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형
제도
시대
현대
성격
법제, 개념
시행일시
1883년 1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
고대사회 때부터 각 집단은 그 집단을 상징하기 위하여 동물·해·달과 같은 징표를 사용하였는바, 염색과 방적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러한 징표를 종이나 천에다 표시하게 된 것이 깃발이다.
그러나 이러한 깃발이 국가를 상징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때 쓰인 삼색기가 처음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가면서 태극도안의 기를 사용한 것이 국기 사용의 효시가 된다.
그러나 태극도안의 태극기가 국기로서 공식화된 것은 이듬해인 1883년 1월이다.
그 과정을 보면,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국기 제정문제가 논의되다가, 1882년 박영효가 고안한 태극무늬의 기를 고종이 “태극 주위에 4괘(四卦)를 배(配)한다.”고 공포함으로써 정식 국기로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공포 당시 태극기의 규격이나 형태에 관한 정확한 명시가 없었으므로, 태극기는 각양각색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1949년 2월 국기시정위원회의 결정으로 규격과 문양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현재 쓰고 있는 국기이다.
국기는 한 나라의 상징물이므로 일반적으로 그 존엄성의 유지를 위하여 법률로써 관련사항을 규정하는데, 우리 나라 국기에 대하여는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문’·‘국기에 대한 경례방법’·‘국기의 제작·게양법’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기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에 대하여는 <형법> 제105·106·109조에서 규율하고 있다.
제105·106조는 모욕을 목적으로 우리 나라 국기의 손상·제거, 또는 더럽히거나 비난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였으며, <형법> 제109조는 외국의 국기에 대한 동일한 행위를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신라시대부터 우리 조상이 사랑했던 전통무늬인 태극을 주된 문양으로 함으로써 민족전통에 합일하는 국기이다.
특히, 태극기는 1883년 공포 이후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까지 28년 이상이나 대내외에서 국기로서의 구실을 했고, 민족항일기를 통하여 국권회복의 상징이 되었으며, 피로 얼룩진 항일투쟁적 역사성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가 전통적인 태극기를 국기로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북한의 깃발은 아무런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소련군정 초기에 북한이 각종 행사에 태극기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후 1882년 중국 청나라의 마건충(馬建忠)이 청나라의 국기를 본받아 조선의 국기를 만들 것을 강요하자,
이에 분개한 고종이 청나라의 국기를 따르지 않고 청색과 적색으로 이루어진 태극원과 사괘를 그려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내렸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조약 조인식에서 고종의 명에 따라 역관 이응준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며, 이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도일할 때에도 태극기를 그려 사용하였다.
여음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을 비롯해서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 전설의 인물인 ‘아랑(阿娘)’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의미 없는 사설(nonsence verse)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을 할 뿐이다.
즉, 아리랑의 여음은 여러 가지이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노래의 머리에서 앞소리 또는 내드름소리로 쓰이는가 하면, 노래의 꼬리에서 뒷소리 또는 받음소리로도 쓰이고 있다.
또는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다른 노랫말로 넘겨받는 넘김소리로도 쓰인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당연히 여음이 노랫말에서 차지할 자리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다른 민요의 여음은 대체로 일정한 마디(節)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쓰임새며 노랫말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가 일정하다.
아리랑의 경우 여음은 다른 면의 다양성과 더불어 마디 구성상의 다양성을 아주 특이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 당다중 쓰리 당다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밀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어헐사 아라성아. (여주)
이와 같이 다양한 여음은 ‘아·이’, ‘아이·으이’, ‘ㄹ·ㅇ’, ‘ㄹ·ㅅ’ 등의 대립적 내지 대조적 음운교체의 엮어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그와 같은 대립·대조적 음운교체가 한국인의 시적(詩的)인 ‘쾌감있는 음상(音相)’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리랑 여음의 어원론적 설명은 그 같은 음운들의 엮어짐이 뜻이 있는 실사(實辭)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고, 또 그 시도에 따라 이설이 분분한 아리랑 기원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我離郎’·‘啞而聾’·‘我難離’ 같은 보기는 아리랑의 여러 가지 여음을 각기 실사로 보고 한자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여음 해설을 계기로 삼은 여러 가지 아리랑 기원론은 아리랑이라는 전승 자체 및 일부 노래말에 얽혀서 전하여져 있는 전설(설명 전설)과 함께, 크게 본 아리랑 전승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아리랑 전승은 아리랑이 노래말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말이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 주축을 세워서 각종 기원론과 전설도 의젓한 아리랑 전승의 일부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기원론은 진지한 노력이나 부분적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어원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론의 언어학적인 타당성과는 별도로 정서론 내지 주제론적인 타당성은 상당한 정도로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어원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투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전승 내부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기원설은 대체로 보아 아리랑을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진 노래로, 그러면서 아리랑을 비창감이 진하게 서린 노래로 부각시키려는 두 가지 경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전자를 아리랑 기원설의 역사주의, 후자는 비창지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두 가지 경향성을 함께 고려할 때 아리랑 기원설에는 민족의 역사성 짙은 상흔이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아리랑 기원론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적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아리랑을 푸념·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을 풀어나가는 양식상의 특색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아울러, 서러움·애달픔·원한을 말하게 되며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며,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적 원상의 노래인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형식과 수사
아리랑의 시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 곧 두 줄 시라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간결한 시형식이다.
