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일 금요일

다문화 사회?[ 多文化 社會 ]

다문화 사회?[ 多文化 社會 ]

다문화 현상/ 다문화 현상의 의미/ 다문화 현상의 원인/ 다문화 현상의 사례/ 대표적인 다문화 지역,

다양한(多) 문화(文化)가 공존하는 사회(社會)

한 사회 안에서 다른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성 등에 따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
多 많을 , 文 글월 , 化 될 , 社 모일 , 會 모일 

교과과정
초등학교 > 6학년 > 2학기 > 사회 6-2 > 4. 변화하는 세계 속의 우리 > 2) 세계화의 모습과 우리의 역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거주하게 되었고, 외국의 다양한 문화와 생산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문화와 다른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도 하나둘씩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울특별시 이태원
-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태원은 아르헨티나, 덴마크, 루마니아 등 많은 대사관이 있고 외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태원은 세계인의 관광특구로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외국인,
경기도 안산시 국경 없는 마을
- 안산시는 공업 단지가 들어서며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다국적 사람들이 늘어나자 소수자 보호와 다문화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국경 없는 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경기도 인천광역시 차이나타운
- 차이나타운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중국 상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곳으로 우리나라의 인천에도 1884년에 생겼습니다.

최근에는 500여명 남짓한 화교 2, 3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명소들이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차이나타운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차이나타운,
다른 문화의 공존
교과/ 과정
중학교 > 사회 ② > Ⅰ. 문화의 다양성과 세계화 > 3.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과 갈등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터키

다문화 현상
현상의 의미
다문화 현상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살게 되는 현상이다.

현상의 원인
세계화로 문화적 접촉이 많아지고, 국가 간 인구와 물자의 이동이 늘면서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현상의 사례
세계 곳곳의 차이나타운, 우리나라 서울 및 안산의 다문화 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외국인 마을과 거리,
서울의 외국인 마을과 거리
세계화로 문화적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 다문화 현상이 빈번해지고 있다. 서울에 형성된 다양한 외국인 마을과 거리가 그 예이다.

대표적인 다문화 지역
미국
미국은 원주민인 인디언, 유럽에서 온 백인, 아프리카의 흑인,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이주민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최근 히스패닉계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영어와 에스파냐 어를 공식적으로 함께 쓰고 있다.

스위스
스위스는 독일계,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국민이 독일어, 프랑스 어, 이탈리아 어, 로망슈 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스위스의 언어 분포도,
스위스의 언어 분포
유럽 중부의 내륙국인 스위스는 민족 구성이 다양하며 이로 인해 과거 언어 갈등을 겪었으나 현재는 4개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함에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불교 · 힌두교 · 이슬람교 · 크리스트교가 공존하고, 화교의 중국어 · 원주민의 말레이 어 · 인도계 타밀 어 ·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싱가포르
원래 말레이 족이 살던 지역이었던 싱가포르는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싱가포르는 국가 수립 초기부터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는 다문화주의를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의 민족별 인구 구성,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동서 무역의 교차점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어 섞여 있다. 불교 · 이슬람교 · 힌두교 ·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며, 중국어 · 타밀 어 · 말레이 어 · 포르투갈 어 · 영어 등을 사용한다.

터키
터키는 서남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하여 문명의 교차로가 되었고,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 문화가 공존한다.
성 소피아 성당(이스탄불) 성
성 소피아 성당(이스탄불)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티움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네 개의 이슬람 양식 기둥이 첨가된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원인 - 문화가 공존해
세계화에 따라 국가 간 인구 이동이 활발해졌어
우리나라는 세계화에 따라 다문화 현상이 나타났지만 주로 결혼을 하지 못한 남성의 국제결혼이 많아져서. 1970년대부터 급격하게 농촌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농촌 지역의 남성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중국의 조선족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 이주를 해왔다, 다음으로는 필리핀과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많이 이주해 오게 된 거야.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와의 국제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7년에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최근 3~4년 동안 외국인과 결혼하는 수가 전체 결혼자의 10%를 넘고 있어. 또한 매년 3만 명 이상의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인과 결혼을 하면서 다문화 가정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이러한 다문화 가정의 국적에 따라 우리나라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에서 온 엄마를 둔 은수는 베트남어도 할 줄 알고, 베트남의 여러 가지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 덕분에 은수 친구들도 베트남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보다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과 교류가 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부쩍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공부와 사업을 위해서 외국인 유학생 및 거주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지. 주변에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사람들과 결혼하는 외국인이 늘어났고, 국제결혼이 곧 다문화 가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외국인이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건너와
우리나라 사람의 인건비가 올라가고 사람들이 3D업종을 기피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졌어. 대신 네팔,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많은 동남아시아 사람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지.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노동자 국적별 현황, (단위: 명, 자료: 통계청, 2008년 기준)
이주노동자/ 국적별/ 현황/ 국적총/ 체류불법/ 체류/
중국
(동포)
321,406
(193,637)
80,394
(36,562)
태국
33,972
11,259
필리핀
42,325
13,661
방글라데시
14,831
13,224
인도네시아
23,751
5,884
베트남
43,320
11,893
몽골
24,926
10,374
우즈베키스탄
13,965
6,355
기타
286,051
32,506
804,547
185,550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중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많아. 또 그 중에서도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 200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18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
한국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가정을 부르는 말에는 세 가지가 있어.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 초점을 맞춘 ‘혼혈인 가족’, 국경을 넘나드는 결혼의 형태를 의미하는 ‘국제결혼 가족’, 그리고 한부모 가정·독신자 가정처럼 다양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로 정의하는 ‘다문화 가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혼혈인 가족, 국제결혼 가족, 다문화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도전이야.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그동안 혼혈인을 무시하고, 이들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으며, 혈통 중심적인 단일민족주의를 중시하는 사고가 강하기 때문이지. 따라서 바람직한 다문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와 정책이 변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혈통주의 사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다문화 사회의 문제점 - 갈등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외국인이 늘어나게 되면서 그에 따른 문제점들이 생겨나고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거야. 현재 많은 외국인 엄마들이 회화는 되지만, 기초적인 한국어를 습득하지 못한 채로 결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이 모두 한국어를 쓰는 가정보다 한국어 습득이 늦어지기도. 결국 한국어도 엄마 나라의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오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언어적 발달 장애를 겪게 되고,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며, 학습부진아가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

