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개척과 총잡이 빌리 더 키드(1859~1881년)
그때 세계는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미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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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남북전쟁 전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서부 개척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철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고 들소와 원주민들만 한가롭게 노닐던 서부는 하루아침에 가축과 총잡이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군대나 관리들을 파견할 수도 없었고 거의 30년 가까이 서부에는 이런 무법 상태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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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남북전쟁 전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서부 개척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철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고 들소와 원주민들만 한가롭게 노닐던 서부는 하루아침에 가축과 총잡이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군대나 관리들을 파견할 수도 없었고 거의 30년 가까이 서부에는 이런 무법 상태가 계속되었다.
무법 상태란 좋게 말하면 무한정의 자유라는 뜻도 되겠지만 총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로 건너갔을까? 물론 모험과 자유를 찾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동부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었던 범법자, 부랑자, 흑인, 이제 막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등도 많았다. 여기에 노다지 꿈에 부푼 투기꾼과 목장주들이 가세했다.
1840년대 말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골드러시는 전쟁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금이 소멸되면서 노다지꾼들은 새로운 금광을 찾아 네바다, 콜로라도, 몬태나 등으로 몰려갔고, 광산 주위로는 여지없이 선술집과 여관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노다지꾼, 총잡이, 도박꾼, 매춘부, 사기꾼이 들끓었고, 돈과 이권을 둘러싼 싸움, 광산채굴업자들과 원주민간의 전쟁, 역마차 강탈사건이 끊일 날이 없었다.
빌리 더 키드 현상 포스터.
사살하거나 생포해 데려오면 5천 달러의 현상금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황야의 무법자들
시대적 상황에서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했는데, 서부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총잡이 빌리 더 키드가 바로 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리 더 키드의 본명은 윌리엄 보니. 1859년 뉴욕에서 태어나 1881년 보안관 가레트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최소한 21명 이상을 살해한 서부의 전설적 총잡이였다.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캔자스로 이사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다시 콜로라도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거기서 재혼을 한다. 다시 뉴멕시코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부터 빌리는 남서부와 북부 멕시코를 두루 방랑하면서 갱들과 어울리고 절도와 무법의 경륜을 쌓는다. 1880년 12월에 가레트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81년 4월 30일 두 명의 보안관 대리를 살해하고 탈옥에 성공하지만 가레트 보안관의 끈질긴 추적과 매복에 의해 마침내 7월 14일 저녁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빌리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분한 이론이 있다. 그날 가레트 보안관에게 사살된 사람은 빌리가 아니었고, 가까스로 그곳을 도망쳐 나온 빌리는 이후 강도짓을 그만두고 편안히 살다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서부 시대를 동경하는 미국 사람들의 적당한 허풍까지 가미되어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그가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총잡이와 더불어 서부의 무법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소몰이꾼(카우보이)이다. 전쟁 후 서부에 방목 형태의 대규모 목축이 성행하게 된 것은 임자 없는 초지가 무한정 펼쳐져 있는 자연적 요소 외에 대륙횡단철도 건설 및 냉장열차의 개발로 서부에서 도축된 고기를 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신속히 그리고 신선하게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의 초지에는 텍사스 롱혼이라는 긴 뿔 육우가 수천만 마리나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의 선조는 스페인의 토로스 종이라고 한다. 즉 초기에 남부를 지배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소가 야생화한 것이다. 카우보이들은 이 소를 몰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부까지 수천 마일을 올라와 철도 주변 대도시의 도축장에 팔아넘기고 여기서 도축된 고기는 열차에 실려 동부로 수송되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런 카우보이들의 삶이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먹을 물과 풀을 찾아 광야를 며칠씩 헤매는 것은 보통이고 카우보이들끼리 좋은 초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카우보이의 낭만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서부 영화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의 향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나아가 미국 역사 자체를 미화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사실 카우보이의 세계가 무법천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축업자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초지와 물의 권리에 관한 상호협약을 맺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협약은 엄격히 준수되었다. 다만 정부가 나서지 않고 주민 스스로 법을 만들고 집행했을 뿐이다. 연방정부도 이들의 자치법을 인정했고 후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때에도 이를 공식법령으로 수용하는 일이 많았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서부의 낭만은 18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부도 점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금의 고갈, 그리고 대규모 채광기업의 등장과 더불어 노다지꾼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선술집이 있던 곳에는 상가, 회사, 신문사,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 소떼를 몰고 초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의 장관도 1885년을 지나면서 보기 힘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카우보이는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다가 고기값의 폭락으로 수지조차 맞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축업자들은 소떼를 끌고 초원을 방황하기보다 울타리를 친 목장의 주인으로 안주하게 되었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의 천국은 불과 3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그렇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1900년에 이르자 이들 서부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몰아낸 들소와 원주민과 더불어 과거 속으로 묻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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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개척과 총잡이 빌리 더 키드(1859~1881년)
그때 세계는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미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이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남북전쟁 전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서부 개척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철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고 들소와 원주민들만 한가롭게 노닐던 서부는 하루아침에 가축과 총잡이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군대나 관리들을 파견할 수도 없었고 거의 30년 가까이 서부에는 이런 무법 상태가 계속되었다.
