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제11·12대 대통령, 2
한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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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시기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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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양국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1982년 8월 15일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反日)이나 '배일'(背日)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유럽&아프리카와의 관계,
한국은 친미·친서방 외교기조를 유지해 오면서도 서유럽 국가들과는 다소 소원한 듯한 감이 있었다. 서유럽국가들이 친미권·독자노선권으로 나뉘어 친미권의 경우는 한국이 직접 접촉을 시도하지 않아도 국제정치 현안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해왔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편중되어 있었고 독자노선권은 소·중·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국가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서유럽국가들과 한국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1980년대 한국은 수출시장 다변화정책의 일환으로 EC시장을 공략했고 그 결과 양측간에는 통상마찰이 빚어졌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의 대서구 외교는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되었다. 아일랜드와는 1983년에 수교하였다.
아프리카 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버마(미얀마)의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1980년), 레바논(1981년), 파키스탄(1983년), 브루나이(1984년), 부탄(1987년)과 수교하였다.
교육·문화 정책,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달래고,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돌리려고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했다. 3S는 공식적인 명칭 같은 것이 아니라 인구에서 회자되다가 굳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 기사에도 이 단어가 인용됐다.
1983년 11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정수 의원이 당시 프로 스포츠의 지나친 열기를 지적하며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라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
1984년의 한 신문 사설은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정책이 이용되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가 축제 분위기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1981년 일본 우익 거물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고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했다. 계속하여 급조된 프로야구-프로축구 출범, 칼라 TV 방송 전격실시, 영화 및 드라마 성적 표현 검열완화,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1981년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입니다.
1983년 10월 제5공화국 내각은 전두환 대통령을 대동하고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 연습 중이던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다만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인원 중 이기백은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각종 휘장 및 약장이 방탄복 역할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랑군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조선인민군 상위 신기철은 격투 중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군 대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 전두환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비행기편으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되었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계속 추진하였다. 1984년 8월 20일 전두환은 갑자기 남북간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 대북기술·물자 무상제공도 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85년 1월 9일 전두환은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고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4일 대대적으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방문(상봉가족 65가족 92명)을 하였다.
임기 중반,
1984년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윤보선으로부터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받았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를 내렸다. 같은해 5월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 당시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가 교황을 영접했다. 전두환은 특별지시로 교황의 임시 경호원을 설정했으며, 교황과 회담 후 교황은 서울 시내를 순방한후 3일만에 바티칸으로 되돌아갔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했다.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차관을 받았다. 1984년 11월에는 포울 슐뤼터(Poul Schlüter) 덴마크 국무총리, 조앙 비에이라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았다.
1985년 보안사에서 국회를 해산하려는 명분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85년 2월 10일 실시된 12대 의원 총선결과 의석수로는 민정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약간 상회했으나 야당인 신민당과 민한당이 합한 득표수는 14% 정도 민정당보다 많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이었던 한용원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한용원은 친위쿠데타까지 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고했다. 1986년 4월에는 구주 4개국을 순방,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1986년 4월 30일 개헌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전두환은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11월 7일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 이틀 전인 11월 5일 김대중 신민당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계획을 거두게 된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계획과 무산,
전두환은 취임 초부터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주영복 등의 강력 반대로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전두환은 그래도 자기시절에 지방자치제 입문이라도 해 놓았다는 업적을 의식하고 일부 지자체에 대한 실험적 자치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주영복은 이것조차도 반대했다. 주영복은 "통치권위에 도전적 요소가 될 수도 있고 국민의 긴장감도 이완된다"는 이유를 들어 전통에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계속된 반대에 전두환은 지방자치제를 포기하게 된다.
아시안 게임 개최,
이 부분의 본문은 1986년 아시안 게임입니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대회가 개최된 경기장과 시설은 1988년 하계 올림픽과 같은 것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이 대회가 2년 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시험 무대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는 27개 나라에서 3,34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27종목이 치러졌다. 유도 및 태권도, 여자 사이클, 여자 사격이 처음 실시되었고, 83개의 아시아 신기록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참가국은 아시아경기연맹 36개 회원국 중 27개국 4,839명(임원 1,419명, 선수 3,420명)이 참가함으로써 아시아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불참 국가는 북한이 대표적이며 이에 동조한 라오스, 몽골, 베트남, 남예멘, 시리아, 캄보디아의 7개국 그리고 미얀마, 브루나이, 아프가니스탄 등 국내 사정으로 참석을 못한 3개국으로 총 10개국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북한의 혈맹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참가했는데 이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차기 대회 개최국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임기 후반,
1987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 취임 6주년을 맞이하였다. 전두환은 그 날 이순자 여사와 함께 삼부여인 공로의원, 국회와 민주정의당 간부들, 그리고 군 참모총장들에게 오찬을 베풀고 환담을 했으며, 지난 6년간을 회고하면서 모든 공직자들은 중요요청을 인식하여 역사 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안정기반을 다지는 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날 그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 유린 등에 비판을 받아 왔다. 국내에서도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는 훗날 민중봉기와 시국수습방안 등으로 이어진다.
그는 노태우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임하고, 노신영, 노재봉, 정호용, 허화평 등을 잠재적 후계자 후보군으로 낙점해두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이후, 그때까지 당대표를 맡고 있던 노태우가 최종 후계자로 낙점된다. 한편 한번은 청와대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이어서 회의 테이블에 자리 지정을 담당자들이 하게 되었다. 이때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라 그렇지 않아도 후계구도도 있고 해서 전통과 나란히 의자를 배치했다. 이때 회의장을 둘러보던 전두환이 "이게 누구 자리냐"하고 물었다. "노대표 자리입니다"하니까 "의자 빼!" 하고 일갈하였다 한다.
