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경복궁 자경전,.

경복궁 자경전,[ Gyeongbokgung Jagyeongjeon ,  殿 ]


경복궁 자경전, 굴뚝 십장생,<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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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대비들의 침전으로, 1867년(고종 4) 자미당 터에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전각이었으나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에 중건되었다. 경복궁 관리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보물 제809호. 자경전(殿)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가 건축되었고, 연이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이 건축되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재건의 제2단계 조영() 때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 신정왕후()를 위하여 옛 자미당() 터에 지은 연침( :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 건물이다.
동행각(), 남행각(), 북행각() 등의 부속건물과 일곽을 이루고 건립되었으나, 두 번에 걸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년(고종 2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전각의 주평면()은 교태전(殿)과 같은 침전이 이루는 기본적인 것으로,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대청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 그리고 그 측면으로 누마루를 두었으며, 이들의 앞면과 뒷면으로는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 : 대접받침)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 두 개를 내어 이익공()으로 꾸몄다.
쇠서〔〕와 보머리〔〕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된 첨차()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끝이 초각된 쇠서모양의 부재를 화반 대신 두 개씩 얹어두었다.
가구()는 앞면의 퇴주(退)와 안쪽의 고주() 사이에는 퇴보〔退〕를 걸고 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높이에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정면의 중앙 세 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여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과 담장에는 여러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그 꾸밈이 매우 아름답고, 특히 북행각에 이어져 있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굴뚝은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 자경전의 북쪽과 서쪽 담 내벽, 그리고 서쪽 담 외벽은 우리 전통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담(화문장 花紋墻)으로 꼽히지요. 그중 북쪽 꽃담 중앙에 붙여 장대석 기단을 놓고 붉은 전돌을 쌓아 벽이 튀어나온 것처럼 꾸민 굴뚝입니다.
대원군이 신정왕후 조 대비를 위해 지어 바친 전각이 자경전이라는 내력은 앞서 말씀드렸고요, 꽃담과 굴뚝 역시 조 대비를 위로하고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공들여 꾸민 것이지요. 자경전은 1867년 처음 지었다가 불탄 뒤 1888년 고종 다시 세웠는데요,
굴뚝도 그때 다시 만든 것으로 짐작합니다. 비와 눈에 침식되지 않도록 위에 지붕을 올리고 사람들 손을 타지 않게 울타리를 둘렀습니다.​

자경전 온돌방들에서 연기를 빼내는 길, 연도(煙道) 10개를 뒷마당 땅밑으로 놓아​ 이렇게 넓은 굴뚝 하나에 모은 
아이디어가 절묘합니다. 위에 나란히 얹은 연기 의 출구, 연가(煙家)가 10개이듯, 굴뚝 벽 안에 10개의 가는 굴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1985년 같은 날 함께 보물(811호)로 지정된 교태전 아미산 굴뚝과 여러모로 비교가됩니다,
둘 다 조형미가 빼어나고 개성이 뚜럿해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이 십장생 굴뚝이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는 듯합니다.

굴뚝 크기는 가로 381cm, 세로 236cm, 두께 65cm이고 가운데 주문양판만 따지면 가로 302cm, 세로 88cm입니다. 주문양판 회벽에는 다양한 형상을 흙으로 빚은 소조편(塑造片)을 붙여 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아미산 굴뚝과 달리 우리 전통 모르타르인 삼화토를 일절 쓰지 않고 전돌을 차곡차곡 포개 쌓아 올린 것도 눈에 띕니다.​​​​ 굴뚝 벽체 위로는 우리 전통 목조건축을 흉내 내소로 도리 장혀를 차례대로 올리고 서까래와 추녀도 만든 뒤 기와지붕을 얹었습니다. 맨 위에 솟은 연기 배출구는 기와를 굽듯 구워 만든 일종의 특수 기와인데, 하나하나가  작은 집 모양이어서 연기의 집, 연가(煙家)라고 부릅니다.