무법 상태란 좋게 말하면 무한정의 자유라는 뜻도 되겠지만 총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로 건너갔을까? 물론 모험과 자유를 찾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동부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었던 범법자, 부랑자, 흑인, 이제 막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등도 많았다. 여기에 노다지 꿈에 부푼 투기꾼과 목장주들이 가세했다.
1840년대 말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골드러시는 전쟁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금이 소멸되면서 노다지꾼들은 새로운 금광을 찾아 네바다, 콜로라도, 몬태나 등으로 몰려갔고, 광산 주위로는 여지없이 선술집과 여관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노다지꾼, 총잡이, 도박꾼, 매춘부, 사기꾼이 들끓었고, 돈과 이권을 둘러싼 싸움, 광산채굴업자들과 원주민간의 전쟁, 역마차 강탈사건이 끊일 날이 없었다.
빌리 더 키드 현상 포스터.
사살하거나 생포해 데려오면 5천 달러의 현상금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시대적 상황에서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했는데, 서부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총잡이 빌리 더 키드가 바로 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리 더 키드의 본명은 윌리엄 보니. 1859년 뉴욕에서 태어나 1881년 보안관 가레트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최소한 21명 이상을 살해한 서부의 전설적 총잡이였다.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캔자스로 이사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다시 콜로라도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거기서 재혼을 한다. 다시 뉴멕시코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부터 빌리는 남서부와 북부 멕시코를 두루 방랑하면서 갱들과 어울리고 절도와 무법의 경륜을 쌓는다. 1880년 12월에 가레트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81년 4월 30일 두 명의 보안관 대리를 살해하고 탈옥에 성공하지만 가레트 보안관의 끈질긴 추적과 매복에 의해 마침내 7월 14일 저녁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빌리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분한 이론이 있다. 그날 가레트 보안관에게 사살된 사람은 빌리가 아니었고, 가까스로 그곳을 도망쳐 나온 빌리는 이후 강도짓을 그만두고 편안히 살다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서부 시대를 동경하는 미국 사람들의 적당한 허풍까지 가미되어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그가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총잡이와 더불어 서부의 무법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소몰이꾼(카우보이)이다. 전쟁 후 서부에 방목 형태의 대규모 목축이 성행하게 된 것은 임자 없는 초지가 무한정 펼쳐져 있는 자연적 요소 외에 대륙횡단철도 건설 및 냉장열차의 개발로 서부에서 도축된 고기를 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신속히 그리고 신선하게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의 초지에는 텍사스 롱혼이라는 긴 뿔 육우가 수천만 마리나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의 선조는 스페인의 토로스 종이라고 한다. 즉 초기에 남부를 지배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소가 야생화한 것이다. 카우보이들은 이 소를 몰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부까지 수천 마일을 올라와 철도 주변 대도시의 도축장에 팔아넘기고 여기서 도축된 고기는 열차에 실려 동부로 수송되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런 카우보이들의 삶이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먹을 물과 풀을 찾아 광야를 며칠씩 헤매는 것은 보통이고 카우보이들끼리 좋은 초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카우보이의 낭만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서부 영화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의 향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나아가 미국 역사 자체를 미화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사실 카우보이의 세계가 무법천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축업자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초지와 물의 권리에 관한 상호협약을 맺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협약은 엄격히 준수되었다. 다만 정부가 나서지 않고 주민 스스로 법을 만들고 집행했을 뿐이다. 연방정부도 이들의 자치법을 인정했고 후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때에도 이를 공식법령으로 수용하는 일이 많았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서부의 낭만은 18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부도 점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금의 고갈, 그리고 대규모 채광기업의 등장과 더불어 노다지꾼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선술집이 있던 곳에는 상가, 회사, 신문사,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 소떼를 몰고 초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의 장관도 1885년을 지나면서 보기 힘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카우보이는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다가 고기값의 폭락으로 수지조차 맞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축업자들은 소떼를 끌고 초원을 방황하기보다 울타리를 친 목장의 주인으로 안주하게 되었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의 천국은 불과 3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그렇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1900년에 이르자 이들 서부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몰아낸 들소와 원주민과 더불어 과거 속으로 묻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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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1. 황야의 무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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