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경상남도, 황해도, 경기도 등지에서 즐겨 해 온 민속놀이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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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황소는 원래 성질이 유순하여 싸움이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다. 그래서 싸움 전에 소주 따위를 먹여 흥분시킨 다음 싸움을 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평소 온순하던 소들도 제법 사나워져 볼만한 싸움을 전개한다. 싸움 장소는 모래를 깔고 둘레는 둥글게 새끼줄로 막아 놓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되어 있다. 넓이는 두 마리의 소가 충분히 싸울 만한 공간이어야 한다. 대개 마을 대항전으로 이루어진다. 각각 건강하고 성질 사나운 소를 골라 싸움에 내세우는데, 두 소를 싸움 장소에 세울 때는 서로 마주 세우면서 보이지 않게 포장으로 가려준다. 포장을 걷으면 싸움이 시작된다. 두 소는 서로 뿔을 맞대고 상대를 밀치거나 떠받는데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한다.
농촌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각자의 소를 데리고 나와 너른 벌판에서 싸움을 붙이는 놀이였으나 현재는 전문 소싸움꾼들이 훈련된 싸움소를 경기장으로 끌고 나와 많은 관중이 보는 가운데서 싸움을 붙이는 놀이.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아 정확한 역사는 알 수가 없다. 인류가 약 3,000년 전부터 소를 길러 왔다고 하니, 소싸움의 역사도 그 정도의 연륜을 가졌으리라고 본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이나 『신당서新唐書』 변진弁辰조에 ‘부여에서는 육축을 사육하고 이들의 이름을 따서 우가, 마가, 저가 등의 관명으로 사용했다.’라고 하는 걸 보아 이 시대에 이미 소를 길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부여에서는 군사가 출정할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길흉을 점쳤다는 기록이 있으니, 소를 희생과 점복에 썼음을 알 수 있다. 구전에 의하면 소싸움은 삼한시대부터 목동들이 초원에서 소싸움을 붙였다고 하고, 또 일설에는 신라가 백제와 싸운 전승 기념으로 소싸움놀이를 행했다는 설이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설을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 전부터 소를 이용했고, 이때부터 소싸움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고 본다. 모든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데, 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락적인 재미를 위해 소싸움을 붙인 것은 신라 말엽쯤으로 보고 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들판에서 소를 먹였는데, 여러 마리의 소가 한꺼번에 모여서 풀을 뜯다가 자기네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본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서로의 소를 데리고 나와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싸움에 이기려면 소의 가슴이 발달되고 어깨가 높으며 두꺼워야 한다. 그리고 뿔이 곧고 날카로우며 위로 잘 뻗어 있어야 한다. 뿔과 뿔 사이는 좁아야 하고 이마가 튼튼해야 한다. 뿔 사이가 좁으면 상대 소의 공격을 덜 받을 수 있고, 이마가 튼튼하면 상대방을 세게 공격할 수 있다. 귀가 작고 뿔은 커야 한다. 귀가 크면 공격할 때 방해가 된다. 가슴이 넓고 허리가 길어야 한다. 허리가 길면 공격할 때 받쳐주는 힘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 목이 짧고 굵어야 한다. 우선 목이 굵으면 힘이 세서 공격과 방어가 용이하고, 목이 짧으면 상대방의 옆목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앞다리 사이가 넓고 짧아야 한다. 앞다리 사이가 넓으면 안정감이 있고, 앞다리가 짧고 강하면 몸을 낮추어 파고들어 공격하기가 용이하다. 발목이 유연하고 발톱이 단단해야 한다. 그래야 공격할 때 땅을 힘차게 짚고 재빨리 공격할 수 있다. 뒷다리가 굵고 강해야 한다. 그래야 공격할 때 밀리지 않고 잘 받쳐 줄 수 있다. 그리고 꼬리가 길어야 한다. 공격할 때 긴 꼬리가 뒷부분의 중심을 잡아 힘차게 공격할 수가 있다. 눈이 작아야 한다. 눈이 작은 소는 겁이 없고 쉽게 부딪치지 않으며 상대에게 재빠르게 파고드는 재치가 있다.
소싸움을 할 때 가장 큰 무기는 뿔이다. 뿔이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은 것을 천향각 혹은 노고지리뿔이라 한다. 천향각이란 하늘을 향하여 뻗었다는 뜻이고, 노고지리뿔이란 노고지리의 날개처럼 하늘을 향하여 잘 뻗어 있기 때문이다. 소의 뿔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천향각 외에도 머리의 앞을 향하여 뻗은 전향각 혹은 전각, 머리 뒤로 젖혀져 있는 후향각, 혹은 후각, 비녀를 지른 것처럼 양쪽으로 일자 모양으로 뻗은 일자각 혹은 비녀뿔, 소의 뿔이 하나는 위로, 또 하나는 아래로 뻗은 것을 천지각 혹은 짝배기뿔이라 한다. 염소뿔처럼 오그라들어 동그랗게 말려 있는 뿔을 옥뿔 혹은 우걱뿔이라고도 한다.
싸움소를 먹이기만 잘 하고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살만 찌고 동작이 느려서 싸움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싸움소가 있는 집에서는 날마다 적당한 훈련을 시키고 있다. 훈련의 종류에는 산길을 달리게 하거나 무거운 짐을 끌게 하여 지구력을 키우고, 폐타이어를 구해다가 돌과 시멘트를 집어넣어 이를 끌고 다니는 훈련을 하여 강인한 체력을 기른다.
싸움소는 힘이 좋아야 하므로 일소처럼 아무 먹이나 먹이지 않는다. 영양가가 많은 좋은 먹이를 먹이는데, 소의 여물에다 콩·보리·좁쌀·쌀겨·보리죽·호박·미꾸라지·뱀·보신탕·인삼·녹용 등을 안배하여 자주 먹인다. 그리고 싸움에 나가기 전에는 십전대보탕이나 우황청심환 같은 보약도 먹이며, 진통제나 두통약도 먹여 상대 소와 부닥칠 때 아픔을 줄여 주려고 애를 쓴다.
소싸움의 시작은 소의 무게를 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소의 몸무게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는데 갑종은 730㎏ 이상, 을종은 641∼729㎏, 병종은 640㎏ 이하이다. 싸움은 같은 등급끼리 붙이는 게 원칙이다. 두 마리의 소가 싸움터에 나가면 처음에는 서로 노려보는 탐색전을 하는데, 이를 눈싸움이라 한다. 그러다가 주인이 싸움에 임하도록 유도하면 서로 싸우게 되고, 이때 주인도 옆에 붙어서 소리 지르며 응원을 한다. 이때 대개 ‘잘한다’, ‘박아라’, ‘찔러라’, ‘밀어라’, ‘찍어라’, ‘감아라’ 등의 명령성 구호를 외치면서 자기 소의 사기를 돋운다. 소싸움장에는 소의 싸움을 붙이고 승패를 판정하는 감독자가 있다. 이 사람을 도감이라 하는데, 소싸움장의 운영은 전적으로 도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소싸움에서 소들이 싸움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지는 않는다. 대개 20∼30분이면 끝나지만 오래 가는 것은 한 시간을 끄는 경우도 있다. 한쪽 소가 도망가거나 넘어지면 패한 것이다. 싸움을 하다가 힘이 부쳐서 싸울 의사가 없는 소는 도망갈 방향을 찾거나, 꼬리를 내려서 흔든다. 숨이 차서 뒷배를 심하게 헐떡거리거나, 똥을 싸거나,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거나, 거품을 내면 지쳐서 힘이 다 된 소이다. 이런 소는 곧 도망가게 된다.