대부분의 농촌 총각들이 국제결혼전문업체를 통해서 결혼을 하다 보니 결혼할 상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문화와 나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가정 내의 다툼이 많아지면서 외국인 신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읽을 거리 
우리가 아는 다문화 가정 출신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혼혈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별을 많이 받아왔어. 하지만 지금은 점차 인식이 달라지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슈퍼볼 스타인 하인스 워드도 우리나라 혼혈인 출신이고,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예인 다니엘 헤니 역시 어머니가 한국인 출신의 입양아였다,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아버지는 케냐, 어머니는 미국 사람이라고 해. 피부색이 좀 다르다고 해서 더 이상 차별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다문화 사회  -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해
그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우리와 서로 다른 피부색,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준비를 해야. 예를 들어서 한글 교육을 받도록 하거나 부모 나라의 언어도 함께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거지. 특히 한국인과 결혼하여 국내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의 문화와 풍습, 일반적인 생활 상식 등을 각 국가 언어별로 만들어서 보급한다면 큰 도움이된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을 위해 한국의 문화와 풍습 등을 익힐 수 있도록 돕고, 이주노동자가 차별적인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해
다른 나라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육체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주노동자라고 해. 이런 사람들은 나쁜 노동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다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돼. 이런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어를 못하면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차별적인 대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용광로 문화와 샐러드볼 문화
다문화 사회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중 하나인 용광로 이론은 여러 민족의 고유한 문화들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당근, 양파 등과 같은 여러 문화들이 솥에 들어가서 그 고유의 맛이 다른 재료들과 섞이면서 변화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이 있지만 국민의 대다수인 한족 중심 정책을 쓰면서 소수민족 문화를 전체에 융화시키고 있다.

반면에 샐러드볼 이론은 국가라는 큰 그릇 안에서 샐러드 같이 여러 민족의 문화가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해. 즉 각각의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들은 국가라는 샐러드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맛을 가지고 샐러드의 맛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모여서 세운 나라인 미국은 그들이 각각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문화들이 섞여서 미국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가 정책적으로 용광로 이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하지만 다문화 사회 관련 시민단체 등에서는 샐러드볼 이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고 있어. 그래서 점차 시간이 지나면 우리나라도 샐러드볼 이론을 따르는 정책이 좀 더 많아질 거라고 합니다.

왜 새터민도 다문화 가정이라고 할까?
새터민은 탈북자라는 용어 대신 사용되고 있는데, 새로운 터전에 정착한 주민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인데, 왜 다문화 가정에 포함될까? 바로 우리나라가 반세기 동안 분단되면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와 환경에서 살아왔고, 사용하는 언어마저 많이 달라져 남한 사람들과는 다른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다문화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다. 이렇게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게 된 이유와 다문화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설명해 보자.

우리나라는 2007년에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후, 계속 증가하고 있어. 먼저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우리나라에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는 이유?.
첫째는 농촌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결혼할 여성을 찾지 못한 농촌 총각들이 동남아시아 여성들과 결혼하기 때문이에요.

둘째는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외국인 유학생 및 거주자들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사람들과 결혼하는 외국인이 늘어났어요. 이러한 국제결혼이 곧 다문화 가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셋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건비가 상승하고 사람들이 3D업종을 기피하는 동시에 많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건너왔기 때문이에요.

다문화 가정이 급증하면서 그에 따른 문제점 또한 심각해졌어요.
첫째, 외국인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에요. 특히 외국인 엄마의 경우, 그 자녀들의 교육이 문제가 되고 있어요. 어릴 때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들이 언어 장애를 겪게 되어 학습부진아가 되기도 하고,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기도 한대요.

둘째, 문화와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어요. 동남아 지역에서 우리나라로 결혼을 하기 위해 오는 여성들은 20대 초반이고, 이들과 결혼하는 한국의 남성들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서로의 문화와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어린 신부들이 가출하는 문제도 생기고 가정 내의 불화도 생기지요.

셋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많아요. 이주노동자들은 노동 시간에 비해 임금은 적으며, 다른 회사나 지역으로 옮겨 다니는 것을 막으려고 임금을 제때 주지 않는 경우도 많대요. 또 작업 도중에 다쳤을 때,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래요. 이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동 조건을 동일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국내 체류 외국인 현황,
다문화 사회의 의미와 등장 배경
다문화 사회의 의미
다문화 사회는 한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인종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다문화 사회의 등장 배경

우리나라는 외국인 근로자와 국제결혼 이주자1), 외국인 유학생, 북한 이탈 주민 등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우리의 다문화 사회적 특징
개방화와 세계화로 인해 우리나라는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주민 중에는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 현황,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유형,
다문화 사회의 영향
다문화 사회의 긍정적인 영향
①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에 기여
외국인 근로자는 국내 3D 업종의 인력난 해결에 도움을 주며,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한다.