호헌과 6.10 항쟁,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에서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 |
— 전두환, 1987년 4월 13일자
|
그들은 이 조치가 국민들이 환호할 것임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국민들의 화를 키우는 원인으로만 적용했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10 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은 군대를 재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진압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미국으로부터의 민주화 수용에 대한 압력 등은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두환의 측근들은 그에게 강경진압을 주문했으나 민정당 의원들은 민의가 터져나온 것이라며 진압불가 입장을 폈다. 내무부 장관 김용갑은 6.10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유혈사태가 번질 수 있음을 주문했다. 강경진압을 외치는 측근세력과 진압에 부정적이던 여당의원 양측의 대립 끝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전두환은 내무부 장관 김용갑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선제를 수용한다.
이후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이 발표됐다.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했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6.29 선언이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입니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로 논란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곧 치러질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당시 4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김영삼은 대선에서 여당의 노태우에게 패하였다.
노태우, 그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노태우는 그를 5공청산의 타겟으로 삼아 신군부 인사들을 정리, 용퇴시킨다.
집권 초기에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 한편 전두환이 노신영을 후계자로 결정하자 군부에서 반발하였다.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였다.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
퇴임 후,
1988년 3월 4일에는 그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었다. 이는 그해 1월 29일에 추천 수속이 끝난 것이었다. 유럽의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87년의 KAL기 폭파추락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했다는 점 을 들어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88년 2월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내려간 후 11월 29일에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12월 31일에 국회 증언대에 섰고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이 있자 그는 명예총재직 제의를 사양했다.
문민정부 이후,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2년 10월,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됐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1995년 8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은 자신이 1989년 12월 15일에 있었던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서 나온 결정에 따라 그해 12월 31일에 13대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고 김영삼 정부는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고 자신은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고 12·12 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으며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김영삼과의 갈등,
김영삼이 취임 직후부터 TK인맥을 해고하고 PK인맥으로 채워버렸다. 하나회가 물러간 자리에는 PK의 군홧발이 점령했다. 모든 곳이 다 그랬다. TK를 몰아낸 자리에는 영락없이 PK가 들어섰다. 김영삼이 개혁의 깃발을 든 사정의 칼날이 겨눈 것은 영락없이 그의 정적이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라도 그의 정적은 칼을 맞았고, 친분이 있는 사람은 구제되었다. 김영삼에게는 금융실명제마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해가자 전두환은 김영삼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 | 만약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지금껏 야합해온 김영삼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 ” |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전두환은 치졸한 정치보복이라고 김영삼을 공격하였다. 전두환은 징역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대구, 경북에서는 정치보복으로 '고난받는 영웅'으로 부활했다.
1999년 당시 대구, 경북 주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0% 이상이 ‘5공신당’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구속과 석방,
전두환·노태우 법적 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5년 12.12 5.18 재판과정 중 그는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그의 광주 좌파 발언이 알려지자 시인 공선옥 등은 그에게 인간이 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는 3124번이었다. 그러나 수시로 안양교도소에는 면회객이 줄을 이었고 교도관들도 전두환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수인번호로 호출하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이후 김영삼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과 반감은 계속됐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이후 친전두환 인사와 제5공화국 가신 세력에 의한 5공신당 창당이 시도됐으나 시민, 사회단체들의 반발과 정부의 압력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편 투옥 직후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를 두고 극작가 신봉승은 어리광, 땡깡이라며 조롱하였다. 12.12 사태와 5.18과 같은 또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던 전두환 대통령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리다가 백담사에 유배되었다'며 '그 후 또다시 구속, 수감되어서는 어처구니없게도 5공의 정통성을 수소한다는 구실'로 구치소에서 단식을 하는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고 조롱했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했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았던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박탈당했다.
5공신당 창당계획,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당했다. 1996년 2월 3일, 전두환은 5공 신당 창당에 여야 정치인 200여명에게 5백억원 이상을 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사회 활동,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
대북 특사 파견 제의와 거절,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올 것을 제의하였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방북의사를 타진해 왔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金日成)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히면서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
전두환은 안현태(安賢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방북 희망과 김정일(金正日) 총비서 면담 의사를 서한으로 전달해 왔었다. 그러나 임동원은 "당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서해교전 직후 등 시기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전 전대통령측에 전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임장관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全전대통령의 방북이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을 全전대통령에게 보내 그같은 입장을 설명했다.
2000년대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
2001년 11월 22일,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내외의 오찬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유럽 순방 결과를 설명한뒤 경제 경쟁력 강화, 민생 안정, 남북관계 개선 등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였고, 유가족들을 찾아 조문하였다. 반면 당시 대통령이였던 김대중은 전사자들의 발인에 불참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시간에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대 독일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2002년에는 제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에 청와대 고위간부 개입설과 전두환이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다. 이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와 녹화사업은 당시 보안사, 치안본부, 검찰, 안기부, 문교부, 대학 등이 총동원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2월 19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대공처장(대령)이었던 최경조가 2001년 12월 "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이 만찬을 할 때 전씨가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군내에 불온낙서 등이 빈발하고 있다는 등의) 군내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거야'라며 혼을 냈고, 그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계획(녹화사업)을 세웠다"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최씨는 이어 "(대통령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이야기 속에 지시가 다 들어있는 것으로, 구상은 (내가) 직접 했다"면서 "입안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맡았다"고 말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했다.
“ | (5.18) 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그런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 ” |
— 2003년 2월 대한민국 각 언론사들과의 공개 인터뷰에서
|
그의 이 인터뷰는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같은해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의 소환조사를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한상범의 소환 조사를 거부했다. 2002년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했다. 오후 5시 20분께 장세동 전 경호실장과 앞서 도착한 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의 안내로 분향소에 도착, 간단한 묵념과 함께 헌화했다. 이어 1호 접객실로 옮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주일씨가 화장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군대시절부터 화장하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즉석 화장 서약을 했다.