소가 싸울 때의 최고 기술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힘이다. 힘이 센 소는 상대방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지녔다 하더라도 힘으로 밀어붙인다. 힘이 센데다가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소가 싸움을 할 때는 여러 가지 기술을 쓴다.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뿔치기와 뿔걸기이다. 소는 뿔을 가진 동물이므로 뿔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다. 그밖에 머리치기와 좌우치기, 들치기, 목치기, 밀어치기 등의 기술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기술이 제대로 먹히면 상대 소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뿔치기란 자기 뿔로 상대방의 뿔을 탁탁 받는 동작이다. 뿔걸기란 자기 뿔로 상대방 소의 뿔을 걸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이다. 머리치기란 소의 머리로 상대소의 머리를 탁탁 치는 동작이다. 좌우치기란 뿔로 상대방의 머리 양옆을 연이어 공격하는 것인데, 마치 권투 선수가 상대방 선수의 좌우를 공격하는 것과 꼭 같다. 들치기란 들어치기라고도 하는데, 자기의 뿔을 상대방의 목 밑에 넣어 위로 들어 올리는 공격법이다.
소싸움을 할 때 가장 큰 무기는 뿔이다. 뿔이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은 것을 천향각 혹은 노고지리뿔이라 한다. 천향각이란 하늘을 향하여 뻗었다는 뜻이고, 노고지리뿔이란 노고지리의 날개처럼 하늘을 향하여 잘 뻗어 있기 때문이다. 소의 뿔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천향각 외에도 머리의 앞을 향하여 뻗은 전향각 혹은 전각, 머리 뒤로 젖혀져 있는 후향각, 혹은 후각, 비녀를 지른 것처럼 양쪽으로 일자 모양으로 뻗은 일자각 혹은 비녀뿔, 소의 뿔이 하나는 위로, 또 하나는 아래로 뻗은 것을 천지각 혹은 짝배기뿔이라 한다. 염소뿔처럼 오그라들어 동그랗게 말려 있는 뿔을 옥뿔 혹은 우걱뿔이라고도 한다.
싸움소를 먹이기만 잘 하고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살만 찌고 동작이 느려서 싸움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싸움소가 있는 집에서는 날마다 적당한 훈련을 시키고 있다. 훈련의 종류에는 산길을 달리게 하거나 무거운 짐을 끌게 하여 지구력을 키우고, 폐타이어를 구해다가 돌과 시멘트를 집어넣어 이를 끌고 다니는 훈련을 하여 강인한 체력을 기른다.
싸움소는 힘이 좋아야 하므로 일소처럼 아무 먹이나 먹이지 않는다. 영양가가 많은 좋은 먹이를 먹이는데, 소의 여물에다 콩·보리·좁쌀·쌀겨·보리죽·호박·미꾸라지·뱀·보신탕·인삼·녹용 등을 안배하여 자주 먹인다. 그리고 싸움에 나가기 전에는 십전대보탕이나 우황청심환 같은 보약도 먹이며, 진통제나 두통약도 먹여 상대 소와 부닥칠 때 아픔을 줄여 주려고 애를 쓴다.
소싸움의 시작은 소의 무게를 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소의 몸무게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는데 갑종은 730㎏ 이상, 을종은 641∼729㎏, 병종은 640㎏ 이하이다. 싸움은 같은 등급끼리 붙이는 게 원칙이다. 두 마리의 소가 싸움터에 나가면 처음에는 서로 노려보는 탐색전을 하는데, 이를 눈싸움이라 한다. 그러다가 주인이 싸움에 임하도록 유도하면 서로 싸우게 되고, 이때 주인도 옆에 붙어서 소리 지르며 응원을 한다. 이때 대개 ‘잘한다’, ‘박아라’, ‘찔러라’, ‘밀어라’, ‘찍어라’, ‘감아라’ 등의 명령성 구호를 외치면서 자기 소의 사기를 돋운다. 소싸움장에는 소의 싸움을 붙이고 승패를 판정하는 감독자가 있다. 이 사람을 도감이라 하는데, 소싸움장의 운영은 전적으로 도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소싸움에서 소들이 싸움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지는 않는다. 대개 20∼30분이면 끝나지만 오래 가는 것은 한 시간을 끄는 경우도 있다. 한쪽 소가 도망가거나 넘어지면 패한 것이다. 싸움을 하다가 힘이 부쳐서 싸울 의사가 없는 소는 도망갈 방향을 찾거나, 꼬리를 내려서 흔든다. 숨이 차서 뒷배를 심하게 헐떡거리거나, 똥을 싸거나,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거나, 거품을 내면 지쳐서 힘이 다 된 소이다. 이런 소는 곧 도망가게 된다.
소가 싸울 때의 최고 기술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힘이다. 힘이 센 소는 상대방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지녔다 하더라도 힘으로 밀어붙인다. 힘이 센데다가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소가 싸움을 할 때는 여러 가지 기술을 쓴다.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뿔치기와 뿔걸기이다. 소는 뿔을 가진 동물이므로 뿔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다. 그밖에 머리치기와 좌우치기, 들치기, 목치기, 밀어치기 등의 기술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기술이 제대로 먹히면 상대 소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뿔치기란 자기 뿔로 상대방의 뿔을 탁탁 받는 동작이다. 뿔걸기란 자기 뿔로 상대방 소의 뿔을 걸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이다. 머리치기란 소의 머리로 상대소의 머리를 탁탁 치는 동작이다. 좌우치기란 뿔로 상대방의 머리 양옆을 연이어 공격하는 것인데, 마치 권투 선수가 상대방 선수의 좌우를 공격하는 것과 꼭 같다. 들치기란 들어치기라고도 하는데, 자기의 뿔을 상대방의 목 밑에 넣어 위로 들어 올리는 공격법이다.
지역사례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싸움을 벌이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주로 영남 지역에 국한되어 있는데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진주·밀양·의령·함안·김해 등지이고,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청도 한 군데밖에 없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소싸움놀이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전라북도 정읍, 충청북도 청주, 경기도 부천, 경남 창원과 창녕에서도 소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다. 청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서면 청도천 둔치에서 소싸움을 벌여왔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년 내내 소싸움을 벌일 수 있는 현대식 전천후 돔 경기장을 2011년 청도 화양읍 삼신리에 건설했다.
특징,,,
옛날에는 들판에서 소를 먹이면서 자연스럽게 소싸움도 시키고 구경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소를 축사에서 육우용으로 기르면서 자연적인 상태에서의 소싸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에 전문 소싸움꾼들이 등장하여 잘 훈련된 싸움소를 등장시켜 흥미진진한 소싸움을 보여 주고 있다. 싸움에서 승리한 소는 많은 상금을 받게 되고, 소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다.
소싸움 경기는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민속놀이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이러한 행사는 지역 주민에게 통쾌함과 재미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한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볼거리가 많은 지금도 사람들은 소싸움 경기를 잊지 못하고 소싸움 경기장을 찾는다. 그것은 힘만 세었지 우직하기 짝이 없는 거구의 황소가 큰 뿔을 앞세워 상대방을 공격하는 묘미와 아찔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에서 느끼는 통쾌함을 맛보고 모두들 즐거워할 수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소싸움 경기는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민속놀이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이러한 행사는 지역 주민에게 통쾌함과 재미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한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볼거리가 많은 지금도 사람들은 소싸움 경기를 잊지 못하고 소싸움 경기장을 찾는다. 그것은 힘만 세었지 우직하기 짝이 없는 거구의 황소가 큰 뿔을 앞세워 상대방을 공격하는 묘미와 아찔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에서 느끼는 통쾌함을 맛보고 모두들 즐거워할 수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개천예술제 / 소싸움팔월 한가위에 주로 남쪽 지방에서 하는 행사이다. 경남 진주시.