② 농어촌 지역 사회에 활력 부여

국제결혼 이주자는 농어촌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③ 풍요로운 문화 형성

다양한 문화 요소가 유입되어 더욱 풍요롭고 창의적인 문화 형성과 다양한 문화적 욕구 충족이 가능해진다.

다문화 사회의 부정적인 영향

다양한 유형의 갈등 발생
문화 간의 충돌,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 차별, 외국인 집단과 내국인 집단 간의 일자리 경쟁 등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다문화 가정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 다문화 가정은 언어 장벽, 사회적 편견,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다문화 가정 구성원들을 돕기 위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 주는 기관과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를 확대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제결혼 이주자에 대해 취업 교육을 확대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 비용 증가
이주민 대책 등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

다문화 사회의 대응 방안
이주민 인정 및 문화적 차이 존중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시민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문화 교육 확대

다문화 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가치 등을 전하는 다문화 교육을 이주민과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확대하여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주민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예) 다문화 가족 자녀의 학교 교육 지원, 이주 여성의 정착 생활 지원 등
다문화 가정 자녀의 취학 현황 우리나라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다문화 가정의 학생 수도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문화가정
 국제결혼 또는 이중문화가정, 서로 다른 인종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중점으로 하여 혼혈인가족 등으로 불리던 국제결혼가족의 새로운 개념
외국어 표기
多文化家庭(한자)
한 가족 내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국적에 따른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던 국제결혼가족이라는 용어를 대신한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가정을 일컫는 표현은 크게 '혼혈인가족(서로 다른 인종 간 태어난 자녀)', '국제결혼가족(국경을 넘나드는 결혼의 형태)', '다문화가족(다양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 등 세 가지로 압축된다. 최근에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가족,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가족, 이주민가족(이주노동자, 유학생)을 포함해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최근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정책으로 외국인의 한국 이주가 증가하고, 주변국 여성이 빈곤탈출을 위해 한국인 농촌남성과 결혼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미혼모의 혼혈아동문제, 빈곤문제, 교육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됨에 따라 이들을 우리 사회의 한 일원으로 포섭하고, 이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차별적 의미가 담긴 국제결혼ㆍ이중문화가정 등으로 불리던 국제결혼가족을 새로운 개념의 '다문화가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 꾸준히 국제결혼이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는 다문화 가정을 이룬 사회로 접어들었다. 주로 아시아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편입되는 형태로 다문화 가정이 형성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은 국가, 성, 계급 등의 결합을 포함하는 개념이므로, 다문화 가정에 대해 알아보려면 언어 및 문화 적응을 포함한 결혼 이주 여성의 한국 사회 적응, 다문화 가정 내 부부 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의 형성, 다문화 가정의 사회 내 적응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다문화 가정의 형성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화에 따라 인구의 국가 간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혼인 적령기를 놓친 농촌 지역의 미혼 남성 위주로 국제결혼이 이뤄지고 있다(이현주, 2013). 우리나라에서 여성 결혼 이민자의 증가는 세 단계를 거쳐 확산되었다. 1990년대 초 중국과 수교 이후 조선족 여성들이 대거 유입한 것이 첫 단계이며, 일본과 필리핀, 한족 등 특정 종교의 신도로, 또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한국 남성과 결혼한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2000년 이후 필리핀, 베트남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여성들이 사설 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대거 입국하고 있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설동훈, 한건수, 2005).

통계청의 2010년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다문화 가정은 38만 6977가구로 나타났으며,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는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다문화 가정은 대부분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의 결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이주 여성의 한국 체류 목적은 한국인과의 혼인을 통해 한국 사회에 편입하여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 가정의 아내이자 2세를 출산하여 한국인 남편과 함께 아동을 양육해야 하는 모성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이현주, 2013). 그래서 그들의 결혼생활은 언어 소통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 육아 및 자녀 교육에서 겪는 곤란, 부부 갈등 등의 문제를 겪게 된다.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부부 관계, 결혼 이주 여성 개인의 적응, 부모 역할과 부모자녀 관계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문화가정의 주요 주제 - (부부 관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 결혼 이민자는 자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 언어 소통의 어려움, 생활습관 및 사고방식의 차이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결혼 초기에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부 간, 가족 간에 오해가 생기기 쉽다. 또한 전통적으로 남편 중심적인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가족 내 문화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여성들은 대부분 가정주부로 지내거나 남편과 함께 농사일을 하므로 한국사회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는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사회활동을 하지 못한 채 주로 남편이나 시집 식구와만 지내기 때문에 한국 문화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윤형숙, 2005; 이혜경, 2005; 김이선 외, 2007; 문경희, 2006; 송미경 등, 2008). 또한 결혼 이주 여성은 시부모와 의사소통하기 어렵고 시부모의 간섭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결혼 이주 여성의 출신 국가가 한국 사회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을 경우, 이에 대한 편견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설동훈 등, 2005). 또한 이들의 국제결혼 동기 중 큰 요인이 본국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것도 있으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의 가정 내 경제 수준은 낮은 편으로 이로 인해 부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이혜경, 2005; 이윤애, 2004).

결혼 이주 여성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모국에 있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설동훈 등, 2005; 김갑성, 2006), 배우자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고 가까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 배우자이기 때문에 배우자와의 만족도가 다문화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김현수 등, 2012). 또한 남편의 지지와 이해뿐만 아니라 시집 식구들의 이해와 노력도 이주 여성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며 겪는 스트레스를 경감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노하나, 2007; 이태욱, 2006; 박수원, 2003; 최경숙, 2006). 그래서 다문화 가정 이주 여성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에 통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가정의 사회, 심리, 문화적 적응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노하나, 2007).