벽체 윗부분에 끼워넣은 ​부조 전돌 셋부터 들여다 보면 가운데는 나티라고도 부르는 귀면상입니다.
전돌 한 장을 큼직하게 빚고 귀면을 돋을새김해 구워낸 뒤 붉은 전돌들 사이에 끼워맞춘 것이지요.
귀면은 삿된 기운을 쫓아내는 벽사(僻邪)의 상징으로 절에서 더 많이 자주 볼 수 있는 불교적 형상입니다.
괴기스러운 중국 귀면과 달리 매우 인간적이고 해학적이며 이곳 귀면상도 교태전 아미산 굴뚝 귀면과 거의 같습니다만
보다 더 섬세합니다. 아래 교태전 귀면과 비교해 보시면 차이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귀면 양쪽에는 학 무늬 전돌, 학문전(鶴紋塼)이 대칭되게 귀면을 향해 고개를 돌려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사물 십장생 중에 하나, 학이 역시 십장생에 꼽히는 불로초(영지)를 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왼쪽에 소나무, 오른쪽에 연꽃, 포도나무가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 위쪽 구름 위로 반쯤 떠오른 해가 인상적이며 나머지 여백은 다양한 장생과 축원 상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경전 굴뚝을 십장생 굴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 담긴 십장생 때문입니다. 살펴보면 십장생 말고도 여러 상징들이 새겨져 있지요. 십장생이라면 보통 해 달 산 내(川) 대나무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불로초(草/ 영지 )를 꼽고
해 돌 산 물 구름 소나무 대나무 거북 학 불로초를 꼽기도 하는데,​ 그밖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맨 왼쪽 첫머리부터 십장생 아닌 게 나옵니다. 커다란 소나무 왼쪽 아래 바위에서 솟아난 꽃, 국화입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 은일(隱逸)과 고결한 기상을 상징하지요. 국화 옆 소나무부터 오른쪽 대나무까지 문양판 3분의 2쯤에는 딱 하나만 빼고 여러 십장생 상징들이 모여 있습니다. 소나무 대나무부터가 십장생이고요, 사슴 거북 학 구름 해 돌, 그리고 사이사이 버섯 모양을 한 불로초가 돋아 있지요. 해, 산, 물, 바위는 장수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고 학은 실제 수명이 80~100년, 거북은 100년, 소나무는 천년도 넘습니다그런데 20~25년 사는 사슴, 금방 흩어져 버리는 구름이 십장생에 들어간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우선 사슴은 은밀한 곳에서 고고한 자태로 사는 모습이 선경을 노니는 신선을 연상시키고, 중국 신선 이야기 '팔선열전()'에 나오는 사슴 이야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당나라 현종이 사냥을 나가 큰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요리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여덟 신선의 한 사람인 장과로가 이 사슴은 천 년 넘은 선록(鹿)이고 한()나라 때 자기가 무제()와 함께 잡았다가 놓아준 바로 그 사슴이라고 말립니다.
그러면서 그때 달아둔 패찰을 왼쪽 뿔 밑에서 찾아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래쪽에 기어가는 거북 두 마리가 입에서 뭔가를 길게 토해내고 있습니다??? 


앞 교태전 대청 뒤쪽 창호문에서 봤던 십장생도에서도 거북이 무언가를 뿜어내는데요, 신령한 동물이 내뿜는 상서로운 기운, 서기(瑞氣)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학이 나는 좌우 하늘에 구름이 떠 다닙니다. 구름은 그 자체로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로 여겼기에 죽지 않는 영생불사의 상징에 꼽힙니다. 땅에서 하늘나라에 오르는 탈것이기도 했고요.구름 운()자는 발음이 운세 운()과 같아 길운()의 의미도 지닙니다. 도판 중간 아래로는 영지(불로초)가 돋아 있습니다.영지(靈芝)는 글자 그대로는 '신령스러운 풀'이라는 뜻입니다. 실제 버섯 이름이기도 하면서 보통명사이기도 하지요 진시황의 명으로 서복이 봉래산에서 영지를 캐왔다는 전설부터 난세를 피해 상산()에 들어가 영지를 캐 먹으며 장생했다는 동원공·하황공 이야기까지 수많은 글이 영지를 장생 반열에 오르게 했습니다.​ 


