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PGA 투어 2연패에 성공한 이경훈(31)이 내친김에 한국 선수 역대 두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에 도전, PGA 챔피언십은 양용은(50)이 2009년 한국 선수 최초이자 아시아 국적 선수 최초로 남자 메이저 패권을 거머쥔 대회,,,
'PGA 투어 2연패' 이경훈, 한국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 도전,
"한국 선수 첫 PGA 투어 2연패' 이경훈,
최경주가 2005년 10월 크라이슬러 클래식,
김주형,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 2연패…PGA 통산 3승,
'PGA 투어 2연패' 이경훈, 한국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 도전,
20일 개막 PGA 챔피언십 출전…2009년 우승 양용은 등 한국 선수 5명 출전,
셰플러·람 강력한 우승후보…'디펜딩 챔피언' 미컬슨은 불참,
미국프로골프(PGA)투어 AT&T 바이런 넬슨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PGA 투어 2연패에 성공한 이경훈(31)이 내친김에 한국 선수 역대 두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에 도전한다.
이경훈은 20일(한국시간)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서던힐스 컨트리클럽(파70·7천556야드)에서 개막하는 올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총상금 1천200만 달러)에 출전한다.
PGA 챔피언십은 양용은(50)이 2009년 한국 선수 최초이자 아시아 국적 선수 최초로 남자 메이저 패권을 거머쥔 대회다.
지난해 5월 마쓰야마 히데키(일본)가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국적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을 기록했지만, 한국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경훈은 PGA 챔피언십 전초전 격인 AT&T 바이런 넬슨 마지막 날 최고조의 샷과 퍼트 감각으로 '노 보기 역전 우승'을 달성하면서 한국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 기대감을 높였다.
그동안 유독 메이저 대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이경훈도 이번 대회서 징크스를 깨겠다는 각오다.
이경훈은 처음 참가한 메이저 대회인 2014년 US오픈과 2019년 US오픈, 지난해 PGA챔피언십·US오픈, 올해 4월 마스터스까지 총 5번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지만 모두 컷 탈락했다.
이경훈과 함께 2009년 대회서 우승한 양용은을 비롯해 김시우(27), 김주형(20), 김비오(32) 등 5명의 한국 선수가 우승자에게 주는 '워너메이커 트로피'에 도전한다지난해 PGA 챔피언십에서 공동 17위에 올랐던 임성재(24)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이번 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메이저 대회답게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대부분 출전하는 가운데 스코티 셰플러(미국)와 욘 람(스페인), 조던 스피스(미국) 등이 우승 후보로 지목된다.
지난달 마스터스에서 첫 메이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세계 랭킹 1위 셰플러는 이번 대회가 치러지는 서던힐스 컨트리클럽과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프로가 되기 전 2015년 텍사스대에 다닐 때 셰플러는 2015년 이곳에서 치러진 미국 대학 '빅12' 개인전에서 우승한 바 있다.
지난 6일 서던힐스 컨트리클럽에서 치른 연습 라운드에서는 6언더파 64타를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세계 랭킹 2위 람의 우승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다.
지난 2일 멕시코오픈에서 시즌 첫 우승이자 통산 7번째 우승을 차지한 람은 지난해 6월 US오픈 우승 이후 11개월 만에 메이저 우승을 노린다.
스포츠 도박 업체 포인츠베트는 셰플러와 함께 람을 PGA챔피언십 우승 가능성 공동 1위로 꼽았다.
AT&T 바이런 넬슨에서 이경훈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스피스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다.
스피스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지난해 대회서 사상 최초의 50대 나이의 메이저 챔피언에 등극한 필 미컬슨(52·미국)은 이번 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PGA 챔피언십 역사상 '디펜딩 챔피언'의 불참 사례는 1949년 벤 호건, 2008년 타이거 우즈(이상 미국) 두 번뿐이었고, 두 명 모두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미컬슨의 구체적인 불참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주도하는 리브 인비테이셔널 골프 시리즈 사태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컬슨은 리브 인비테이셔널 골프 시리즈를 두둔하고, PGA 투어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가 스폰서 후원 중단 등 곤경에 처한 바 있다.
반면 자동차 사고를 이겨내고 재기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는 마스터스에 이어 PGA 챔피언십에서 올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 나들이에 나선다.
"한국 선수 첫 PGA 투어 2연패' 이경훈,
한국 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경훈,
한국 선수 첫 PGA 투어 2연패…AT&T 바이런 넬슨 우승,
3라운드까지 4타 차 공동 6위서 역전 'V', 한국 선수가 3회 연속 정상,
이경훈(31)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AT&T 바이런 넬슨(총상금 910만 달러)에서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경훈은 16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매키니의 TPC 크레이그 랜치(파72·7천468야드)에서 열린 대회 마지막 날 4라운드에서 이글 1개와 버디 7개를 묶어 9언더파 63타를 쳤다.
최종합계 26언더파 262타를 기록한 이경훈은 25언더파 263타의 조던 스피스(미국)를 1타 차로 제치고 우승 상금 163만8천 달러(약 21억원)를 받았다.
지난해 5월 이 대회에서 PGA 투어 80번째 출전 만에 통산 첫 승의 감격을 누린 이경훈은 대회 2연패와 투어 2승째를 수확했다.
한국 선수가 PGA 투어 대회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것은 이경훈이 최초다.
최경주가 2005년 10월 크라이슬러 클래식,
2006년 10월 크라이슬러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두 대회는 서로 다른 대회로 열렸다.
또 PGA 투어에서 2승 이상 거둔 한국 선수는 최경주(8승), 김시우(3승), 양용은, 배상문, 임성재(이상 2승)에 이어 이경훈이 여섯 번째다.
특히 이 AT&T 바이런 넬슨은 최근 3개 대회 연속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인연을 이어갔다.
2019년에 강성훈(35)이 우승했고, 2020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대회가 열리지 못했으며 2021년과 올해 이경훈이 왕좌를 지켰다.
1944년 창설된 이 대회에서 2연패 이상을 달성한 선수는 1958년 샘 스니드, 1971년 잭 니클라우스와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연속 우승한 톰 왓슨(이상 미국) 등 '골프 레전드'들에 이어 이경훈까지 4명이 전부다.
3라운드까지 선두에 4타 뒤진 공동 6위였던 이경훈은 이날 6번 홀(파4)까지 버디 4개를 몰아치고 단숨에 선두 경쟁에 뛰어들었다.
2번 홀(파4)에서 15m 긴 버디 퍼트를 넣고 기분 좋게 출발한 이경훈은 6번 홀(파4) 버디로 선두에 올랐다.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12번 홀(파5)이었다.
선두에 1타 뒤져 있던 이경훈은 242야드를 남기고 4번 아이언으로 친 샷을 홀 1.5m로 보내 이글을 잡고 단독 1위가 됐다.
기세가 오른 이경훈은 13번 홀(파4)에서도 약 4.5m 버디 퍼트를 넣고 2타 차 선두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경훈을 추격하는 선수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텍사스주 출신 '골든 보이' 스피스를 비롯해 마쓰야마 히데키(일본), 잰더 쇼플리(미국)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이경훈을 따라붙었다.
