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5일 목요일

"위험한 발상의 트럼프, 대선 당시 '재선하면 한미동맹 날려버릴 것' 언급했다",

"위험한 발상의 트럼프, 대선 당시 '재선하면 한미동맹 날려버릴 것' 언급했다",

워싱턴포스트, 자사기자 책 인용해 보도.."나토 탈퇴도 추구 시사",
동맹 경시·방위비 분담금 불만 반영된 듯.."에스퍼, 민주당 응원" 일화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작년 11월 대선 과정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한미동맹을 날려버리겠다(blow up)는 식으로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13일(현지시간) 자사 기자인 캐럴 리어닉과 필립 러커가 쓴 '나 홀로 고칠 수 있어 : 도널드 트럼프의 재앙적 마지막 해' 저서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이 책은 트럼프의 집권 마지막 해인 작년에 미 전역을 휩쓴 대유행 대응 과정과 대선 당일 분위기, 이후 대선 불복 등 상황을 담고 있다.

책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탈퇴하고 한국과의 동맹을 날려버리는 것을 추구하겠다고 시사했었다고 돼 있다.

일부 참모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대선 전에 이들과 관계를 찢어버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래, 두 번째 임기에. 우리는 두 번째 임기에 이를 할 거야"라고 말했다.

이 책을 소개한 WP 기사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왜 동맹인 나토나 한국과 관계에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다

다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내내 동맹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꺼내 들고 나토와 한국 등 전통적 동맹국들의 방위비 증액을 강력하게 압박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에 필요한 방위비 분담금을 최대 5배 수준으로 올릴 것을 요구했고, 대선 당시까지 이 협상은 타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또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비용이 과하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고, 사석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를 종종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마크 에스퍼 당시 국방장관이 선거 당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로 나선 민주당을 응원하고 있었다고 측근에게 말했다는 일화도 담겼다.

에스퍼 전 장관은 과거 미 상원의 참모일 때 상원 의원이던 바이든 대통령, 토니 블링컨 현 국무장관과 함께 일했는데, 이들이 국가 안보 강화 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진지하고 안정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에스퍼 전 장관은 인종차별 항의 시위 진압을 위한 군 병력의 투입 문제,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군기지 명칭 변경 문제 등을 놓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에스퍼 전 장관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후 자신을 해임할 것임을 알고 사표까지 준비해 뒀지만, 대선 후 최소 며칠 간이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희망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기간 군에 무슨 일을 할지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스퍼 전 장관은 자신이 대선 다음날 해임될 것에 대비하고 있다는 내용의 NBC방송 보도가 나오려 하자 참모들에게 이를 막기 위해 설득하라고 지시해 보도를 보류시켰다는 내용이 책에 담겼다.

책에는 또 마크 밀리 합참의장 역시 승자가 확정되지 않은 대선 당일 밤 퇴역한 군인인 한 친구로부터 헌법에 충성해야 한다며 "당신은 이 공화국의 안정성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상기시켜 주는 전화를 받았다고 돼 있다.

이 친구는 "국방부에는 4류의 사람들이 있다.

또 백악관에는 5류의 사람들이 있다"며 "당신은 완전히 무능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참고" 버텨라"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동맹 韓美同盟,

시대/ 유형/ 분야,

현대

개념용어

정치·법제/외교

북한의 남침과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동맹.

목차

  1. 개설
  2. 연원 및 변천
  3. 내용
  4. 현황
  5. 의의와 평가

개설

한반도에서 북한의 전쟁 재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과 논의한 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체결되어 한미동맹관계는 법적·국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되었고,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정식 조인되었으며,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부로 발효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한미 간에 아래와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6.25전쟁이 개시된 후 교착상태에 빠진 남과 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시작한 후 밀고 당기는 교전 속에서 난항을 거듭하다가 10개월이 경과한 1952년 5월 의사일정과 휴전선 획정문제, 감시위원단 구성문제 등에 관해 합의했으므로 포로송환 문제만이 미해결의 난제로 남게 되었다.

유엔군 측은 많은 북한군 포로가 전쟁 중 강제 징집된 뒤 투항하였고, 또한 한국군 포로 가운데 많은 수가 북한군에 강제 편입된 사실, 그리고 중국군 포로 가운데에는 중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사실들을 이유로 포로 송환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북측에서는 무조건 강제송환을 주장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휴전회담의 교착상태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2가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1952년 12월 3일 제7차 유엔총회에서 포로송환에 관한 결의안을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이는 송환위원회를 조직하고 포로를 120일간 설득하여 그들이 희망하는 장소로 송환하자는 결의였지만 북측에서 반대하였다.

또 하나는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 점이다.

