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0일 금요일

아즐행 자연 tv???

아즐행 자연 tv???
아: 아름다운세상, 즐: 즐거운세상, 행: 행복한세상, 자연: 자연과함께,

행복[ Happiness , 幸福 ]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정치사상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세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플라톤(Piatō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와 같은 고전적 체계에서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은 궁극의 목적이었다. 기독교는 현세의 행복을 상대화하였지만 중세의 공통선(共通善)이라는 발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자의 행복을 배려하는 것은 정치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 때 행복을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심리적으로 혹은 신체적으로, 또는 심신의 양면에 걸쳐 욕구가 충족된 상태.
에피쿠로스(Epikuros) 학파나 공리주의(功利主義)에서는 행복을 감각적 쾌락과 같은 것이라고 하여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인 이성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였으며, 칸트(I. Kant)는 자아의 결정에 의하여 자기 존재의 충족성과 조화를 의미하는 인격의 통일성이 성취된 상태라고 하였다. 흔히 종교적 세계관에서 초현실적 열락(悅樂)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정치사상에서는 혼의 내부에 서열을 정하여 감각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절제하고 혼의 상위부분(지성, 신앙)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였다. 그 점에서는 쾌락주의라고 비난받았던 에피크로스파도 마찬가지이며 욕망에 현혹되지 않는 아타락시아(ataraxia; 마음의 평정부동(平靜不動)의 상태)의 경지로 정치에서 물러서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귀결하였다.

근대의 정치사상과 행복의 관계는 양극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행복이 혼 내부의 서열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쾌락으로 환원됨으로써 평준화 및 양화(量化)되어 계산 가능한 것이 된다. 엘베시우스(Claude-Adrien Helvétius)를 계승한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입법의 원리로 한다. 다른 하나의 극에 있는 것은 칸트(Immanuel Kant)의 입장이다. 칸트는 전제 계몽군주가 국민의 행복을 이유로 한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후천적인 것에 불과하며 도덕이나 법의 규정 근거가 될 수 없다.

19세기의 위대한 공리주의자 J. S. 밀(John Stuart Mill)은 벤담의 원리를 수정하고 행복에 다시 질적인 상위(相違)를 도입한다. 또한 위해(危害)원리에 의해 간섭주의에 의한 개입을 제한하였다.

우리의 잃어버린 마음 안에는 우리의 숨겨진 재능과 기술이 반드시 숨겨져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와 자기관찰을 해야 하는데 몇 년, 아니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단언하건대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평생이 걸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머리가 아프더라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만이 당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당신을 정말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보상은 엄청날 것이며, 어느 날 존경받는 사람으로까지 변해 있을 것이다.

존경할 대상이 많은 사회는 정직한 사회다. 그리고 깨끗한 사회다. '과연 난 누구를 존경하는가?' 각자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기를 바란다. 아마도 즉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고, 벤치마킹할 대상이 있을 때 삶의 활력을 느끼게 된다. 삶의 의욕이 생긴다. 막연한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존경이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존경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런 대상이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으로부터 정신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누군가를 존경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과 행복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들은 누구를 존경할 것이며, 그 사람의 무엇을 존경할 것인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건강한 사회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강해질 확률이 높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녀를 도덕지수(MQ)가 높은 아이로 키워야 할 것이다. 신뢰성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할 것이다. 사회가 신뢰성이 있으면 내 아이가 신뢰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내 아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의 미래는 밝아진다.

난 선진국이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 개개인의 의식이 모일 때야 가능한 것이라 믿고 있다. 나라가 부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부강한 나라의 힘을 입어 우리 개인도 커나갈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평생학습 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것은 단지 국가가 제공하는 졸업장과 학위에 끌려 억지로 대학원을 가는 사회가 아니다. 기업과 재벌이 주는 고용기회에 이끌려 새벽부터 토익학원에 가는 사회도 아니다. 서로서로 가르침을 청하고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사회다. 이런 배움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배움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왜 강남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가? 아이들 공부 때문에 왜 많지도 않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도대체 무엇을 남겨주고 싶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공부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 공부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자기가 그렇게 겪고도 왜 그 전철을 자식에게 똑같이 물려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방법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하지 말자. 사실은 그 방법이 가장 쉽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얘기하자. 교육정책의 성패가 진정 그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배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냐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탓만 하고 있어서는 바뀌지 않는다. 교육부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자.
결국 문제는 다시 개인인 '나' 로 돌아왔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도 내가 바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바뀌어서 얻게 되는 행복은 절대 지속적일 수 없다. 그것은 정말 일시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내가 바뀔 때, 이 세상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다가온다.