이경훈이 1타 차로 앞서 있던 경기 막판에 흐름이 요동쳤다.
17번 홀(파3)에서 이경훈은 티샷이 그린 주위 벙커 턱에 놓여 타수를 잃을 위기를 맞았다.
벙커에 발을 딛고 시도한 두 번째 샷은 홀 약 3.5m 거리에 놓여 만만치 않은 파 퍼트를 남겼다.
그러나 이경훈은 이 퍼트를 넣고 1타 차 리드를 유지했다.
반면 뒷 조에서 경기한 스피스는 2.8m 거리의 버디 퍼트가 왼쪽으로 살짝 약해 동타 기회를 놓쳤다.
고비를 넘긴 이경훈은 마지막 18번 홀(파5)에서 팁인 버디에 성공해 2타 차로 달아나며, 역시 같은 홀 버디로 추격해온 스피스를 1타 차로 따돌렸다.
이경훈은 이날 퍼트를 24번만 하는 등 샷과 퍼트 감각이 모두 호조를 보여 '노 보기 역전 우승'을 달성했다.
지난해 이 대회 우승 이후 지난해 7월 3M오픈 공동 6위가 유일한 '톱10' 성적일 만큼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이경훈은 다시 AT&T 바이런 넬슨에서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경훈과 스피스에 이어서는 마쓰야마와 세바스티안 무뇨스(콜롬비아)가 24언더파 265타로 공동 3위에 올랐다.
이경훈은 19일 개막하는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 PGA 챔피언십 전망도 밝게 했다.
이경훈은 지금까지 메이저 대회에 다섯 번 출전했으나 모두 컷 탈락했다.
지난해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대상, 상금, 평균 타수 3관왕 김주형(20)은 18언더파 270타로 공동 17위에 올랐다.
김주형의 PGA 투어 최고 성적은 지난해 3월 푸에르토리코오픈 공동 15위다.
김주형,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2연패… PGA 통산 3승,
김주형(21)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첫 타이틀 방어로 겨우 1년 만에 PGA 통산 3승을 기록했다.
김주형은 16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TPC서머린(파71)에서 열린 PGA투어 슈라이너스 칠드런스오픈(총상금 840만 달러)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7개, 보기 2개로 5언더파 66타를 쳤다.
최종 합계 20언더파 264타를 기록한 김주형은 리더보드 최상단을 지켜 우승 상금 151만2000달러(약 20억5천만원)를 획득했다.
한국 선수의 PGA투어 대회 2연패는 2021, 2022년 AT&T 바이런 넬슨에서 우승한 이경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또 임성재가 2021년 이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래 3년 연속 한국 선수가 이 대회 정상에 올랐으며, PGA투어에서 최경주(8승), 김시우(4승)에 이어 3승 이상 거둔 세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공동 선두로 4라운드를 시작한 김주형은 3번 홀(파4) 버디로 단독 선두에 올랐고, 4번 홀(파4)까지 연속 버디를 잡으며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5번 홀(파3), 6번 홀(파4)에서 연속 보기로 공동 3위로 순위가 잠시 하락했다.
9번 홀(파5)에서 다시 버디를 잡아내 공동 2위로 전반 9홀을 마친 김주형은 12번 홀(파4)에서 다시 타수를 줄여 다시 공동 선두를 이뤘다.
김주형은 13번 홀(파5)에서 곧바로 버디를 뽑아내며 19언더파 단독 선두로 올라섰고, 애덤 해드윈(캐나다), 에릭 콜(미국) 등의 추격을 받았다.
김주형이 1타 차로 추격받던 15번 홀(파4)에서 버디를 잡으며 2타 차로 도망가자 해드윈도 곧바로 15번 홀 버디로 다시 1타 차로 압박했고 승부는 16번 홀(파5)에서 갈렸다.
해드윈이 두 번째 샷을 그린 앞 물에 빠트리고 보기를 적어낸 반면, 김주형은 2온 3퍼트로 파를 지키면서 격차는 2타 차가 됐다.
이후 김주형은 파를 안정적으로 지켜나갔고 해드윈은 18번 홀(파4)에서 1타 줄이는 데 그쳐 단독 2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편 이경훈은 이날 버디 5개, 보기 2개로 3언더파 68타를 기록, 공동 7위(17언더파 267타)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경훈은 한때 12번 홀(파4) 버디로 공동 2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김주형,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 2연패…PGA 통산 3승째,
3년 연속 한국 선수 우승…PGA 3승은 최경주·김시우 이어 세 번째,
2연속 보기로 한때 3위로 하락…16번 홀에서 해드윈 따돌리고 우승,
김주형(21)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처음으로 타이틀을 방어하고 통산 3승을 쌓았다.
김주형은 16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TPC 서머린(파71)에서 열린 PGA 투어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총상금 840만 달러)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7개, 보기 2개를 묶어 5언더파 66타를 쳤다
최종 합계 20언더파 264타를 기록한 김주형은 이 대회 2연패와 투어 3승째를 수확했다.
우승 상금은 151만2천달러(약 20억5천만원)다.
한국 선수의 PGA 투어 대회 2연패는 2021, 2022년 AT&T 바이런 넬슨에서 우승한 이경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아울러 임성재가 2021년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래 3년 연속 한국 선수가 이 대회 정상에 올랐다.
PGA 투어에서 3승 이상 거둔 한국 선수로는 최경주(8승), 김시우(4승)에 이어 김주형이 세 번째다.
김주형은 지난해 10월 이 대회 우승으로 PGA 투어 사상 두 번째 어린 나이에 2승을 달성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김주형의 나이는 만 20세 3개월로 타이거 우즈(20세 9개월)보다 빠르게 2승 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우즈가 좀 더 빨랐다.
타이거 우즈는 만 21세, 김주형은 21세 3개월에 3승째를 기록했다.
PGA 투어가 2024년부터 단년제로 편성됨에 따라 이번 대회는 2022-2023시즌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김주형은 사실상 시즌 2승째를 올린 것으로 계산된다.
공동 선두로 4라운드를 시작한 김주형은 3번 홀(파4) 버디로 단독 선두에 올랐고 4번 홀(파4)에서도 1타를 더 줄이며 좋은 기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5번 홀(파3)에서 보기를 적어내며 루드빅 오베리(스웨덴), 테일러 펜드리스(캐나다)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하더니 6번 홀(파4)에서 연속 보기로 선두와 1타 차 공동 3위로 하락했다.
이후 파를 지켜나간 김주형은 전반 마지막 9번 홀(파5)에서 버디를 잡아내 공동 2위로 반등했다.
10번 홀(파4)에서는 약 4m짜리 퍼트가 홀 왼쪽으로 비껴가 버디 찬스를 놓쳤으나 12번 홀(파4)에서 타수를 줄여 공동 선두에 복귀했다.
에릭 콜(미국), 알렉스 노렌(스웨덴) 등 4명과 공동 선두에 있었지만, 챔피언 조에 속한 김주형이 라운드를 가장 덜 치른 상황이었다.
