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갈만한 곳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본격적인 관광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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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도 신선대도 모두 도장포에 있는데 신선대는 도장포로 들어가지 전에 언덕 아래 마치 사람이 쓰는 모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입니다. 도장포 유람선 선착장에는 연신 관광객들이 즐기는 모터보트의 소리가 굉음을 내고 달리고 그 보트에 탄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바라보면 시원한 정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니 벌써 봄은 깊이 찾아 들어왔고 도장포로 내려가는 양지바른 곳에는 동백이 아름답게 피어 거제도가 동백의 천국. 그리고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 거제도 특산물에는 바다에서 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제도 특산물로 표고버섯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여행이었읍니다.
거제도 갈만한곳인 바람의 언덕입니다.
이 곳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명소중 한곳이 아닐까 하네요.
각종 TV프로그램에도 방영이 되었기도 하고 생각이 나는 것 중 하나가 예전에 예능프로그램에서 거제도를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근방에 놀러오시게 되거나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오게 되더라도 거의 필수적인 코스 중 하나로 알고 있는 곳중 하나입니다.
이 곳은 명칭 그대로 정말 사계절 내내 바람이 엄청 많이 분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속을 뻥 뚫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거 관광객분들이 적어서 여유있게
구경도 하면서 사진도 찍고 구경하고서 다 된것 같다.
감기에 걸릴 수도 있기 떄문에 적당하게 눈에 담고 구경을 하셨으면 갈만한곳이 많기에
다른 코스로 거제도 빠르게 보기위해 이동을 하시는게 낫다고 생각,, 필수 코스 같네요 .
갈만한곳 학동몽돌해수욕장'
거제도 남쪽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요. 이곳은 특히하게 대부분의 해수욕장들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이 곳은 몽돌들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특이한 모습과 돌들 위로 넘나드는 파도소리가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연의 소리 100선에 선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아름다운 곳 중 한곳 입니다. 이 곳에서 는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모래였을 경우에는 신발에 들어 갈 수 있다보니 걷는데 있어서 신경을 많이 쓰고는 해야하지만 돌 위를 걷기 때문에 그러한 불편함 없이 여유롭게 바다를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편하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거 같습니다. 확실히 조용하게 눈을 감고 돌에 치이는 파도소리에 귀를 귀울이면 청아한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 최고인것같읍니다.여기에선 돌을 집어서 물수제비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것도 하나의추억거리가됩니다. 운이 좋게 날이 도와준 덕분인지 평소보다 많은 분들이 돌을 집고 기념 촬영도 많이들 하십니다. 자세히 보시면 매끄럽고 이쁘장하게 생긴 돌들이 있기 때문에 관상용이나 사진용으로 보기도 좋읍니다. 그렇기 떄문에 혹여나 가져가시는 분들도 있으실수 있는데 이 몽돌은 이 곳을 대표하는 돌인만큼 자연에 있는 그대로 구경만 하시고 양심적으로 반출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변에 CCTV도 배치가되어 있고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표지판도 있기 때문에 양심에 맞는 행동을 하시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장사도해상공원은 섬전체에서 사시사철 푸르름을 구경할수있는 거제도 갈만한곳입니다. 섬전체가 대부분 상록수목으로 조성되어있어서 푸르른 자연미와 자연친화적인 해상공원의 각종조각과 예술품을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도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한국현대사의 아픈상처를 간직한 뜻깊은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과 전쟁포로가 수용되었던곳입니다. 지금은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해서 후손들에게 전쟁의 위험과 참상에 대해서 알려주는 곳입니다. 어린아이들 교육장소로 어른들에게는 교훈을 주는 좋은 유적공원입니다.