청도 소싸움조사자 : 국립민속박물관 / 조사지역 : 경북 청도.
두 소를 마주 세워 싸움을 붙이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
한가위 소싸움 대회
경상남도 지방에서 성행하며 주로 한가윗날 벌인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싸움 소를 따로 길렀고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마을 전체의 영예로 알았다. 이를 주관하는 이를 ‘도감’이라 부르며 도감은 싸울 소의 나이 ·체구 등에 따라 비슷한 것끼리 싸움을 붙인다.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뒤로 밀리면 지는 것으로 한다.
근래에는 싸움이 더욱 격렬해지기를 바라서 싸움 직전에 소주를 강제로 먹이기도 한다. 현재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해마다 벌이는 개천예술제 때 소싸움이 가장 성대하다. 소싸움은 줄다리기와 더불어 논농사를 짓는 지역의 전형적인 민속으로 중국 남부, 일본, 인도네시아, 타이 등지에서 성행하며 본디는 신에게 제물로 바칠 소를 고르기 위해서 벌였다는 설이 있다.
두 마리 황소를 맞붙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소를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에서 소싸움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임시로 벌이는 소싸움이 아니라 두 마을 또는 여러 마을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소를 끌고 나와 연례적으로 벌인 소싸움은 경상남도 일원과 경상북도 청도 지역 등 이른바 가야문화권에서만 전승되어 있다.
연례적으로 벌어진 놀이로서 소싸움은 주로 추석(秋夕) 무렵에 행해졌다. “정월 씨름, 팔월 소싸움”이라는 경북 청도 지역의 향언(鄕言)은 이를 말해준다. 이 시기는 수도재배의 힘든 노동이 일단락되는 농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한 일꾼들이 주도한 놀이가 바로 소싸움이었다. 현재까지도 소싸움이 강성한 경남 진주 지역에서 “소싸움 날은 상머슴의 날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인접한 두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소싸움 이야기가 나오고 각 마을에서는 싸움에 나설 소를 가린다. 싸움소는 평소 초동(樵童)들의 소싸움 등을 통해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소로서, 싸움에 대비하여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 장소는 통상 두 마을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개천이나 논밭이다. 개천에서 싸울 경우,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개천 둑에서 응원한다. 소싸움에 참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 싸움을 자기 마을의 위신이 걸린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대 현리의 소싸움을 보면, 인접한 두 마을인 봉기리와 현리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매년 추석 뒷날이나 그 다음 날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싸움을 벌였다. 각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황소 한 마리씩 출전하는데 소의 목에는 적·청·황의 세 천을 엮은 ‘이남기(끈)’를 둘러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싸움터에 나가며 이때 풍물패를 꾸려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였다. 워낙 싸움이 거칠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망라한 마을사람들은 개울의 둑 위에서 열렬히 응원하였고,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소를 몰고 나온 머슴이나 소 주인은 싸움소를 따라 움직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승부는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먼저 도망가는 쪽이 패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대개 단판으로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패한 마을에서 다른 소를 끌고 나와서 이긴 마을의 소와 한 번 더 싸움을 붙인 적도 있다. 이 싸움에는 어떤 상품도 걸려 있지 않으며, ‘싱벽[勝負慾]’과 마을의 ‘세도’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머슴이 소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며 소의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인접한 두 마을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근동(近洞), 혹은 관내의 다수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역시 추석 무렵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경남 의령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적어도 수십 개 마을의 소들이 출전하고 난장이 서는 대규모 소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09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晉陽雜詠) 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을 평하기를 “당지(當地)의 투우(鬪牛)가 심히 성하여 천백(千百)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라고 한 것도, ‘수무바다’라고 일컫던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소싸움을 본 소감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마을의 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남 의령의 소싸움을 보면, 소싸움은 바쁜 논농사일이 한풀 끝난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행해졌다. 싸움은 넓은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이루어졌는데, 의령읍의 남산천과 정암진의 모래사장, 가례면의 한내변, 유곡면의 세간천변, 부림천변 등이 소싸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싸움의 장소가 정해지면 음식장사들이 미리 몰려들어 일대 난장을 이룬다. 고삐와 코뚜레를 푼 싸움소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머슴이나 주인에게 이끌려 싸움터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자기편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격려와 쓰다듬을 받는다. 싸움터에 나간 싸움소가 잠깐 동안 상대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급소를 공격해 들어가면 모래사장, 혹은 풀밭은 격투장으로 변한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소들은 ‘뿔걸이’, ‘옆목치기’, ‘들치기’ 등의 공격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밀어붙인다. 이때 주인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받아라’, ‘찍어라’, ‘이러이러’ 하고 외치면서 소를 독려한다. 약한 쪽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날 때까지는 보통 몇 분이 소요되지만 길게는 수십 분이 소요될 경우도 있다. 싸움의 결과는 소의 동작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달아날 방향을 찾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거나 꼬리를 흔들고, 뒷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싸거나 입에 흰 거품을 내뿜으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표시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목과 뿔을 비단과 들꽃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소등에는 상머슴이나 주인이 올라타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풍물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들어오면 소의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를 즐긴다.
이와 같이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즉 청도의 풍각면이나 이서면처럼 이름난 우시장을 중심으로 면 관내의 각 마을들이 참여하던 소싸움이나 의령, 진주, 김해 등지에서 행해진 고을 규모의 초대형 소싸움이 역사상 어떠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퍼짐으로써 집약적인 노동력 투입이 요청되고 그에 따라 두레 등의 협업관행이 활성화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집락(集落)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축력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조선 후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처럼 범공동체적인 소싸움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소싸움의 주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마을 간의 소싸움일 경우, 싸움에 참여하는 각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공인된 소를 싸움소로 내세운 점, 그 소가 지게 되면 마을의 다른 소를 데리고 와서라도 이기려고 했다는 점, 풍물패가 함께 했다는 점, 소싸움을 마을 간의 ‘세도(세력)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기 마을 소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소싸움이 단순히 소 주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소가 속해 있는 마을 간의 싸움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성격은 여러 마을들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싸움에 참여하는 소가 있으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그 소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서 열렬히 응원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싸움에 참여한다. 마을 사람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접적이다. 자기 마을의 소가 불리하면 상대편 소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소싸움판은 난장판이 되게 마련이다. “센 소도 그 마을의 세력이 없으면 진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싸움이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소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며 함께 돌아온다. 승리하였을 경우 마을은 온통 잔치판이 되고 대개 부농인 소 주인은 음주가무가 따르는 뒤풀이를 주선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각 수준의 소싸움이 공동체의 참여와 후원 아래 행해졌고, 그 승패를 마을의 승패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소싸움은 줄당기기, 동채싸움, 팔매싸움 등과 마찬가지로 대동놀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 소 주인 → 소 ↔ 소 ← 소 주인 ← 공동체
소싸움은 외형상 소들의 싸움이지만 그 배후에는 우선 소 주인이 있고 다음으로 그 소가 속한 공동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일차적으로 소 주인의 명예와 위신이 걸려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속 공동체의 위신과 명예가 걸려 있다. 따라서 ‘소 - 소 주인 -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싸움의 주체를 이루게 된다.