다문화 가정 부부가 문화적 차이와 가족 내 갈등을 겪는 것은 사실이나, 부부가 다문화 가정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긍정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면서 지역사회에 참여하면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공적인 적응을 위해서는 다문화주의적인 이해를 함께 가지고 서로 맞춰가는 것이 필요하며, 이와 동시에 다양한 계층의 지지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강유미 등, 2010).

다문화가정 부부의 성공적인 적응 과정(강유미 등, 2010)
적응/ 단계/ 내용
문화 차이와 갈등 단계
국제결혼 이후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실을 알게 되는 단계이다. 결혼 전 한국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동경과 달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 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외국인이라는 편견적인 시선과 차별을 당하고 남편의 환경과 성격도 결혼 전 생각과 달라 갈등을 겪는 단계이다. 결혼 전 정보가 얼마나 충분하고 배우자와 얼마나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따라 문화 차이와 갈등의 양이 다르다.
이해하고 노력하는 단계
문화 차이를 줄이기 위해 외국인으로 느끼는 고충을 이해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천천히 적응해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며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우고 노력하는 단계이다.
서로 맞추어가는 단계
부부 간에 문제나 오해가 발생하면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긍정적으로 행동을 바꾸며 서로 맞추어가는 단계이다. 배우자의 지지, 가족의 지지, 사회적 지지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안정된 적응 단계
부부가 결속력이 강해지며 가족 정체성이 강화되는 단계로, 부부는 함께 긍정적인 미래를 설계하고 가족과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문화 가정의 주요 주제 (결혼 이주 여성)”
결혼 이민자는 대한민국 국민과 혼인한 적이 있거나 혼인관계에 있는 재한 외국인을 지칭한다(재한외국민 처우 기본법 제2조 3항).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은 결혼 이민자 중 대략 25%를 차지하고,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은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2011년 통계청 자료). 이처럼 여성 결혼 이주자가 더 많아서 이들의 한국 사회 적응에 대한 다각적인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구성 유형
성별/ 유형별/ 2008년/ 2009년/ 2010/ 2011
남자
외국인
8,041
8,158
7,961
7,497
여자
외국인
28,163
25,142
26,274
22,265
36,204
33,300
34,235
29,762
결혼 이주 여성의 출신국 또한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어서 2000년 초에는 중국, 일본, 필리핀 출신이 다수였으나, 최근에는 베트남, 태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다변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주은선 등, 2012). 이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자신이 성장한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에 대한 적응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임은미 등, 2010).

결혼 이주 여성들은 언어가 달라서 생기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적응 문제(이금연, 2003; 권복순, 차보연, 2006)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고 있다. 또한 이들은 주로 결혼정보업체를 통하는데, 이 업체들이 국제결혼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한국 남성에 대한 과대포장이나 허위 정보를 제공하고 급속도로 결혼을 추진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이 맞선을 보고 한국 남성과 결혼에 이르는 데 불과 5-6일이 걸린다는 조사가 있다(김오남, 2006). 또한 결혼 이주 여성들은 이중 문화로 인한 정체성 혼란 등의 심리적 측면의 어려움(설동훈 등, 2005)을 호소한다.

결혼 이주 여성들은 초반에 언어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관계의 어려움을 더 많이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최운선, 2007). 특히 경제적인 풍요를 꿈꾸며 한국에 온 여성들은 한국의 비싼 물가와 남편의 낮은 경제력, 사교육비 부담에서 불만족을 경험한다. 이는 대부분의 다문화 가정이 농촌에 있거나 도시 하류층일 가능성이 높아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

오세걸(2010)의 연구에서 결혼 이주 여성은 한국어 교육 다음으로 가정생활 안정과 관련해서 의료, 생계, 주거비 지원이 가장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9년 다문화 가족 실태 조사에 의하면, 빈곤 경험 조사에서 전체의 30%가 ‘사회보험료 미납 경험’, ‘공과금 미납으로 인해 전기 수도 등이 끊긴 경험’, ‘생활비가 모자라서 돈을 빌린 경험’, ‘경제적 이유로 인한 치료 중도 포기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김승권 등, 2010).

국제결혼은 국가와 성, 계층, 문화의 결합이기 때문에 여성 결혼 이민자는 문화 차이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특히 문화와 사고방식, 음식의 차이, 외국인이라는 편견과 차별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송미경 등, 2008). 또한 한국 문화나 예절을 익히는 것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이순형 등, 2006). 한국 특유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가족 내 며느리의 위치, 한국인 남성과 시어머니의 관계 등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인 것으로 나타났다(한건수, 2006).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의 여성 결혼 이민자는 양계 중심적 가족 구조에 익숙하기 때문에 (한국여성개발원, 2006),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한국 문화는 시집과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한건수, 2006). 특히 가족 돌봄과 가사 노동 및 남편과 시집의 요구들을 수행하는 도구적 역할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여성 결혼 이민자에 대한 역할 기대는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있다(나임순, 2008; 정기선 등, 2007).