아리랑의 시형식은 민요형식의 단순성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여음은 따로 계산하고 뜻 있는 실사로 엮어진 시행만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줄 시로서 한 줄이 대체로 3∼5음보 정도로 엮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모두 10음보를 넘지 않는 짧고 간결한 시형식을 갖추고 있다.
예상되는 중문과 복문 이 외에 단문으로만 된 두 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아리랑의 단순성은 더욱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줄 시는 <캐지량>이나 <강강술래>의 한 줄 시에 비하면 양식의 안정도 크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 줄 시와 네 줄 시에 견주어서 기억하기 좋고 즉흥성을 가미하기 쉽다는 양식상의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민요 두 줄 시는 속담이나 속신 등 이른바 ‘민중의 신념’ 또는 ‘민중의 판단’이라고 총칭할 수 있는 ‘문장 구술 전승’과 한 범주에 들거나 아니면 서로 이웃할 수 있는 서술형식상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팥 심은 데 팥나고 콩심은 데 콩난다.”고 하는 속담이나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 라는 속신 따위는 아리랑의 두 줄 구성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속신과 속담은 ‘민간 수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최소 단위이다.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민간 수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은 실제로 민간 수사를 총망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이 아리랑이 지닌 형식상 또는 수사상의 큰 장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리랑의 배후에 속신과 속담 등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리랑이 각종 민간 수사의 보고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그 양식이 단순하여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과 함께, 속담이나 속신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의 보고라는 사실이 어울려서 무수한 아리랑 노래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노래말의 문체적 원천 내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노래말이 오늘날 많게는 한 지방의 경우 400∼500가지가 보고되어 있다.
노래말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요는 그렇게 다양하게 계속 지어지고 있는 바탕, 큰 시문법이나 초구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에서 대구법이 가장 우세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을 ‘대구적 두 줄 구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구는 대조와 대비의 대구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존재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이 대조의 대구법이라면, 이와는 달리 큰 것들 사이의 공질성이 강조된 것이 대비의 대구법이다.
“앞남산의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정든님 두 팔은 내허리를 감는다.”가 전자의 보기라면, “오릉촉단(吳綾蜀緞) 능라조(綾羅調)로 날 감지 말고 대장부 긴긴팔로 날 감아 주게.”는 후자의 보기로 알맞을 것이다.
두 가지 노랫말에서 다 같이 ‘임에 의한 허리감기’는 사람이 충족된 상태를 뜻하고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임에 의한 허리감기’와 동형동질의 것을 찾아 짝을 맞추고 있고, 이와는 달리 충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행이질의 것을 찾아서 짝맞추기를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이것을 아리랑의 짝맞추기, 정확하게는 아리랑 두 줄 대구의 짝맞추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짝맞추기에 의해 아리랑은 ‘도시(부)·농어촌(가난)’, 사회계층과 신분계층의 ‘위·아래’,‘가짐·안 가짐’, ‘밝음·어둠’, ‘잘남·못남’ 등 종횡무진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다.
그 짝 맞추기에 따라 아리랑은 때로는 밝은 양지의 노래가 되고 때로는 어두운 음지의 노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짝맞추기 대구법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반복법·말놀음·쌍소리·문답법·독백체 등이 간간이 활용되면서 무수한 변이를 낳게 되고, 오늘날 3,000여 가지가 넘는 노래말이 수집, 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아리랑은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온갖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장단과 가락
민요·신민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긴아리랑>·<남도긴아리랑>·<해주아리랑>은 부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어랑타령(신고산타령)>·<긴아리>·<자진아리>는 오늘날 아리랑으로 꼽지 않고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엇모리 4장단에 메기고, 엇모리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종지하며 미는 작게 떨고 레에서 도로 꺾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것보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불리는 것이 훨씬 향토적인 맛이 난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강원도 긴아라리를, 촘촘히 엮어 엮음 아라리로 불려지던 것이 세상에 퍼진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자유리듬으로 촘촘히 노랫말을 엮어가다가 세마치 8장단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하고 받는다.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엮지 않는 것은 매우 처량한 느낌을 주며 엮는 것은 노랫말을 빠르게 촘촘히 엮어나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어 감정을 퍼버리며 뒷소리로 느리게 흐느끼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서울의 <구조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며, 장단은 세마치로 되어 있으나 흔히 4분의 3박자로 불러 신민요의 리듬으로 부른다.
세마치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는 경토리로 되어 있으며,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에 성창하던 <구조아리랑>은 이 아리랑과 장단과 토리가 같으며 곡조가 약간 다를 뿐이다.
<긴아리랑>은 <구조아리랑>과 장단과 토리는 같으나 훨씬 느리고 곡조가 약간 변동되어 있다.