떠오르는 해는 물론 장생불사의 상징이고요, 궁궐에서는 임금 또는 왕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아래 나는 것은 분명 학이고요,
또 그 아래 땅에 서 있는 것도 학일까요. 십장생도를 비롯한 여러 전통 회화에서 학은 하늘을 날거나 높은 소나무 가지에 앉은 고결한 모습으로 표현되기에 학이 아니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어느 자료에 백로라는 대목이 있던데 백로가 고결하고 청렴한 선비를 상징하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나무는 십장생에 꼽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지만 십장생이라고 대나무를 경계선 삼아 오른쪽에는 십장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판 오른쪽 3분의 1은 대나무, 연꽃, 포도나무가 차지했고 동물은 딱 한 가지, 새 있습니다.
먼저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면서도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 오래 전부터 사랑 받아 왔습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부처의 탄생부터 극락까지를 상징하는 대표적 꽃이지요.대부분 식물이 꽃 지고 열매 맺는 것과 달리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고 영글기에 '연이어 귀한 자식을 낳으라(연생귀자 連生貴子)'는 축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잇닿을 連과 연꽃 蓮의 발음이 같다는 점도 한몫 했고요.

봉오리부터 활짝 핀 연꽃, 꽃 지고 남은 연밥, 방석처럼 넓은 연잎, 아래로 뒤집힌 연잎까지 다채로운
모습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연꽃 위아래로 세 쌍의 새가 날거나, 앉거나, 떠 있습니다. 오른쪽 위 연꽃 가지에 마주보며 날아드는 한 쌍, 아래쪽 연 줄기에 앉은 한 쌍, 그리고 연못에 떠 있는 한 쌍입니다. 그렇듯 쌍조(雙鳥)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고요, 특히 물 위에 떠서 눈을 맞추고 있는 원앙은 잘 아시듯 부부애, 금슬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맨 오른쪽 포도나무를 봅니다.  잎과 포도까지 매우 크고 풍성하게 표현해 이 도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상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포도는 무엇보다 한 가지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손이 많은 다자(多子)를 상징입니다.끝없이 뻗어나가는 덩굴식물이어서 끊임없는 영속성도 상징하고요,
 

그래서 이렇게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를 덩굴째 표현한 형상은 자손이 만대에 걸쳐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지요덩굴은 한자로 만대()라 쓰기에 같은 발음인 만대()의 의미를 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포도 그림을 집 안에 두거나 포도 모양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어 몸에 지니면 가문이 번창하고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십장생 외 다섯 가지를 포함해 모두 열다섯 상징을 봤습니다. 어떤 분은 복숭아도 있다고 하던데 저는 못 찾겠습니다.^^;;  도판 아래 쪽엔 아미산 굴뚝에서도 익히 봤던 불가사리를 전돌로 구워 양쪽에 끼워 넣었습니다. 액자처럼 긴 전돌로 변죽을 두르고 움푹 들어간 감실을 꾸며 불가사리 전돌을 넣은 것이 독특합니다.
 

불가사리는 불을 막는 상상 속 동물이어서 크게 보아 위쪽 귀면처럼 삿된 기운을 쫓는 벽사상(僻邪像)에 속하지요. 담 앞으로 60cm쯤 튀어나온 굴뚝의 옆면도 그냥 비워둘 리가 없습니다.​ 한쪽으로 긴 회벽에우아한 당초무늬 소조편을 붙였고, 위에는 복과 부귀()의 상징 박쥐를 새긴 전돌을 맞춰 넣었습니다. 반대편 오른쪽도 대칭되게 꾸몄습니다.​ 짝날개를 편 박쥐가 원투 스트레이트를 연달아 날리는 듯합니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사물 십장생 중에 하나, 학이 역시 십장생에 꼽히는 불로초(영지)를 물고 있습니다.​

 

