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에 딸린 섬.
면적 12.63㎢, 해안선길이 24.7㎞이다. 1999년 12월 말 현재 414세대에 1,11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최고점은 삼각산(343m)이다.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171㎞, 옹진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 거리에 있으며 백령도(白翎島)·소청도(小靑島)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다. 황해도 장산곶과 불과 19㎞ 떨어진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을도(包乙島)였으며, 고려 초기에 대청도(大靑島)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으로는 소청도, 북쪽으로 백령도, 동쪽으로 서해도 옹진군과 마주하고, 서남쪽은 서해에 면한다. 서해도 장산곶과 불과 19km 떨어진 곳으로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주민은 728가구 1,386명, 초등학생 42명, 중학생 16명, 고등학생 30명이 있다. 산지가 많고 농경지는 북부에 조금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주업은 어업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을도(包乙島)였으며, 고려 초기에 대청도(大靑島)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도는 백령도와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그러나 백령도의 유명세에 밀려서 덜 알려진 측면이 많다. 섬의 크기는 백령도의 4분의 1 정도이며 대부분 산지를 이룬다. 대청도는 산이 높아 역동적인 모습의 느낌을 준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1406년(태종 6)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경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었다. 1793년(정조 17) 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었으며, 1799년(정조 23)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섬에 각각 진(鎭)을 설치하였다. 1894년 황해도 장연군에 속하였고, 1928년 백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74년 대청면으로 승격한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이며, 해안선은 대체로 단조롭다. 북쪽은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경지율이 낮아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일부 주민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업하는 전형적인 어촌 지역으로 1980년대 말까지는 홍어잡이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병을 완쾌시켰다는 상기생(桑寄生)을 비롯하여 약초 100여 종이 자라고 있으며, 최북단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청도의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천연기념물 66)이 있다. 유물·유적으로 중국 원나라의 발라태자(勃喇太子)와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가 귀양왔을 때 살았다는 집터로서 거택기(居宅基)와 깨진 기왓장이 남아 있다. 연안부두에서 3종의 쾌속선이 1일 1회 왕복운항한다.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1406년(태종 6)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경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었다. 1793년(정조 17) 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었으며, 1799년(정조 23)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섬에 각각 진(鎭)을 설치했다. 1894년 서해도 장연군에 속했고, 1928년 백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74년 대청면으로 승격한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청도에는 고려 충숙왕 5년(1318) 원나라에서―드라마 기황후에서 순제로 등장하는―발라태자(孛刺太子)를 이곳에 귀양 보냈다가 충숙왕 10년에 소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는 대청(大靑), 소청(小靑) 두 섬을 뭉뚱그려 그냥 청도(靑島), 곧 ‘푸른 섬’이라고 불렀다. 송나라에서 고려에 온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대청서(大靑嶼)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黛)과 같다 하여, 고려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도 이 섬을 ‘푸른 섬’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4년에 간행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포을도(包乙島)’를 청도(靑島)라 했는데 서긍의 글을 옮긴 듯하다.
푸른 섬을 우리 음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쓴 것이 포을도이고, 이것을 다시 뜻에 따라 한자로 기록한 것이 청도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를 지나는 배들이 모두 ‘푸른 섬’이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 또 대청도를 암도(岩島)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대청도의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 대청도는 죄인들의 유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당시 원나라 황실 황태자까지도 유배를 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한 무신 김방경(金方慶)이 모반을 했다는 모함을 받아 이곳에 유배되었던 기록이 있다. 원나라 사례로는 충렬왕 6년 원제(元帝)가 황태자 애아역(愛牙亦)을 대청도로 귀양 보낸 것으로, 그에 관련해서는 1996년에 발간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유배 당시의 궁궐터가 내동초등학교 터였다고 하며 내동(內洞) 지명을 고쳐 장안(長安)으로, 그리고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러 이곳을 자기의 도읍지라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기록이 있다.
섬 둘러보기,
대청도는 백령도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자연을 앞세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우람한 남성적인 모습의 삼각산을 위주로 하여 부드러운 모래 해수욕장과 빼어난 경관을 뽐내는 ‘신이 내린 낙원’이라는 곳이다. 백령도는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이며, 대청도는 농업보다는 어업이 성행한 곳이다. 이웃이지만 서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대청도는 산이 높기에 난공사를 통해 각 마을과 연결된 도로를 잘 만들어 놓았다. 대청도의 일주도로는 전체가 18km밖에 되지 않지만 볼거리가 많아서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대청도 일주 관광코스를 보면 선진포선착장-옥죽포해안가-농여해변-동백나무자생지-자두리해안가-모래울해변-서풍받이-독바위-선진포이다.