9월 30일 서울 강서하키장에서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남자하키 A조 예선 한국-일본전에 아내 이순자, 측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20여명과 참관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인사했다. 경기가 끝난 후 한-일전에서 첫승을 거둔 대한민국 남자하키팀 국가대표 선수들을 면담, 격려했다.
10월 녹화사업 관련 전두환이 직접 지시를 내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됐고, 10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2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문서를 처음 공개했다. 80년대 초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녹화사업'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 무렵 그의 팬클럽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약칭 전사모)'가 활성화 되면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 8월 29일 한나라당·이명박 등의 방문 시에는 자신이 대신 인질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납치극과 관련 자신은 이제 많이 살았다. 난 특수훈련도 받아서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기도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일부 네티즌들의 비판이 있었고, 권영길은 전두환 덕분에 웃었다는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 2월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식에 초대됐고, 4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이 대통령이 국민이 바라는 염원을 잘 파악해서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독려했다.
2008년 7월 22일 인사차 방문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 등 정치인들의 예방을 받고 회견했다. 회견 중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곡물을 하루에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자 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 고사를 들어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했다. 정치권은 코미디 같은 제안이라 말했고, 그날 오후 진보신당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의 제안을 헛된 개그라고 비판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중절모 차림으로 경호원 10명을 대동하고,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쪽으로 갔고, 관 앞에서 합장하고 나서 그만 평소 자신의 습관대로 계속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난 조문 시간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김 추기경과의 인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전두환은 "인연이 깊다"라며 김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신군부에 저항했던 김 추기경의 민주화 행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에게 "30년 악연이라는데…….",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 "김 추기경과 악연인 것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개인적으로 찾아오라"라면서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
5월 23일 17대 대통령 노무현이 투신 자살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다. 전두환은 노무현의 투신 자살에 대해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했다.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라며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도 "이 병원에서 완쾌한 바 있다"면서 "의료진들이 워낙 저명한 분들이니 잘 하실 것"이라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때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 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0월 19일 오전 11시경 부인 이순자 여사를 동반하고 전 안기부장 장세동, 전 감사원장 황영시, 전 국방장관 이기백 등 일행을 대동하고 함께 관광버스편으로 평화의 댐 관리사무소에 도착, 김명림 수자원공사 강원지부장과 정갑철 화천군수, 오정석 육군 제2군단장 등의 영접을 받고 환담을 하였다. 이후 평화의 종을 타종하는데 참석하고 댐 주위를 둘러보았다.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 그 후 1672억 추징금 중 300만원을 납부하였다. 이번 미납액 일부 변제로 추징시효는 2013년 10월까지 연장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2013년 2월 25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했고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전두환 추징법은 추징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불법 재산을 취득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불법 재산에서 유래한 재산을 가진 제3자를 상대로 추징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찰에 의하여 일가의 수백여점의 미술품이 압수되었고, 해당 미술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경매는 2차례에 걸쳐 열렸고, 모든 작품이 100%로 완판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은 3권의 회고록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2017년 8월 4일 법원은 제1권 <혼돈의 시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표현 33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판매, 배포하지 말라고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였다. 채무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들 전재국 씨가 책이 서점에서 판매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엔 5.18 기념재단 등에 1회당 5백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그 후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2017년 10월 회고록 1권에 문제가 된 33개 부분을 검은색 잉크로 씌운 뒤 재출간하자, 5월 단체들은 2차 소송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8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은 다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이때 1차 소송 당시 5·18과 관련된 33개 허위 사실 외에 36개 내용도 거짓 내용으로 추가 인정되었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받게 되었고, 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고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재판에 갈 수 없다며 불출석하였다. 2018년 8월 27일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판에서 재판을 맡은 김호석 판사는 "2013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회고록은 2017년 4월에 발매됐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지적했고, 변호인을 맡은 정주교 변호사는 "회고록 준비는 오래됐다"며 "2013년에 가족들이 이상 상태를 보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고, (알츠하이머를)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상훈,
서훈이 취소된 훈장,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서훈취소/06.03.21)
- 태극무공훈장 (서훈 취소/06.03.21)
- 화랑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충무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을지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국선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천수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삼일장(서훈취소/06.03.21)
- 수교훈장 광화대장 (서훈취소/06.03.21)
서훈 취소,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을 비롯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일까지 반환은 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았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두환은 6년이 지난 현재도 취소된 훈장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국무회의에 의결을 통해 환수키로 의결했지만 적극적으로 환수노력을 하지 않는 행안부를 비판했다.
저서,
- 《전두환 회고록》 1권 2권 3권
논란과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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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 관련,
정권 차원에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여 인권을 침해했다. 한편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이택승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이택승 등은 1989년 12월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 김만기(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뒤인 1992년 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다.
비자금 조성 & 추징금 미납,
1994년 당시 총무처 장관인 서석재에 의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제기됐다. 서석재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발언 파문 초기에 전두환은 새벽에 약수터를 오르며 웃음과 무응답으로 서석재의 발언을 일축했다. 그러나 1995년 민자당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4천억, 노태우 4천억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자 전두환은 강하게 부인했다.
서석재, 박계동의 공식 폭로에 의해 국회에는 진상조사단 구성에 여야가 합의해서 국회 진상 조사단 및 검찰·경찰 합동 수사팀이 구성됐다. 수사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는 5천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수뢰한 것으로 확인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 문제와 12·12 군사 정변 주동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말 화합이라는 명목으로(당시 반DJ세력인 YS세력과 tk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주선으로 사형 형집행은 면죄되고 곧 풀려났다. 풀려난 후 복권됐다.