유리한 고지를 점한 김주형은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13번 홀(파5)에서 곧바로 버디를 뽑아내며 19언더파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김주형은 세 번째 샷에서 과감한 칩인을 시도했고, 이후 빗나간 공을 약 1.9m 거리에서 쳐 버디 퍼트를 떨어트렸다.
그러면서 경쟁 구도는 같은 조에 속한 애덤 해드윈(캐나다), 바로 앞 조인 테일러 펜드리스(캐나다)와의 3파전으로 압축됐다.
김주형은 해드윈, 펜드리스에게 1타 차로 추격받는 15번 홀(파4)에서 3.6m짜리 버디 퍼트를 떨어트리며 2타 차로 도망갔다.
해드윈도 곧바로 15번 홀 버디를 잡아 김주형을 1타 차로 압박했고 승부는 16번 홀(파5)에서 갈렸다.
해드윈이 두 번째 샷을 그린 앞 물에 빠트리고 보기를 적어낸 반면, 김주형은 2온 3퍼트로 파를 지키면서 격차는 2타 차가 됐다.
버디 퍼트를 놓쳐 아쉬움을 드러냈던 김주형은 해드윈이 파를 놓치고 자신이 파 퍼트를 집어넣은 뒤 미소를 지었다.
이후 김주형은 파를 안정적으로 지켜나갔고 해드윈은 18번 홀(파4)에서 1타 줄이는 데 그쳐 단독 2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편 이경훈은 이날 버디 5개, 보기 2개로 3언더파 68타를 기록, 공동 7위(17언더파 267타)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경훈은 한때 12번 홀(파4) 버디로 공동 2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한국을 움직인 50人, YS와 단일화 실패로 '야권분열 장본인' 비난 받아, 대권4수·피랍·은퇴번복·노벨상…'끈질긴 인동초'박 정권때 피랍…신군부엔 사형선고, 미국 망명,YS와 단일화 실패로 '야권분열 장본인' 비난 받아,대북 송금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 흠집… 한국은 4% 안에 드는 희귀한 나라, 26경 원 잡을 기회의 나라,,,
◇한국을 움직인 50人(가나다順)
▲高銀(1933∼. 전북 군산)
▲공병우(1906∼1995. 평북 벽동)
▲金九(1875∼1949. 황해도 해주)
▲金大中(1925∼. 전남 신안)▲
대권4수·피랍·은퇴번복·노벨상…'끈질긴 인동초'
박 정권때 피랍…신군부엔 사형선고, 미국 망명,
YS와 단일화 실패로 '야권분열 장본인' 비난 받아,
대북 송금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 흠집…서거 직전엔 'MB정부 독재' 주장,
DJ, 말년 각종질환,
한국은 4% 안에 드는 희귀한 나라, 26경 원 잡을 기회의 나라,
▲한국을 움직인 50人,,,
광복 50년이라는 뜻깊은 역사의 한 장을 넘기면서 지난 반세기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표적 인물 50명을 선정했다.
이를 통해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살펴보고, `인물'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우리의 삶과 역사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국을 움직인 50人'은 8.15 광복 이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체육.과학.예술.인권.통일운동.사회봉사.사상 등 각 분야를 망라해 한국사회를 주도적으로 움직인 사람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도 각 분야에서 지속적.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경우 이에 포함시켰으며 북한의 경우 김일성.김정일 부자만을 예외적으로 다뤘다.)
◇ 한국을 움직인 50人(가나다順)
▲高銀(1933∼. 전북 군산)
민족문학진영의 대표적 시인.
12년간의 승려생활 끝에 63년 환속했다.
첫 시집「피안감성」 이후 현재까지 1백권이 넘는 시집과 소설.산문집 등을 내 국내 제1의 多作 작가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문의마을에 가서」,「백두산」, 「만인보」 등이 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간사,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공병우(1906∼1995. 평북 벽동)
안과의사로 50여년간 한글타자기의 개발에 정열을 쏟은 한글신봉자.
「나는 내 식으로 살아왔다」는 그의 회고록 제목처럼 명리와 주위의 시선에 별로 신경쓰는 일 없이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말년에는 사진작가로 변신해 2권의 사진집을 냈으며 사망한지 한달이 지난후에 부고하고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金九(1875∼1949. 황해도 해주)
해방공간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과 영욕을 함께 했던 지도자.
1895년 명성왕후살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 장교를 살해했으며 1911년 1백5인 사건으로 4년간 복역했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45년 임정 주석에 피선됐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말에서 보듯 현실보다는 理想을 좇은 민족주의자.
혼탁한 정국의 해방공간에서는 외면당했으나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지 38년이 지난 87년 정부가 개정헌법 전문에서 `3.1 독립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함으로써 헌정사의 중심에 섰다.
▲ 金大中(1925∼. 전남 신안)▲
30여년의 정치생활중 한번도 여당이 되어본 적이 없는 야당의 지도자.
61년 5대 국회의원 당선이후 6선 의원으로 71년.87년.92년 세차례 대권에 도전했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6.27 4대 지자제 선거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 대권4修 도전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일관되게 3단계 통일론과 4대국 보장론을 주장하고 있다.
대권4수·피랍·은퇴번복·노벨상…'끈질긴 인동초'
2009 09 18일 오후 서거한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 DJ)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물 정치인이었다.
전남 하의도서 출생…5.16으로 3일만에 의원직 잃어,
김 전 대통령은 1925년 목포 앞바다 신안군(출생 당시 무안군)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 회사를 인수해 경영자로 변신했고 이어 목포일보를 인수해 언론인 경력도 쌓았다.
1954년 제 3대 민의원 선거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낙선했고 56년에는 장면이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해 본격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4.19 이듬해인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 사흘만에 5.16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이러는 사이 59년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했다.
그는 62년 YWCA 총무였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했다.
김 전 대통령은 63년 6대 총선 때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두번째로 당선됐다.
그는 71년 첫 대권 도전에 나서 실패한 뒤 36년만인 97년 '대권 도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올랐다.
70년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의 막판 지원으로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본선에서 박정희에게 95만표차로 졌다.
그는 대권 도전으로 야당 대표적 정치인으로 도약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정적으로 확실히 부각되면서 이후 납치 망명 투옥 연급 등의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박 정권때 피랍…신군부엔 사형선고, 미국 망명,
김 전 대통령은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 중이던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펼쳤다.
이런 움직임은 박정희 정권을 자극해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수장당할 뻔 했지만 살아나 서울로 귀환했다.
이 사건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벌인 일로 알려져 있다.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 징역을 살고 나와 가택연금을 당했다.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과 전두환 정권의 양해로 무기 징역, 20년형으로 차차 감형된 뒤 82년말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 체류 중이던 84년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해 공동의장이 됐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는 전격 귀국을 감행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다시 가택연금당했다.
하지만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활약하며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제 1야당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YS와 단일화 실패로 '야권분열 장본인' 비난 받아,
그는 87년 6.29 선언 이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신민당을 깨고 나가 평민당을 창당, 대선에 두번째로 출마했지만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에 그쳤다.
