으며 저 캠프와 도로 등의 편의시설이 상당히 잘 마련되어있다.

공원에는 산, 공룡호박과 특이하게 형성된 모래언덕, 바위와 년 중 얼음으로 덮힌 계곡 등이 있다. 또한 이 공원은 몽골사막 되새, 회색독수리(Cinerous Vulture), 사막 휘파람새와 호우바라 능애(Houbara Bustard)를 비롯한 200여종의 조류들의 서식지이다.

드문드문 자란 초목들은 검은꼬리 가젤, 눈표범, 아벡스, 아르갈리 양과 멸종위기의 야생낙타와 같은 동물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준다. 적은 입장료를 동물박제를 전시해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는 욜린엠(Yolyn Am)계곡에서 받는다.

많은 외국인들은 고비를 외지며, 색다르고 신비한 장소로 알고 있다. 그런 점들을 보이기도 하지만 고비는 주로 풀, 관목 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오아시스와 모래는 사막의 3%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한번 극심한 폭우가 내리며 기온은 여름동안에 40℃(105℉)를 넘고 겨울에는 -40℃(-40℉)를 기록한다.

거반사이칸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40km(211mi)떨어져 있으며 달란자드가드(Dalanzadgad)시에 근접하였으며 중국국경에서 멀지 않다.

고비로 가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달란자드가드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지프를 빌린다. 울란바토르와 달란자드가드사이를 1주에 한번 운행하는 버스도 있다.

Khovd 코브드

한때 작은 농업지역사회였고 나중엔 러시아와 몽골의 무역중심지 이였던 코브드시는 이제 주요산업도시이며 서부몽골로 떠나는 탐험의 출발지로 좋은 장소이다.

도시의 북부지역은 1762년 이곳을 정복한 후 강제로 통치자가 된 만주족 장수에 의해 세워진 지금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폐허만 남은 상진커렘(Sangiin Kherem)유적지가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복합건물들은 1911년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중국혁명 후에 완전히 방치되었다. 유적지의 북쪽에 있는 메마르고 울퉁불퉁한 언덕에서는 좋은 풍경을 볼 수 있고 하이킹하기에도 좋다.

코브드는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1425km(884mi)떨어져 있고 아발리키르(Arvaikheer), 바얀콘거(Bayankhonger) 와 알타이를 거쳐서 서쪽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경유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코브드까지가는 정규항공편이 있고 그곳에 도착해서는 지프를 빌려 도시외곽으로 관광을 갈 수 있다.

레저스포츠

울란바토르주변의 신성한 4개의 봉우리에는 도전할만한 하이킹코스와 깜짝 놀랄만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테스트검(testseegum)봉우리의 남쪽측면에 있는 만즈시르키히드(Manzshir Khiid)등산로는 가장 쉬운 길이다,

자이산(Zaisan)등산로는 가장 볼거리가 많고 가장 어렵다.

코브드언덕 주변의 거반사이칸(Gurvansaikhan)국립공원과 고비사막에는 더 많은 하이킹 코스가 있다.

거대한 홉스굴누르(Khovsgol nuur)호수는 낚시와 카약을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이고 호수가 주변의 동굴에서 이루어지는 동굴탐험도 즐길 수 있다.

1월과 2월은 스키를 즐기기에 좋다.

활강스키와 크로스컨트리스키 여행은 울란바토르에서는 즐길 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다.

울란바토르와 그 주변에서는 지금도 말, 낙타, 야크 등을 사로잡아 길들여 타고 다니며 그 옛날 징기스칸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상기하고 있다

몽골로 가는 길

대부분의 관광객은 베이징,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울란바토르까지 항공편으로 이동한다. 오사카나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몽골에 입국하는 관광상품도 있다.

국제적인 몽골항공회사는 MIAI이며 장난스러운 말로 '아마도 나는 오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Maybe I'll Arrive Today)'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라고도 한다.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생기는데 좋지 않은 기상조건 때문이다.

공항이용료는 US$10정도이다.외국인이 몽골로 입국하거나 출국하는 유일한 다른 방법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Trans-Mongolian Railway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곳은 중국-몽골 국경의 에른자민오드(Ereen-zamyn-ood)와 러시아-몽골 국경의 나우시키소크바타(Naushki-sokh baatar)가 있다.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지프나 버스를 이용하여 국경을 넘었다고 하는 여행자들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이것은 지금도 불법이다.

국내 교통편

하부조직 없이 방대한 지역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 몽골은 항공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80여 개 이상의 공항이 있으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활주로를 가진 공항은 없다.