<아롱타령>은 장단과 토리는 <구조아리랑>과 같지만 곡조가 높은 음역에서 부르도록 바뀌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서울의 <아롱타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장단은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어헐시구 아라리가 났네.”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진도아리랑>은 <남도긴아리랑>을 변창한 것이다. 8분의 9박자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뒷소리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고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라·시·도로 되어 있고 라로 마치며 미에서 세게 떨고, 도에서 시로 꺾고 레보다 낮은 음에서 도·시로 흘러내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이 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느낌을 준다.
<남도긴아리랑>은 서울 <구조아리랑>을 육자배기토리로 바꾼 것으로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다양성과 초역사성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전통민요이다.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자연적 습득 등과 같은 민속성 외에 지역공동체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 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 간다.”,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매인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월 15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대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직업공동체나 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하게 아리랑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랑은 분명히 공동체의 휘장(徽章) 내지 민중의 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애원성(哀願聲)이나 한탄의 소리인가 하면, 항거요 비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념의 하소연인가 하면 강한 삶의 의지의 표백이었고, 모가 난 말싸움인가 하면 익살떨기의 넉살부림이기도 하였다. 구시렁거리는 불만인가 하면 지독한 악담이요 욕이요 쌍소리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집단과 민중의 휘장이라고 하지만, 아리랑은 이 같은 다양한 목청과 소리투로 그 휘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바로 그것이 지녔던 집단 내지 민중의 휘장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문화인 민요운동을 우리 민요사에서 유일하게 도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의 민속성에서 사회와 역사의 민속성을 향하여 아리랑은 자신을 확대할 것이다. 아리랑이 근대사를 살게 된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랑의 집단성은 앞소리와 뒷소리, 매김소리와 받음소리 등으로 나뉘어 부르는 형식에도 곧잘 드러나 있다. 한데 어울려 일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의 가름을 따라 제창이나 윤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 그 집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강한 개인성을 갖추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주관성 높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는 서정시이면서 원한과 아픔을 풀이하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였다.
유사 대화체나 독백체가 이 속성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떼소리’ 또는 ‘무리소리’이면서도 ‘혼자소리’이기도 하다.
절로 한숨 짓듯이, 더운 숨결을 토하듯이, 혹은 매인 중치를 터놓듯이 혼자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소리꾼은 그 혼자소리로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소리 아리랑은 삭임의 소리, 푸는 소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성과 개인성은 아리랑이 지닌 또 다른 원심력과 구심력이지만, 그 양면성을 갖추고 있는 데에, 아리랑이 지닌 복합성을 읽게 되는 단서의 하나를 얻게 된다.
밀양아랑제 / 밀양아리랑
아리랑은 결코 단일한 장르의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그 다양한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적응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과거의 화석으로 전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로이 새 삶을 얻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단일한 민요의 소재를 들자면 아리랑만큼 질기고 굵은 맥을 지켜온 보기를 구할 수 없다. 그것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더불어 제기하는 소재사의 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일의 한국의 시대, 그리고 사회에서 아리랑의 소재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재사의 맥이 더욱 굵어지고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인에게는 자칫 본질적이거나 철학적일 수도 있는, 현상적이거나 시대적인 것일 수도 있는 이 복잡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일은 그 용어의 뜻과 유래를 말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의 기원이나 어원 문제는 1930년대 연구 초창기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인 관심거리로, 실로 다양한 견해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노래의 반복 후렴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노래가 불린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이겠지만, 기록 자료로서 가장 앞선 것은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실린 「농부사(農夫詞)」(1790)의 후렴인 듯하다.
어휘와 표현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조선시대 후기 전반적인 사회 해체 과정 속에서, 농삿일을 장려하고 농민을 독려하기 위한 국문시가 창작 등 일련의 경향과 맞닿아 있다.2) 한시 형식은 물론 강조하는 내용도 상층 사대부의 것이다. 또한 제목이 말하는 대로 '농부의 노래'를 직접 옮겨 온 부분은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라는 후렴 부분 정도이다.
이로부터 18세기 후반경에 농부들은 이미 '아리랑'과 유사한 소리를 후렴으로 하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는 점, 이 노래는 공동체의 생산 활동과 관련된 민중의 소망이 담긴 흙의 노래였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사회적 요구와 추세에 따라 농민을 넘어 한시
담당층으로 하여금 가창(歌唱) 형식의 한시를 창작하게까지 하였다는 점 등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아로롱'은 농부 노래의 후렴구를 음차(音借)한 것일 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불러들여 농사일을 더불고자 하는 의도로 부르는, 농민들의 별 뜻 없는 가벼운 흥얼거림이다. 그런데 아리랑 연구자들은 크게 역사적 사건이나 사물 혹은 인물에 관련지어서 아리랑의 기원을 찾거나,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의 발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두 갈래로 기원론의 방향을 잡고 있다.3) 이를 두고 호사가적 논자들의 견강부회라고 지나치게 몰아세울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본래는 특별한 의미 없이 구사되곤 했던 후렴구 '아리랑'이, 구한말 대원군 섭정기와 일제 강점기, 민족 해방과 한국전쟁 등 우리 근대사에서 굵직한 민족의 위기를 거쳐 오는 동안 각 시기마다 향유자들에게 나름의 절실한 소리로 수용되었던 양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리랑의 기원을 역사적 현실로서 의식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이든, 시대적 부조리로 말미암은 정한(情恨)의 노래라고 인식하든 그 다양한 견해는 그만큼이나 풍요로운 아리랑의 내용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며, 다양함 자체가 아리랑의 실체인 것이다.