당시 양김이 김영삼으로 단일화됐다면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이었지만 둘은 끝내 합치지 못했다.
그는 이 때문에 야권 분열의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여 3야'로 분열된 상태에서 나선 88년 총선에서는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했지만 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
91년 9월에는 이기택의 민주당과 야권통합을 성사시키며 재기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97석을 얻어 대권에 세번째 도전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92년 필생의 라이벌 김영삼을 상대로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패퇴하자 이번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93년 7월 귀국해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치전면에 또 나서 97년 대선에 대비했다.
그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 최대 실세였던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손잡는 'DJP 공조'를 이뤄낸 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권 4수 끝에 마침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대북 송금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 흠집…서거 직전엔 'MB정부 독재' 주장 ,
1998년부터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 갈등과 측근 비리 사건이 줄줄이 터져나오면서 전임자 감영삼처럼 조기 레임덕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김 전 대통령 아들들과 '2인자' 권노갑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옷로비' 이후 불거진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집권 기간내내 특정지역 인사편중 시비가 끊이질 않았고, 북한군의 서해 도발 등으로 '대북 퍼주기' 논란에 휘발렸고 서해에서 장병들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일본으로 월드컵 관람을 하러가는 바람에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퇴임 후에는 노무현 정부가 벌인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2005년에는 불법 도감청 사건 수사로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그래도 그는 잦은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영향력을 즐겼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돼 진전을 하지 못했다"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하면서 민주개혁세력 연대를 주문하는 등 현실 정치에도 깊이 개입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한 이후에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기까지 하는 등 마치 대정부 투쟁 선봉에 선 듯한 모습까지 연출했다.
DJ, 말년 각종질환,
18일 향년 85세로 유명을 달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말년에 고혈압 만성신부전과 혈액투석, 폐렴 폐부종 치료 등 많은 병을 얻었다.
젊은 시절 오랜 투옥과 망명에도 불구하고 건강했던 것과 대비된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5월 심장동맥이 좁아지는 협심증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심혈관 확장시술을 받았고 콩팥에 이상이 생겨 몇 차례에 걸쳐서 혈액 투석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때부터 신장기능이 저하돼 일주일에 세 차례 가량 병원을 찾아 지속적으로 혈액투석을 받아왔었다.
김 전 대통령은 폐질환에도 시달렸다.
김 전 대통령은 2005년 8월에 세균성 폐렴 증세가 발견 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항생제 치료로 폐렴 증세를 치료한 뒤 일주일만에 퇴원했으나 한달만에 다시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 증세로 병원에 재입원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7월에는 폐렴증세가 심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는데 여기에 혈전이 폐 혈관을 막아 생기는 폐색전증까지 발생해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호흡곤란 증세가 회복되지 않아 입원 한달만에 연명치료술인 기관절개술을 통해 20여일을 인공적으로 호흡을 연장했으나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은 김 전 대통령 병상일지,
◆ 1차 입원 2003.5.10 심혈관 확장술로 입원 (심혈관질환) 2003.5.15 입원 중 신장기능 저하로 혈액투석 2003.5.16 퇴원 ◆2차 입원 2005.4.4 응급실 입원 ◆3차 입원 2005.8.10 폐렴으로 입원 2005.8.17 '8·15 민족대축전' 북측 대표단 김 전 대통령 병문안 2005.8.21 퇴원 ◆4차 입원 2005.9.22 폐부종으로 입원 2005.10.8 퇴원 ◆ 5차 입원 2007.7.5 안과 검진 ◆6차 입원 -2008.7.13~8.1 종합검진 위해 입원 ◆ 7차 입원 2009.7.13 폐렴으로 입원 2009.7.15 중환자실 이동
2009.7.19 인공호흡기 제거 2009.7.22 일반병실로 이동 2009.7.23 폐색전증으로 인공호흡기 재부착 2009.7.29 기관절개술 시행 2009.8.9 상태악화 후 회복 2009.8.14 상태악화 2009.8.18 서거 13:43분
"DJ, 서거 직전까지 눈빛으로 의사소통"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주치의 측은 "김 전 대통령이 편안 모습으로 가셨다"고 18일 밝혔다.
이날 세브란스병원 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사망선고를 한 주치의 정남식 교수는 "심폐소생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편안하게 가시는 모습을 지켰다"고 말했다.
주치의 측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17일 밤 11시부터 혈압이 떨어지는 등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혈압상승제를 사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18일 오전 6시쯤 다시 악화됐다.
주치의 측은 "김 전 대통령은 서거 2시간 전부터 소생이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주치의 장준 교수는 "서거 2시간 전까지 눈빛으로 가족들과 의사소통은 됐다"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멍하게 있는 것과는 구분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주치의를 비롯해 간호사 등 여러 팀들이 24시간 최선을 다했다"면서 "김 전 대통령은 평소 의사 말을 너무 잘 따랐다. 폐렴만 아니였다면 오랫동안 사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생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서거하신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
▲ 金東里(1913∼1995. 경북 경주)
지난 50여년간 한국 문단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목. `
서라벌군단'(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출신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문단의 代父로 군림했던 그는 대표적 우익 문인이었으며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했다.
神.인간.자연을 3대 주제로 특유한 순수문학세계를 구축한 그는 1935년 「화랑의 후예」로 데뷔한 후 「山火」「바위」「巫女圖」「黃土記」「等身佛」등의 단편과 「사반의 십자가」 등의 장편을 남겼다.
▲金東振(1913∼ . 평남 안주)
<가고파>,<봄이 오면>,<내 마음>,<수선화>,<목련화> 등 주옥같은 가곡을 작곡했다. 해방 직후 평양 중앙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약하다
1.4후퇴 때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전시 종군작가단에 합류했다.
79년 신창악회를 창설해 회장직을 맡고 있다.
전래의 창을 악보로 남겨 성악곡으로 보급시키겠다는 의도로 시작된 신창악은 전래의 판소리 창법을 가곡.오폐라에 접목시킨 것이다.
▲ 金壽煥(1922∼ . 경북 대구)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주교서품.마산교구장(66),대주교.서울대교구장(68)을 거쳐 69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70년대 유신독재시절과 80년대 군부독재시절,
종교인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면서도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의 양심으로 존경을 받았던 그는 문민정부 등장 이후 정치적 이슈보다는 개혁지지.사형반대.낙태반대 등 사회윤리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 金炳魯(1887∼1964. 전북 순창)
건국 초기 대법원장. 1919년 京城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 新幹會중앙집행위원장, 남조선 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부터 9년 3개월간 대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려는 책동을 막아냈다.
추운 겨울에도 집무실에 난롯불을 피우지 않았고 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등 청빈하고 대쪽같은 성품과 관련한 일화가 많다.
▲ 金素姬(1917∼1995. 전북 고창)
우리 시대를 풍미했던 소리꾼.
1929∼34년 명창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홍보가를 사사했고 1936년 일본 빅터오케이 전속으로 「춘양전전집」을 취입했다.