학동흑진주몽돌해변
학동흑진주몽돌해변" 해변전체가 흑진주같은 몽돌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몽돌밭은 맨발로 걸으면 지압효과가 좋아 여름피서객뿐만 아니라 가을,겨울에도 바닷가산책을 즐기시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외도 보타니아
거제도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들려보아야 곳이기도한 거제도의 꽃이라 불리는 아름다운섬 외도 보타니아 입니다. 섬전체가 이국적인 정원의 모습을 하고있는 해상식물공원으로 동도와 서도 두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연동백림과 아열대성 식물들로 이루어진 식물원과 여러가지 아름다운 조각상들까지 있는 볼거리가 많은섬입니다.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김삿갓의 일생.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이었다. 시 짓는 재주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오던 그는 고금의 시서와 사서를 닥치는 대로 섭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 살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 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시니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동북땅 적벽강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 놓았다. 저자 정비석은 <작가의 말>에서 김삿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사람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름만 알았다 뿐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흔히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 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 시인이었다. 1807년 개화 초기에 당대의 명문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태어난 김삿갓은, 20세 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시로써 이름을 천하에 떨쳐 왔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 가문의 치욕적인 비밀을 알고 나자, 김병연이라는 본명까지 깨끗이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오직 삿갓과 죽장만을 친구삼아 거지처럼 동가식 서가숙하며 떠돌아다니다가 57세를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자체부터가 전고에 그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려운 극적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도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수많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시들뿐이어서, 시에 있어서도 독보적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은 개화 초기의 시대적인 희생자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웃고, 서민들과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였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김삿갓의 자재 무애했던 시의 세계를 소개함과 아울러, 그가 끝없는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직접 겪어 온 가지가지 행적들을 김삿갓식으로, 풍류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특이한 생애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이요, 해학이요, 풍자요, 익살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도 길고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의 생활 풍토만은 근본적으로 달랐는데, 김삿갓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항상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유일한 서민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한 위대한 생활 시인이었던 것이다." 정비석이 바라보는 김삿갓은 서민의 대변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비석의 소설 <김삿갓>은, 서민들 속에 있는 김삿갓에 주목한다. 그 속에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객사한 거지 시인 김삿갓과는 조금 다른, 서민들의 애환과 풍속을 시로 승격시키는 김삿갓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재치와 기행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점잔 떠는 얼굴에 침을 뱉는 독설가이기도 했다. 작가 정비석은 그런 김삿갓의 거침없는 인생을, 서민들과 함께 숨쉬었던 김삿갓의 행적과 결부시켜 소설 <김삿갓>이라는 대작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김립시집
조선 후기의 시인 김병연의 시집. 이응수가 시편들을 수집하였다. 일제강점기 1939년, 학예사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김삿갓 생가 터회암동에 있는 조선 후기 방랑 시인인 김삿갓의 생가로 추정되는 터의 전경이다. 현재 김삿갓 생가 터 주변은 밭으로 변해 있다.
김삿갓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김병연 그가 왜 김삿갓을 자처하고 한평생을 방랑했는가! 1826년(순조 32년)에 김병연은 백일장을 보게 되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있는 무명유생(無名儒生) 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와 같은 것이다. 이때 김병연의 나이는 갓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 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같은데는 관심이 없었던 김병연이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공무원시험 과도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다음과 같았다. 論鄭嘉山忠節死 (논정가산충절사) 嘆金益淳罪通于天 (탄김익순죄통우천)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 이 시제는 홍경래의 난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 신미년(辛未年) 12월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해 가면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대는 가산(嘉山).박천(搏川)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南進)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西北)으로 진격하여 곽산(郭山). 정주(定州) . 선천(宣川)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席捲)해 버렸다. 그 통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 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가산 군수 정 시는 문관(文官)이면서도 그러했건만,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김익순(金益淳)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武官)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 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던 반면에,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고 있었다.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김익순이란 놈을 백일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잘 만났다. 오늘은 나의 필봉(筆鋒)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없는 네 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彈劾)하리라 曰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將軍桃李陵西落 烈士功名圖未高 왈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장군도이릉서락 열사공명도미고 신하라고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李陵) 같은 놈이요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길이 빛나리로다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死 宣川自古大將邑 北諸嘉山先守義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사 선천자고대장읍 북제가산선수의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두 사람은 다 같은 조정의 신하였는데 죽어서야 할 곳에서 어찌 두 마음을 먹었더란 말이냐 태평 성대와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募亮 同朝寯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모양 동조준신정충신 저장풍진립절사 주 나라를 존중하려고 충신 노중련이 나왔고,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제갈량이 나왔듯이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풍진을 맨손으로 막아 내려다 죽지 않았더냐 嘉陸老吏揭名族 生色秋天白日下 魂歸南畝件岳飛 骨埋西山傍伯夷 가륙노리게명족 생색추천백일하 혼귀남무건악비 골매서산방백이 전사한 충신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 갈 것이니 그 이름은 가을 하늘에 태양처럼 빛날 것이요, 혼백은 남묘로 돌아가 악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고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 숙제와 이웃하게 될 것이로다.