서양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시간의 행복을 얻고 싶으면 낮잠을 자라.
1일의 행복을 얻으려면 낚시를 하라.
1주간의 행복을 얻으려면 휴가를 떠나라.
1개월의 행복을 얻으려면 결혼을 하라.
1년의 행복을 원하거든 부모의 유산을 노려라.
일생의 행복을 원하거든 남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라.

정신병 환자를 고치는 방법 중에 환자에게 일을 시킨 후 감사하다는 표시를 해서 자기가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사실 그로 인해 나 또한 도움을 받는 것이다. 타인을 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생활과는 다른 어떤 '기여의 기쁨'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행복하게 해줌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행복하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자녀 교육을 시킬 때 "May I help you?(제가 도와드릴까요?)"라는 말을 생활화시킨다. 외국에 나가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일상에서 자주 듣는 말인지 실감할 것이다. 물건을 사러 상점에 가도 제일 먼저 듣는 말이 "May I help you?"이다.

내가 외국생활을 하면서 가장 남다르게 느낀 점이 있다면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람을 거의 야만인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온 가족이 방학을 이용해 Hot Spring이라는 곳을 다녀온 적이 있다. 쉽게 말하면 수영복을 입고 온천욕을 즐기는 곳이다. 온천욕을 하는 풀장 양쪽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한 백인 소녀(우리나라 초등학교 4, 5학년쯤 돼 보였음)가 그 사이를 헤엄쳐 지나갔다. 그때 아이의 부모는 그 자리에서 그 아이를 큰소리로 혼을 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방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너 이따가 보자,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 하면서, 그 자리에서는 그리 심하게 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종종 부모들을 일부러 골탕먹이기도 한다. 나중에 부모가 잊어버리고 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니까.

이런 얘기도 있다. 어떤 소년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기후가 나빠서 비행기가 몹시 흔들리자, 자기도 멀미로 정신을 못 차리면서 옆 사람에게 틈만 나면 "May I help you? May I help you?" 하고 묻더라고 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어린 시절에 특히 강하다가 나이가 들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면서 엷어져서 타인이나 세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많은 일을 이루게 한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도 같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랑도 결국은 한 사람을 통해 찾아오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해본 이는 알 것이다.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던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가?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지 않던가?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정작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내 마음 하나 바뀌는 것으로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한 사람이 되고, 누군가가 나에게 꼭 필요한 한 사람이 되면 온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질 것이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보다 더 필요한 것은 '함께 걸어줄 친구'이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손수건 한 장보다 더 필요한 것은 기대어 울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그 사랑을 표현하라. 뭐든 처음이 어렵지 자꾸 하다보면 일상의 언어처럼 편해진다.

