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일요일

전두환,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제11·12대 대통령,


출생
1931년 1월 18일 (89세)
일본령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거주지
재임

1. 개요. 상세. 일생. 평가.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이모저모. 각종 타이틀.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10.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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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全斗煥, 1931년 3월 6일 (1931년 음력 1월 18일)[2] - )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3일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였으나, 활동 과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1997년 12월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공식 초상화,

목차,
학력,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출생과 가계,

1958년   1월 24일 에 아내   이순자 와의 결혼식,

1958년 1월 24일에 아내 이순자와의 결혼식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5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고 전두환이 9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지냈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년기,

육사 졸업 후의 전두환,

육사 졸업 후의 전두환,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다. 5세 되던 해 그의 가정은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7세 되던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10대 초반인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기도 했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전두환(뒷줄 두 번째) 

1941년 4월 다시 가족과 함께 남행열차를 타고 귀국하여 대구로 내려와 바로 희도국민학교에 복학하여 1944년 3월 25일 15세에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1년 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생이 된 전두환은 권투를 시작했고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킬로미터 거리였지만 그는 왕복 20km의 길을 직접 걸어서 통학하였다.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생 당시 별명이 몽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그는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학교 동창이던 백순달은 그가 걸어서 다녔다고 하였다.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는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0년 2월 10일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형 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학하지 않았고,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다. 2백명 선발에 2천 4백명이 몰렸는데 합격,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청년기 운동선수로서의 전두환,

육사생도 시절의 전두환,

육사생도 시절의 전두환,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은 교번 152번으로 교육연대 2중대 2구대에 소속되었다. 육사 1학년 여름에 비상이 걸려 M1소총을 들고 완전 군장을 갖추고 24km를 구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장교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판정되어 유급 조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진해 해군대학에서(마진터널)을 거쳐 창원군 상남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진해로 돌아오는 60리의 구보였다. 몇몇 생도들이 쓰려졌다. 이때 전두환은 한손으로는 한 동료의 옆구리를 잡아 이끌고 또 한손으로는 그의 M1 소총과 (배낭)을 움켜쥐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미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성적은 하위였지만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축구부원이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축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1983년 5월 K리그 개막 경기에 직접 참관을 비롯하여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서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운동선수라는 이력과는 별개로 전두환은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전두환은 대구공업고등학교시절부터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육사 생도 시절,

생도 시절의 전두환,

생도 시절의 전두환,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친구이며 이는 군생활과 정계진출 내내 그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평생동안 친구로 지내게 된다. 한가지 특이사항이라면 전두환이 지나갔던 이력의 상당부분을 노태우가 따라갔고 심지어는 전두환의 후임 대통령이 노태우가 되었다.            
1955년 9월 30일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사 생도 시절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가장 돈이 많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집에 살았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하였다.
임관 초기,
1955년 3월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 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4년 동안의 생도시절에 나는 축구와 권투를 한 탓인지 학과성적이 좀 뒤진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관들의 기대를 그리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육사 성적이 좋지 않았으므로 동기들 대부분에게 묵살당했다. 초군반 수료를 마치고 육군 제 21보병사단으로 배속되었다. 1957년에는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로 전속되고, 그 해 10월 중위로 진급하였다. 그 후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이 되었다.
5.16 지지와 월남전 참전장교 생활,

육군   중위   시절의 전두환 ( 1957년   10월 )