주요항공사인 MIAT는 지방도시와 주요도시, 그리고 관광지역으로(모든 곳은 아니지만)운행하는 항공편을 가지고 있다.

항공 시간표는 정기적으로 바뀌며 외국인은 몽골 현지인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으며 컴퓨터 전산화된 예약시스템은 없다. 따라서 출발지에서 되돌아오는 항공권도 같이 구입해야 한다.

도시를 관광하기에는 버스가 가장 좋으나 서비스가 엉망이고 버스가 오래되어서 여행은 안락하지 못하고 매우 느리다.

여행을 오래할 경우엔 버스의 파손도 발생할 수 있다.

버스노선은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하여 그곳에서 끝나며 서부몽골로 가는 버스노선은 없다. 관광지를 순환하는 조금 비싼 미니버스는 빠르고 좀더 안락하다.

몽골의 1750km(1090mi)에 다다르는 철도는 남북을 가로지른다. 이 철도는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Trans-Mongolia Railway의 일부이다.

택시는 포장된 도로에서만 유용하다 즉 전체길이가 47,000km(29,150mi)에 달하는 도로 중 1200km(744mi)만이 포장도로이므로 택시는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프는 포장되지 않은 대부분의 도로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이며 원거리에 있는 관광지를 방문할 땐 필수적이다. 지프는 속도가 느리고 기계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보통 지프에는 운전사와 안내자 그리고 공용지프라면 다른 승객들이 함께 탄다.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한다하더라도 개인지프로 여행을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경찰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고 사고를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몽골 #올란바트로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 #청 제국 #부패와 독재성 #중국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 #몽골은 반란을 도모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 #몽골 기회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선언 #국제운전면허증 #관광지 #컴퓨터 전산화된 예약시스템 #주요항공사인 MIAT #관광객 #베이징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울란바토르까지 항공편으로 이동 #오사카나 서울에서 항공편 #코브드는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1425km(884mi)떨어져 있고 #아발리키르(Arvaikheer) #바얀콘거(Bayankhonger) 와 알타이를 거쳐서 서쪽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경유 #서부몽골 #테스트검(testseegum)봉우리의 남쪽측면에 있는 #만즈시르키히드(Manzshir Khiid)등산로는 가장 쉬운 길 #자이산(Zaisan)등산로 #코브드언덕 주변 #거반사이칸(Gurvansaikhan)국립공원 #고비사막 #하이킹 코스 #홉스굴누르(Khovsgol nuur)호수 #낚시와 카약을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이고 #호수가 주변의 동굴 #동굴탐험 #아이벡스 #눈범 #국제환경보호단체의 도움 #많은 타키말 들이 쿠스타인누르의 90000ha(222300acre)에 달하는 넓은 특별보호구역과 고비 남쪽에서 다시 도입되었다 #이제 약200필 정도가 이 보호구역과 야생에서 살고 있다 #자연보호구역은 울란바토르에서 약 100km(62mi)북서쪽에 떨어져있다 #울란바토르의 남쪽으로 40km(25mi)떨어진 준모드(Zuunmod)에서 쿠스타인(Khustain)으로 여행하는 편이 쉽다 ##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미니버스 공용택시가 울란바토르에서 준모드까지 운행된다 #준모드에서 자연보호구역으로 가려면 지프차가 필요할 것이다 #Kharkhorin (Karakorum) 카라코람 #1220년 징기스칸은 카라코람에 그의 방대한 몽골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건물은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오그다이칸(Ogedai Khan)에 의해 완공은 되었으나 카라코람이 수도로서 사용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0년간만 사용되었다 ##수도를 옮긴 후 몽골제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카라코람은 버려졌으며 나중에 약탈자들과 같은 만주족 군인 에 의해 파괴되었다 #16세기에 에르덴주(Erdene Zuu)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숙청작업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카라코람의 현대적이고 적막한 도시는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에르덴주(수많은 보물 이라는 뜻)는 몽골 라마교의 본산지였다 #수도원은 1586년에 짓기 시작했으나 300년 후가 되어서야 완공하게 되었다 #60에서 100개의 사원과 외곽벽안에 위치한 300여 개의 게르가 있으며 매우 높은 곳에 있어서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 #카라코람과 같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사원은 버려진 후 파괴되었다 #스탈린의 암살단원에 의해 에르덴주에 있는 사원 중 3곳을 제외한 모든 사원이 파괴되었고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승려들이 살해당했다 #수도원은 1965년에 종교적 장소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 다시 개방할 때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공산당 #수도원 #거대한 벽이 복합적으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고 #3개의 사원 안에는 유년시절 청년시절 #성년시절의 3단계 부처 생애를 기리기 위해 헌납되어있다 #사원 #부처의 주(Zuu of Buddha)라 불리며 어릴 때의 부처 상 #부처 상 #수도원 벽의 외곽 #2개의 '거북 돌 #고대 카라코람의 경계 #흥미로운 것은 남근형태의 돌 #북부 중앙몽골에 위치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은 