64년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 서울올림픽 페막식에서 <떠나가는 배>를 선창,
역사상 최고의 女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정수를 한 자리에 모아 새로운 창법을 창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재를 털어 국악예술학교의 주춧돌을 마련했으며 신영희.이일주.안숙선 등 후진을 양성했다.
▲ 金泳三(1927∼ .경남 거제)
5.16 쿠데타 이후 31년만에 문민시대를 연 정치인.
최연소.최다선 의원, 최연소 제1야당 총재 등 화려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84년 4주일간에 걸친 단식투쟁을 단행,
철권통치 시대에 민주화투쟁의 불을 당겼다.
`깨끗한 정부'를 표방하며 자신의 재산을 공개한 것은 물론 공직자들의 재산을 등록.공개토록 한 것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개혁작업이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 金宇中(1936∼ . 경북 대구)
67년 자본금 5백만원과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 「포천」誌 발표 세계 5백대 기업중 94년 33위, 95년 52위로 꼽힐만큼 성장시켰다.
특히 90년대 들어 `세계경영'을 표명하며 국제화에 나선 것이 주목된다.
그의 성공은 젊은이들과 봉급생활자들에게 꿈과 비전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국내에만 머물고 있던 사고와 시야를 세계로 돌리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金容基(1912∼1988. 경기 양주)
농민운동가.
27세 때부터 농촌개척에 나서 경기도 양주.고양.용인 등에서 농장을 개척한 그는 1954년 11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현재의 하남시) 황산 1만평을 평당 5원에 구입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농장'을 건설했다.
62년 설립된 가나안농군학교에서 50만명의 농촌후계자가 교육을 받았다.
▲ 金日成(1912∼1994. 평남 대동)
해방후 58년까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독재체제 구축과 개인숭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후 66년까지 `혁명전통'을 조작하여 1인체제를 확고히 했으며 67년부터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4백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5천년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6.25전쟁의 최대책임자로 金泳三대통령과의 회담을 며칠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오명을 씻을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
▲ 金載圭(1926∼1980. 경북 선산)
朴正熙대통령 시해범. 1946년 육사 2기로 졸업한 후 육군보안사령관과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朴대통령을 저격,
18년간의 유신독재체제를 물리적으로 종식시켰다.
그는 법정에서 "개인적 정분을 끊고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 金正日(1942∼ . 蘇聯 브야츠크)
공산국가에서도 유례가 없는 父子 권력세습의 주인공으로 金日成 사망 이후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과는 달리 권력기반을 점차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94년 11월1일 "인간개조.사상개조 사업이 물질경제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선차적 과업"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북한주민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金鍾泌(1926∼. 충남 부여)
1961년 5월 16일 朴正熙소장이 지휘한 쿠데타의 막후 실력자로,
이후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하는 등 정치 전면에 나섰다.
공화당 총재, 국무총리 등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30여년을 정치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으나 朴正熙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신군부에 의한 정치규제, 전례없는 3당 통합으로 만든 민자당 탈당 등 고난도 겪었다.
▲金活蘭(1899∼1970. 인천)
70년 독재권력에 맞서 국회의원.군장성 등을 전통적 민중예술양식인 담시로 빚댄 <五賊>을 발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았던 유신정권시대의 대표적 저항시인.
70년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고 80년 석방된 이후에는 사상적 전환을 거쳐 생명사상에 몰입,
운동권의 비판을 받았으나 생명이라는 화두의 사상적 완결에 전력하고 있다.
제3세계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상 수상.
▲金昌淑(1879∼1962. 경북 성주)
한학자로 일제시대 때는 애국.계몽활동과 신교육.무장폭력투쟁 등을, 해방뒤에는 남한단독선거 반대에 이어 李承晩정권의 독재 반대에 앞장서며 두차례 옥고를 치르는 등 大義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反침략.反분단.反독재 투쟁의 전면에서 꺾이지 않는 지사 정신으로 일관, 민족의 師表로 꼽히고 있다.
성균관대 초대 총장 역임.
▲金芝河(1941∼. 전남 목포)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학위 취득자로 梨大총장,
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한 최고의 여성지도자.
여성지위향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의 단합된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
근우회.한국여약사협회.한국여성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했다.
기독교신앙, 여성해방,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 등이 사상적 기반.
▲盧泰愚(1932∼. 경북 달성)
1987년 열화같은 민주항쟁 시기에 집권당 대표위원으로 대통령 직선과 金大中 사면복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
위기 국면을 수습한뒤 이른바 `3金'과 함께 직접선거에 나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재임시 제2,제3 야당과 3당 통합을 단행했으며, 88 올림픽을 개최하고 사회주의와 문을 튼 북방외교에 주력했다.
▲文鮮明(1920∼. 평북 정주)
통일교 교주로 영국의 더 타임즈紙가 `20세기를 만든 1천명의 인물'로 선정할만 큼 국제적 명성이 높다.
교화력 못잖게 사업수단도 탁월, 부동산.식품제조.석재업.철강 등 각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국제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세계평화교수협의회.국제크리스챤교수협의회.세계평화 국제학술회의 창설 등의 교육사업과 언론. 예술사업 등에도 진출했다.
▲朴景利(1926∼. 경남 충무)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대하소설 「토지」(5부 16권)를 26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했다.
작품 초기에는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가치관이 파괴된 사회 속에 처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참담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다 가정의 불행, 사회의 불행, 민족비극의 형상화로 개념을 확대해간 것이 특징.
치열한 작가정신은 상업주의로 오염된 문학풍토에서 하나의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朴正熙(1917∼1979. 경북 구미)
5.16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강력한 정부주도의 경제부흥을 꾀했으나,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독재정치로 민주발전에는 역행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중앙정보부장 金載圭에 의해 암살되면서 20여년의 강권 통치가 막을 내렸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면서 아직 명확히 규정되지 않고 있다.
▲朴鍾哲(1965∼1987. 부산)
죽음으로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핀 `6월항쟁의 꽃봉오리'.
87년 1월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 수배중이던 동료학생의 참고인 조사를 받기 위해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돼 모진 고문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그해 6월 일어난 민주화항쟁의 불씨로,
범죄적 억압의 부도덕한 공포정치로 얼룩진 全斗煥정권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朴泰俊(1927∼. 경남 양산)
허허벌판에 포항제철.광양제철 등을 건설한 철의 사나이.
정치자금 제공 등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구설수를 낳았지만 한국의 철강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공로자라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후 정계에 투신,
민자당 최고위원을 거쳐 한때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문민정부 출범이후 사법처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약없는 해외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白南準(1932∼. 서울)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전자예술을 창조한 예술가.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를 통해 관객의 예술 참여를 유도하는 등 삶의 예술을 창출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며 독특한 예술론과 기행으로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다.
▲性徹(1912∼1993. 경남 산청)
조계종 7대 종정. 8년 長座不臥로 각인되는 철저한 수행 등으로 `가장 중다운 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제시대를 통해 왜곡되고 상실된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불교 부흥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참다운 수행방법을 몸소 실천으로 가르쳤다.