미국과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모두 교체된 시점인 3월 28일 북한 측에서 휴전회담 재개를 제의하여 4월 휴전협정이 재개되었다.

중국은 포로송환 문제에 대해 양보의사를 나타냄으로써 협상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다.

공산측은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에 맡겨, 그들의 귀국문제를 정당하게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의를 하였던 것이다.

4월 11일 상병포로교환협정이 성립되어 협정각서가 교환되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롤백정책에 밀린 공산측 양보로 6월 8일 포로의 자유송환 원칙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어 휴전협정은 사실상 매듭지어졌으며 서명 절차만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6월 18일 경이면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휴전을 시종일관 반대해 온 이승만 대통령이 6월 18일 새벽 북한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약 2만 6천명을 과감히 석방하는 일을 감행해 공산 측의 강력한 군사공세를 불러일으키는 등 잠시 휴전성립에 암운을 던져 주었다.

이에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을 약속하면서 이승만을 무마시켜 “휴전협정 체결에 더 이상의 방해는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이승만으로부터 얻어냈다.

이렇게 미국은 마지막 고비를 넘겨 7월 22일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각각 2㎞씩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하여 7월 27일 공산군 측의 북한군 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정전협정)이 체결되어 3년 1개월에 걸친 승패 없는 전쟁은 끝이 났다.

남한정부는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도아래 북진을 외치며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내용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이 북한의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전쟁에 자동적으로 개입하는 내용을 상호방위조약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자동개입 조항이 포함되면 상원의 비준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한국정부를 설득했다.

체결된 조약의 제2조에서 “어느 1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하며 “무력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며 강화시킬 것이”라고 합의했다.

그러한 위협이 있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3조에는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되어 있다.

전쟁발발시 양국은 상호협의를 거친 후에도 각자의 헌법상 절차를 경유하도록 함으로써 자동개입 보장은 유보했다.

이렇게 자동개입 조항은 빠졌지만 미국은 한국 정부의 우려를 고려해 2개 사단을 서울과 휴전선 사이 서부전선에 배치했다.

이로써 북한이 남침할 경우 휴전선에 배치된 미국군과 충돌함으로써 미국이 전쟁에 자동 개입하는 현실적 조치(인계철선: tripwire)가 확보되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이 조약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조약만으로 한미동맹이 법적으로 완벽하게 기능할 수는 없었다.

한미연합방위체제의 법적 근간인 상호방위조약을 중심으로 이미 체결된 정전협정과 1954년 11월 17일 ‘경제 및 군사문제에 관한 한미합의의사록(Agreed Minute Relating to Continued Cooperation in Economic and Military Matters)’, 1966년에 체결되고 1967년부터 발효된 ‘한미주둔군지위협정’(The US·ROK 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로 약칭됨) 등 정부 간 및 군사당국 간의 각종 안보 및 군사관련 후속 협정과 어우러져 한미동맹의 제도적 틀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상호방위조약이 북한의 남침을 막는데 주목적이 있었다면, 한미합의의사록은 이승만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 국군 등 군사당국 간 또는 실무부서 간의 전시비축물자, 미군장비의 설치, 군사판대 및 기술지원, 작전, 정보협력 등 실무협정체결이 잇달아 한미연합방위 능력 제고에 기여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라 양국은 한미안보협의회(SCM)와 한미군사위원회회의(MCM) 등을 설치해 실질적인 안보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주한미군은 1945년부터 지금까지 60여 년간(잠시 철수했었던 1949년 6월부터 1년간 제외) 대한민국 안보에 직접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안보의 핵심 축으로 전쟁억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오늘날까지도 미국은 유사시 미 해군의 40%, 공군의 50%, 해병대의 70% 이상의 대규모 증원전력을 전개하도록 계획하고 훈련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1950년 6.25전쟁 이래로 지난 6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현황

한미동맹 50여 년의 역사에서 미국은 한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

안보의 일부분은 미국이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경제성장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생존을 담보하는 ‘생명줄’이자 압축성장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한미동맹은 그 효율성과 정합성으로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성공적인 동맹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한미동맹은 대개 굳건했지만 한미관계에 불화와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이래 반미주의가 이슈가 되기도 했다.

1999년 9월 9일 AP통신이 크게 보도하면서 문제가 된 노근리양민학살사건(1950년 7월)으로 반미운동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2002년 6월 일어난 두 여중생의 미군장갑차에 의한 사망사고에 이은 추모행사가 대중적인 반미시위와 반미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분위기 아래 치러진 그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대미자주성에 입각한 ‘자주외교노선’을 내세웠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이후 한미동맹이 균열 조짐까지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한미 양국의 동맹은 2001년 9·11테러 이후 국내외 안보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한국의 국력신장에 따라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미국과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미래지향적 동맹관계로 발전 강화시키고, 양국사이에 형성된 역사적 신뢰를 바탕으로 전략적 동맹관계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2008년 4월 중순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한미관계를 기존의 ‘전통적 우호관계’에서 ‘21세기 전략동맹’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다.