섬의 관문 선진포,
대청도는 소청도의 형님뻘 되는 형제 같은 섬이다. 예로부터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던가. 대청도는 소청도보다 면적도 넓고 보고 즐길거리도 많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백령도행 쾌속선을 타고 출항하면 3시간 후에 가장 먼저 소청도에 닿고 이후 15분 정도 더 들어가 대청도를 경유해서 최종목적지인 백령도에는 대청에서 약 20분을 더 가야 한다.
대청도의 관문은 배가 닿는 선진포이다. 배가 닿기 전에 우측으로 보이는 곳이 답동해수욕장이다. 답동이란 식량이 매우 귀하던 시기에 논이 몇 마지기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바로 아래 해변에는 길이가 1km 정도의 완만한 해수욕장이 있어서 피서에 적합하다. 대청도의 선진포 선착장에 내리면 아담한 포구에 수많은 어선들이 출어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은 옛날 이야기이지만 한때 대청도는 서해의 고래잡이 전진 기지였다.
1904년 우리나라 어업권을 침탈한 일본이 대청도 선진포에 들어와 서해상에서 고래를 잡았다. 당시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은 일본이 독점했고 지금도 포경 회사 건물 일부분이 남아 있다. 대청도 근해에서 잡히는 어종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1950~60년대는 조기와 까나리잡이, 1970~80년대는 홍어잡이,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우럭과 볼락 등이 주 어종이라고 한다.
대청도의 고기잡이는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선진포항을 가득 메운 어선들은 대규모 선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사연이 많은 대청도를 1994년도에 방문하여 1박을 했는데 그때 선착장에 100여 척의 어선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대청도" 소청도보다 큰 섬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짐을 들고 선착장에 내린다. 뱃길의 종점인 백령도로 가려고 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뱃시간에 맞추어서 마중을 나온 대청도 주민들까지 합쳐져 선착장은 북적북적 활기를 띤다. 선진포선착장 입구에는 어부상이 있다. 대청도 주민들은 백령도와 달리 농경지가 적기에 어업에 많이 종사하면서 살아가는데 이러한 어부상은 대청도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화합과 단결을 의미하는 듯했다.
한국의 사하라, 옥죽동,
선진포에서 출발하는 일주도로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상관없다. 먼저 들판과 해안사구가 있는 옥죽동에 가려면 도중에 꽤 높다란 고개를 4개 넘어야 된다. 첫 번째 고개는 높이 약 74m에 불과하지만 바다에서 치솟아 그런지 훨씬 높게 느껴진다.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고개의 연속이다.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고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데, 난공사로 시간과 예산이 많이 투입되었을 것 같다.
고개에 올라오면 양지동 들판이 펼쳐지고, 내리막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가면 적송보호림이 있다. 그 옆에는 널따란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다. 이 모래는 신안군 우이도의 모래 언덕과 비슷한 이치였다. 서해의 거대한 겨울 파도가 물밀듯이 옥죽동 해변으로 밀려오면서 모래들이 오랜 세월동안 해변과 산자락에 날려서 쌓인 것이 지금의 모래밭으로 변한 것이다.
모래사막은 꽤나 넓고 높게 분포돼 있는데 길이 1.5km, 폭 1km 정도의 모래언덕이다. 이 언덕에 정말 낙타가 있다면 중동의 사막이라 착각할 것 같다. 최근에 모조품으로 2마리의 낙타를 만들어 놓았는데 사막 정취를 살리겠다는 취지인지 모르겠다. 좀 생뚱맞지만 모래밭 한가운데 있노라면 중동의 어느 사막에 와 있는 기분을 낼 수 있다. 이제 진짜 낙타를 가져와 낙타를 타고 모래사장을 둘러보는 것도 새로운 아이템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주민은 “30년 전만 해도 길이가 2km나 되는 커다란 규모였다”며 “해변에 경계지대를 만들고 방풍림인 소나무를 심어서 모래밭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래가 계속 바람에 날려서 배수로를 막고 경작지인 밭까지 덮어서 주민들은 방풍림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연적인 현상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다시 소나무를 베어버리고 모래사막을 더 조성키로 했다고 한다. 모래언덕에 올라가면서 동심으로 돌아가 뛰기도 하고 뒹굴며 내려오기 딱 좋다.
