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7일 월요일

대마도, 한국 땅,

대마도, 한국 땅,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거제도에서 본 대마도,

일본 후쿠오카 까지는 138Km이지만 부산까지는 49.5Km의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대마도 (쓰시마)의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거리를 볼 수 있다,

  대마도 우리 땅.  독도가지고 버티는 것은 대마도를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하는 일본의 수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식한 미국 실무자들 때문에 대마도가 일본 지배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한국은 미국 때문에 피해가 많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친일파 정군들이  일본에게  침묵한 결과가  대마도를  내 준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던 지도,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도 인정한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1734년 프랑스제작 지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중 주목할 부분은,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김일성 때문에 찾지 못한 대마도. 멍청한 김일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일단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부터 살펴보자. 2018년 8월 2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월11일 일본의 지도 학자 구보이 노리오 교수를 통해 고지도를 입수했다.

이 지도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Kernot이 1790년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24센치로 소형 판본이며, 채식인쇄 기법을 사용했다. 지도 상단 중앙에 일본 수도 YEDO, 좌측 하단에 조선의 관리로 보이는 3명이 COREANS, 우측 하단에 거북선으로 보이는 STATE BARGE 라고 적힌 3장 삽화를 첨삭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위 지도의 빨간색 원안에 표시된 곳이 대마도인데, 한국 해협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는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색깔로 분류했는데, 모두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이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식 발음인 ‘Dagelet(다제레트)’, 울릉도는 ‘Argonaut(아르고노우트)’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J.H.Kernot가 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일본 자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도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적잖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일본 고지도나 고문서에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했던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또 세계인들도 오래전부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 고지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대마도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정치가.)이 조선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 에는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하여 '일본 영토' 가 아닌 '침략 대상' 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나던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명기돼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것으로 알려진 대마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일본에 편입됐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독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일본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려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국 사람들을 경계한다.   양심이  두려운거지,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사부 영정,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49.5㎞, 히타카쓰항까지 배 타는 시간은 1시간10분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 1.7배 크기인 섬이다.

제주보다 가까운 섬 대마도,

1)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말까지 대마도는 한국의 경상도 계림(신라)의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2) 대마도 원주민들의 혈액 DNA가 한국인과는 100% 동일하여도 일본인들과는 30%가 같지 않다.

3) 대마도를 지배 했던 소씨(蘇)는 진주가 본관인 한국 성씨이다.

4) 삼국시대에는 진도라는 우리의 영토로 불리었다.

5) 신라 때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된 신라 국사 박제상 공의 순국비가 있다.

6) 고려 창왕(1389년) 때 박위 장군의 지휘로 왜구의 소굴로 변한 대마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대마도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그 후 조선 태조(1396년) 2차 정벌, 세종(1419년) 이종무 장군의 3차 정벌 후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서약서도 있다.

8)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해 만든 지도(팔도전도, 1592년이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사들에게 내린 하교문,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조선과 대마도를 부자관계로 비유한 퇴계 이황 선생,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외전, 동사강목, 정약용의 비어고에도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조선 왕조 500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11) 1750년 영조 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의 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나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 국내의 많은 역사 기록문에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아래 표시된 부분은 하루빨리 우리가 복원해야하는, 조상이 물려준 우리의 영토이다.

대마도는 한국땅,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영토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 양국 간의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만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최근 이 섬이 한국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2월 8일 일본의 유명 언론 매체 산케이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인들이 대마도에 수많은 땅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표현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고령화와 과소화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일본인이 없어지고 틀림없이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대마도 땅 매입 소식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큰 손들이 대마도의 많은 영도를 사들여서 호텔과 민박 등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대마도가 관광지로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무려 4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와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마도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근거가 존재했습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 팔도총도에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그려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830년에도 일본이 만든 조선국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에 이 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대한민국 땅 독도입니다.


한일 감정으로... 문제는 세계에서 보는 시각이 한국으로 그간 식민지 생활, 그들의 만행으로 잘못됨은 바로 잡히고 반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수수방관 하에 적당한 대응으로 잠자는 사자 건드려 봐야 이로워질게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조국 내가 지킨다고 발언하는대 어느 국민이 머라하겠소 ! ??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능사는 아닐듯...?

이권 그만 챙기고 나라 위한 발언 한번 해보세요 ....정치인님 ????