이후 전두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고 하여 회자화되기도 했다. 2009년 전두환의 미추징 비자금은 정확히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13년 현재 검찰이 전두환의 차명재산으로 의심되는 자녀 명의의 부동산 등 100억원가량의 자산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최규하 대통령 위협 문제,
그가 최규하를 직접 위협했다는 설과 사람을 시켜서 압력을 가했다는 설이 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김정렬에게 부탁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하야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현확 전 총리는 1995년 12월 16일 검찰 진술에서 "81년 김정렬씨에게 최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진술했다. 실제 김정렬씨는 최대통령이 설악산으로 하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청와대를 방문하여 그와 독대하였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직접 최규하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가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있다. 1980년 8월 16일 당시 최규하는 압력에 못 이겨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는 것이다.
지역감정 조장 의혹,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부에서는 광주학살을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 정부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정의당 집권세력의 농간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여당이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고위관료의 경우 5공화국에서는 지역간 격차가 더욱 심해쳐 영남출신이 43.6%로 늘어난 반면 호남출신은 9.6%에 불과했다. 제5공화국 시기 한국 50대 재벌 중에 영남출신 소유주가 23개인 반면, 호남출신 소유자는 4명에 불과했다. 85년 전북과 전남의 도시화율이 각각 43%와 40%인데 반해, 경북과 경남은 각각 57%와 75%로 큰 격차를 보였다. 도시화가 뒤진 호남지역은 지역개발이 낙후되고, 지역발전을 위한 경제활동 기반이 취약해 지역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기념물 건립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일해공원입니다.
2008년 일해공원 건립을 놓고 5.18 관련 단체 및 부산, 경남의 시민단체들이 반발, 전사모, 보수단체 등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일해공원 반대투쟁위원회 등이 구성되어 활동했고, 일해공원 예정지 내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해공원은 건립됐다.
2009년 5월, 전두환의 지지모임인 '전사모'는 전두환 기념 시설 건립을 추진했으나 2009년 6월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5.18 단체들과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전두환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전사모측의 주장과 범죄인 신분의 전두환의 상징물은 안 된다는 반대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다.
지방세 미납,
전두환은 2003년 자택의 경호동 건물이 법원에 의해 강제 경매되면서 발생한 양도소득세 중 일부에 대해 2010년, 서대문세무서가 부과한 세금 3017만원을 미납하고 있다. 체납 금액은 장기간 체납으로 인해 4000여 만원으로 증가된 상태이며, 서울특별시청에 의해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 오를 예정이다.
사상과 신념,
박흥주 대령 복권 노력,
1987년 전두환은 박흥주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총무처와 국방부에서는 현행법을 고치지 못하는 이상 어렵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의리를 모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박흥주 대령에 대한 것을 다시 접하게 된 전두환은 박흥주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복권을 여러번 시도했다.
재판 당시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던 박흥주는 사후 연금을 받지 못했다. 박흥주의 딸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박흥주의 처는 국방부에 가서 연금청구를 했으나 현역군인으로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을 땐 연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는다.(군인연금법 33조)는 급여제한 규정이 있어 불가능하다는 회신만 받았다. 87년 겨울 어느날 전두환 대통령은 안현태 경호실장을 불렀다. 전대통령은 "우리 나라 군인들 중에 박흥주 대령이 훌륭했었다고 알고 있다. 요즘 그 유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안현태 실장은 박흥주와 가깝게 지냈던 육사 동기생(18기)들을 찾아보았고 육군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배모 사단장을 찾아냈다. 배 사단장은 수소문 끝에 박흥주의 지인 H모에게 연락을 했다.
박흥주의 측근인 H모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안양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단을 방문해 달라고 해서 갔더니 배 사단장은 "각하의 지시로 박대령의 유가족을 도와야겠다"며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대령의 부인은 강남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없다. 김재규가 연금이 나오는 등 실질적으로 예비역중장 신분이 회복된 상태인만큼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박대령도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했다. 배사단장은 그렇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배사단장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분식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안실장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즉석에서 'OK'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안실장이 총무처와 국방부 등에 연금지급과 복권문제를 협의했으나 현행법을 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며 몹시 서운해 했었다. 배 사단장은 청와대에서 보내준 것이라며 금일봉을 놓고 갔다. 전두환은 보훈처장이 자신의 부탁을 끝내 거절한 것을 서운해 하면서도 보훈처장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며 경질하지 않았다. 예비역 중장인 김재규, 예비역 대령인 박선호와는 다르게 박흥주는 10.26 사태 이후 재판 당시 현역 대령 신분이었으므로 법의 적용을 받았다.
대북 특사 파견,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자신이 북조선에 특사로 다녀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다.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테러 사건(83년10월) 등 남북관계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밀사교환을 통한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85년)을 실현시킨 바 있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김대중 정부에 호소하였다.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1999년 5월부터 김대중에게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동원에 의해 거절당했다.
전두환은 1999년 7월 당시 자신은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고 신념을 밝혔다.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오고 싶다고 다시 여러번 청와대에 건의하였다. 전두환은 당시 통일부 장관 임동원에게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대북특사 역할을 통해 공식 활동을 재개하고 통일에 기여한 민족의 원로로 남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金日成)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며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당시 국민의 정부에 제의하였다. 일각에서는 그가 지미 카터 前미국대통령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카터는 94년 6월 북핵 위기 때 김일성(金日成)과의 면담을 통해 북핵위기를 해소하고 그해 11월 제네바 북-미 합의의 길을 닦았다. 전두환은 자신도 지미 카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끝내 거절당했다.