위기와 고난의 장면에서 힘을 발휘한 아리랑 노래는 비관적인 삶을 해학적으로 전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느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해학이라는 장치는 그것을 통해 슬픔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을 차단해 주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쫓기는 이들의 쓰라리고 처절함을 표현할 때조차 절망 자체가 아니라 절망을 이기려는 굳센 각오를 동시에 표현한다. 아리랑의 생명력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고정된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민족·민중의식의 성장과 함께 시대사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역동적 산물이다.
민중, 민족의 노래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團成社)에서 처음 상영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문화사적으로나 사회사적으로 충격을 던진 일대 사건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이 영화는 이후 2년 6개월에 걸쳐 전국 각처에서 상영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 같은 흥행에 힘입어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신아리랑」, 일명 '나운규의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앞길이 양양한 청년 영진(永鎭)은 불우한 현실 속에서 그만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가, 악질 지주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동리 사람들은 물론 사랑하는 연인마저 유린하는 오가(吳哥)에게 이성을 잃고 낫을 휘두르게 된다.
상대의 피를 보고서야 문득 정신이 돌아온 영진이 일본인 순경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 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던 그 마지막 장면, 바로 그 순간 흘러나오던 주제가인 「신아리랑」을 관객들은 뜨거운 공감의 눈물과 함께 소리죽여 합창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해 나운규가 몇 겹으로 걸쳐 놓은 영화 속 우의법(寓意法)은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더욱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응축된 감정은 마침내 주제가를 통해 분출된 것이다.
「신아리랑」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그때까지 불리던 전통 민요의 가락이나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 3/4박자로 편곡된 신민요로서, 그 주제 또한 본래의 것에서 멀어져 비창감이 깃든 한(恨)의 정서를 부각시켰다.
나운규의 「신아리랑」이 '아리랑'의 정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확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한편에서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아리랑」의 정조가 '아리랑'의 전부는 아니며 그 전체의 성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신아리랑」은,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갈래로 내용과 형식이 재창조되면서 성격을 형성해 온 중요한 구비문학으로서의 민요가, 일제 침탈의 시기인 20세기에 들어 영화라는 예술장르에 걸맞게 변형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나운규의 『아리랑』이, 당시까지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그리 보편화하지는 않았던 민요 '아리랑'을 역사와 사회의 표면으로 부각시키면서 확장기와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등장하기 이전의 '아리랑'의 기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리랑'은 특정한 노래 이름이 아니고 유사한 경향성을 띠는 일군의 작품 명칭도 아니다. 그 명칭이나 가락, 후렴 등이 오랫동안 민요생활권에 내재해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 한 지역이나 한정된 주제를 넘어 유동민요4)로서 전파되고 성격을 형성했다.
앞서 살핀 것처럼, 18세기 이후 농민이 겪은 사회적 체험의 질적 변화와 함께 평민의식이 확산되고, 19세기 후반 민중의식이 성장하면서 근대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과거 농업생산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격심한 사회변동과 긴박한 체험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민요 양식이 요청되었고, '아리랑'은 각 지역에 분포하는 개인적이고 소박한 노래와 더불어 보편적 사회상을 담은 유동적인 노래로서 이에 부응했던 것이다.
19세기말 이후 20세기 초엽에 유행한 '아리랑'은 근대민요5)의 대표격이 되었다. 근대 생활과 근대 사회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 점에서 그러하다.
노동과 행사, 생활 속의 의식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비기능요로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으며, 일상의 갈등과 고민을 구체적으로 의미화하여 현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짧고 간결한 형식으로 역설과 해학의 어조를 유지한 점도 시대적인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할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바야흐로 근대 생활의 만화경"이었던 것이다.
'아리랑'은 시대상을 단순히 반영하거나 사회 변화를 인식하기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극적 현실을 형상화하거나 항거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사회정신을 이끄는 적극적이고 중요한 구실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우리의 민족문화 내지 민족성 말살 정책 가운데 하나로 아리랑의 탄압과 변조를 일삼았다.
유흥적이고 찰나적 풍조의 잡가를 앞장서 보급하면서 '아리랑'의 가사와 곡조를 왜곡해 그 성격을 변질시키고자 한 것이다.
일제의 의도에 맞서려는 우리의 노력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아리랑' 개작 운동 및 장르 확산 운동을 벌여 민족의 감정과 풍속 변화를 민요가 주도하도록 하였다.
소설과 연극, 영화 등 여러 가지 예술의 영역에서 '아리랑'이 관련을 맺게 됨으로써 '아리랑'은 민요 생활층의 범위를 넘어 더 넓고 큰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영화 『아리랑』을 통해 비애와 감상주의에 젖은 무기력한 정서가 퍼져 나간 점은 이처럼 '아리랑'이 민족의 감정을 대변하는 예술운동의 중심테마로 부각되면서 나타난 일면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의 민족적 성격이 두드러진 곳은 멀리 해외 망명지에서였다. 만주와 북간도 등지에서는 항일의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개작 가사가 불렸으며, 고국을 그리면서 민족의 시련을 항일 투쟁의식으로 집약하는 사설들이 등장했다.