「한국불교의 법맥」, 「선문정토」 등 독창적인 저서와 함께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申星一(1937∼. 대구)
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5백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여성들의 우상, 청년들의 영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절정기에는 하루에 18편을 겹치기 촬영했을 정도. 최근 성일시네마트를 설립, 영화제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작은 <난의 비가>, <청춘극장>, <맨발의 청춘>, <만추> 등.
▲申翼熙(1894∼1956. 경기도 광주)
上海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大選 10일을 남겨놓은 56년 5월5일 호남선 야간열차에서 사망, 현대사에 뜻하지 않는 변수를 안겼다.
서울인구가 1백20여만명이던 당시, 수십만 인파를 한강 백사장 유세장으로 끌어들이는 등 李承晩정권을 위협했다.
갑작스런 죽음에도 유효투표의 20% 가까운 표가 몰렸을 정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大選구호. 임정 내무총장, 법무총장을 거쳐 해방후에는 국회의장,
대한국민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安益泰(1905∼1965. 평양)
<애국가>의 작곡가. 일제치하에서는 해방의 상징으로, 해방뒤에는 독립국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애국가는 해방 前後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스페인 라요르카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를 지냈으며, 국립교향악단을 조직하는데에도 앞장섰다.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와 애국선열 추도곡인 <진혼곡>, 교향곡 <파스토랄>, 교향시 <논개>, 가곡 <흰 백합화> 등이 주요작품.
▲呂運亨(1886∼1947. 경기도 양평)
신한청년당.임시정부 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해방직후 일본의 요청을 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해방정국을 주도하다 친일파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인민당을 결성하는 등 중도적 입장에서 활동하며 좌.우익 모두의 견제를 받다 우익 청년에 의해 암살됐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특히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禹長春(1898∼1959. 東京)
해방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척박한 과학계를 이끌었다.
일제 때는 禹씨 성을 고집,
재능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나 해방뒤 농업과학연구소장.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 등을 맡아 육종학의 씨를 뿌렸다.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의 자급과 함께 고구마 생산으로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柳一韓(1885∼1971. 평양)
기업의 사회성 강조와 이의 실천으로 기업윤리 정착에 크게 공헌했다.
李承晩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정경 분리원칙에 입각, 정치에 일체 간여하지 않은 것도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유한양행 설립(1926년)과 함께 美 로스앤젤레스.뉴욕 상공회의소 회장을 거쳐 초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역임.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인계, 족벌경영 관행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兪鎭午(1906∼1987. 서울)
해방 뒤 우리나라 헌법 제정의 주역으로 활동한 헌법학자로 정부조직법 골격마련, 공포식령.감찰위원회직제 제정 등에도 관여하는 등 대한민국 정부 초창기의 법령제정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정계에 투신, 민중당 대통령 후보,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했으며 <金講師와 T敎授> 등의 작품을 남긴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尹潽善(1897∼1990. 충남 아산)
5.16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뒤 재야 민주운동의 중심 인물로,
유신치하 암흑기에 민주구국선언 채택을 주도하는 등 反군정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두차례 大選에 나서 朴正熙와 사상논쟁을 벌였으며 韓日협정 비준을 반대,
당시 야당당수로 의원직을 사임하는 등 군정종식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李美子(1941∼. 서울)
한과 눈물의 정서를 담고 있는 <동백아가씨>,<섬마을 선생님>, <아씨>, <흑산도 아가씨>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지난 40여년간 줄곧 트롯 가요의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엘레지의 여왕'. 데뷔이후 수백장의 음반과 수천곡의 노래를 발표하며 대중 가요의 보급과 토착화에 크게 기여했다.
▲李承晩(1875∼1965. 황해도 평산)
한국 현대사에 긍정과 부정이 선명히 대비되는 족적을 남긴 대표적 인물. 개혁가로, 독립운동가로,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화려한 인생역정을 밟아왔으나,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의도적 외면,
권력유지를 위한 헌정 유린 등의 흠을 남겼다.
독재에 항거한 4.19 의거로 하야, 말년에 하와이에서 유배성 체류를 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李秉喆(1912∼1987. 경남 의령)
삼성그룹의 오늘을 있게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인.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과 의류 등 생필품의 국산화에 앞장섰으며 70년대 전자.중공업 등에 본격적으로 투자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
오늘날 반도체 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
인재 제일', `조직의 삼성' 등과 같은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경영에 있어 합리적인 관리를 중시했다.
▲李燦振(1965∼. 인천)
컴퓨터 소프트웨어 `아래아 한글'로 한글의 정보화와 컴퓨터화에 기여하며 우리나라 컴퓨터 소프트웨어산업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런 `아래아 한글'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글과 컴퓨터란 벤쳐 캐피탈회사를 설립,
기업인으로서도 성공해 한국 컴퓨터업계의 빌 게이츠로 불리며 젊은이의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林權澤(1936∼. 전남 장성)
<만다라>, <씨받이>, <아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영화감독. 베니스영화제.몬트리올영화제.모스크바영화제.상해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 인본주의에 초점을 맞춘 그의 대표작들은 흥행과 예술에서 동시에 성공한 보기드문 수작들이다.
▲張勉(1899∼1966. 인천)
4.19의거로 제2공화국 총리자리에 올랐으나 내분과 정적의 공세 등에 시달리며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못하다 5.16쿠데타로 사퇴했다.
집권 8개월 동안 내무장관이 네번,
국방장관과 육군총장이 두번씩이나 바뀔정도로 정권의 기반이 허약했다.
그의 실각은 결과적으로 朴正熙 장기독재의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됐다.
▲全斗煥(1931∼. 경남 합천)
朴正熙대통령 사망이후 전개된 안개정국에서 12.12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대통령직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양심수를 양산하는 등 反민주적 철권통치로 임기 막바지 6월 민주항쟁으로 상징되는 국민적 저항을 받았다.
퇴임후에는 백담사에 유배 되기도 했으나, 최근 검찰의 12.12 기소유예처분, 5.18 공소권 없음 결정 등으로 법적 사면을 받았다.
▲全泰壹(1948∼1970. 대구)
서울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70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시위를 벌이다 실패하자 분신자살,
당시 고도성장에 가려있던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태와 조건을 폭로했다.
그의 분신은 침체된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며 조직적 노동운동의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최근 그의 삶을 영화로 제작중이며, "내죽음을 헛되게말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全泰壹 烈士가 살았던 집을 가다.
평화시장 피복 공장 재단사로 취직한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한없는 연민과 분노를 느낀다.
어렵사리 구한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명시해 놓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전태일은 작업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절망한 그는 마침내 분신을 선택하여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 숨을 거둔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발췌,
1995년 11월 18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아직도 우리가 직면해있는 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영화가 나오고 21년이 흐른 2016년 지금의 현실은 여전히 춥고 어둡고 희망을 찾으려 몸부림쳐도 그것은 멀고 먼 신기루처럼 쉬이 잡히지도 않는다.
꿈을 가지고 살아야할 청춘들은 꿈 대신 좌절부터 맛보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가진 자들의 추악한 소위 甲질을 보면서 다 시 한번 긴 절망을 맛보아야했다.