평가와 비판,
인물평,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정승화는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가리켜 '전두환 역도 또한 미국이 오래전부터 손때묻혀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 전두환 당시 야당인사이자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그가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긍정적 평가,
- 1979년 박정희 피살 후 경제회생에 노력을 기울여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헌정 사상 최고의 호황을 맞이했다.
-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 1988년 하계 올림픽(1981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 2009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과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회원들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며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평화의 댐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자신의 임기기간 동안 경제기획원이 관치를 펼쳐, 전임 박정희 정권에 비해 임기동안 평균 물가상승률을 6.1%으로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과외 과열로 인해 계층간 위화감이 심각해진다고 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7·30교육개혁조치에 따라 대학졸업정원제와 함께 교육정상화와 과열과외해소라는 이유로 과외금지조치를 실시했다. 학교밖에서의 과외수업은 일체 금지하고 미인가된 교습자와 과외를 한 학부모는 명단을 공개하여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직장인인 경우에는 면직처분을 내렸으며, 과외를 받은 학생은 적발된 경우 입시자격을 박탈하고 형사입건하였다.
- 전두환은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야구(1982년 창설)와 축구(1983년 창설)의 프로리그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만 해당하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부정적 평가,
-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이용해, 1979년의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통해 불법적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이다. 5.18 사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전두환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직무상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해 입안케 한 다음 이러한 조치를 실행했다. 전두환의 집권 과정 중에 행해진 조치들에는 인권 유린, 헌정 파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 신군부의 집권 과정과 제5공화국 시절에 언론의 자유가 크게 훼손됐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전두환은 언론인, 언론사를 회유하기 위해 보안사를 통해 K공작계획을 비롯한 수 차례 언론 공작을 했으며, 대통령 재임 시절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에 관여했다. 전두환 정부의 문화공보부는 매일 보도 지침을 편집국에 보내서 여론을 조종했다. 제5공화국 정부는 외국 잡지나 신문을 한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분실, 보안사 등을 통해 김근태, 박종철, 권인숙 등의 반체제 인사와 학생운동가를 고문하여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비판이 있다.
- 전두환 정권 동안 여러차례 권력형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으로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이규광의 처제였던 장영자와,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희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그의 남편인 이철희가 건설업체에 접근하여 현금을 제공하는 대신 그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이를 사채시장에 할인함으로써 거액의 자금을 조성했던 장영자ㆍ이철희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에 발생한 명성그룹사건과 영동진흥개발사건도 대표적인 사례였다.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6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 등이 전두환의 재임기간 중 저질러진 친인척의 비리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이승만 21.6%, 박정희 33.1%,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에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때는 생산소득에 대한 불로소득 비율이 거의 미미한데 비해 이승만 때에 43%, 전두환은 67.9%, 노태우는 거의 100%, 박정희는 무려 248.8%에 달했으며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것과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의 경제 치적은 실제로 경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거품경제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라는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업계에서는 정설로 돼 있다.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나거나 1985년 총선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괘씸죄'에 걸렸고, 결국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후 양정모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1993년 승소판결을 얻어내기도 했다.[200]
-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 실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3S 정책은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즐겨 쓴다는 정책이다. 올림픽 유치를 지시 한 이유, GNP 2천 달러도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서 프로 야구를 출범시킨 배경이 있다. 이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치밀하게 기획됐다는 비판이 있다.
- 1996년 전두환은 포괄적 뇌물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고, 600여억원을 납부하여 추징금이 1600여억원 가량 남아있던 중 2010년 10월 14일 300만원만 납부했다. 이에 대해 추징금 시효를 연장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전두환의 추징금 시효는 2010년까지이며, 납부하지 않을 경우 재산이 가압류된다. 하지만 추징금중 일부를 납부할 경우 3년간 시효가 연장되어 재산 가압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두환 일가가 약 1700만 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생산 농장(와이너리)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 된 바 있다. 전두환은 지인들과 무주리조트 등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들이 목격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으나, 전두환은 남은 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과외금지조치가 당초 취지와 달리 음성적인 불법비밀과외가 번성하여 일부 특권층 자제만이 혜택을 누렸고, 과외비 폭등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당락/
제11대 대선 | 대통령 | 11대 | 무소속 | 99.4% | 2,524표 | 1위 | |
제12대 대선 | 대통령 | 12대 | 민주정의당 | 90.1% | 4,755표 | 1위 |
가족 관계,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이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됐다. 사촌 전순환(全淳煥)은 기업인으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촌 전우환(全禹煥)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갑자기 양곡가공협회장이 되었으며, 새서울용역 감사가 되었다. 그러나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세 아들 재국, 재용, 재만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출판 업체 시공사의 대표이다. 둘째 재용은 탤런트 박상아와 결혼했고, 셋째 재만은 이윤혜와 결혼했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사장이었던 운산그룹(동아원) 회장 이희상의 장녀이다. 최근 미국 나파밸리의 포도밭에서 출시한 두 종류의 동아원 와인이 G20정상회담의 만찬주로 사용되어서 화제가 됐다. 장녀 효선은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교양영어 담당)이다.
전상우 (全相禹) ?~1967 | 김점문 (金點文) ?~1974 | ||||||||||||||||||||||||||||||||||
전열환 요절 | 전규곤 요절 | 전기환 (全基煥) 1929~ | 전두환 (全斗煥) 1931~ | 이순자 (李順子) 1939~ | 전경환 (全敬煥) 1942~ | ||||||||||||||||||||||||||||||
전재국 (全宰國) 1959~ | 전재용 (全在庸) 1964~ | 박상아 (朴相兒) 1972~ | 전재만 (全在晩) | 전효선 (全孝善) |
- 아버지 : 전상우(全相禹, 1893년 1월 9일 ~ 1967년 3월 2일)
- 어머니 : 김점문(金點文, ? ~ 1978년[206] 4월 10일)
- 형 : 전열환(요절)
- 형 : 전규곤(요절)
- 누나 : 전홍렬(全鴻烈, 1918 ~ ?)