우리나라에도 중동처럼 이런 사막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예전에 이곳 주민들은 아무 쓸데없는 모래땅이라고 하면서 이곳에 방풍림과 해송을 심고, 수로도 만들어 농토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당시 규모의 1/5 정도만 사막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곳 주민들은 나무를 베고 원래 상태로 되돌려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한다. 대청도의 처녀 총각들은 결혼할 때까지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가고 장가를 갔을 정도로, 바람에 모래가 많이 날린다 한다.
옥죽동 해안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있다. 농여 해안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 대청도에는 옥죽포, 농여, 사탄동, 탑동 등 해수욕장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농여 해수욕장의 규모가 가장 크다. 분위기도 한적하고 백령도가 마주 보인다. 농여 모래사장은 발자국도 남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백사장이다.
대청도는 백령도 때문에 일반인에게 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에 천혜의 자연자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수심이 얕다. 조용한 곳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여름 해수욕장이다. 농여 해수욕장은 백령도의 사곶해변과 마주보고 있는데 이곳은 썰물 때 1km 이상의 모래사장이 드러난다.
이 두 해변 모래는 규암에서 비롯된 매우 가는 모래이며,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이 백사장은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농여해변 주위의 바위들은 고생대에서 중생대로 바뀌는 변혁기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 지층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기이한 모습이 보인다.
농여해안을 둘러보고 돌아 나와 들판길을 따라가면 섬에서 가장 큰 양지동 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크긴 해도 선착장이 있는 선진동이 면소재지가 있는 섬의 관문이자 중심지이다.
사탄동 해안,
양지동을 지나면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사당고개(143m)를 넘어야 사탄동 해수욕장으로 갈 수 있다. 힘들게 고개를 오르면 사탄동 해수욕장의 비경이 멀리 눈앞에 펼쳐진다. 사탄동 해수욕장은 모래가 바람에 날려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어 1km 정도 고운 모래가 깔려 있고, 주변에는 수백 그루의 적송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있다. 사탄동 해변은 너무 아름답고 한적한 명소이다. 이 해변의 천연기념물 제66호 동백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서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북단이어서 의미가 크다.
이 해변은 풍덩 물에 빠져서 수영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정도이다. 다른 해수욕장과 달리 파도가 심하게 몰려와 인명 사고가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해수욕을 통제한다고 한다.
사탄동(沙灘洞)이란 이름이 참 재미있다. ‘사탄’(沙灘)이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못하기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장소이다. 사탄은 ‘모래여울’이라는 뜻으로 모래가 바람에 실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여울이라고 한다. 여행자마다 의아해하는 이 이름에 대하여 눈치 챘는지 이제 명칭을 ‘모래을’로 바꾸고 있다고 한다. 사탄동이라는 이름보다는 모래을이 낫지 않은가. 기독교의 교회만큼은 ‘사탄’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실로암교회란 명칭을 쓰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사탄동공소가 있다. 사탄이란 말은 기독교의 최대의 적대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탄초등학교는 20년 전에 폐교돼 지금은 야영장으로 쓰이고 있다 한다.
사탄동 해변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오고, 정자를 지나가면 세 번째 고개(105m)를 오르게 된다. 정자 남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가 보이는데 절경의 해안절벽이다. 독바위 해안을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로 변하면서 네 번째 고개(117m)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출발지인 선진동 포구가 나온다.
매바위(수리봉),
대청도에는 자연이 선물한 신비한 풍경이 또 하나 있다. 사탄동 고개에서 삼각산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수리봉이란 바위가 나오고 여기서 해안가를 조망하면 새 형상을 하고 있는 산세 모습이 나온다. 날개를 길게 펼치고 누워 있는 모습의 매바위가 바다에 부리를 대고 있다.
대청도의 매는 “해동청”이라고 하는데 사냥에 능숙하여 주변국가에까지 널리 알려졌단다. 중국에서 서해를 횡단하여 날아온 매가 처음으로 찾은 곳이 대청도였고, 가을만 되면 이 매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대청도에서 생포한 매를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 서내동 옛이름이 ‘매막골’이라 한 것도 가을이면 이곳에 막을 치고 매를 잡았던 것에 유래한단다.
이 매의 목 위로 도로가 나 있는데 거기에 정자각이 있다. 낙조 포인트인 강난도 정자각이다. 정자각은 이해가 가는데 “강난도”는 이름이 특이하고 생소하다. 이 정자에 오르면 멀리 독바위해변과 사탄해변 그리고 북쪽에 떠있는 갑죽도가 눈에 들어온다.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이 정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낙조는 한 폭의 그림이다. 지나는 나그네에게 휴식의 틈을 주고, 주변의 좋은 풍광도 감상하라고 이 정자를 세워 놓은 모양이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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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보물섬에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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