일본 측과 대화도 간단합니다 ?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일본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국땅,  

대마도 [大馬島]

#대마도 [大馬島] #아시아 #한국 #전라남도 #지리학 #자연지리 #섬 #조선시대 말목장이 있던 섬 #한국의 섬 #진도군 #조도초등학교 대마분교장 #다도해해상국립공원 # 조도면 #기해동정 #고려말기의 왜구 #여말선초 #피왜부로쇄환 #여말·선초의 대마도정벌 #호서사학 #고려말기의 대일관계 #사회과학 #여말선초의 왜구와 그 대책 #조선전기 #대마 1구 #섬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다 #진도의 섬과 일본의 섬 #1971년도의 대마도 #대마리에 97호 #막금리에 47호 #호서사학 #사총 #대마도의 자랑거리 #봉화연기 #종선 운행자 #웰빙 식품 #976년 대마도의 남동쪽 작은 오두막집 #멍굴이 부부 #소마도 #모도 #거차도 #반농반어업 #대마도 한국땅 #삼국시대 역사 #대마도 여행 #대마도 지도 #대마도 정벌 #대마도 날씨 #대마도 관광 #부산 대마도 거리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속한 땅이었으나 점차 일본인들이 거주 하면서 왜구의 땅으로 변했다 #언젠가는찾아야할땅 #관광지# 다케시마 #대마도# 대마도관광# 대마도땅매입# 대마도한국땅 #독도 #역사적자료# 일본불매운동 #한국인관광객40만 #너무 참혹한 전쟁 정유재란 #말도 안되는 인사행정을 시도 #이순신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을 집안배경과 상관없이 배치했다 #그래도 당했다 3아니 우리가 밀렸다 #히데요시 #엄청난 전쟁준비 #부산에 왜적이 침입 #한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수도까지 점령당했다 #선조는 궁문에 자물쇠조차 채우지 못하고 도망을 갔다 #임진왜란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조총은 조선군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군 #전투방식 #가장 먼 곳에서 철환을 쏘고 #다음은 창으로 찌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밴다 #일본에서는 뎃포(조총)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하여 무뎃포(무데뽀)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가야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가야가 열심히 농사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맛있게 밥을 지어놓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밥상을 통째로 먹었다 #오다 노부가야는 서양뎃포 #조총을 일본에 들온 인물이다 #침략한 왜적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자발적으로 왜적에게 투항한 순왜들이 있었다는거 #그 반대로 우리의 편이 되어준 왜적 #항왜들이 었었다는거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 #여말선초 약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가 창궐해 피해가 극심하였다 #고려는 사절 파견 #성보(城堡) 수축 #수군 증강 #화기 개발 등의 왜구의 근절책을 세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의 장군 #태조 이성계(李成桂) #왜구의 피해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 #흥리왜인(興利倭人) #귀화왜인을 우대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땅이 되었다 #대마도주는 소씨(宗氏) #일본사 #가마쿠라막부시대(鎌倉幕府時代)주 #지쿠젠주(筑前州)주 #다사이부소이(太宰府小貳) 무토(武藤)가 그의 가신 소(宗尙重)를 대마도에 보내어 이를 점령하고 #수호대(守護代)로 삼았기 때문에 이후 소씨가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매우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일본 국내의 내환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다 #몰락한 무사와 농민 등 #빈민이 증가해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 공급이 요청되었다 #대마도를 비롯한 삼도(三島 : 對馬·壹岐·松浦地方) #왜구의 근거지가 되어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대마도정벌 #고려 말 조선 초의 수군 확충과 화기 발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 #현종 때는 동여진 해적을 막기 위해 도부서(都府署)를 설치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다 #고려 말에는 도부서를 사수서(司水署)로 개편 #전함들을 건조하는 등 수군을 재정비하였다 #조선도 수군을 강화해 세종 때는 총 72곳에 829척 #병선과 5만 169명의 기선군(騎船軍)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기는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 #20여 종을 제조 #나세(羅世)·최무선 등의 진포싸움과 정지(鄭地) #남해대첩 #화포를 전함에 배치 #왜구를 섬멸 #화약과 화기 #태종 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군기주부가 되어 더욱 개발 #대마도정벌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 창왕때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다 #1387년 왜국 격멸에 큰 공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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