- 누나 : 전명렬(全命烈, 1922 ~ )
- 누나 : 전선학(全善學, 1928 ~ )
- 누나 : 전학렬
- 형 : 전기환(全基煥, 1929년 ~ 2019년 , 경찰 출신으로 1988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 홍준표에 의해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 형수 : 최수자(崔秀子, 1931년 ~ )
- 동생 : 전석환(요절)
- 여동생 : 전점학(全點學, 1935년 ~ )
- 동생 : 전경환(全敬煥, 1942년 10월 20일 ~ , 기업인,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역임)
- 제수 : 손춘지(孫春枝, 1944년 ~ )
- 배우자 : 이순자(李順子, 1939년 3월 24일 ~ , 본관은 성주)
- 아들 : 전재국(全在國, 1959년 10월 26일 ~ , 기업인, 시공사 대표 역임)
- 며느리 : 정도경(鄭都瓊, 1961년 5월 30일 ~ ) - 정준석(鄭俊錫)의 딸
- 아들 : 전재용(全在庸, 1964년 9월 22일 ~ , 본명은 전재용(全載容))
- 며느리 : 박경아, 포스코 그룹 회장 박태준의 넷째 딸, 1992년 이혼
- 며느리 : 최정애, 공무원 최성대의 딸 1992년 결혼, 2006년 이혼
- 손자 : 2명
- 며느리 : 탤런트 박상아(朴相兒, 1972년 ~)
- 아들 : 전재만[213](全在滿, 1971년 4월 10일 ~ , 외교관)
- 며느리 : 이윤혜(李倫慧, 동아원(운산)그룹 이희상 회장의 장녀)
- 딸 : 전효선(全孝善), 1962년 3월 19일 ~ ,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윤상현과 결혼했으나 2004년 9월 이혼했다. 현재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교양영어 담당).
- 사위 : 윤상현(尹相鉉, 1962년 ~ ), 이혼
- 작은아버지 : 전상기
- 사촌 형 : 전순환(全淳煥, 1922년 ~ )
- 작은아버지 : 전상희
- 사촌 동생 : 전우환(全禹煥, 1933년 ~ )
기타,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유행어,
-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했다.
-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했다. 한편 2004년 11월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는 29일 전두환 명의의 추가 부동산 존재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과 관련, 전두환이 허위로 재산명시를 함으로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를 검토했고, 일류국가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2005년 7월, 전두환을 법정 허위 진술죄로 검찰에 고발하였다가, 허위사실 명시는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
- 2008년 4월 방송 인터뷰에서 겪어보지도 않고 나를 미워한다 라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의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나라도 대단히 좋은 나라가 됐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고 할 사람은(없을 것)…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223] 또한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찍는단 말이야. 인상 나쁘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09년 8월, 전두환은 한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전두환은 친인척이 추징금을 대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라 가족이 추징금을 대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 전두환의 재판 때 전두환이 같이 재판을 받는 노태우에게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프라이 주나?"라고 하자,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답하였고,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대답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는 어~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라고 망언한데 대해 일간베스트저장소나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는 한동안 5.18을 비하할 의도로 그의 말투가 패러디되곤 한다.
종교,
전두환은 고등학생때부터 가톨릭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례명: 성 베드로). 대통령임기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한국에 초청하거나 개신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점 등을 들어 기독교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퇴임후 강원도 백담사에 간 것은 종교를 위장하기 위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PlTHS3SK0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 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무르며, 백담사 생활을 한 지 1년 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불교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했던 1980년 9월 10일 직후인 10월 27일에 10·27 법난 을 일으키며 집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를 탄압한 일이 있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신군부를 반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가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일화,
- 그는 대통령 재임 중 민족문화 장려정책에 따라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에는 김구의 차남 김신을 관장으로 선임했다.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7년부터 문교부를 출입하던 이유립 등의 역사가들을 계속 문교부 등에 초빙하여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사강연을 실시했다. 한편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일감정에 대해 극일(克日)정신을 주장하며 실력으로 일본을 이길 것을 강조하였다.
- 대통령 후보 시절 7년 단임제를 주장했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재출마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재출마를 단념하고 노태우를 차기 주자로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한편 전두환은 후임자는 문민 통치자여야 된다며 1984년 경 국무총리 출신 노신영 등을 후계자로 낙점, 정치수업을 하려다가 신군부와 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의 반발로 취소하고 노태우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후계자로 잠정 낙점했던 인물은 노신영,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등이 있다.
- 전두환은 2009년 8월 14일 김대중의 병문안 중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 때 가장 행복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돌,
전두환의 별명은 '돌' 또는 '똘'이다. 그의 머리가 유난히 빛나는 것에 대한 비꼼의 의미도 담겨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을 말할 때 우스개 삼아 '이, 윤, 박, 최, 돌, 물, 깡'이라 부른다 한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까지는 성을 그대로 부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별명이다. 즉 '전두환 = 돌', '노태우 = 물', '김영삼 = 깡'이다.
당시 세간에선 그를 '무식한 돌머리'라고 했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지만 그는 영어를 잘 못했고, 학식도 짧았다. 일설에는 그래서 미국에 간 그가 IQ측정기에 머리를 집어넣었더니 "돌 넣고 장난하지 마시오."라는 경고음이 나왔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널리 유행했다. 당시 시중에 '돌머리' 유머가 돌면서 전두환의 '머리 나쁨'은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었지만, 당시 일선에서 뛰었던 한 언론인은 그 풍문을 부인하면서 실제로 "전두환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직관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증언했다.