전통적 소싸움에는 이렇다 할 물질적 유인(誘因)이 없다. 두 마을 간의 싸움인 경우에는 상품이 전혀 없었다. 이길 경우 소 주인이 마을사람들에게 한턱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 여러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는 우승한 소에게 ‘광목필’ 정도를 걸어주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보다 후대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물질적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싸움이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무언가 다른 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보자들은 이것을 흔히 ‘싱벽’ 즉 싸움에 이기고자 하는 욕구, 혹은 ‘세도’ 즉 마을의 힘 내지는 위세의 과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소싸움은 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소 주인, 보다 깊게는 해당 지연공동체의 명예, 혹은 위신의 과시라는 비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싸움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와 싸움의 의미는 어떠할까? 우선 싸움소는 소 주인,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대리하는 존재이다. 소는 곧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존재로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을 소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위임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싸움소와 그들을 동일시하며 그러한 동일시는 소의 수성(獸性)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소에 대한 인성(人性)의 부여라는 교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가 말귀를 알아듣는 듯 싸움의 요령을 알려주고 격려와 응원의 고함을 쉴 새 없이 내지르는 소 주인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싸움소는 소속 지연공동체의 모든 소를 대리하는 존재이자 소와 함께 농업생산을 주도하는 일꾼들, 즉 마을사람들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마을의 모든 남성, 나아가서는 모든 마을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마을의 소들 그리고 마을 일꾼들의 힘의 총합은 곧 해당 지연공동체의 현재의 생산력 및 미래의 생산력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을을 대표하여 소싸움에 나서는 황소는 곧 그 마을의 생산력, 그리고 생산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소싸움은 각 마을 간의 생산력의 경합이라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던 전통적 소싸움은 1970년대에 이르러 경남 진주를 시작으로 이른바 투우대회가 본격적으로 개최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우선 전통적 소싸움의 주체였던 마을공동체가 뒤로 물러나고 소 주인이 싸움의 주체가 되었으며 엄격한 경기 규칙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소싸움에는 없던 체급 구분이 이루어지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각 체급의 우승 소를 가리게 되었다. 또한 우승 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 그 소의 몸값도 몇 배나 오름으로써 물질적 유인이 소싸움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현재 소싸움은 대구, 경북 청도, 경남 의령·진주·김해·창원, 전북 정읍 등에서 연중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도에서는 대규모 실내 투우장을 건설하여 소싸움을 상설화하고 우권(牛券)을 발행하여, 그 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싸움 도박을 양성화하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인접한 두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소싸움 이야기가 나오고 각 마을에서는 싸움에 나설 소를 가린다. 싸움소는 평소 초동(樵童)들의 소싸움 등을 통해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소로서, 싸움에 대비하여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 장소는 통상 두 마을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개천이나 논밭이다. 개천에서 싸울 경우,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개천 둑에서 응원한다. 소싸움에 참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 싸움을 자기 마을의 위신이 걸린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대 현리의 소싸움을 보면, 인접한 두 마을인 봉기리와 현리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매년 추석 뒷날이나 그 다음 날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싸움을 벌였다. 각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황소 한 마리씩 출전하는데 소의 목에는 적·청·황의 세 천을 엮은 ‘이남기(끈)’를 둘러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싸움터에 나가며 이때 풍물패를 꾸려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였다. 워낙 싸움이 거칠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망라한 마을사람들은 개울의 둑 위에서 열렬히 응원하였고,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소를 몰고 나온 머슴이나 소 주인은 싸움소를 따라 움직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승부는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먼저 도망가는 쪽이 패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대개 단판으로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패한 마을에서 다른 소를 끌고 나와서 이긴 마을의 소와 한 번 더 싸움을 붙인 적도 있다. 이 싸움에는 어떤 상품도 걸려 있지 않으며, ‘싱벽[勝負慾]’과 마을의 ‘세도’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머슴이 소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며 소의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인접한 두 마을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근동(近洞), 혹은 관내의 다수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역시 추석 무렵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경남 의령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적어도 수십 개 마을의 소들이 출전하고 난장이 서는 대규모 소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09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晉陽雜詠) 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을 평하기를 “당지(當地)의 투우(鬪牛)가 심히 성하여 천백(千百)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라고 한 것도, ‘수무바다’라고 일컫던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소싸움을 본 소감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마을의 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남 의령의 소싸움을 보면, 소싸움은 바쁜 논농사일이 한풀 끝난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행해졌다. 싸움은 넓은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이루어졌는데, 의령읍의 남산천과 정암진의 모래사장, 가례면의 한내변, 유곡면의 세간천변, 부림천변 등이 소싸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싸움의 장소가 정해지면 음식장사들이 미리 몰려들어 일대 난장을 이룬다. 고삐와 코뚜레를 푼 싸움소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머슴이나 주인에게 이끌려 싸움터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자기편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격려와 쓰다듬을 받는다. 싸움터에 나간 싸움소가 잠깐 동안 상대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급소를 공격해 들어가면 모래사장, 혹은 풀밭은 격투장으로 변한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소들은 ‘뿔걸이’, ‘옆목치기’, ‘들치기’ 등의 공격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밀어붙인다. 이때 주인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받아라’, ‘찍어라’, ‘이러이러’ 하고 외치면서 소를 독려한다. 약한 쪽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날 때까지는 보통 몇 분이 소요되지만 길게는 수십 분이 소요될 경우도 있다. 싸움의 결과는 소의 동작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달아날 방향을 찾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거나 꼬리를 흔들고, 뒷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싸거나 입에 흰 거품을 내뿜으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표시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목과 뿔을 비단과 들꽃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소등에는 상머슴이나 주인이 올라타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풍물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들어오면 소의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를 즐긴다.
이와 같이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즉 청도의 풍각면이나 이서면처럼 이름난 우시장을 중심으로 면 관내의 각 마을들이 참여하던 소싸움이나 의령, 진주, 김해 등지에서 행해진 고을 규모의 초대형 소싸움이 역사상 어떠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퍼짐으로써 집약적인 노동력 투입이 요청되고 그에 따라 두레 등의 협업관행이 활성화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집락(集落)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축력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조선 후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처럼 범공동체적인 소싸움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소싸움의 주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마을 간의 소싸움일 경우, 싸움에 참여하는 각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공인된 소를 싸움소로 내세운 점, 그 소가 지게 되면 마을의 다른 소를 데리고 와서라도 이기려고 했다는 점, 풍물패가 함께 했다는 점, 소싸움을 마을 간의 ‘세도(세력)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기 마을 소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소싸움이 단순히 소 주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소가 속해 있는 마을 간의 싸움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성격은 여러 마을들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싸움에 참여하는 소가 있으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그 소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서 열렬히 응원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싸움에 참여한다. 마을 사람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접적이다. 자기 마을의 소가 불리하면 상대편 소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소싸움판은 난장판이 되게 마련이다. “센 소도 그 마을의 세력이 없으면 진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싸움이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소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며 함께 돌아온다. 승리하였을 경우 마을은 온통 잔치판이 되고 대개 부농인 소 주인은 음주가무가 따르는 뒤풀이를 주선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각 수준의 소싸움이 공동체의 참여와 후원 아래 행해졌고, 그 승패를 마을의 승패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소싸움은 줄당기기, 동채싸움, 팔매싸움 등과 마찬가지로 대동놀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 소 주인 → 소 ↔ 소 ← 소 주인 ← 공동체
소싸움은 외형상 소들의 싸움이지만 그 배후에는 우선 소 주인이 있고 다음으로 그 소가 속한 공동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일차적으로 소 주인의 명예와 위신이 걸려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속 공동체의 위신과 명예가 걸려 있다. 따라서 ‘소 - 소 주인 -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싸움의 주체를 이루게 된다.