1737년 몽골의 위대한 불교신자로 봉헌되었을 뿐 아니라 #조각가이며 만주족왕인 칸수자나바자르(Kansu Zanabazar) 에 의해 세워졌다 #1992년 새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화 개혁 과정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된 시장경제로의 전환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생필품 부족 #식량배급 등의 결과를 낳았다 #전체 노동력의 거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해 왔으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 정도에 불과하다 #축산물 #전체 농산물 수익의 약 70%를 차지한다 #가축의 약 2/3는 양이며 #염소·소·말·낙타도 기른다 ##농경지는 국토의 1% 미만으로 밀이 주요작물이다 #국토의 약 1/10은 숲으로 덮여 있고 #삼림에서 나오는 통나무는 공업용과 연료로 쓰인다 #석탄은 몽골 전역에서 채굴 #주요 탄광지역 #울란바토르 남동쪽에 있는 날라이 #다르한 남동쪽에 있는 샤린골이다 #다르한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에르데네트 광산 단지 #구리 #몰리브덴 #채굴 #광물이 전체 수출액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노동력의 1/5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하며 #GDP의 1/4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재와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 #공업은 대부분 울란바토르에 몰려 #주요공산품 #가공식료품 #의류 #신발 #판재 #목제품 #전기 #국내 연료 #수입 연료로 생산 #광물 외 #원자재 #식품 #소비재 등 #수출 #기계류 #운송장비 #연료 #금속 #수입 #주요 교역 상대국 #러시아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 #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 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 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Kublai Khan) #약1216-94)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몽골의 최고 전성기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몽골의 원 왕조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쿠빌라이 #도시의 중심은 수헤바타르(Sukhbaatar) 광장이다 #이곳에서부터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헤바타르(Damdiny Sukhbaatar)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집회의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한다 #평상시에 이곳은 조용한 곳으로 비둘기와 3류 사진사들만이 배회하고 있다 #회색의 주 의회건물이 광장을 마주하고있고 #높이가 높은 현대적인 문화의 궁정(Palace of Culture)은 유용한 건물 #인상적인 몽골 아트겔러리 #다른 몽골문화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있다 #광장에서 한 블록 북서쪽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 #만약 시골로 가려면 한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몽골의 지리 동물 식물 에 관해 것들이 전시되어 있고 #최근의 몽골역사에 대한 전시물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2개의 공룡 뼈로서 고비에서 발굴된 것이며 #고기를 먹는 거대한타보사우르스(Tarbosaurus) #첫 번째 사촌 #오리너구리 부리를 가진 #초목을 먹는 작은 사우로포스(Saurolophus)이다 #자나바자르 미술박물관(The Zanabazar Museum of Fine arts) #회화 조각에 관련된 훌륭한작품들이 전시 #존경받는 #조각가 #예술가 #승려 #자나바자르들의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탕카스(tangkas; cloth painting) #불상 등과 같이 보기 힘든 종교적 색채의 전시물들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100여 개 이상의 티벳 불교 썸(sum; 사원) #키이드(khiid; 수도원)가 50000명 이상의 울란바토르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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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6일 토요일

나반존자 那畔尊者,

나반존자 那畔尊者,

나반존자 那畔尊者, 독성수(獨聖修), 독성존자(獨聖尊者)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독성각 또는 삼성각에 봉안해 신앙대상으로 삼는 불교성자. 독성수·독성존자,

주로 삼성각에 모셔져 예불을 드리는 나반존자는 잘생긴 외모에 길게 하얀 눈썹이 양쪽으로 드리워졌다.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하였다.

이는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 고유 신앙의 것이다.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 밭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고 있으므로,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도 보고 있다. 사찰에서는 독성기도(獨聖祈禱)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데 기인한다. 

그러나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건립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에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전래시기에 이를 포섭하여 모신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특히, 사찰에서는 독성기도(獨聖祈禱)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데 기인한다.