또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받을 만한 정보의 부족, 주변인들의 편견과 차별은 적응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데 도시보다 지방에서 어려움이 더 큰 것으로 드러났다(송미경 등, 2008). 또한 이 여성들은 결혼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호소할 만한 부모나 친구가 곁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김현수 등, 2012). 따라서 의논할 수 있는 대상이나 여가 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거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김현수, 최연실, 2012).
인천 학익 초등학교 다문화 교육 활동인천 학익 초등학교에서 열린 2012년 다문화 교육을 위해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활동 중 쥬네스 초컬릿 체험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다문화 가정의 주요 주제 “(부모 역할 및 부모자녀 관계)”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시기와 자녀 육아의 시기가 겹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매업체를 통해 교제 기간 없이 결혼한 후 바로 한국에 입국한 경우에는 배우자와의 문화 차이와 언어 이해의 어려움으로 자녀 양육에도 이중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이윤호, 2007; 조미영, 2010). 게다가 육아에 대한 준비가 충분치 않은 결혼 초기에 아이를 가질 경우, 자녀 육아 시기와 문화 적응 시기가 겹쳐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 또한 한국 사회는 자녀 양육 문제에서 아버지의 역할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결혼 이주 여성은 육아의 고충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인봉숙, 2002; 이현주, 2013).

이러한 어려움은 자녀의 성장 과정에 필요한 발달 과업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의 발달 단계에 적합한 놀이감이나 책을 구입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 있다(노미향, 2009). 또한 자녀의 발달 과업이 이주 여성의 출신국에서 나타나는 모습과 달라 자녀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학업, 또래 관계, 정체성 등의 발달 과제와 더불어 부모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이중 부담을 갖기도 한다(조미영, 2010).

한편으로 다문화 가정 여성들의 자녀에 대한 애착은 높은 편인데, 결혼 후 한국에 와서 자신에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을 자녀의 출생이라 꼽는 여성이 많았고, 한국 생활을 하는 데 자녀가 심리적 거점이자 희망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김민정, 2002; 김상임, 2004; 송미경 등, 2008). 또한 자녀 관련 문제를 의논하는 상대로 남편이나 시집 식구, 친정 부모나 친구를 이용하고 있어(김오남, 2006; 인봉숙, 2002), 이 여성들에게 사회적 지지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다문화 가정에서 부모 역할에 대해 이 여성들은 ‘한국에서의 적응 돕기’와 ‘좋은 부모 되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자라온 문화권에 대해 교육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녀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교육에 잘 따라가도록 돕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송미경 등, 2008).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다문화 가정에 위기가 올 수 있는데, 자녀들이 혼혈인에 대한 차별적 문화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문화 가정 자녀는 외모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되고(이금연, 2003), 부모가 이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사회적 지지망을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앞으로 다문화 가정 자녀의 학교 및 사회 적응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문화 가정 여성의 자녀 그리고 가족의 양육 경험(한상영, 2011)
다문화 가정 여성의 자녀 그리고 가족의 양육 경험(한상영, 2011)
집필 : 김은영(동서울대학교 교양학과)

다문화 아동과 다문화 교육
다문화 아동의 증가/ 다문화 민감성 교육의 대상과 필요성/ 다문화 아동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다문화 사회로 빠르게 진전되면서, 이제 피부색이 다르거나 출신국이 다른 다문화 가정 출신 아동이나 청년을 학교에서, 심지어 군대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문화 가정 아동에 대한 차별은 작은 도시나 시골로 갈수록, 부모의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심해지며, 이는 학업 중단율이 높아지는 현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문화 아동 스스로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다문화 아동과 일반 아동 모두를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유아 때는 문화적 차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이 없지만 청소년기로 접어들수록 그들과 다른 문화에 대해 자각하고, 특정한 태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다문화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먼저 다문화 아동의 증가 배경과 이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모두를 대상으로 한 다문화 교육 방법과 다문화 아동이 교내 방송이나 신문을 활용해 자신의 삶과 문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방법에 대해 사례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다문화 아동의 증가
다문화 아동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2012년 행정안전부의 자료에 따르면, 결혼이민자는 14만 4214명으로 전체 국내거주 외국인의 10.2%를 차지하며, 이 중 86.4%가 여성이다.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저출산 및 농촌 총각 결혼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필리핀,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등 아시아 국가로부터 결혼이주여성이 꾸준히 유입된 결과다. 2007년 이미 국제결혼 비중이 전체 결혼의 11.1%에 달했고, 농, 임, 어업 종사자 기혼남성의 40%가 외국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이주여성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내국인과 가족, 친구, 이웃 등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다문화 아동의 초기 가정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다문화 아동이 늘면서, 이들로 인해 학교 교실이 다문화 경험과 갈등, 문제해결의 현장이 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다문화 아동이 2015년경에는 전체 취학아동의 13%가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다문화 아동을 위한 전반적인 커리큘럼 등 교육과정의 개편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2012년 9월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다문화 학생이 4만 6954명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지난해보다 21%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다문화 아동이 꾸준히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다문화 아동을 위한 학교와 사회의 배려는 취약하다. 어떤 학교에서는 다문화 아동의 한국어 등을 돕기 위해 방과 후 교육을 실시하는데, 수업 후 선생님이 "다문화(학생) 남아"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이는 다문화 아동과 내국인 아동 사이를 구별 짓는 다문화 감수성이 부재한 태도다. 이들을 이름 부르고, 특별 대우할 것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융화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 꼬리표를 붙여 그들만을 분리하는 식의 교육은 오히려 다문화 아동의 주변화나 왕따를 유도할 수도 있다. 다음 〈표 1〉은 관련 기사다. 〈표 1〉 다문화 교육의 문제점

[내 생각은···] "다문화 학생 남으세요" 상처 주는 말들 (중앙일보 2009년 8월 22일자)