여느 민요처럼 흙의 노래, 노동요에서 시작해 민중의 개인적 회한가 내지 자탄가(自嘆歌)로 존재했던 '아리랑'은, 20세기를 전후하여 근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민족의 시련을 집약해 전달하면서 세태 풍자와 항거 의지를 고취하는 민족의 노래로 변모하게 되었다.
「신아리랑」을 거치면서 한편으로 상업주의의 물결을 타고 대중가요의 길을 가게 되거나 실용적 기능을 담은 사설도 출현했는데, 이는 '아리랑'의 범민족적 확산과 유행 현상에 편승한 한 예일 뿐이다. 큰 흐름으로 보면 시대적인 각성과 민족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채 시대적,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근대 민요로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단순한 형식' 다양한 주제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아리랑' 노래의 다채로운 세태 풍자가 큰 반향을 끌어오는 것과 함께 특정한 지역 내의 '아리랑' 또는 그 비슷한 노래들이 각기 발전을 보인 것도 민요 '아리랑'만이 가진 특징이다.
사설 구성 원리나 길이, 내용면에서 근대 민요 '아리랑' 일반의 성격과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지역적 특성을 보존한 노래들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데 힘입어 한층 성행하게 되었다.
함경도 원산 지방의 「어랑타령(=신고산타령)」도 그 일종이며, 「정선아라리」를 비롯한 강원도 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경남 「밀양아리랑」이 대표적 예들이다.
「정선아라리」가 대체로 구성지고 느린 가락에 생활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노래하는 독창 방식인 데 비해, 「밀양아리랑」은 남녀관계를 소재로 한 사설을 경쾌한 가락으로 되어 있다.
「진도아리랑」은 부요(婦謠)적 성격과 육자배기 선율구조를 지니고 교환창(交換唱) 내지 선후창(先後唱)방식을 따르는 점이 다르다.
모두 작업의 과정이나 특정 노동에 구속되지 않는 비기능요로 창곡이 가사나 기능보다 중시되는 개방적 성격을 지닌다.7) 전체 비중으로 보면 「정선아라리」를 비롯한 강원도 지역의 노래가 다른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사설의 분화와 구성의 원리 등 내적 요소도 훨씬 복잡하다.
전국적인 전승 범위를 지닌 '아리랑' 일반과 비교할 때 이들 지역적 노래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연행성 혹은 유흥성에 기반한 놀이 문화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지닌다는 사실이다.
지리적으로 격리되고 객관적 조건이 열악할수록 다양하고 독특한 사설을 창출하면서 놀이, 자기 표출 매체로서 '아리랑'을 활용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랑' 전체에서 변함없이 공통되는 점은 그것이 언제나 짧고 단순한 두 줄 형식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것은 기본 성격을 결정짓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속에다 불 담는 것은 시뉘 올캐 아니냐. 내 속 풀어 주는 그대는 낭군님이 아니냐. - 「정선아라리」
주재소가 멀어서 화투치기 좋고요
님의 품이 넓어서 잠자리가 좋아라.
- 「원주아리랑」
모두 2행이 한 짝을 이루는 병행체(竝行體) 형식이다.8) 첫 번째 것은 똑같은 의미나 상황이 행 단위로 거듭되는 대등형 병행체이다.
제1행에 객관적 대타(對他)의 문제를, 제2행은 창자의 관심사인 대자(對自)의 문제를 배열하여 주관적 관심사를 대타의 문제에 의지하여 일반화하려는 의도로 선택된 양식이다.
두 번째 노래는 병치된 사항들의 성격이 서로 대조적 속성을 갖는 대립형 병행체이다. 긍정적 주화제와 부정적 부화제를 한 행씩 배열해 자아와 대상 사이의 괴리/조화 관계를 비교해 드러내 보인다.
이 밖에도 제2행에서 새로운 정보를 삽입해 제1행의 내용을 보충함으로써 완결시키는 보완형 병행체도 보이지만 위의 두 유형이 대부분이다.
'아리랑'의 공식적 2행 구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유형은 연결체(連結體)이다.
아리랑 고개에 북소리 둥둥 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리네.
- 「광복군아리랑」
만주야 봉천은 얼마나 조먼[좋으면]
꽃같은 각씨 두고 만주 봉천을 가는고.
- 「진도아리랑」
백석봉 겉이두야 [같이도] 두텁던 정이
풀잎에 이슬겉이두 다 떨어지네.
- 「정선아라리」
각 행은 등가적이지 않고, 이유-상황, 주부(主部)-서술부(敍述部)의 관계로 두 행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논리적으로 구속한다.
첫째와 둘째 노래가 이유-상황의 관계를, 세 번째 노래는 행 사이의 통사적 관계가 굳어져 형성된 주부-서술부 관계의 노래이다.