1970년 11월 13일..
절망한 그는 마침내 분신을 선택하여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 숨을 거둔 全泰壹 烈士의 희생으로 이 나라는 얼마만큼 변해왔을까..?
여전히 노동현장 곳곳에는 비정규직이란 멍에아래 똑같이 일하고 노력해도 언제나 그늘 속에서 고통받아야하는 고된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노동현장에는 정규직 그리고 비정규직이란 두 개의 계급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가르고 사람들의 삶과 꿈조차 좌절시키고 있다.
저임금 장시간근로 휴일조차 눈치를 보아야하는 삶..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전히 가진 자들 부를 축적한 甲들은 헝그리 정신만 강조하고, 요구한다.
노동자들 희생의 댓 가로 부를 축적한 사주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기에 바쁘다.
썩어 문드러진 재벌이나 그들과 이합집산으로 얽힌 정치집단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2016년 1월의 어느 날..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인적도 찾아보기 힘든 좁은 골목길을 돌아 그곳에 다 달았다.
全泰壹은 1948년 8월 26일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맏이로 이곳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교구청 후문 앞 왼쪽골목길로 들어서니 도심의 중심가속 개발과 거리가 먼 그곳은 흐르는 시간도 잊어버린 낡은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골목길속에 全泰壹 烈士가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교내 있었음)에 다니던 시절 살았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25-16).. 부서질 듯 낡은 나무대문 너머 한옥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 어디에도 이곳을 알리는 푯말도 찾아볼 수 없고..
아는 사람만이 이곳이 그가 태어난 곳임을 알 수 있는 그의 흔적은 이처럼 쓸쓸히 관심 밖에서 남겨져 있었다.
또한 이곳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다.
가장 아래서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간 노동자들과 함께한 그를 만나기는 여전히 멀게 만 느껴진다.
현실은 여전히 그를 잊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애써 지우려 애쓰는 건가?
그의 무덤 앞에서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는 그때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세상은 40번을 변해왔지만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이 골목길은 변함없이 남아서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이 작은 골목길에 드리운 햇볕처럼..
그의 삶의 흔적에도 볕이 비추어 그가 희생하며 우리들에게 남기 고저 한 숭고한 뜻을 기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 며 조용히 골목길을 떠났다..
(찾아가는 방법)
대구시중구남산로 8길(25-16)
대구도시철도 1, 3호선 명덕역에서 하차,
7번 출구로 나와서 2.28 기념관, 명덕초교를 지나 빨간선을 따라 이동하면 남산동 자동차부속 골목길이 나오며 이 도로를 건너 대구교구청 후문으로 가면 후문 정면에서 좌측 편으로 골목길이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현재 全泰壹 烈士가 살았던 집터는 타인의 사유지로서 내부는 들어 갈수 없습니다.
▲정트리오(서울)
鄭明和(1944∼. 첼로), 京和(19485∼. 바이올린), 明勳(1953∼. 피아노,지휘)으로 구성된 세계적인 음악가족.
세사람 모두 국제음악콩쿠르 수상경력이 있으며, 매년 한차례 이상 실내악 순회공연을 가진다.
이들은 또 유엔마약퇴치대사로 선임되어 음악연주와 함께 평화사절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명훈은 얼마전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감독직 사임문제를 둘러싸고 세계 문화계의 관심의 초점이 된 바 있다.
▲趙炳玉(1894∼1960. 충남 천안)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李承晩과의 대결을 한달 앞두고 미국에서 병사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방뒤 최초의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 창당을 거쳐 미군정하에서 경무부장으로 정부수립을 방해하는 좌익세력 탄압에 앞장서는 등 李承晩정권 수립에 1등공신 역할을 하지만 그후 결별,
사사오입개헌 반대 등 反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조용필, 한국 대중음악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초대형 가수.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 그는 대마초가수로 묶여 한동안 활동을 못하다가 <창밖의 여자>로 재기에 성공,
80년대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한 오백년>,<촛불>,<고추잠자리> 등 히트곡을 잇따라 내놨다.
1969년에 경동고등학교를 25회로 졸업하고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에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하여 미 8군 무대에 데뷔하였다,
1971년, 김대환, 조용필,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된 3인조 음악 그룹 김트리오로 본격적인 락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2년,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앨범을 발매하였고, 수록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칼 사랑의 일기'라는 앨범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 등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앨범이다.
이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 경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26세가 되던 1975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발표한 트로트 음악,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처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1979년, 가요계 공식 데뷔,
그러나 1977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공백기를 갖게 되고, 해금 조치 이후 지구레코드와의 전속으로 1979년에 현재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정규 1집 음반 수록곡 〈창밖의 여자〉를 발표했다.
이 곡이 수록된 조용필의 정규 1집 음반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밀리언 셀러) 단일 음반이다.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된다.
일선 학교에서 음악 교사들로부터 교육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서 고교들을 순회하며 선생님들과 전교생 앞에서 단독 공연을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에서는 공연 도중에 교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학생들이 입고 있던 팬티를 무대로 던지는 상황이 있었고 이 사건 이후로 학교 초청 공연들은 중단되게 된다.
조용필 밴드는 공연마다 밴드의 악기들도 모두 큰 트럭에 싣고 다닌다고 유명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조용필 밴드의 구성원이 되면 좋은 점으로 밴드 구성원이면 조용필에게 필요한 악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언제나 그 즉시 조용필이 구입해줘서, 고가의 유명 악기이더라도 거리낌없이 직항편도 없어 중간 기착지인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야 하는 먼 미국 본토로부터 곧바로 공수받아 쓸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음악계에 알려졌었다.
1986년~1988년, 일본 진출, “모나리자”와 “서울 서울 서울”
조용필은 락 음악과 발라드 음악, 트로트 음악 또는 〈강원도 아리랑〉처럼 한국 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 내며 다양한 연령층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용필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오빠부대로 불리는 젊은 여성 팬층을 이끌고 다니기도 했으며 조용필 등장 이전에 대한민국의 최고 인기 가수로 호평을 받던 남진과 나훈아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1985년 조폭 출신 김 모씨로부터 폭행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경찰은 조씨에 대한 폭행사건에대해 수사를 펼치기로 했으며 보디가드를 5명으로 늘리기로 하였다.
홀로 대한민국 가요사의 한 획을 긋기 시작하던 조용필은 1986년에 일본에 진출하여 발매한 앨범 〈추억의 미아 1〉이 100만장이상 판매하는 대성과를 거두어 그 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장르를 섭렵한 가수로 통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용필을 엔카의 황제로 부른다.
1988년에는 10집 음반을 발표했는데 그 음반의 수록곡 〈서울 서울 서울〉,〈모나리자〉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여러 가수와 경쟁을 하였다.
이 중 〈서울 서울 서울〉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 때 방송에서 전파되면서부터 인기를 얻었는데 조용필은 당시 인터뷰 때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 사회가 우울해 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1980년대 후반에는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조용필군'이라고 호명되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몇 회에 걸쳐서 거의 고정 출현하였다.