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綠客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객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행열순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 오기에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가문이 훌륭하여 성은도 두터웠을 것이니 백만 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않았어야 할 것을 청천강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弓矢)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吾王庭下進退背 背向西域凶賊股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代王 오왕정하진퇴배 배향서역흉적고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 황촌에도 못 갈 놈이라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이니 말이다.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한 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이런 시로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술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의 홀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이야기를 듣는 도중 어머니가 갑자기 기절하시고 이내 정신을 차리시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그의 집안 내력을 눈물 흘리시며 가르쳐 주시니 바로 김익순이라는 사람이 김병연의 할아버지이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3대를 멸하라는 그때의 법에 따라 마땅히 김병연도 죽어야 했지만 어머니가 김병연을 데리고 깊은 곳에 숨어사시고 때로는 도망도 다니시면서 김병연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신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집안내력을 숨겨왔는데 오늘과 같은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그것도 반역자의 후손으로 말이다. 뒤에 어머님이 말씀해주시길 그의 할아버지는 술취해 주무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히신 것이였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반항하실 틈도 없으신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고 그의 아내와 이제 낳은 지 얼마안되는 아이와 김병연만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가슴아픈 눈물을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앞으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죄인이니 삿갓을 쓰도록 하며 이름도 김병연을 지우고 김삿갓으로 스스로 부르리라.. 漂浪一生嘆 (표랑일생탄)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我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아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건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해보니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 먼데,,,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방랑시인 김삿갓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 호 난고이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는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김삿갓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김삿갓의 시 <고풍>과 <호남시>
김삿갓 시 12편 중 고풍(古風) 시 1수(왼쪽)와 호남시(湖南詩).
조선 말기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의 설화. 일명 김삿갓으로 더 알려진 그가 전국을 방랑하며 기이한 행동을 한 설화로 글재주 시합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인물전설의 대표적인 예이다. 황오(黃五)의 <김사립전(金莎笠傳)>, 신석우(申錫愚)의 <기김대립사(記金薹笠事)> 등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견문에서 설화적인 창작으로의 단계적인 변모를 나타내고 있다. 김삿갓이 걸인행색을 하고 방랑하는 몰락양반으로서 비분강개도 하고, 미친 사람인 듯하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잘한다고 하였다. 인물과 시에 대한 소개에 치중하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싣지 않았다. 1939년 이래로 여러 차례 편찬된 《김립시집(金笠詩集)》에서는 생애를 소개하는 데 이어서 김삿갓이 시를 지은 일화를 여럿 들었다. 어디를 가나 천대를 하기에 시를 지어 서당훈장 · 절간승려, 환갑잔치를 하는 노인 등을 우롱하였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그래서 지었다는 시는 김삿갓 자신의 작품이라는 보장이 없고, 설화와 함께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설화는 장난같은 시로 글재주 시합하는 데서 흥미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늘날 구전되고 있는 김삿갓설화는 사실에서 더욱 벗어나 글재주 시합의 묘미를 가장 잘 나타낸다. 산사의 승려와 시합을 하는데 사실은 승려가 시를 더 잘 지었지만 김삿갓은 재치가 뛰어나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김삿갓은 글이 모자라면서도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재주로 크게 행세하며 다녔다고도 한다. 한번은 산에서 나물캐는 여자를 희롱하다가 그 여자가 시로 반격을 하는 통에 혼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전설화에는 글재주 시합을 실력이 아닌 재치경쟁으로 꾸미고, 김삿갓을 능가하는 재치를 가진 사람이 김삿갓보다 지체가 낮은 쪽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김삿갓 이야기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에서 김삿갓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김삿갓 이야기」는 김삿갓인 김병연(金炳淵)[1807~1863]이 지은 숫자와 관련 시(詩)에 관련된 인물담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하늘 보기가 민망하다 여겨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다녔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수집상황
2006년 김광순이 집필하고 도서출판 박이정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경북 고령군편에 실려 있다. 이는 2001년 10월 30일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운산2리 26번지[새구름길 67]에 거주하는 주민 박상희[남, 86]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고령군 운수면에는 김삿갓과 관련된 민담이 전하고 있다. 김삿갓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던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파 어느 민가에 들어갔다. 민가에 들어가 요기를 청하였으나 집주인이 쉰밥을 주었다. 김삿갓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나서 나지막하게 “사십촌중에 오십식이라”하고 시를 한 수 읊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 사십촌중오십식(四十村中五十食)[망할 놈의 동네에선 쉰밥을 주는구나] 인간기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불여귀가삼십식(不如歸家三十食)[고향집에 돌아가 설익은 밥 먹느니만 못하리라] 김삿갓이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걸식을 하다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숫자를 이용하여 표현한 시라고 한다.