21세기 전략동맹이란 단순히 군사동맹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포함하는 ‘포괄동맹’의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한미 양국이 한반도 평화수호 차원을 넘어 테러·기후변화·인권·국지분쟁·에너지 안보 등 다양한 국제적 현안에 함께 대처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2009년 6월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은 10개 단락의 ‘한미동맹(을 위한) 공동비전(Joint vision for the Alliance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을 발표했다.

부시행정부와 합의했던 것을 계속 지속시키기로 합의했다는 평가이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제공할 핵억지력과 관련해 “양국의 안보 이익을 유지하는 동맹 능력이 뒷받침하는 강력한 방위태세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 억지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은 이와 같은 보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동맹을 통해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에 이르도록 한다”고 나와 있었다.

양자·지역·범세계적 범주의 포괄적 전략 동맹을 구축하고 녹색성장·우주협력·청정에너지 등 미래·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협력으로까지 확대하며 테러리즘·대량살상무기 확산·기후변화·전염병 등 범세계적 문제에 협력하는 내용까지 포괄했다.

안보동맹 차원을 뛰어넘어 명실상부한 전략 동맹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제 한미동맹은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포괄적·역동적·호혜적 동맹관계’로 발전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북한이 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미군철수를 제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사회 일각에서도 즉각적인 미군철수가 비록 구호의 차원이지만 등장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안보의 불안요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미동맹을 맹신해 스스로의 국가안보를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미동맹 무용론은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으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이 있다.

2009년 당시 동맹해소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급진론과 한미동맹에 어떠한 수정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현상유지론 사이에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냉전시대에 형성된 한미동맹의 틀은 21세기에는 탈냉전시대의 조류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국관계는 이전의 다소 일방적이며 의존적이고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며 동맹관계는 한반도 안보를 넘어선 지역안보 동반자로서 그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2009년 당시 결정된 전시작전통제권의 대한민국으로의 환수 문제도 한미간의 전통적 우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유연성을 높는 방향으로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출처 ^ 참고문헌,

[조정기의 한미동맹 (2003·2008)』(이수훈, 경남대학교출판부, 2009)

[한미동맹은 영구화화는가』(서재정, 이종삼 (역), 서울: 한울 2009)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정욱식, 한울, 2008)

[The Korea Knot: A Military·political History, Rev. ed. (Carl Berger,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64)

[‘한미동맹을 위한 공동비전’ 전문」(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통일시대』, 2009. 7)


#트럼프 전 대통령 #캐럴 리어닉과 필립 러커 #집권 내내 동맹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꺼내 들고 #나토와 한국 등 전통적 동맹국들의 방위비 증액을 강력하게 압박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에 필요한 방위비 분담금을 최대 5배 수준으로 올릴 것을 요구했고 #대선 당시까지 이 협상은 타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비용이 과하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고 #사석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를 종종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마크 에스퍼 당시 국방장관이 선거 당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로 나선 민주당을 응원하고 있었다고 측근에게 말했다는 일화도 담겼다 #에스퍼 전 장관 #과거 미 상원의 참모일 때 상원 의원이던 바이든 대통령 #토니 블링컨 현 국무장관과 함께 일했는데 #이들이 국가 안보 강화 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진지하고 안정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에스퍼 전 장관은 인종차별 항의 시위 진압을 위한 군 병력의 투입 문제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군기지 명칭 변경 문제 등을 놓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재선에 성공하면 한미동맹을 날려버리겠다(blow up)는 식으로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13일(현지시간) 자사 기자인 캐럴 리어닉과 필립 러커가 쓴 '나 홀로 고칠 수 있어 #도널드 트럼프의 재앙적 마지막 해' 저서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트럼프의 집권 마지막 해인 작년에 미 전역을 휩쓴 대유행 대응 과정과 대선 당일 분위기 이후 대선 불복 등 상황을 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탈퇴하고 #한국과의 동맹을 날려버리는 것을 추구하겠다고 시사했었다고 돼 있다 #일부 참모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대선 전에 이들과 관계를 찢어버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래 두 번째 임기에 #우리는 두 번째 임기에 이를 할 거야"라고 말했다 #이 책을 소개한 WP 기사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왜 동맹인 나토나 한국과 관계에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다 #국방부에는 4류의 사람들이 있다 #백악관에는 5류의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완전히 무능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버텨라"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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