최근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다문화 가정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몹시 짜증을 내면서 "엄마, 왜 내가 다문화야? 나는 ○○인데", "왜 나한테 이름을 안 부르고 다문화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잖아!"라며 계속 울고 떼를 쓰더라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선생님이 "오늘 수업 후에 조사할 것이 있으니 다문화 애들 잠깐 남아 있어"라고 말한 것 때문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 아이는 친구들로부터 가끔씩 다문화라는 호칭으로 놀림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게 배려한 경우도 있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이름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을 이용해 다문화 가정 아이를 불러 관련 자료에 나와 있는 것을 상담한 사례다. 격려와 지지를 해 주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왜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불렀는지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중략〉

다문화, 다문화 가정 자녀라는 용어는 정책적 용어이고, 편의적으로 제3자를 지칭할 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교실에서 "오늘 수업 후 다문화 잠깐 남아 있어"라든가, "다문화 학생 이리 나오세요"라는 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로 인해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클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일이나 정책들이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배려가 절실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문화, 다수에 의한 소수의 차별문화가 형성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건강한 민주주의 이념은 다수를 위한 사회이면서 소수의 의견과 권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도 마찬가지다. 다문화 시대, 조금만 배려를 한다면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김범수 평택대 다문화가족센터 소장〉
다문화 아동들은 의사소통의 어려움,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학업성적 저하, 또래 관계 형성의 어려움과 왕따 등 다중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이창호·오성배·정의철·최승희, 2007). 이들은 한국말이 서툰 어머니로부터 교육 받은 관계로 언어능력 부족과 학습 부진을 경험하며,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도 경험한다(조영달, 2006). 언어능력 및 학습능력 부족 등 내적 요인에다가 다문화에 적절하지 못한 학습 환경, 편견과 놀림, 교사의 인식부족, 다문화에 맞지 않는 커리큘럼 등이 맞물려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부모의 경제소득이 낮고, 맞벌이로 아이를 돌볼 시간이 부족하며, 엄마의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인한 한국어 미숙과 학습부진으로 학교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다(이성미, 2012). 이러한 환경에 대응해 다문화 아동과 내국인 아동 모두를 대상으로 한 다문화 교육이 조기에 실시되어야 한다. 문화적 가치관을 학습하고, 태도를 형성하며, 내면화하게 되는 아동기에 모두를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적 가치관과 행동을 포용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효과적이다.

다문화 민감성 교육의 대상과 필요성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군대에 입대하는 비율도 2010년 111명, 2011년 139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 교실과 또래 사이에서 다문화 가정 아동이 겪는 어려움이 컸다면, 이제 군대에서도 다문화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다문화 사회 갈등의 예방을 위해서도 모두를 대상으로 한 다문화 교육의 체계화와 확대가 필요하다. 이주민의 경우 여러 세대의 동화과정을 거치면서도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관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겉으로는 새로 이주한 사회의 일반적인 기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Keats, 1997). 이 상황에서, 이주민의 자녀들은 다른 아이들의 놀림과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의 편견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은 다른 문화의 아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며, 특별한 교육이나 학습이 없으면 문화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동기에 다른 문화권 아동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아동들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와 다른 이주민의 문화를 이국적으로 희화화하거나 '구경거리화'하지 말고,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을 배양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과 학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포함한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동들이 영상 매체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미디어, 특히 영상 매체나 인터넷을 활용해 교육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이주민을 '우리'의 일부로 묘사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확산도 필요하다. 체계적으로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의 다문화 콘텐츠를 모니터링과 함께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다문화에 부적절한 내용을 규제하고,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다문화 아동에 대한 교육은 주로 학교생활 적응, 한국어 능력 향상 등 한국화 교육이 중심이 되어 왔다. 또한, 다문화 가정 아동 지원 및 교육 프로그램은 시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이주민을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특별한 집단, 또는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데 기인한다. 동정과 지원의 대상이 되는 다문화 아동은 시혜적 시선에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친구들과 거리감을 갖게 되기도 하며, 이는 다문화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표 2〉는 다문화 교육의 네 가지 영역들을 보여 주는데 우리사회는 첫째 영역에 치중하고 있다. 즉, 다문화 아동과 같은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국화'에 치중하면서 이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킬 수 있는 일반 아동 등 다수자의 인식과 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는 불완전한 다문화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표 2〉 다문화 교육의 네 가지 영역(안정임 외, 2008)
1. 소수자 적응 교육 :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
2. 소수자 정체성 교육 : 자신이 속한 문화와 집단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목적
3. 소수자 공동체 교육 : 소수집단 간(동일한 소수집단 내) 편견, 고정관념 및 갈등 해소
4. 다수자 대상의 소수자 이해 교육 : 차별 및 편견 제거를 위해 다수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교육
다문화 아동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에 치중하는 다문화 교육으로는 아동 사이에 문화 간 갈등을 예방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다문화 아동의 정체성을 보호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교육, 다문화 공동체 내부 또는 공동체 간 편견과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교육, 다수자를 대상으로 다문화 아동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한 반편견 교육(non-biased education)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다문화 사회에서는 문화와 민족 배경이 다른 아동들이 학교를 통해 수시로 접촉하며, 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서도 다른 문화를 간접 경험하게 된다. 다문화적 상황에서 주류문화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동들은 편견과 따돌림을 경험하기도 하고, 이는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좌절이나 거부와 연결될 수도 있다(Keats, 1997). 이를 감안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문화 간 소통 교육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문화 아동이나 이주민을 특별대우나 시혜 베풀기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또한, 산발적인 이벤트 중심이 아닌 전문화된 교육과정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육체계와 교육문화 전체를 다문화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는 노력도 요구된다.