「김삿갓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재치가 돋보이는 숫자시를 남긴 김삿갓’이다. 이는 김삿갓의 행적과 재치가 드러나는 인물전설이다. 김삿갓은 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산천을 거닐면서 유명한 일화들과 함께 그의 재치와 문학성이 돋보이는 글을 남겼다. 고령 지역에서는 대가야와 관련된 인물들의 일화들이 소재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김면(金沔)[1541~1593] 장군, 이미숭 장군 등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방랑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삿갓(1807~1863년)의 본래 이름은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신동이 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글재주가 뛰어나 향시에 나가 급제를 하였으나, 집도 처자도 버리고 방방곡곡을 떠돌며 해학과 풍자의 시를 읊은 그는 천형의 죄인 같은 시인이었다. 삿갓이라는 이름은 신분을 감추고 다닌 그가 김립(金笠)이라는 가명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죽장에 삿갓 쓰고 미투리 신고 산수를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로 한세상을 떠돌던 방랑 시인인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뜬 구름 같고 바람 같았던 그의 삶의 궤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묘소가 발견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82년 영월의 향토 사학자 박영국의 노력으로 영월읍 와석리에서 그의 묘소가 확인되었다. 김병연은 명문 안동 김씨의 일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높은 벼슬을 지내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병연이 다섯 살 때(순조 11년, 1811)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가산 군수를 지낸 정시는 포로가 되어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나, 선천에서 부사를 지내던 김익순은 농민군에 항복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다가 농민군이 관군에게 쫓길 때에는 농민군의 참모인 김창시의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였다. 그런 이중 인격의 행위가 드러나자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였고, 비열한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병연에게 공부를 시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 양명을 위해 과거를 준비하였다. 병연은 향시에 나가 장원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이 그토록 의기에 차서 비방하였던 김익순이 자신의 친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백일장의 시제가 ‘정시 가산 군수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였는데, 그는 타고난 글재주로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한껏 저주하였다. 곧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책과 번민에 빠져들었다. 출세를 보장해줄 수단으로 믿었던 과거 시험이 조상을 욕하는 영원한 기념물이 될 줄이야. 그는 어이없이 천형의 죄인이 되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고행에 가까운 방랑을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금강산이었다. 금강산을 돌고돌며 가는 곳마다 시객을 만나 시를 짓고 술을 얻어마셨다. 당시 그의 금강산 시는 금강산 구경 못지 않게 유명하여, 금강산을 찾은 선비들은 괴벽스러운 성격을 가진 그를 개운찮아 하면서도 그가 써놓은 시구절은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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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꼿꼿, 뾰족뾰족, 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도 모두 놀라 참말인가 못 믿을 것 같다. 내 평생의 소원이 금강산을 읊으려고 별러 왔으나, 이제 금강산을 대하고 보니 시를 못 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힘도 안 들이고 즉흥적으로 써갈기는 그의 시구가 김삿갓이라는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지자 괴롭고 뒤틀린 심사를 감추듯 삿갓을 더 꾹 눌러쓴 그는 함경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집에서 잠시 쉬어갈 때였다. 김삿갓이 떠난 뒤에 밥을 먹으려고 제법 유식한 마누라가 파자(破字)로 “인량차팔?”(人良且八) 하자 남편되는 자가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견자화중(犬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다” 하고 욕을 하고 껄껄대며 그 집을 나섰다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人+良+且+八’은 ‘식구’(食具)이니 ‘밥상 차릴까요?’ 하는 뜻이고, ‘月+月+山+山’은 ‘붕출’(朋出)이니 ‘이 친구 나가거든’이란 뜻이며, 김삿갓이 한 말을 합치면 ‘저종가소’(猪種可笑)가 되니 ‘이 돼지 새끼들아, 가소롭다’는 뜻이다. 어느 땐가 사람이 죽어 부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써주었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는 뜻이다. 