전통적 소싸움에는 이렇다 할 물질적 유인(誘因)이 없다. 두 마을 간의 싸움인 경우에는 상품이 전혀 없었다. 이길 경우 소 주인이 마을사람들에게 한턱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 여러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는 우승한 소에게 ‘광목필’ 정도를 걸어주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보다 후대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물질적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싸움이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무언가 다른 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보자들은 이것을 흔히 ‘싱벽’ 즉 싸움에 이기고자 하는 욕구, 혹은 ‘세도’ 즉 마을의 힘 내지는 위세의 과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소싸움은 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소 주인, 보다 깊게는 해당 지연공동체의 명예, 혹은 위신의 과시라는 비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싸움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와 싸움의 의미는 어떠할까? 우선 싸움소는 소 주인,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대리하는 존재이다. 소는 곧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존재로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을 소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위임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싸움소와 그들을 동일시하며 그러한 동일시는 소의 수성(獸性)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소에 대한 인성(人性)의 부여라는 교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가 말귀를 알아듣는 듯 싸움의 요령을 알려주고 격려와 응원의 고함을 쉴 새 없이 내지르는 소 주인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싸움소는 소속 지연공동체의 모든 소를 대리하는 존재이자 소와 함께 농업생산을 주도하는 일꾼들, 즉 마을사람들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마을의 모든 남성, 나아가서는 모든 마을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마을의 소들 그리고 마을 일꾼들의 힘의 총합은 곧 해당 지연공동체의 현재의 생산력 및 미래의 생산력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을을 대표하여 소싸움에 나서는 황소는 곧 그 마을의 생산력, 그리고 생산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소싸움은 각 마을 간의 생산력의 경합이라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던 전통적 소싸움은 1970년대에 이르러 경남 진주를 시작으로 이른바 투우대회가 본격적으로 개최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우선 전통적 소싸움의 주체였던 마을공동체가 뒤로 물러나고 소 주인이 싸움의 주체가 되었으며 엄격한 경기 규칙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소싸움에는 없던 체급 구분이 이루어지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각 체급의 우승 소를 가리게 되었다. 또한 우승 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 그 소의 몸값도 몇 배나 오름으로써 물질적 유인이 소싸움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현재 소싸움은 대구, 경북 청도, 경남 의령·진주·김해·창원, 전북 정읍 등에서 연중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도에서는 대규모 실내 투우장을 건설하여 소싸움을 상설화하고 우권(牛券)을 발행하여, 그 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싸움 도박을 양성화하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소싸움(인도네시아)
소싸움 분포도
1991년 1월 16일, 비행기는 온통 회색으로 얼어붙은 북경을 떠나, 2시간 반만에 귀주성(貴州省) 귀양(貴陽)시 부근에 이르렀다. 고도를 낮추자 대지는 초록과 노랑의 수 방석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보리와 유채(油菜) 세상이었던 것이다. 귀양에서 다시 자동차로 5시간을 달린 끝에 개리(凱里)시에 닿았다. 이 일대는 먀오족 밀집 지역으로, 귀주성의 260만 명(1978년 현재) 가운데, 46퍼센트가 거주한다. 양자강 중류에서 벼농사를 짓던 이들은, 점차 한족에게 밀려 귀주성 산간 지대로 들어왔으며 운남성과 태국 북부로도 내려갔다.
소싸움은 먀오족의 대표적 민속 놀이이다.
정월 초하루 오전 10시, 공업학교 운동장 담 밖의 언덕에까지 구경꾼이 빽빽하게 둘러섰다. 청년 둘이 각기 소를 이끌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가운데, 북을 치고 노생(蘆笙)을 부는 패들이 뒤를 따른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올린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소싸움은 먀오족의 대표적 민속 놀이이다.
정월 초하루 오전 10시, 공업학교 운동장 담 밖의 언덕에까지 구경꾼이 빽빽하게 둘러섰다. 청년 둘이 각기 소를 이끌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가운데, 북을 치고 노생(蘆笙)을 부는 패들이 뒤를 따른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올린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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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주인들이 소를 끌고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다시 응원의 고함이 터진다. 두 소를 마주 세우고, 눈을 가렸던 나뭇잎을 거둔다. 소들은 달려들어 뿔 질을 한다. 밀고 밀리기를 거듭한 끝에, 한 소가 옆으로 비켜서면서 상대를 냅다 받았다. 목덜미가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둘은 다시 뿔을 댄 채 씨근거린다. 찔린 소가 밀리자, 이를 놓칠세라 더욱 거세게 뿔을 휘두른다. 이리저리 몰린 끝에 줄행랑을 놓던 소는, 정문 근처에 이르러 쓰러져 버린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함성이 터진다.
출정에 앞서 기름을 바르고 문질러 주는 사람들
준비를 마친 소
싸움터로 향하는 모습
먀오족의 소싸움은 1994년 2월, 귀주성 도균시(都勻市) 교외에서도 보았다. 출정에 앞서 소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준다. 등에 붉은 천을 덮고, 뿔에도 붉은 천을 감았다. 노생을 비롯한 악대와 응원대가 앞 선다. 싸움터는 산 비탈 사이의 논바닥이다. 비탈 양쪽에 악대를 비롯하여 은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이 구름처럼 둘러서서 소리 높여 자기 마을 소에 응원의 함성을 보낸다. 그 소리에 좁은 골짜기는 하늘로 떠오르는 듯하다.
깃발을 높이들고 싸움터로 향하는 응원군
싸움터
은관에 갖은 은장식으로 꾸민 여성들이 언덕에 서서 응원의 함성을 지르는 모습
맞 붙은 소
소싸움 유래담이다.
옥황상제가 우왕(牛王)에게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이 사흘에 한 끼만 먹도록 이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실수로 하루 세 끼를 들게 되었다. 화가 난 상제는 하루 세 끼 먹으면 무엇으로 그 배를 불리겠는가? 꾸짖고, 우성(牛聖)들을 데리고 가 농사를 도우라 하였다. 소 여러 마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양식이 넉넉해지자 사람들은 감사히 여겼다. 어떤 날 들에서 점심을 먹을 때, 풀을 뜯던 소들이 산비탈로 뛰어올라가 다른 소들과 싸움을 벌였다. 이를 말리던 한 노인이 밥 광주리를 엎는 바람에 흙밥이 되자, 옥황상제의 뜻으로 알고 소에게 주었다. 이날이 4월 8일이었다. 이날 하루 소를 놀리려고 싸움을 붙였다. 단풍나뭇잎으로 찐 검은 찹쌀밥을 주먹처럼 빚어, 소에게 먹이는 풍속도 이때부터 생겼다.
호남 · 귀주 · 광서성 경계의 동족(侗族)이 해마다 2월과 8월의 돼지날 벌이는 소싸움은 더욱 극적이다. 이들은 싸움 소를 우왕(牛王) · 진천왕(震天王) · 철두왕(鐵頭王) · 검대왕(黔大王) 등으로 부르며 “마주치면 번개나 우레 같고, 싸우면 관운장의 힘을 낸다.”는 글과 이름을 적은 패를 목에 채운다. 싸움 소는 절대로 부리지 않으며, 특별한 먹이를 주며 돌본다.
이곳 소싸움은 7세기 전부터 벌였다. 『당토훈몽도회(唐土訓蒙圖滙)』에 투우도가 있으며(권 6), 청대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이렇게 적혔다.
이곳 소싸움은 7세기 전부터 벌였다. 『당토훈몽도회(唐土訓蒙圖滙)』에 투우도가 있으며(권 6), 청대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이렇게 적혔다.