다음으로 아리랑의 율격을 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떠라 노다가세" 등 공식화된 후렴구에서 나타나듯이 아리랑의 기본 율격은 3·3·4조의 3음보이다.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인가.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 「서울아리랑」
3음보 내에서도 음절수의 변화는 다양하게 나타나며, 앞 음보보다 뒤 음보가 무거운 구조로 리듬감을 형성한다.
경쾌하고 가벼워 역동적인 효과를 주는 2음보 형식이나, 두 구(句) 단위의 대구를 이루며 유장하고 장중한 느낌을 내는 정통 4음보 형식을 택하지 않은 것은 노래가 담아야 할 내용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속요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민요 가운데 상당수가 3음보 형식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미의식에 상응하는 가장 익숙한 음보율 그리고 짧은 두 줄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기억과 재생에 용이한 구조를 취한 점은 아리랑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요컨대 우리 민족적 리듬에 뿌리를 둔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규칙 내의 변화를 최대한 활용해온 '아리랑'은 형식 자체가 그 생명력의 원천이 되었다.
익숙하고 단순화된 형식 덕분에 가능한 모든 인간사의 내용이 수렴될 수 있었으며,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해 새로운 노래로 변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 안정된 정형성으로 인해 즉흥성이 더해져 누구든지 어떤 사연이라도 기능과 무관하게 노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고정성 & 유동성 '아리랑'의 전파 & 전승의 원리-
'아리랑'이 이처럼 다른 민요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 '아리랑'만이 지닌 특별한 원리가 있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리랑'의 유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은 근대 민요로서 '아리랑'이 전국적인 전승 영역을 보이면서 성행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각 지역의 독특한 '아리랑'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각 지역에 속한 '아리랑'만이 지닌 어떤 성격이 있어서 그것이 고정성의 한 요소가 되고, 반면 어떤 성격은 전국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아리랑'에만 있는 것이어서 유동성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었다고 손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역 '아리랑' 가운데 어떤 것은 유동성을 지니고 전파될 가능성이 존재하기도 하고, 전국적 '아리랑'의 사설 가운데에도 널리 공감을 얻기 어려운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내용들은 탈락되어 버리기도 한다.
'아리랑'의 지역적인 명칭이나 속성만으로 고정적이라거나 유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정성과 유동성은 흔히 전승의 원리와 자작(自作) - 혹은 창작 - 의 원리라고 규정되는 '아리랑' 사설의 지속 및 변화 개념과는 다르다. 사설 전달 면에서 전승 및 창작 원리란 가사의 변개에 관계되는 구연자 개인의 문제지만, 고정성 및 유동성은 '아리랑'의 전파나 수용 과정과 관련한 전승 집단의 문제이다.
이 같은 고정성과 유동성이란 물론 '아리랑'이 한 개인의 가창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승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제 '아리랑'의 고정적 요소와 유동적 요소를 몇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 보자.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 「밀양아리랑」
무저리10) 밑으로 들어간 윤선11)
평난(平亂)이 되었어도 나올 줄을 모르네.
- 「진도아리랑」
이 두 노래는 모두가 전설 또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설이다.
첫 번째 노래는 아랑전설과 관련된 내용으로 「밀양아리랑」은 동일 전설 관련 사설이 대단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두 번째 노래도 지역적 사건과 관련한 노래이다.
이처럼 지명이나 전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사설들은 전승 영역을 넓히지 못하고 한 지역 내에 고정되어 버린다.
인간의 평범한 일상사나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는 사설들은 언제라도 어디서든지 재생될 수 있는 유동성을 지닌다.
**세월이 갈려면 제 혼자 가지
아까운 우리 청춘 왜 데려가나.
- 「정선아라리」
**조선 팔도의 농사법은 잘두나 냈는데
젊은 과부 수절법은 누가 마련했나.
- 「강릉자진아라리」
첫 번째 노래는 늙음에 대한 한탄을 다룬 것이며,
두 번째 노래는 수절하는 청상과부의 원망 섞인 하소연이다. 이들은 개인의 일상사를 배경으로 한 것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노래 내용으로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창방식 면에서 생각해 보자.
독창은 창자가 고정되어 혼자 사설을 부르지만 선후창이나 교환창은 창자가 따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앞 사설에 이어지는 다음 사설 또한 창자에 따라 변하므로 개방적이다.
독창이 '아리랑'을 고정적인 것으로 묶어 둔다고 한다면, 선후창이나 교환창이라는 가창 방식은 보다 유동적 측면을 강화시킨다.
실제로 「정선아라리」나 「진도아리랑」은 대개 혼자서 진행하는 노동 작업과 함께 가창된다.
이와 더불어 음악적 문제로서 노래의 후렴 - '맞음소리' 또는 '메김소리'라고도 한다 - 을 논할 수 있다.
독창은 후렴이 있거나 없어도 무방하지만, 선후창과 교환창의 경우는 후렴이야말로 특유의 가창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 요건이 된다. 후렴은 '아리랑'의 유동성과 관련이 깊다.
다음으로 기능면에서 보면, '아리랑'에는 크게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고 안정감을 찾는 자족적 기능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여 노래를 통한 의사소통적 기능이 있다.
담 넘어 갈 때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쥐고서 벌벌 떤다.
