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달려가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행동은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릴 수 있었어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충청남도 예산 출생
본명은 우의, 별명이 봉길, 아호는 매헌,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며 신학문을 배웠으며. 한시에 재능이 있었어요.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은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과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셨어요.
월진회를 만든 목적과 규칙을 적은 것으로 뒤에는 윤봉길 의사를 회장으로 하는 회원 명단이 들어 있어요.
1929년 음력 정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쓴 일기로 곳곳에 민족의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은 1930년 23살이 되던 해에 부인과 두 아이를 고향에 담겨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공장에서 일하거나 채소를 팔면서 정보를 수집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찾아가 직접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마침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상하이 침략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일본 왕의 생일 기념식을 겸하여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윤봉길 의사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의열투쟁 단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를 준비했어요.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하고 선서식을 거행하고, 입단하며 쓰신 선서문을 걸고 찍은 사진이에요.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단원 윤봉길이 1932년 4월 26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다짐을 쓴 입단 선언서입니다.
-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거사 전날,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마지막으로 직접 써서 남긴 약력과 유서가 적혀 있어요
'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이도 만일 피가 잇고 뼈가 있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기발을 놉피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저와 한잔 술을 부서 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우 아비 업슴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잇고 미국에 발명가 에듸손이 잇고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리라.'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1932. 4. 27)
윤봉길의사가 의거 당시 갖고 있었던 지갑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입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시계를 차고 홍커우 공원을 향하셨답니다.
홍커우공원 의거에 사용된 도시락형 폭탄과 수통형 폭탄(모형)으로 천안 독립기념관 제5전시실 나라 되찾기에 전시되어 있어요.
홍커우의거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일본인 대표가 올라오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지셨어요.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진 폭탄으로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어요.
홍커우의거는 성공했지만 자폭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 상해의 일본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다가 김구 선생이 성명을 발표한 후에야 배후가 김구인 것을 시인하였어요.
그 후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홍컹우 공원에서 공개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의사의 순국이 독립운동가들의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점과 국제여론 악화를 우려하여 11월 18일에 오사카에 있는 육군 위수형 형무소로 옮겨 수감됩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고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답니다.
1932년 12월 18일 일본 가나자와로 옮겨 다음날 오전 7시 30분에 총살형이 집행되어 25세의 일기로 순국하셨답니다.
일제는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 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어요.
국내. 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은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봉길과 이봉창이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와 천황을 노렸다,
시대/ 국가/대륙/
1932년 4월 29일
한국
아시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마련된 일본군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의 폭탄에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인 거류민단장이 그 자리에서 죽고 일본군 중장을 비롯한 고위 인사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앞서 이봉창은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천황이 탄 마차에 미치지 못했다. 윤봉길과 이봉창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의거 직후 체포돼 순국했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당시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다양한 매체나 소설, 책 등에서 도시락 폭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도시락폭탄을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전승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오늘날 역사교과서에서도 잘 소개가 된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그정도이고,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어 3가지 정도 정리해봤습니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상해 홍구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안에서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우렁차게 외쳤다.
도시락폭탄은 일본 요인 7명을 몽땅 쓸어버렸다. 상해 거류민회 위원장 가와바다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시라카와는 열두 차례에 걸친 복부수술을 받았으나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애꾸가 되었고 9사단장 우에다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이는 독립운동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거와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봉길의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20대의 처녀 이화림이다. 그녀는 김구의 비서로 윤봉길을 뒤따르며 몰래 수행했는데 비밀을 유지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봉길은 이 거사로 중국 100만대군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상해의 중국사람들은 가난하고 초라한 조선사람을 만나면 '망꿔노'라 하며 깔보기 일쑤였다. 또 일제가 조선인 밀정을 곳곳에 풀어 공작에 이용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보면 일제의 밀정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중국인이 많았다.
사태의 진상을 잘 모르는 중국 민간인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조선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이 거사에 감동하여 조선인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냈다. 흥구공원 부근에 사는 중국의 혁명문학가 노신도 이 소식을 듣고 통쾌하게 여겼다. 또 김구가 배후인물로 알려지자 국내외를 통틀어 김구의 정치적 입지와 인기가 높아졌다.
수통 형 폭탄의 진실
우선 첫 번째 잘못 알려진 사실중에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것으로 보이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부분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당일에 김구선생과 아침을 함께 먹고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장군의 주선으로 마련된 수통 형 폭탄이랑 도시락 폭탄을 챙겨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수통 형 폭탄은 거사용으로 사용된것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오전 11시 40분경에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에 윤봉길 의사는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한 것일까?
두번째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이야기인데요, 상해 홍구공원에 가면 한쪽에 매원이라는 이름 붙여진 곳에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게되면, 윤봉길 의사 의거비가 나옵니다.
조선족 현지 가이드들은 바로 의거비를 설명하면서 이곳이 폭탄을 투척했던 곳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고, 노신의 묘가 있는 곳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운봉길 의사 체포사진의 진실
마지막으로 폭탄 투척 이후 윤봉길 의사가 체포 당하는 당시 사진은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오류중 하나 입니다. 사진은 옷이 멀쩡한 채로 중절모를 들고 약간 겁먹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윤봉길 의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의문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복장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당시 군경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고, 결국에는 그자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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