늘 소싸움을 즐긴다. 비싼 값에 큰 소를 사서 잘 먹여 살찌운 다음, 겨울에 날을 받아 싸움을 붙인다. 백 · 천 마리가 뛰고 달리고 뿔을 휘둘러서 승패를 지어야 끝낸다. 사람들은 이긴 소 뿔에 붉은 댕기를 걸어주며, 술을 마시고 피리에 맞추어 춤춘다. 진 소는 잡아먹는다.
이후 300여 년 동안, 싸움 규칙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승부 짓기는 1949년부터 달라졌다. 옛적에는 이긴 소가, 달아나는 상대를 좇아서 큰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야 끝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도록 승부가 나지 않으면 비긴 것으로 하며, 수십여 명이 달려들어 소 다리에 줄을 걸어 따라가지 못하게 막는다. 이로써 소가 죽지 않게 되고, 마을 사이의 분쟁도 사라졌다. 그 결과 사람이 소싸움에 가담하는 꼴이 되었고, 사람과 소 사이에 끌고 당기기가 벌어져서 흥미가 더해졌다.
이긴 소 다리에 줄을 걸고 당기는 사람들
소싸움을 위한 금기 이다. 싸움 전 날 돼지를 잡거나 나무를 패지 않았고, 천을 짜거나 깁는 일도 삼갔다. 외양간에 보릿대와 종려잎으로 꼰 줄을 둘러서 잡귀를 막았다. 밤새 소를 지키는 청년들은 자정에 북을 쳐서 기세를 올렸고, 첫닭이 울 때 고함을 세 번 질러 소의 힘을 북돋우었다. 또 나무 그릇에 우렁이 두 마리와 은 귀고리 두 개를 넣고 노래를 부르며, 달아나는 쪽의 방향을 보고 승패도 점쳤다.
날이 밝으면 포를 세 번 쏘아 기세를 올린 뒤, 덕망 높은 이가 소를 끌어내어 영기(令旗)를 매달고 방울을 채운다. 북과 피리가 앞서고, 소 뒤로 채색기를 든 응원군이 따른다. 각 마을 소가 싸움터로 모이면, 북 · 징 · 노생의 울림과 사람들의 고함이 천지에 진동한다. 싸움이 시작되고 소들이 뿔 질을 해 대자, 번쩍번쩍 불꽃이 인다. 뿔에 쇠집을 씌워놓은 까닭이다. 철두왕이라는 이름은 이에서 왔다. 이긴 소에 사람마다 붉은 천을 감아 주고 술도 뿌린다.
이긴 쪽 색시들은 진 쪽 마을의 오색기를 모두 거두었다가, 며칠 뒤 돌려준다. 기를 찾으러 간 청년들은 그네들에게 음식을 열심히 베풀고 이때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진다. 투우절은 동족 젊은 남녀를 위한 사랑의 명절이기도 한 것이다.
한대의 전돌(彫塼)에 소와 사람이 겨루는 모습을 새긴 것이 있다. 사람이 탈을 쓴 것으로 미루어 실제 싸움이 아니라, 공연 장면인 듯 하다. 그리고 맨 얼굴로 싸우는 모습은 당시에 소싸움이 크게 유행한 사실을 알려 준다.
날이 밝으면 포를 세 번 쏘아 기세를 올린 뒤, 덕망 높은 이가 소를 끌어내어 영기(令旗)를 매달고 방울을 채운다. 북과 피리가 앞서고, 소 뒤로 채색기를 든 응원군이 따른다. 각 마을 소가 싸움터로 모이면, 북 · 징 · 노생의 울림과 사람들의 고함이 천지에 진동한다. 싸움이 시작되고 소들이 뿔 질을 해 대자, 번쩍번쩍 불꽃이 인다. 뿔에 쇠집을 씌워놓은 까닭이다. 철두왕이라는 이름은 이에서 왔다. 이긴 소에 사람마다 붉은 천을 감아 주고 술도 뿌린다.
이긴 쪽 색시들은 진 쪽 마을의 오색기를 모두 거두었다가, 며칠 뒤 돌려준다. 기를 찾으러 간 청년들은 그네들에게 음식을 열심히 베풀고 이때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진다. 투우절은 동족 젊은 남녀를 위한 사랑의 명절이기도 한 것이다.
한대의 전돌(彫塼)에 소와 사람이 겨루는 모습을 새긴 것이 있다. 사람이 탈을 쓴 것으로 미루어 실제 싸움이 아니라, 공연 장면인 듯 하다. 그리고 맨 얼굴로 싸우는 모습은 당시에 소싸움이 크게 유행한 사실을 알려 준다.
한국의 소싸움 중심지는 경상남도이며, 경상북도 · 경기도 ·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도 벌였다. 농촌에서는 흔히 백중에 머슴들끼리 싸움을 붙여서 마을 대표를 정하고, 한가위에 우승자를 가렸다.
싸움 날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머리를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동이며, 목에 큰 방울을 매단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비껴 동인 소 임자는, 오른편 허리에 긴 수 주머니를 차고 소와 함께 싸움터로 간다.
싸움터에서는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는 풍물패들이 가락을 울려 흥을 돋운다. 소싸움을 주관하는 도감이 비슷한 것끼리 짝을 짓는다. 그의 호명에 따라 주인과 소가 들어서고, 소와 소 사이에 쳐두었던 장막을 거두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면 진다. 싸우지 않고 모래만 차올리며 시간을 끄는 소가 있어, 소주 한 병(1.8리터)을 입에 부어 넣기도 한다. 여러 마리를 한 소에 차례로 붙일 때는 시간을 정하지만, 단판이면 승패가 날 때까지 기다린다. 이긴 소 목에 우승기를 걸어준 주인은, 소 등에 올라앉아 거리를 돈다.
1963년 7월(음력),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50원을 내고 소싸움을 보았다. 바닥에 모래를 깔고 주위에 새끼줄을 둘렀으며, 가운데에 검은 포장을 쳤다. 소마다 마을 이름을 적은 종이를 둘러 감아놓았다. 다섯 마리의 소가 이어 붙었다. 만약 싸우던 소가 죽으면 마을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이 관례이다. 이를 ‘가수압’(뜻모름)이라 한다.
우리 소싸움은 경상남도 진주시 한국투우협회가 주관한다. 1992년에 21회를 치렀다. 개천 예술제 때 경상북도와 전라남도 등지에서 80여 마리가 모여든다. 싸움 방법은 목치기 · 뿔치기 · 날치기 · 옆치기 · 밀치기 등이다. 소는 급에 따라 범소 · 사자소 · 씩소로 구분한다. 하루 4킬로미터 산보에, 두 차례 목욕을 시키고 다리도 주물러 준다. 콩 · 호박 · 좁쌀 · 쌀겨 따위로 쑨 두레 죽 외에, 인삼 · 개고기 · 미꾸라지 등을 먹인다. 한국투우협회장 김재윤은 서울 한강 가에서 소 싸움을 여는 것이 온 회원의 꿈이라고 하였다.
싸움 날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머리를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동이며, 목에 큰 방울을 매단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비껴 동인 소 임자는, 오른편 허리에 긴 수 주머니를 차고 소와 함께 싸움터로 간다.