땡전 뉴스,
이 부분의 본문은 땡전 뉴스입니다.
1980년 이후 각 방송사의 오후 9시 뉴스 시작 때 "...땡!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두고 '땡'과 전두환의 '전'을 따서 만든 이름이 땡전 뉴스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 뉴스는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심지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던 1983년 9월 1일, 소련군이 비행기를 격추시켜 250여명이 사망한 중대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뉴스 시작에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과 "한편 이순자 여사는"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전두환 대통령의 호는 '일해'였으나 전두환의 호가 '오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순자 여사의 호가 '한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취향,
그는 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2007년에 공식적으로 술을 줄였다고 미디어에서 밝혔다. 2007년 1월 5일 인사차 방문한 당시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과의 1시간 공개 면담에서 "주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나이 드니까 도리 없어."라며 절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운동은 뭘 하시느냐?'고 묻는 이 시장에게 "나이 들면 골프가 가장 좋아, 그런데 주변에 한 사람 두 사람 골프치는 사람이 없어져, 세상 떠나고 아프고."라면서 적적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애연가이기도 했던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퇴임식 등 공식 석상에서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전두환,
문학,
- 백무현, 《만화 전두환》,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전기
사이버 공간,
- 일베저장소에서는 그를 ‘땅크성님’, ’엔젤두환’ 등으로 부른다.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들,
드라마,
- 박용식 - 1989년 MBC 《제2공화국》
- 박용식 - 1991년 MBC 《땅》
- 박용식 - 1993년 MBC 《제3공화국》
- 박용식 - 1995년 MBC 《제4공화국》
- 정종준 - 1995년 SBS 《코리아 게이트》
- 장광 - 1998년 SBS 《삼김시대》
- 이덕화 - 2005년 MBC 《제5공화국》
- 염동헌 - 2012년 MBC 《빛과 그림자》 - 각색한 인물 '정장군'
- 윤동환 - 2013년 MBN 《대한민국 정치비사》
- 장광 - 2013년 tvN 《응답하라 1994》
- 장광 - 2015년 tvN 《응답하라 1988》
라디오,
기타,
- 김길호 - 1989년 영화 《서울 무지개》(영화에서는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어른"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 정종철 - 2005년 KBS2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옥장군으로 연기함)
- 이강영 -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홍보물)
- 장광 - 2012년 영화 《26년》 (영화에서는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 서현우 - 2020년 영화 《남산의 부장들》
같이 읽기,
각주,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8/1816410_19338.html
- ↑ 링크
- ↑ 김수한. “[金守漢] 전두환 노태우 학병을 내 휘하에서 훈련시켜”.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2016년 6월 17일에 확인함.
- ↑ “'수상한 5.18 유공자' 이해찬? 김진태, 무지하거나 사악하거나”. 오마이뉴스. 2019년 2월 18일.
- ↑ 오늘 속으로 全盧재판 - 한국일보 2004년 8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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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1997.12.16 경향신문
- ↑ 15대 대선 전두환 노태우 사면 문단 참조
- ↑ 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1999.1.29 경향신문
- ↑ 5공 세력이 돌아온다 1999.3.13 동아일보
- ↑ 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1999.3.15 경향신문
- ↑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1999.8.31 동아일보
- ↑ 이동:가 나 http://news.joins.com/article/3359391.html?ctg=1000
- ↑ 이동:가 나 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① 중앙일보 2008년 10월 30일자 기사
- ↑ 이동:가 나 “보관 된 사본”. 2012년 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9일에 확인함.
- ↑ 육사12기 장교출신이 쓴 회한의 육필수기 내가 겪은 전두환 노태우와 박태준 신동아 1999년 5월
-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8416&CMPT_CD=P0000
- ↑ 이때가 하나회가 본격 형성되전 시기
-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 ↑ 경향신문 1980년 08월 21일자, 정치 3면
- ↑ 전두환이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이 되라는 권유를 받을 때 전두환은 대위였지만 그 동기인 손영길은 중령 진급심사를 앞둔 소령이였다.