육군 중위 시절의 전두환 (1957년 10월)
1959년 1월 3일 육군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4월 20일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59년 5월에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로 배속되었다가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 6월 12일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유학을 갔다. 통역장교를 포함한 총 5명의 대한민국 육군장교들이 같이 유학 갔고 노태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에도 역시 다른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에 입교하여 1960년 6월에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뒤이어 1960년 6월 25일 미국 육군보병학교의 유격훈련 교관교육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수전학교 과정에는 노태우를 비롯한 4인의 한국 장교들과, 레인저 스쿨 과정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5인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지만, 이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으로서는 홀로 교육받았다. 영어에 서툴렀지만 통과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0년 12월 16일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참모로 보임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초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되고, 4월 10일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로 발탁되었다. 그곳에서 1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예비장교훈련단(ROTC) 창단을 서두를 때 예비장교훈련단 준비위원으로 발탁 되었다. 그리고 그 예비장교 훈련단 참모장 이명재 소장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담당 교관요원이 되었다. 이어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5·16 군사 쿠데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총애을 받았다. 5·16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 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 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 등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육사 교장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출세가도의 기반을 마련한다.
오치성박창암 등은 육사를 '혁명대열'에 끌어넣는 것이 이들의 긴급 임무였다. 박정희는 이들을 급히 육군사관학교로 파견하였다. 쿠데타 군 측에서 온 오치성과 차지철은 육사 간부장교들과 생도대표에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도대표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학교 지휘계통은 육본을 장악한 혁명위원회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북극성 동창회의 선배들과 상의하겠다.
또한 생도대표들과 북극성회 간부들이 가진 시국대책회의에서는 쿠데타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북극성회는 육사 11기 이후 졸업생이 참여하는 순수한 동창회였다. 주로 성적우수 졸업자들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간부를 맡았다. 전두환 등의 하나회계는 성적우수자가 없었으며 교수요원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러나 교수부 동기생들을 통해 북극성회와 생도대표들의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이상훈(육사11기, 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 역임) 등과 함께 정규육사 출신들이 모여 박정희 주도의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 등은 육군본부로 가 육본에 설치된 군사혁명위 본부에 들어가다가 김종필과 마주쳤다. 전두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 전두환 : 이렇게 중대한 일을 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아무 연락도 안 했습니까.
  • 김종필 : 비밀 유지도 어려웠고 서두르다 보니 다 연락하지 못하고 빼 먹은 데가 생긴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부터 협력하라.
  • 전두환 : 그렇잖아도 지금 막 저희 동기생들이 모여 육사 동창생들은 이번 군사혁명에 적극 함께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 김종필 : 아, 그런가, 잘 됐다.
  • 전두환 :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한데, 잘 안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맡아 해 보겠습니다.
  • 김종필 : 좋다. 차량 등을 지원하라고 할 테니까, 성공시켜 봐라.
5월 17일 자정 전두환 등은 그날 밤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로 갔다. 그러나 육사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반대 분위기였고 더구나 강영훈 교장이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린 상태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지지 데모 주도,
그런데 5월 17일 저녁 육사 교장 강영훈이 육군본부로 간 것을 알고 전두환은 뒤쫓아 갔다. 육본의 쿠데타 본부에서 강영훈은 장도영과 박정희로부터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독촉받는다. 그러나 강영훈은 "생도들 중에도 찬반이 갈려 있어서 어렵다"면서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폈다.
이때 전두환은 막 육본에 도착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주모자들인 박창암· 박치옥 대령에게 "강영훈 교장이 육사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가 방해받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박창암박치옥에게 보고한 것은 그때까지 들었던 강영훈의 상황 설명과 딴판이었다. 강경파로 후에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던 박창암은 강영훈과 전두환을 대질시키자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반혁명으로 찍히기 전의 고위장성과 새파란 대위급 장교를 대질시키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쿠데타의 최고지도자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게 물었다.     
  • 장도영 : 너희들, 육사쪽이랑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 전두환 : 각하, 저희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저희 육사출신 장교들과 생도들은 군사혁명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때 안에서 강영훈과 면담하던 박정희가 나왔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지시했다. 박정희는 즉석에서 "강영훈 교장의 얘기가 전두환 대위랑 이 사람들과 달라요. 강 교장을 조치하시오."라고 하고 전두환 등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창암은 즉각 강영훈을 구금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도 이한림의 '쿠데타 묵인'소식이 들려왔다.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북극성회 간부들은 쿠데타 반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장교단과 함께 교문을 나서 동대문으로 향했다. 생도 800여 명과 육사 소속 장교 및 졸업생 2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소공동과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육사생도 시위대의 직각보행을 본 서울 시민들은 구경하다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것으로 쿠데타가 국민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비쳐졌다.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의 각종 주한 기관들, 즉 대사관과 8군과 CIA가 '민심 우호적'이라는 보고서들을 띄웠다.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권위적인 태도로 권력의 맛을 즐기기시작했다.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해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였다. 
1961년 5월 21일 군사혁명위원회 민원담당비서관으로 차출되었고, 6월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그는 9월 13일 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에 다시 발탁되었다. 현역 육군 대위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과 동시에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을 겸직하였다. 그해 11월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장이 되었다가 12월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으로 보직변경되었다.
1962년 12월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전두환 대위를 불러들였다. 전두환은 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물 포섭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박정희 :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전두환 : 제가 어찌 국회의원을 하겠습니까.
박정희 : 이봐, 국회의원이 뭐 별거야.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
전두환 : 예 각하, 일단은 군에 있는 게 좋습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그는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계속 사양하였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상의한 사람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던 윤필용이었다. 그는 윤필용에게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의장 각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다시 전두환을 불렀다.
박정희 : 어때, 생각해 봤나.
전두환 : 각하, 제가 아직은 출마할 만한 돈도 지역기반도 없습니다. 좀더 마련후에 기회를 주시면 견마지로를 다해보겠습니다만 아직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라는 전두환의 이 말이 박정희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역대 대통령,
"no 2, 로 이어 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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