다문화 아동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대표적 다문화 가정 아동의 예로 연예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문화 가정의 긍정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로버트 할리 아들 하재익(1994~ )ⓒ 커뮤니케이션북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언어발달이 늦고, 학습발달도 또래보다 느린 경우가 많으며,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건강 문제를 겪을 수 있는데, 치료보다는 사회적 관심과 교육을 통한 예방이 더 중요하다(Keats, 1997). 이러한 다문화 아동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연구와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것으로 여겨지는 아동기가 사실은 편견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시기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다문화 교육이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문화 가정 아동들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이를 모든 아동이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의 문제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가 학교나 가정, 지역사회에서 겪는 문제들을 미디어는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또한, 아동들이 많이 보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다문화 아동들을 자연스럽게 출연시켜 이들도 우리 사회와 학교의 소중한 부분임을 알리는 작업도 유익할 것이다.

다문화 아동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볼 경우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교육은 어렵다.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도움 받는다', '추가로 교육 받는다'는 상황에 대해 거부감이 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 다문화 아동이 주체가 되는 교육이 필요하다. 대구 죽전초등학교의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이 학교는 2010년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수요일과 금요일 오전 8시 50분부터 10분간 재학 중인 다문화 가정 학생들이 진행하는 아침방송을 시작해 모든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최창희, 2010 ). 다문화 학생이 직접 아침방송의 진행자로 나서 교육과학기술부가 제작한 〈다름에서 어울림으로〉라는 제목의 CD 내용 및 다문화 교육 우수사례를 소개했다. 이 학교는 2010년 초 다문화정책연구학교로 선정돼 향후 2년간 다문화 이해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의 방송반 활동이나 신문의 제작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동이 직접 그들의 시각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전파하는 것은 다문화 아동이 주체가 되는 다문화 교육 방법이다. 이러한 교내 미디어를 활용한 참여적이고, 열린 접근을 통해 다문화 아동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들의 의견 및 목소리를 표현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문화 아동이 초등학교 교내방송 또는 교내신문의 제작에 참여할 경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향상은 물론, 학교라는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의식도 향상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를 학교와 또래라는 공동체 속에서 공식 제기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접근법은 다문화 아동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확대에 기여할 것이다. 한편 학교 친구인 다문화 아동이 제작한 미디어 콘텐츠를 접하는 내국인 자녀들은 다문화 아동의 삶과 근심을 이해하면서, 다문화 감수성이 증진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학교 미디어 제작 참여 프로그램은 다문화 환경의 학교에서 문화 간 갈등 예방에도 유익할 것이다.

'다문화'라는 거대 담론 속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다문화 속 이주민들의 출신 지역은 중국, 동남아, 일본, 러시아, 몽골 등으로 다양하며, 이들이 겪는 문화적·언어적 차이로 인한 어려움의 양상도 다르다. 이들 다양한 출신의 다문화 아동을 모두 동질적인 집단으로 여겨, 동일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즉, 다문화 아동을 위한 다문화 교육과 정책 지원은 다문화 속의 또 다른 다양성을 고려해 차별적이고, 맞춤형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겠다.

주제어
  • 다문화 아동, 다문화 민감성, 다문화 교육, 편견적 가치관, 문화적 정체성
출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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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 [多文化社會]
[다양한(多) 문화(文化)
[공존하는 사회(社會)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용어사전)
[다문화가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다문화 가정 [multi-cultural family] (심리학용어사전, 2014..)
[여성 결혼이민자의 사회적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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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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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 #세계화의 문화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공간 #공존하는 사회(社會) #다문화 사회 [多文化社會] #다양한(多) 문화(文化) #다문화 가정 #다문화 사회로 진입 #다문화 가정의 학생 수 #매년 증가 추세 #다문화적 배경 #시민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다문화 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가치 #다문화 교육 #이주민과 학생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확대 #체계적으로 진행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 #다문화 가족 자녀의 학교 교육 지원 #이주 여성의 정착 #생활 지원 #한 가족 #다양한 문화가 공존 #국적에 따른 차별성을 내포 #국제결혼가족이라는 용어 #내 외국인이 결혼한 가정을 일컫는 표현 #혼혈인가족 #서로 다른 인종 간 태어난 자녀 #국제결혼가족 #국경을 넘나드는 결혼의 형태 #다문화가족(다양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 등 세 가지로 압축된다 #최근 한국인 남성 #결혼한 이주여성가족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가족 #이주민가족 #이주노동자 유학생을 포함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최근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정책 #외국인의 한국 이주가 증가 #주변국 여성이 빈곤탈출을 위해 #한국인 농촌남성과 결혼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미혼모의 혼혈아동문제 #빈곤문제 #교육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 #우리 사회의 한 일원으로 포섭하고, 이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 #차별적 의미가 담긴 국제결혼 #이중문화가정 등으로 불리던 국제결혼가족 #새로운 개념의 다문화가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성 결혼이민자 #사회적 지지 #결혼만족도에 관한 연구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 #200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18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 #한국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가정을 부르는 말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 초점 #혼혈인 가족 #국경을 넘나드는 결혼 형태를 의미 #국제결혼 가족# 한부모 가정 #독신자 가정 #다양한 가족의 형태 #하나로 정의 #다문화 가족 #여성 결혼이민자 #사회적 지지

2020년 4월 30일 목요일

세계 종교,

세계  종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1. 지역이나 나라의 문화에 따라 명절과 기념일이 다릅니다.
2. 종교에 따라 다양한 명절과 기념일이 있습니다.
3. 세계 3대 종교의 대표적인 기념일을 알아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종교로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종교에 따라 명절과 기념일을 지내는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 종교에 따라 어떤 명절과 기념일,

기독교와 불교의 특별한 날
※ 기독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성경 책을 봅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명절인 크리스마스는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로 예수님이 탄생을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부활절에는 계란을 삶아 돌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수확을 감사드리는 추수 감사절에도 기독교의 대표적인 명절입니다.