- ↑ 그는 자신의 동기들 중 중령 진급은 늦었으나 대령 진급은 빠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버 서 어 저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이야기 전두환
- ↑ 박정희가 이후락을 대통령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취중발언
- ↑ 이동:가 나 다 라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조선닷컴 인물
- ↑ 이동:가 나 정병진,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한국일보사, 1992) 26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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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가 나 다 신군부, 언론통제 실상 드러나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12270124 조선일보 1996년 1월 22일 5.18사건 재수사 종결,내일 기소
- ↑ 이동:가 나 공소장으로 본 5.18 전개과정
- ↑ [광주항쟁 30년] 광주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자의 과제 :: 네이버 뉴스
- ↑ 일본 커넥션 -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 ↑ 5월 15일, 전국 학생운동권 의장단과 간부진이 경찰과 특수부대 출동 정보 입수를 입수하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 ↑ 양당 국회 대책 개헌해제논의 등 활성화
- ↑ 미국,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에 "버릇없는 녀석들" 2015-03-24
-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정부와 언론의 왜곡에 의해 김대중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여겨졌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은 정당화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 학생운동권 탄압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 정치군인 양성 등에 대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문제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 인민군 침투와 반체제 세력의 선동 등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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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인들이 쿠데타 후 결성하는 조직들에 대한 대명사
- ↑ 1990년대에 미국과 다시 협상을 벌인 결과 '미사일 각서'를 무효화하는 대신 2001년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해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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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 네이버 뉴스
- ↑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 네이버 뉴스
- ↑ 일부 보수 세력은 1983년의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은 전두환의 대북관 및 전두환 정권의 대북정책을 부정적으로 보게 했고, 전두환 체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주체사상파(NL) 역시 전두환 정권의 대북정책을 경직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5공화국 정부와 전두환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비밀리에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 ↑ <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 네이버 뉴스
- ↑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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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가 나 올 노벨 평화상 후보 전 전임대통령 추천경향신문 1988.03.04
- ↑ 이동:가 나 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337페이지
- ↑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전두환의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 이동:가 나 다 전두환 대국민성명 전문, 한국일보 1995년 12월 04일자, 8면
- ↑ 이동:가 나 다 라 김진국,《WWW.한국현대사.COM》(민연, 2000) 293페이지
- ↑ 이동:가 나 김진국,《WWW.한국현대사.COM》(민연, 2000) 294페이지
- ↑ YS-전두환 영남나들이 1999.4.5 동아일보
- ↑ TK지역'5共(공) 신당說(설)'불길 심상찮네1999.5.10 동아일보
- ↑ 대구 경북 현지 분위기, 5공 신당 반응 1999.5.10 동아일보
- ↑ 5공 세력 움직임 심상찮다 1999.5.24 경향신문
- ↑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
- ↑ 이동:가 나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5페이지
- ↑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6페이지
- ↑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1997.9.2 mbc
- ↑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1997.12.16 경향신문
- ↑ 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1999.1.29 경향신문
- ↑ 5공 세력이 돌아온다 1999.3.13 동아일보
- ↑ 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1999.3.15 경향신문
- ↑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1999.8.31 동아일보
- ↑ 이동:가 나 다 라 http://ilyoseoul.co.k/index2.php?idx=85802&news_sec_name=인터뷰·인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경제난에 '두 끼 먹자' 일요서울 2008-07-31 기사
- ↑ 비록 문민정부 특별조사실 12.12 5.18 사건, 5공 신당 창당설과 전두환교 맹신도들 경향신문 1998.4.23
- ↑ 전씨 5공 신당 추진 등 비자금 880억원 뿌려 경향신문 1996.2.3
- ↑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1997.9.2 mbc
- ↑ 빠른 시일 내에 전노씨 사면, 이인제 후보 기자회견서 밝혀 1997.12.16 경향신문
- ↑ 영남 보수 신당 창당 추진 1999.1.29 경향신문
- ↑ 5공 세력이 돌아온다 1999.3.13 동아일보
- ↑ 5공 세력 정치재개 진통 1999.3.15 경향신문
- ↑ 全斗煥(전두환)-金重權(김중권) 골프 회동 與圈(여권),5共(공)에 손내미나 1999.8.31 동아일보
- ↑ (풍향계)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도덕적 해이 교수신문 2001년 08월 13일
- ↑http://news.donga.com/Column/Kija/3/040102/19990628/7450724/1
- ↑ 이동:가 나 다 <아시안게임> 전두환 전대통령의 하키 '애정' :: 네이버 뉴스
- ↑ [전두환씨 기자간담]『통일특사役 하고 싶다』 동아일보 1999.05.04
- ↑ [전두환씨 방북추진/김정일 면담요청 안팎] 동아일보 1999.10.25
- ↑ 이동:가 나 다 라 마 정부, 전두환 전대통령 방북 추진 거부 연합뉴스 1999.10.25
- ↑ 이동:가 나 다 전두환씨, 7월 訪北 극비 추진…정부에 주선 요청 동아일보 1999.10.25
- ↑ 김대통령 전두환씨 오찬 :: 네이버 뉴스
- ↑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 ↑ "여섯 용사들, 장맛비처럼 통곡했을 것"
- ↑ 이동:가 나 '녹화사업', 82년 전두환씨 지시 - munhwa.com
- ↑ “전두환 광주 폭동 발언”.
- ↑ donga.com[뉴스]-´녹화사업´ 조사위해 전두환씨 소환
- ↑ 전두환 전 대통령 '녹화사업' 조사 불응 : 사회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 ↑ 이동:가 나 다 이회창 후보, 전두환 前 대통령 조문 :: 네이버 뉴스
- ↑ 하키장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 네이버 뉴스
- ↑ 이동:가 나 "'녹화사업' 대통령지시 시사문건 확인"- 중앙일보 뉴스
- ↑ "전두환, 녹화사업 지시" 추정문서 발견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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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공간은 전두환 패러디 글로 '들썩' :: 네이버 뉴스
- ↑ 전씨는 구호대상자 아닌가 ::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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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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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SC-86-08975 퍼블릭 도메인 사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DA-SC-86-08977 퍼블릭 도메인 사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 임 최규하 (권한대행)박충훈 |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 후 임 노태우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전임 진종채 | 제20대 국군보안사령관 1979년 3월 5일 ~ 1980년 8월 21일 | 후임 노태우 |
전임 (직무대행)윤일균 |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 1980년 4월 14일 ~ 1980년 7월 17일 | 후임 유학성 |
전임 (초대) | 초대 민주정의당 총재 1981년 1월 15일 ~ 1987년 7월 10일 | 후임 (총재권한대행)노태우 |
전임 - |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1987년 7월 10일 ~ 1989년 11월 23일 | 후임 - |
전임 최규하 |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1988년 2월 ~ 1988년 11월 23일 | 후임 최규하 |
전임 박충훈 | 한반도의 국가 원수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 후임 노태우 |
12·12 군사 반란 주동자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냉전의 주요 인물
전거 통제 ,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김재익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군부 세력은 김재익을 견제했다.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것은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재익 등의 경제 관료들은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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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2J47TYTWo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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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eo2uTjp8iLk-캬바레 경음악 총결산 1집(지루박),2집(디스코),3집(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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