한자를 빌려 교묘하게도 우리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한번은 그가 개성에 갔을 때 어느 집 문 앞에서 하룻밤 잠을 청했다. 집주인은 문을 닫아 걸며 땔감이 없어 그런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 걸며,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邑名開城何閉門 山名松岳豈無薪). 하루는 한 농가에서 양반 세도가가 선산의 묏자리를 자기네 딸의 묏자리로 썼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김삿갓은 “사대부의 따님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눕혔으니 할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 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양반에게 갖다주도록 했다. 양반 세도가가 당장에 두말 없이 자기네 딸의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에는 이처럼 민중의 응어리 진 한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시원함과 통쾌함이 있었다. 그는 문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지고 또 화조월석(花鳥月石)이나 음풍농월만을 따지는 한시를 거부했다. 비록 칠언고시 따위의 형식을 빌려 운자를 달았으되 그가 다루는 주제는 모두가 항간의 일이었고, 그의 시어에는 더러운 것,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속어,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그가 쉰일곱에 전라도 화순군 동복에서 죽자, 역시 아버지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영월땅 태백산 기슭에 묻어주었다. 김삿갓의 묘소는 영월읍에서 동남쪽으로 영월 화력발전소, 고씨동굴, 와석재를 차례로 지나, 와석리 입구 김삿갓상회 뒤쪽으로 난 좁고 깊은 계곡 노루목에 있다. 이 계곡길로만 약 4㎞ 간다.
김삿갓의 흔적,화순(종명지와 물염정)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에 있고,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 적벽을 다녀간 방랑시인 난고 김병연(김삿갓)은 화순적벽의 수려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아마도 적벽의 절경에 매료되어 더는 방랑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전남 화순에는 김병연의 흔적이 제법 남아 있다. 김삿갓 종명지와 물염정이 대표적이다. 김병연은 경기 양주에서 태어나 강원도 영월에서 성장했다. 스무 살 무렵 가족사를 전혀 모른 채 할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한 뒤 그 사실을 알고 죄인처럼 전국을 떠도는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화순을 세 번이나 찾을 정도로 지극히 아꼈고, 멀고 먼 타향인 화순 동복에서 눈을 감았다. 김병연은 화순적벽 가운데서도 물염적벽을 자주 찾아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물염적벽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정자, 물염정이 있다. 지난 2004년 풍광이 수려하고 유서 깊은 정자로 뽑힌 8개 가운데 당당히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중엽에 물염 송정순이 세웠고, 1966년에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물염정 내부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시 28수가 걸려 있다. 중수 당시 마을의 배롱나무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세운 기둥도 볼 만하다.
김삿갓 종명지가 있는 구암마을 입구 |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김삿갓 종명지 전경 |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물염정 전경 |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물염적벽의 풍경 |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김병연이 눈을 감은 곳은 노루목적벽에서 10km 남짓 떨어진 동복면 구암마을이다. 마을에는 그가 눈을 감은 곳이라는 뜻의 김삿갓 종명지가 있다. 압해 정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김삿갓이 머물렀던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이 복원되어 있다. 김병연은 1863년 3월, 향년 57세로 이곳 사랑채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삿갓 종명지 왼편에는 삿갓동산이, 마을 뒤편에는 그가 죽은 뒤 초분을 했던 초분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언덕 같은 낮은 봉우리 위 망미대도 올라보자. 우람한 편백나무 숲을 따라 망미대 정상까지는 5분도 채 안 걸린다. 암벽으로 이뤄진 망미대에 서면 구암마을의 너른 풍경과 동복 일대의 산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김병연도 이곳에 올라 풍경을 감상했다고 한다. 구암마을에서 동복천을 건너 연둔리 숲정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숲.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 리 흰구름 뜬 고개 너머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간주중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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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정보는 2015년 6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