축하곡을 부르기도 하였으나 드레스를 입은 무대 뒤쪽 계단 위에 여성들 중에서 미스코리아 진선미(眞善美) 최종 후보에게만 손을 내밀고 1명씩 계단 아래 무대로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93년~1994년, 교통사고 그리고 음반 판매량 1천만장 돌파, 결혼과 재혼,
1993년 12월 1일 오전 1시 50분 인근 술집에서 문화일보 기자 권모 기자와 함께 술을 마신뒤 서울 강남구 역삼동 대동은행 앞길에서 음주 상태에서 밴츠 승용차를 몰고가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에 서초경찰서는 무면허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조용필은 1994년에 대한민국 최초로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기록했다.
일본에서의 앨범판매량 역시 공식적으로 600만장이 넘어 한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오가며 활동을 해오고 있고 지금까지 총 18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가장 최근의 앨범은 2003년에 발매한 18집 《OVER THE RAINBOW》(비정규앨범은 2009년에 발매한 《2008년 조용필 40주년 콘서트 기념 앨범 "THE HISTORY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조용필 이후로 가요의 음반 판매량이 외국 음반 판매량을 넘어서게 되었다.
데뷔 이래 현재까지 조용필의 히트곡은 다른 가수들 보다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1983년에 미술교사 박지숙과 결혼하였으나 5년만에 이혼하였고 1994년 재미교포 성공한 사업가 안진현과 63빌딩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하였다.
하지만 결혼 9년차 2003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심장병에 걸려 투병 중이던 부인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2013년, 10년 만에 발매된 앨범 “Hello”
2011년까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전국 투어 콘서트를 마치고 2012년에는 약 10년 만에 정규 19집 앨범을 제작하는데 매진했으며, 드디어 2013년 4월 23일 발매 예정이었던 정규 19집 앨범 "Hello"의 수록곡 중 하나인 "Bounce"를 4월 16일에 먼저 선공개했다.
음원이 선공개되면서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를 하는 등 다시 한 번 조용필의 귀환을 알렸으며, 일주일 뒤인 4월 23일에는 타이틀 곡인 "Hello"와 나머지 8곡을 모두 공개하였다.
공개 후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했을 뿐 아니라 당일 오프라인 발매를 시작한 음반 판매도 아침 시간부터 조용필의 정규 19집 앨범을 구매하기 위해 조용필 팬들 뿐 아니라 10, 20대들까지 모두 1천 여명의 팬들이 음반 매장 앞에서 줄을 서는 등 침체된 음반 시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이는 2009년 서태지 이후로 4년 만에 일이다.
당일 오후 8시에는 데뷔 이후 갖는 첫 쇼케이스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 선공개되었던 "Bounce"는 빌보드 K-Pop 차트에서 1위를 차지 하였으며, 4월 26일 방송된 뮤직뱅크에서 5위에 올라서는 등 다시 한 번 그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일주일 뒤 5월 3일에는 23년만에 지상파 가요순위 프로그램 정상에 올라서게 되었고, 11월 22일에 개최된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서 3개 부문 대상에 속하는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2월 20일 방송된 뮤직뱅크에서 2013 연말결산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曺薰鉉(1952∼. 전남 목포)
바둑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을 극복하고 한국바둑을 세계 최강에 올려놓은 주역.
잉창치(應昌期)배, 동양증권배, 진로배, 후지쓰(富士通)배 등 4대 국제기전을 모두 한차례 이상 석권,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입지를 굳혔다.
국내에서도 세차례에 걸쳐 全기전을 차지하는 천하통일을 달성하며, 한국바둑의 수준을 한단계 도약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咸錫憲(1901∼1989. 평북 용천)
두번씩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종교.역사.사상.평화운동 등에 깊이있는 지적 성취를 이룩한 행동하는 사상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47년 월남한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민주구국선언 등 줄곧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그의 사상의 핵심은 `씨알론'으로 압축된다.
그는 장자,노자 등 동양사상과 인도 간디사상, 서구 자유주의사상, 기독교 등을 융합한 평화의 철학을 갈파했다.
저서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이 있다.
▲黃永祚(1970∼. 강원 삼척)
`몬주익의 영웅'. 孫基禎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 57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우승, 인간 한계에 도전한 한국인의 자부심을 세계에 과시했다.
이후 그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함으로써 또 한번 마라톤을 통한 국민적 단결과 통합에 기여했다.
그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한국은 4% 안에 드는 희귀한 나라, 26경 원 잡을 기회의 나라,
세계적인 환경 운동가죠.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로도 잘 알려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MBC와 만났습니다.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희귀한 나라'라고 말했는데요.
아직도 재생에너지보다 석탄 발전이 더 싼 나라, 전 세계 4%에 드는 희귀 국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에도 강력한 기술 경쟁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거라고 전망했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환경운동을 이끄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을 세계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앨 고어/클라이밋 리얼리티 프로젝트 설립자 (미국 전 부통령)] "한국은 세계에서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석탄과 가스 발전보다 비싼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 말이 맞는지 세계적인 시장조사 기관에 물었습니다.
노란색 국가는 태양광 발전이 가장 싼 나라, 하늘색은 풍력이 가장 싼 나라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중국과 영국은 풍력이 가장 쌉니다.
일본과 호주, 프랑스와 인도는 태양광이 가장 저렴합니다.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는 붉은색입니다.
조사대상 50개국 중 우리나라는 지금도 석탄 발전이 가장 싼 희귀한 나라가 맞았습니다.
[데이비드 강/블룸버그 뉴에너지파이낸스 한국·일본 리서치총괄] "세계 발전 시장의 96%에서 재생에너지가 화석 연료보다 싸졌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이런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4%에 드는 희귀한 나라입니다."
원인은 재생 에너지 발전 시설의 규모가 작은데다 전력 시장에 대한 규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은 그러나 이런 한국에도 내년부터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앨 고어/클라이밋 리얼리티 프로젝트 설립자 (미국 전 부통령)] "내년부터 (재생에너지 가격 하락이) 현실화될 겁니다.
화석 연료를 서둘러 퇴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면적인 가격 역전은 2028년에서 2029년 사이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올해 태양광 발전 가격입니다.
메가와트시당 최저 72달러에서 140달러, 우리 돈으로 대략 10만 원에서 18만 원 정도로 분석됩니다.
그러나 내년에는 최고 가격이 115달러로 떨어지고 2028년에는 83달러로 낮아집니다.
가장 비싼 태양광 발전도 가장 싼 가스 발전 가격보다 낮아집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전환은 비용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시장 분석가들은 오히려 큰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강/블룸버그 뉴에너지파이낸스 한국·일본 리서치총괄] "우리 분석에 따르면 온실가스 순 배출량이 0에 도달하는 2050년까지 194조 달러(한화 약 26경 원)의 기회가 생길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 경쟁력을 가진 나라 중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앨 고어/클라이밋 리얼리티 프로젝트 설립자(미국 전 부통령)] "세계적인 배터리 회사 6개 중 3개가 한국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