기억하자. 내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성공도, 행복도 내 마음에 달려 있다!
행복주의[ Eudemonism, 幸福主義 ]
행복이 인간 행위의 본래적 동기, 인간의 최후의 목적, 윤리적 기준이라는 윤리설. 고대 윤리학(데모크리토스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등)의 한 특징이며 또한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에서도 두드려지게 나타난다. 칸트는 윤리적 행위의 동기로서 도덕 법칙에의 존경만을 인정, 일체의 경향성을 배제하는 입장에서 행복주의를 엄격하게 멀리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 유물론 등, 이전의 행복설의 적극적인 면을 계승하면서, 행복의 개념 그 자체를 비역사적, 개인주의적,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역사적, 사회적, 구체적인 것으로 끌어올렸다. 이 입장에서 보면, 행복은 인간이 그 육체적, 정신적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는 상태이며 쾌감을 동반한 상태이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능력의 역사적ㆍ사회적인 변화ㆍ발전 및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생산력의 발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교류 형태의 발전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역사적ㆍ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회 조직, 또한 계급 사회에서의 계층 소속의 차이에 의해 무엇이 행복인가도 달라지게 된다. 피억압 인민의 입장에서는 왜곡되고 억눌린 욕망을 인간적, 사회적 욕망으로 양적, 질적으로 발전시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종 능력의 전면적인 발전을 기하고, 나아가 마비된 일변적인 감각을 해방하여 여러가지 능력의 발전을 감득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이와 같은 민중의 행복을 저해하는 모든 요인과의 투쟁은 불가피하며, 이것을 통해서만 행복은 실현된다. 이 과정에서 투쟁을 자기 자신의 요구로 파악, 그것에 전력을 경주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우리가 마음먹는 순간 바뀐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얘기일 것이다. 어느 날 나치스에 의해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의사가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그는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동족들의 행렬을 보면서 머잖아 자기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어느 날 노동 시간에 이 젊은 외과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유리병 조각을 몰래 바지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매일 그 유리병 조각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다. 동족들이 차츰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동안, 그는 독백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그는 죽음의 극한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 꼭 두 번씩 면도를 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일렬로 선 유대인들 중에서 그날의 처형자들을 골라냈다. 하지만 유리 조각을 가지고 피가 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를 한 외과의사는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 때문에 삶의 의지가 넘치고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상은 나치스들에게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많은 동족들이 가스실로 보내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비망록에 이렇게 썼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리 서두를 것이 못 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그 외과의사는 결국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다. 살아서 아우슈비츠를 떠날 때 그는 이렇게 독백했다.
가스실로 떠난 동족들은 한 번 죽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외과의사는 모든 가시적인 자유를 박탈당하고 질병, 고문,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이전에는 결코 맛보지 못했던 깊은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진정한 자유란 어디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맞서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이 외과의사는 이러한 진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덕분에 인생의 외적인 조건이 얼마나 악화되었든지 간에 그는 생각과 마음가짐의 자유를 소유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생각과 마음가짐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생의 경험까지도 바꿔놓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외과의사가 바로 실존 분석적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창안한 빅터 프랭클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를 그리워합니다.
자유인, 자유의 세상
자유는 사람들의 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의 뜻을 모릅니다.
자유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지 못합니다.

자유의 자()는 스스로 자입니다.
자유의 유()는 말미암을 유입니다.
'말미암'이란 원인, 과정, 결과입니다.

모든 일의 원인, 과정, 결과는 모두
스스로 책임질 때 자유입니다.
남의 탓을 안 할 때 자유입니다.

스스로 할 때 자유인입니다.
시켜야 할 때 어린이입니다.
욕먹고 할 때 노예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그 모든 결과를 책임질 때
그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스스로 할 때–그때 성공합니다.
–박해조, 「자유」

우리는 흔히 뉴스나 신문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는 행동으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망신을 당하는 일들을 흔히 접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을 누르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쟁 위주의 방법들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배우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해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신 그 자리를 시기와 질투, 무시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승자와 패자 모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상대방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이해를 시작한다면 상대방 역시 나를 위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이해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상대방과 모든 공동체의 이익과 행복이라는 과실을 맺을 것입니다.

아티스트강익중,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60년, 제작연도 2006년, 종류 비디오, 설치 미술크기120 x 120 cm
아티스트/ 제작연도/ 종류크기/
강익중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60년
2006년
비디오/설치미술
120 x 120 cm

참조어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기독교, 공리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플라톤, 벤담(Jeremy Bentham), 밀(John Stuart Mill), 롤스(John Bordley Rawls)

출처 ^ 참고문헌,
[행복[Happiness, 幸福]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행복 [幸福, happiness] (교육학용어사전, 1995..,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행복주의 [Eudemonism, 幸福主義] (철학사전, 2009.,)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성공의 길은 내 안에 있다, 2004..,)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창안한 빅터 프랭클이다.
[https://happyday-2100.tistory.com/653 [살맛 나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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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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