이는 독성기도를 올릴 때 외우는 찬송 가운데 “나반존자의 신통이 세상에 희유하여 행하고 감추고 변하기를 마음대로 한다.”고 한 구절 속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반존자는 사찰의 독성각 또는 삼성각에 봉안되며,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이나 탱화를 단독으로 모시고, 삼성각에는 칠성·산신 등과 함께 모신다.

《나반존자 발원문》
대자대비 신통자재 나반존자 대성이여 자비하신 존자님께 간절히 아룁니다.

우러러 생각하니 나반존자 대성인의 걸림없는 그 자취는 그지없이 미묘하고 중생향한 자비원력 깊고 다시 깊을 세라 석가세존 부촉(咐囑)받아 반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들을 이끌고자 계족 마라산에 머무시며 고요하고 큰 삼매에 어느 때나 드시어라.

또한 다시 보리도량 잠시라도 안 여의고 중생들의 찾는 소리 하나하나 응하시어 사바세계 구석구석 거룩한 몸 나투실새
어떤 사람 정성들여 공양하고 발원하면 자재하신 신력으로 살피시고 거두시어 구하는바 다 이루고 원하는바 원만이라 대자대비 신통자재 나반존자 대성이여 간절히 아뢰오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 

대자대비 신통자재 나반존자 대성인은 석가세존 당시에는 빈두로라 이름 했네! 

부처님의 큰 제자로 부처님의 명을 받아 모든 성인 열반 후에 오직 홀로 남았으니 독성이라 이름하고 나반이라 이름 하네! 

흰머리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눈썹은 벽지불과 흡사하고 맑은 음성 그윽하니 아육왕도 존자 뵙고 뛸 듯이 기뻐했네

자씨미륵 올 때까지 말세중생 부촉받아 중생들의 원하는바 고루고루 응하시며 온갖 고통 없애주고 즐거움을 베푸시는
사바세계 복전(福田)이신 나반존자 대성이여 저희들의 지극정성 굽어 살펴 주옵소서.

시험을 앞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절을 찾아 기도를 올릴 때면 꼭 들러 두 손 모아 합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삼성각이다.

삼성각 가운데는 석가모니 부처님, 오른쪽에는 산왕대신, 왼쪽에는 나반 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왼쪽에 모셔진 이 성인은 홀로 공부를 해 도를 깨쳤다.그런데 나반 존자는 어느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홀로 공부해서 훌륭한 아라한과를 얻고 연각을 이루었다.

옛날 그는 혼자서 도를 깨친다는 큰 꿈을 안고 홀로 천태산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바위 위에 정좌하고 깊은 정에 들어가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것처럼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서 만고에 빛나는 성자가 되었다.

나반 존자의 스승은 하늘의 뜬 구름이요, 계곡을 흐르는 물이요, 철따라 우는 풀벌레들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대자연의 운행이며 철마다 변하는 무상한 산천의 경치가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이렇게 홀로 도를 깨쳐서 그의 높은 경지를 닮고자 지금도 절집 삼성각에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예불을 드린다.

천태산상에서 홀로 선정닦기를 좋아한 나반 존자의 ‘나반’은 저쪽 피안, 자반은 이쪽이라는 의미로 나고 죽는 경지를 해탈하지 못한 경지인 이쪽 언덕은 자반이고, 반야용선을 타고 지혜의 배를 타고 저 이상의 경계에 이른 것을 나반이라 이른다.

보통사람보다 길게 하얀 눈썹이 양쪽으로 드리워진 나반 존자는 세상에 머무시면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다음의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56억7천만 년 동안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분이다.

나반 존자는 삼명(三明) 즉 과거생에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숙명명(宿命明),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다 보는 천안명(天眼明), 번뇌망상을 다한 누진명(漏盡明)을 증득했다.

그리고 나반 존자는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를 겸했다고 해서 이리원성(二利圓成)이라 한다. 또 나반 존자는 공양에 응할 만한 법력이 있기에 응공복전(應供福田)이라 한다.

그래서 나반 존자께 절을 할 때는 나무 천태산상 독수선정 나반 존자를 부르며 “천태산상 독수선정 나반존자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면서 첫 번째 절을 올리고 “삼명을 하시고 자리와 이타를 하시고, 신통이 자재한 나반 존자에게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두 번째는 나무 삼명이중 이리원성 신통자재 나반 존자라고 하며 절한다.

세 번째 “공양에 응할 만하고 복전이 되는 용화세계를 기다리는 나반 존자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나무 응공복전 대사용화 나반 존자라고 하면서 세 번 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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