문양을 전체적으로 보면 왼쪽에 소나무, 오른쪽에 연꽃, 포도나무가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 위쪽 구름 위로 반쯤 떠오른 해가 인상적입니다. 나머지 여백은 다양한 장생과 축원 상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경전 굴뚝을 십장생 굴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 담긴 십장생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십장생 말고도 여러 상징들이 새겨져 있지요. 십장생이라면 보통 해 달 산 내(川) 대나무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불로초(草/ 영지 )를 꼽고 해 돌 산 물 구름 소나무 대나무 거북 학 불로초를 꼽기도 하는데요. 그밖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십장생 굴뚝이라는 이름은 편의상 문화재에 붙인 명칭일 뿐 이 귀한 굴뚝의 진면목을 두루 아우르는 이름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수는 물론, 갖가지 상서로운 상징 길상(吉祥)과 사악한 기운과 불을 막는 벽사까지 망라돼 있기 때문이지요. 문화재청 자료의 결론을 인용하며 자경전 굴뚝.^^*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돼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쪽으로 긴 회벽에 우아한 당초무늬 소조편을 붙였고,
 

자경전은 대비전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연침 건물이라는 데에 그 역사적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참조항목

카테고리

  • 문화예술 > 건축 > 각종 건축물 > 궁(궁전)
  •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 문화유적 > 한국 > 보물 > 서울특별시

  • 출처 & 참고문헌
  • 경복궁 자경전 [Gyeongbokgung Jagyeongjeon, 景福宮 慈慶殿] (두산백과)
  • 경복궁 자경전 [景福宮慈慶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의 고궁건축』(신영훈 외, 열화당, 1988)
  • 『국보』 11-궁실건축-(신영훈 편, 예경산업사, 1985)
  • 『한국건축미』(주남철, 일지사, 1983)
  • 문화재청(www.cha.go.kr)


    • 경복궁 자경전, 굴뚝 십장생,
      자경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대비들의 침전으로, 1867년(고종 4) 자미당 터에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전각이었으나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에 중건되었다. 경복궁 관리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보물 제809호. 자경전(殿)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가 건축되었고, 연이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이 건축되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재건의 제2단계 조영() 때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 신정왕후()를 위하여 옛 자미당() 터에 지은 연침( :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 건물이다.
      동행각(), 남행각(), 북행각() 등의 부속건물과 일곽을 이루고 건립되었으나, 두 번에 걸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년(고종 2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전각의 주평면()은 교태전(殿)과 같은 침전이 이루는 기본적인 것으로,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대청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 그리고 그 측면으로 누마루를 두었으며, 이들의 앞면과 뒷면으로는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 : 대접받침)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 두 개를 내어 이익공()으로 꾸몄다.
      쇠서〔〕와 보머리〔〕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된 첨차()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끝이 초각된 쇠서모양의 부재를 화반 대신 두 개씩 얹어두었다.
      가구()는 앞면의 퇴주(退)와 안쪽의 고주() 사이에는 퇴보〔退〕를 걸고 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높이에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정면의 중앙 세 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여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과 담장에는 여러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그 꾸밈이 매우 아름답고, 특히 북행각에 이어져 있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굴뚝은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 자경전의 북쪽과 서쪽 담 내벽, 그리고 서쪽 담 외벽은 우리 전통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담(화문장 花紋墻)으로 꼽히지요. 그중 북쪽 꽃담 중앙에 붙여 장대석 기단을 놓고 붉은 전돌을 쌓아 벽이 튀어나온 것처럼 꾸민 굴뚝입니다.
      대원군이 신정왕후 조 대비를 위해 지어 바친 전각이 자경전이라는 내력은 앞서 말씀드렸고요, 꽃담과 굴뚝 역시 조 대비를 위로하고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공들여 꾸민 것이지요. 자경전은 1867년 처음 지었다가 불탄 뒤 1888년 고종 다시 세웠는데요,
      굴뚝도 그때 다시 만든 것으로 짐작합니다. 비와 눈에 침식되지 않도록 위에 지붕을 올리고 사람들 손을 타지 않게 울타리를 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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