싸움터에서는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는 풍물패들이 가락을 울려 흥을 돋운다. 소싸움을 주관하는 도감이 비슷한 것끼리 짝을 짓는다. 그의 호명에 따라 주인과 소가 들어서고, 소와 소 사이에 쳐두었던 장막을 거두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면 진다. 싸우지 않고 모래만 차올리며 시간을 끄는 소가 있어, 소주 한 병(1.8리터)을 입에 부어 넣기도 한다. 여러 마리를 한 소에 차례로 붙일 때는 시간을 정하지만, 단판이면 승패가 날 때까지 기다린다. 이긴 소 목에 우승기를 걸어준 주인은, 소 등에 올라앉아 거리를 돈다.
1963년 7월(음력),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50원을 내고 소싸움을 보았다. 바닥에 모래를 깔고 주위에 새끼줄을 둘렀으며, 가운데에 검은 포장을 쳤다. 소마다 마을 이름을 적은 종이를 둘러 감아놓았다. 다섯 마리의 소가 이어 붙었다. 만약 싸우던 소가 죽으면 마을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이 관례이다. 이를 ‘가수압’(뜻모름)이라 한다.
우리 소싸움은 경상남도 진주시 한국투우협회가 주관한다. 1992년에 21회를 치렀다. 개천 예술제 때 경상북도와 전라남도 등지에서 80여 마리가 모여든다. 싸움 방법은 목치기 · 뿔치기 · 날치기 · 옆치기 · 밀치기 등이다. 소는 급에 따라 범소 · 사자소 · 씩소로 구분한다. 하루 4킬로미터 산보에, 두 차례 목욕을 시키고 다리도 주물러 준다. 콩 · 호박 · 좁쌀 · 쌀겨 따위로 쑨 두레 죽 외에, 인삼 · 개고기 · 미꾸라지 등을 먹인다. 한국투우협회장 김재윤은 서울 한강 가에서 소 싸움을 여는 것이 온 회원의 꿈이라고 하였다.
일본 소싸움의 본거지는 에히메현과 오키나와 열도이다. 오키나와 투우조합연합회에서는 달마다 두 세 번씩, 소규모 조합끼리의 싸움을 붙인다. 봄(5월), 가을(11월)에 열리는 전도(全島) 대회에서는 열 쌍쯤 겨룬다. 곁에서 고함을 지르는 주인의 부추김과, 북과 징 그리고 응원단의 함성이 어우러지면서 싸움은 절정에 이른다.
오키나와의 소싸움
싸움소
에히메현에서는 싸움이 가까워지면 뿔을 칼이나 끌로 날카롭게 갈며, 살모사가루 · 마늘 · 날 달걀 따위를 먹인다. 상금은 이긴 쪽이 3, 진 쪽이 7의 비율로 받는다. 진소는 상품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긴 쪽은 소의 급수에 따라 적게는 백 만엔에서, 크게는 사백 만엔을 들여 자축연을 베푸는 것이 관례이다. “소 한마리를 기르면 곳간 한 채 없어진다.”는 옛말은 이에서 나왔다.
싸움은 걸기 · 찢기 · 배째기가 기본이다. 걸기는 뿔로 상대를 쓰러뜨린 뒤 목을 조르는 재간이고, 찢기는 상대 얼굴을 뿔로 찢어 젖히는 기술이다. 이에는 정면 찢기와 측면 찢기 두 가기가 있다. 배 째기는 뿔을 맞대자마자, 상대 옆구리를 찢는 공격법으로, 단기전에 능한 소가 잘 쓴다.
오키나와 나하시의 투우장은 1만여 명이 들어가는 규모이다. 싸움터의 지름은 18미터이며, 주위에 높이 1.5미터의 철책을 둘렀다. 입장료는 3,000엔(1991년)으로, 보통 4,000~5,000명이 모여든다. 소는 일본 씨름 선수 이름을 따라 챔피언을 ‘요코쓰나(橫繩)’, 버금급을 ‘오제키(大關)’ 따위로 부른다. 적어도 10~15번 우승해야 요코쓰나가 되며, 값은 600만~1,000만 엔이다(1991년).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요코쓰나 자리를 지켰던 소는 44회 이어 이겼다.
싸움은 걸기 · 찢기 · 배째기가 기본이다. 걸기는 뿔로 상대를 쓰러뜨린 뒤 목을 조르는 재간이고, 찢기는 상대 얼굴을 뿔로 찢어 젖히는 기술이다. 이에는 정면 찢기와 측면 찢기 두 가기가 있다. 배 째기는 뿔을 맞대자마자, 상대 옆구리를 찢는 공격법으로, 단기전에 능한 소가 잘 쓴다.
오키나와 나하시의 투우장은 1만여 명이 들어가는 규모이다. 싸움터의 지름은 18미터이며, 주위에 높이 1.5미터의 철책을 둘렀다. 입장료는 3,000엔(1991년)으로, 보통 4,000~5,000명이 모여든다. 소는 일본 씨름 선수 이름을 따라 챔피언을 ‘요코쓰나(橫繩)’, 버금급을 ‘오제키(大關)’ 따위로 부른다. 적어도 10~15번 우승해야 요코쓰나가 되며, 값은 600만~1,000만 엔이다(1991년).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요코쓰나 자리를 지켰던 소는 44회 이어 이겼다.
이긴 소가 받은 여러 가지 상패
500여 호로 이루어진 한 마을(具志川市 字赤野)에 20마리의 싸움 소가 있다. 한 집에서 다섯 마리, 나머지는 아홉 집에서 키운다. 다섯 마리의 주인 고지마(小島)는 한 마리에 하루 달걀 노른자 열 개씩 먹이고, 2킬로미터의 산보를 시킨다. 이들은 사탕수수를 옮길 때만 부리고 평소에는 놀린다. 싸움 열흘 전부터 먹이와 산보 양을 줄이다가, 2~3일 앞두고 마사지를 해준다. 의례는 따로 없으며, 집 안 불단(佛壇) 앞에서 “조상님 우리 소 잘 돌보아 주십시오.” 축원한다.
옛적 농촌 마을 소싸움 때는 시간 제한이 없어 횃불을 밝혀 들고 밤늦게까지 벌였다. 소가 밀리는 듯싶으면, ‘와비’(사과한다는 뜻)라 하여, 주인이 머리에 썼던 수건을 던져서 중단시켰다. 싸움에 죽은 소는 각 집에 돌렸고, 이를 받은 집에서 얼마씩 돈을 내었다. 『남도잡화(南島雜話)』에도 나오미(奄美) 대도(大島)에서 8월 15일의 축제나 9월 9일의 중양절에 벌이는 소싸움에서 진 소를 잡았다는 내용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정부에서 축산 장려책으로 소싸움을 부추겨서 성황을 이루었다.
옛적 농촌 마을 소싸움 때는 시간 제한이 없어 횃불을 밝혀 들고 밤늦게까지 벌였다. 소가 밀리는 듯싶으면, ‘와비’(사과한다는 뜻)라 하여, 주인이 머리에 썼던 수건을 던져서 중단시켰다. 싸움에 죽은 소는 각 집에 돌렸고, 이를 받은 집에서 얼마씩 돈을 내었다. 『남도잡화(南島雜話)』에도 나오미(奄美) 대도(大島)에서 8월 15일의 축제나 9월 9일의 중양절에 벌이는 소싸움에서 진 소를 잡았다는 내용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정부에서 축산 장려책으로 소싸움을 부추겨서 성황을 이루었다.
인도네시아의 소싸움은 자바 동쪽 본도보소에만 남아 있다. 발리 덴파사에서 새벽 4시에 떠나, 5시간이나 차를 달렸다. 해거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싸움터는 스페인의 투우장 그대로였다. 사진을 찍으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막았다. 심판도 소에 받혀 죽었다는 것이다. 승강이 끝에 투우협회 부회장 마르틴이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그는 군복무 시절인 1967년, 축구 선수로 뽑혀 우리 나라에도 왔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쉰셋의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에, 이도 쪽 고르게 난 미남자였다.