문고리 쥐고서 떨지를 말고
할 말 있거든 들어오지.
···
오라바님 장개[장가]는 명년에 가고
농우소 팔아서 날 치아주소.
- 「아리랑」
위의 두 노래는 사랑을 품은 남자와 상대 여자 그리고 부모에 대하여 그 딸이 각각 발화하고 싶은 내용을 노래가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기 표출이 공동의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곧 유동성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난 행위가 집단의 공감을 얻음으로써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될 때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설 구성의 원리에 있어서 '엮음아라리'12)도 고정성과 관계된다.
아들딸을야 못 낳는다고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칠성단을 모아놓고
사시장천에 방차)
아들딸 달라고 산지 불공을 마시고
야반삼경에 오시는 님을 괄세를 마라.
- 「정선아라리」
강원도에서 특히 두드러진 '엮음아라리'의 엮음 부분은 보통 제1행의 전반부를 비대하게 늘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에서 보듯이 엮음 부분의 내용은 사실적인 데서 벗어나 창자의 노련함과 해박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입하여 비사실적으로 묘사되거나, 군더더기를 덧붙이는 수준이다.
엮음 부분은 특히 창자에 따른 자작 사설이 많고 이 때문에 '아리랑'의 유동성과는 한층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엮음 아리랑이 행해지는 곳은 강원도 이외에 울릉도나 제주 우도의 '잡노래' 정도인데 특이한 것은 두 곳 모두 「정선 아라리」의 엮음 사설을 변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엮음아라리'는 '아리랑'의 사설 전승이라든가 창작이 왕성한 지역에서 우수한 창자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서 고정성에 기여하는 요소가 아닌가 한다.)
이상에서 '아리랑'이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동시에 지역 내에서 전승을 지속할 수 있었던 요소를 점검해 보았다. 노래의 유동적 측면들을 모아 보면 '아리랑'은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하여 전국적인 확산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자체에 전파력을 발휘할 만한 요소를 내재하고 있었다.
전국적 확산과 더불어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랑' 일반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어도 그 고정적 요소들 때문에 특정 부분은 살아남아 아직도 몇몇 지역적 '아리랑'이 존속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고정성과 유동성이야말로 바로 '아리랑'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내적 원리이다.
'아리랑'의 부활을
민요는 구비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시대적인 변화에 민감한 갈래이다. 근대 민요로서 '아리랑'의 자취는, 민요가 위기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 변화를 감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민중의식의 역사적 성장과 더불어 발전하면서 저항하고 투쟁하며 지향을 제시하는 민족의 노래로 거듭 났다.
한 사회를 둘러싼 갈등과 모순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근엄하게 관조적으로 추상화하거나 냉소적으로 회피하는 방법으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현실 한가운데 서서 구체적 의미를 유지하면서 사태를 대상화하고 총체적으로 인식하도록 깨우치되, 역설과 해학의 어조를 유지하면서 문제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민요의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기만 하다. 골방에 갇힌 현대시를 불러내고 박제화한 옛노래에 숨결을 불어넣어 공동체의 욕망과 이상을 대변할 현대판 아리랑을 꿈꾼다.
문제???
1. '아리랑'이 각 지역의 노래와 전국 단위의 노래로서 보여준 속성은 어느 쪽에서나 각각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노래의 생명력을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보완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점을 노래의 유통과 관련시킬 때 실제로 어떻게 적용 가능할 것인가?
이상에서 얻은 성과를 구체적 노래 사설에 적용하여 노래의 기능 및 전파 과정과 연동시켜 본다면, 고정적 측면을 약화시킴으로써 현재의 본바탕 '아리랑'을 전국적인 노래로 확산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고, 특정 내용의 사설만을 전파시키기 위해 유동적 측면을 더욱 강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아리랑' 노래들에서 발견되는 고정성과 유동성의 요소를 비교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고정적 측면과 유동적 측면
아리랑의 고정적 측면과 유동적 측면구분고정적 측면유동적 측면
사설 내용
- 기명, 전설, 역사적배경
-개인적·경험적 현실 인식
- 개인적 경험 차원
- 비사실성
- 일상사 배경
-비판적 현실 인식
- 공동의 인식 차원
- 사실성
가창 방식
독창
(후렴이 있거나, 없어도 무방)
선후창·교환창
(후렴 필수)
기능
자족적 기능
의사소통론적 기능
공감 형성
사설 구성
엮음
일반
* 율격이 정제될수록, 곡조가 빠를수록 유동적 측면이 높다.
이러한 비교 결과에서 드러난 점을 근거로 서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설을 지닌 여러 '아리랑' 노래들의 성립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특정 지역의 '아리랑'이 인기를 얻어 전국 단위의 '아리랑'으로 확산될 경우, 혹은 한 지역에서 불리던 노래가 다른 지역으로 전이될 경우를 상정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그러한 확산과 전이가 불가피하다면 원래 노래에서 손질을 필요로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일지 사설 내용이나 가창 방식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3. '아리랑'은 20세기 초 근대 민요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세태 풍자와 민족의식의 고취, 항일투쟁의 의지 등 민중의 목소리와 갈증을 직접적이고도 신속하게 반영하는 역동적인 면모를 보였다.
구비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서 특히 민요 '아리랑'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19세기 이후 전문적인 창자인 광대의 출세와 함께 상업성과 대중성을 갖추게 된 판소리는 상층 향유층의 요구를 수렴하면서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고, 역시 직업적인 소리패가 맡아 부르던 흥행 위주의 민요는 잡가라는 갈래로 구별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히 민중의 갈래로 남은 설화도 존재했으나 전래된 유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분적으로 보태야 하는 설화보다는, 가락에 의한 전승이 안정적이면서 사설 변화의 진폭이 큰 민요가 시대변화에 즉각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유리했다.
각주
1) 『만천유고』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문집이라고 전한다. 여기 실린 「농부사」는 7언절구의 한시를 우리말로 노래할 수 있도록 변형시키면서 '아리랑', '어허야'에 해당하는 후렴구를 삽입한 특이한 형태이다. 시와 함께 "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이라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았는데, 경술년은 이승훈이 평택(平澤)현감으로 재직한 때인 1790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소개한 시는 총 9수(首) 가운데 첫 수이다.
2) 이 시기에 농촌에서의 삶과 농삿일의 보람 등을 농민과 동등한 생활인의 시각에서 창작한 국문가사나 시조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3) '아리랑'의 의미를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동원된 인부들의 심정과 연결한 '아이롱(啞而聾·我耳聾)', '아난리(我難離)', '아리랑(我離娘)'설, '알영(閼英)' 혹은 '아랑(阿娘)', '樂浪[아라]'설 등이 전자의 대표적인 견해이며,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疼痛]'설, '(누가 이 마음을) 알리오'설 등이 후자 견해의 대표적 예이다.
4) 어느 한 지방에서 언제나 동일한 기능과 연계하여 전승되는 '고정민요'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지역적 한계를 넘어 널리 불리고 기능이 일정하지 않은 민요이다. '유행민요'라는 용어와도 개념상 유사하다.
5) '근대 민요'라는 개념은 시기적인 유사성을 지니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른 '신민요'와 구별해 사용한다. 근대 민요가 민중적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노래인 데 반해, 신민요는 상업성을 띤 완전한 창작민요를 의미한다.
6)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외에 박승희(朴勝喜)의 희곡 『아리랑고개』가 공연되었고, 현진건(玄鎭健)의 단편소설 「고향」은 아리랑 노래로 끝맺음을 했다. 유진오(兪鎭午)의 희곡 『박첨지』, 이광래(李光來)의 희곡 『촌선생(村先生)』에도 아리랑 노래 일부가 인용되었다.
7) '아리랑'이 기능요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면에 있어서도 대부분 특정 노동에 노래가 구속되어 노동에 걸맞은 박자와 사설을 갖추지는 않았다. 다만 밭매기, 나물캐기, 뽕따기, 방아찧기, 나무하기, 부엌일 등 개인적인 노동을 하면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점에서 기능요적 역할이 인정된다는 정도이다. 이 때 '아리랑'은 작업 진행 과정에 밀착해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흥미위주의 자기 표현적 내용으로 힘든 노동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기능요적 역할을 감당한다.
8) 병행(竝行, parallelism)은 기본적으로 반복(repetition)의 한 형태로,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시 구성 양식이다. 병행은 서로 대응되는 한 쌍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행을 기본 단위로 하여 구성되는 일이 많고, 병행되는 두 행 가운데 제2행은 제1행의 구성 요소 중 일부가 교체되어 나타난다는 특성을 지닌다.
9) 앞에서 예로 든 「원주아리랑」이나 「광복군아리랑」 경우처럼 표면적으로 4음보에 가까운 노래들도 존재하지만, 이들 또한 한 행 내의 두 구가 대응관계를 형성해 정적(靜的)이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 4음보와는 거리가 멀다. 시조, 가사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0) 지명(地名)이다.
11) 인명(人名)이다.
12) 일반적인 경우보다 비대하게 늘어난 사설을 곡조에 맞추기 위해 촘촘하게 엮은 부분을 포함한 노래이다.
13) '방차'라는 말은 아직까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14) 이 밖에도, 율격이 정제될수록 곡조는 완만하고 느린 것보다 빠르고, 경쾌할수록 사설의 변개를 줄이고 전파를 쉽게 해 유동성이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을 때는 붉은 옷을 입고, 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며 우리나라의 승리를 응원했습니다.
오는 2018년에 열리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선 정선 아리랑을 이용해 한국 고유의 문화를 알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부르며 슬플 때는 슬픔을 잊기 위해, 기쁠 때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불러왔습니다. 2011년부터 자발적으로 아리랑 프로젝트를 펼쳐왔습니다.
2012년 너랑 나랑 아리랑, 2013년 우리랑 아리랑, 2014년 아리 우리 아리랑. 2015 아리 우리 즐거운 아리랑.
다시 한 번 아리랑을 통해 참여와 소통, 나눔의 문화 확산을 목표로 새로운 시대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캠페인으로 성장, 발전하고 이제 아리랑이 즐거운 노래로써 온몸으로 불리워지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