본도보소에서는 마을 단위로 승패를 가르고, 연말에 우승자를 정한다. 시간은 1시간이며, 한 마리는 한 해 16번쯤 싸운다. 정강이가 길고 목의 힘줄이 뚜렷하며, 주둥이가 삐죽 나오고 폐활량이 큰, 세 살에서 아홉 살배기가 뛰어나다. 이들에게 달걀에 커피를 섞어 먹이고, 콩도 자주 준다.
소는 무게를 달지 않고 심판의 눈대중에 따라 대 · 중 · 소로 나눈다. 전에는 700호쯤 되는 마을에 20~30마리의 싸움소가 있었고, 마을마다 한 해 세 번 붙였다. 결승전은 추수 뒤에 벌였으며 주인은 적지 않은 상금을 받았다. 3~4년 챔피언 자리를 지키는 일등 소는 500만 원(우리 돈)이다. 1930년 투우장 건설과 함께 근대적인 규칙을 적용하며, 일주일에 두 번, 하루 8회전 치른다.
싸움터는 스페인의 투우장 그대로였다. 사진을 찍으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막았다. 심판도 소에 받혀 죽었다는 것이다. 승강이 끝에 투우협회 부회장 마르틴이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그는 군복무 시절인 1967년, 축구 선수로 뽑혀 우리 나라에도 왔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쉰셋의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에, 이도 쪽 고르게 난 미남자였다.
본도보소에서는 마을 단위로 승패를 가르고, 연말에 우승자를 정한다. 시간은 1시간이며, 한 마리는 한 해 16번쯤 싸운다. 정강이가 길고 목의 힘줄이 뚜렷하며, 주둥이가 삐죽 나오고 폐활량이 큰, 세 살에서 아홉 살배기가 뛰어나다. 이들에게 달걀에 커피를 섞어 먹이고, 콩도 자주 준다.
소는 무게를 달지 않고 심판의 눈대중에 따라 대 · 중 · 소로 나눈다. 전에는 700호쯤 되는 마을에 20~30마리의 싸움소가 있었고, 마을마다 한 해 세 번 붙였다. 결승전은 추수 뒤에 벌였으며 주인은 적지 않은 상금을 받았다. 3~4년 챔피언 자리를 지키는 일등 소는 500만 원(우리 돈)이다. 1930년 투우장 건설과 함께 근대적인 규칙을 적용하며, 일주일에 두 번, 하루 8회전 치른다.
우승소(인도네시아)
이긴 소 등에 올라서서 거리를 도는 소주인
싸움 상대는 주인이 고른다. 30분쯤 지나 호명에 따라 두 마리의 소가 경기장으로 들어온다. 한 아가씨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돋운다. 돈을 내고 들어온 관객들도 울 밖에서 떠들며 돈을 걸기도 한다.
심판은 두 사람. 소들은 마주서자마자 붙는다. 머리를 대고 겨루더니, 한 쪽이 슬쩍 비키면서 목덜미를 받는다. 피가 뚝뚝 흐른다. 이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심판들이 이긴 소 발에 밧줄을 걸어 당겨서 좇지 못하도록 막는다. 두 소는 모두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서, 10여 명이 달려들어도 힘이 달린다. 사람들의 함성이 터지고, 마이크에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긴 소 뿔에 붉은 수건을 동여주는 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분에 못 이긴 소가 심판에게 달려든다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쫓긴 심판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울타리 위로 기어오르는 소동이 벌어졌다. 소는 씩씩거리며 한동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망원 렌즈를 썼다.
인도네시아의 소싸움 유래담이다.
심판은 두 사람. 소들은 마주서자마자 붙는다. 머리를 대고 겨루더니, 한 쪽이 슬쩍 비키면서 목덜미를 받는다. 피가 뚝뚝 흐른다. 이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심판들이 이긴 소 발에 밧줄을 걸어 당겨서 좇지 못하도록 막는다. 두 소는 모두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서, 10여 명이 달려들어도 힘이 달린다. 사람들의 함성이 터지고, 마이크에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긴 소 뿔에 붉은 수건을 동여주는 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분에 못 이긴 소가 심판에게 달려든다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쫓긴 심판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울타리 위로 기어오르는 소동이 벌어졌다. 소는 씩씩거리며 한동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망원 렌즈를 썼다.
인도네시아의 소싸움 유래담이다.
600여 년 전 자바 왕이 서 스마트라에 항복을 요구하자, 소싸움으로 결판내자는 제안이 왔다. 자바 소가 이기면 손을 든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스마트라의 소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자바 소 배 밑으로 뛰어들어 뿔로 받았다. 견디다 못해 피를 흘리며 달아났지만, 작은 소가 끝까지 따라 붙어 결국 죽고 말았다. 작은 소가 이긴 것은 사흘 동안 굶긴 뒤, 뿔에 끝이 날카로운 쇠집을 씌웠기 때문이다. 어린 소는 상대의 젖을 먹으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중국 서남부 지역에서처럼 뿔에 철물을 씌웠다는 점은 흥미롭다.
소싸움은 풍년의례 때 소를 신에게 바친 데에서 나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제물로 바칠 소를 고르는 행사로 여기며, 진 소의 희생이야말로 신의 뜻이라 믿는다. 중국 · 일본 · 인도네시아계 주민이 이주한 마다가스칼 섬에서는 싸움에 진 소를 잡아먹는다. 우리도 옛적에 진 소를 백정에게 팔아 넘겼고, 함경북도 북청에서는 진 소를 그 자리에서 구워먹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의 먀오족은 두 소 모두 제물로 바쳤다.
이러한 점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에서 해마다 줄다리기와 함께 벌이는 나무소싸움은, 농가의 귀중한 재산인 소의 손실을 막기 위해 고안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근래 중국에서 좇는 소의 뒷다리에 줄을 걸어 죽음을 막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에서 해마다 줄다리기와 함께 벌이는 나무소싸움은, 농가의 귀중한 재산인 소의 손실을 막기 위해 고안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근래 중국에서 좇는 소의 뒷다리에 줄을 걸어 죽음을 막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 소싸움놀이의 민속적 고찰(한국민속학32, 한국민속학회, 2000),
- 소에 얽힌 민속(배도식, 민속학연구2, 국립민속박물관, 1995),
- 한국민속의 원형(집문당, 1995).
- 소싸움 [斗牛]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 소싸움 (두산백과)
- 소싸움의 변화와 그 원인에 대한 고찰-마을공동체적 성격과 놀이 원리를 중심으로, 1995년
- [네이버 지식백과] 소싸움 (한국세시풍속사전)
- 2001년, 『우리 문화가 온 길』, 민속원
- 1964년, 「소싸움놀이」 『조선의 민속놀이』, 군중 문화 출판사
- 1992년, 『中國民族節日大全』, 知識出版社
- 1990년, 『中華傳統遊戱大典』, 農村讀物出版社
- 1985년, 『中國南部少數民族誌』, 三和書房,
- 宮田登 · 馬興國 編, 1998년, 『日中文化交流叢書』 (5) 民俗, 大修館書店
- 石井浩一, 1997년, 「鬪牛の社會的機能」, 『한 · 일 비교민속놀이론』, 민속원
- [네이버 지식백과] 소싸움 (동아시아의 놀이,)
- 소싸움놀이 (체육학대사전, 200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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