※ 불교
부처님을 믿고 경전을 봅니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도 불교의 경전입니다. 가장 큰 명절은 음력 4월 8일로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예쁜 등을 만듭니다. 이 외에도 부처님께 도를 깨치신 날, 돌아가신 날 등이 불교의 기념일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연등
※ 용어
1. 신자 : 종교를 믿는 사람
2. 경전 : 종교의 중요한 내용을 담은 책
3. 도 : 종교에서 깨달은 매우 훌륭한 지식

민족종교와 세계종교


종교인의 현황
거의 모든 지역에서 종교인의 수가 비종교인(무신론자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수보다 많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신봉되고 있는 종교는 크리스트교이며, 다음으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순으로 신도 수가 많다.
종교는 크게 민족종교와 세계종교로 구분하는데 종교의 영향력이 한 민족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경우 이를 '민족종교'라고 한다.

민족종교는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되어 나타난다. 여호와를 믿는 유대교, 인도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힌두교 등은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유대교는 신의 소명에 따라 유대인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선민사상을 강조하여 배타적이고, 힌두교는 엄격한 신분제인 카스트제를 지키고 있어 민족을 초월하여 전파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유대교는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모태가 되었으며, 힌두교는 불교를 탄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세계종교인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불교는 비록 민족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지만 개방적인 자세로 전 인류 차원에서 보편적 진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민족종교가 민족 고유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세계종교는 세계성과 보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편 종교'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종교 분포도,

세계의 종교 분포
세계 3대 종교인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는 유럽·미국, 아시아, 서남아시아에서 각각 확고한 우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전통적으로 크리스트교가 강세인 유럽에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크리스트교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참선과 명상이 인기를 끌면서 불교도가 늘어나고 있다.(자료: 《내셔널지오그래픽 비주얼 아틀라스 오브 더 월드》, 2009)

크리스트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 1세기에 태어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오랜 역사를 가진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에서 믿는 것/ 하느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
가톨릭교, 개신교, 정교회를 통틀어 크리스트교라고 불러요. 우리에게 크리스트교만큼 친숙한 종교는 없을 거예요. 꼭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 눈에 그만큼 성당이나 교회가 많이 보인다는 말이지요. 어느 곳을 가도 십자가가 세워진 성당이나 교회를 볼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신은 하느님이라고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말을 따르는 종교랍니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지요.

크리스트교는 약 200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가진 종교예요. 세계 여러 종교 중에 신자가 가장 많기도 하지요. 전 세계적으로는 15억 명 정도가 크리스트교를 믿고, 우리나라만 해도 1300만 명 정도가 크리스트교 신자예요. 그러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 크리스트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해요. 크리스트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의 탄생이 곧 크리스트교의 시작이에요. 예수가 탄생한 후 하느님의 계시가 적혀 있는 책이 신약 성경이고, 그 이전의 유대 민족에 관한 역사와 하느님의 계시 등을 적은 책이 바로 구약 성경이지요.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하느님이 내린 빛으로 예수를 잉태하는 성모마리아를 그린 그림크리스트교의 시작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해요.

크리스트교에서 믿는 것
크리스트교에서는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어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과일들이 열리는 곳,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여 미움과 다툼이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곳이죠. 반면 지옥은 천국과는 반대로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 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로 싸우기만 하지요.


크리스트교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 예수
천국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처음으로 한 말은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어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죽어서 가는 곳도, 정해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죠.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 알아 볼까요? 
예수님의 나이가 올해의 연도와 같다고요?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기원은 연도를 계산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해를 말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 기준을 예수가 태어난 것으로 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원전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 기원후는 예수가 태어난 후를 말해요. 처음에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서양에서 이렇게 연도를 계산했어요. 그러나 중세시대 이후 서양 강대국들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 달력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한 뿌리 종교?

분야
사회·문화
유목 민족 종교와 농경 문화 종고/ 유대인의 민족 종교, 유대교/ 구원자 예수를 믿는 종교, 기독교/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이슬람교/ 무엇을 믿든 존중이 첫째,

유대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이 하느님을 믿는 종교예요. 그러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에 큰 차이점이 있지요.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 인으로,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섬겨요.

유대교 신자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려요. 예배를 드리는 곳은 '회당'이라고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랍비'라고 부르지요.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유대교 신자들은 예배를 드릴 때,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성경을 읽고 랍비의 설교를 들어요. 크리스트교와 비슷하다,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둔 종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혹은 '토라'라고 불러요. 토라는 구약 성경 맨 앞에 있는 다섯 권의 책을 말해요. 이 책들에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든 이야기와 유대 인 조상들의 이야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나와 있어요.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요.
더 알아 볼까요? 
랍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랍비란 히브리어(유대 인의 언어)로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이에요. 이들은 유대교 율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유대 인들에게 가르치는 학자랍니다.

매주 금요일에 해가 지면 유대 인들은 회당으로 모여들어요. 회당에서 집회를 가지고 예식을 치르면서 율법을 공부하지요. 랍비는 이 집회를 이끌어요. 랍비들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모아 책으로 엮기도 했어요. 이것을 '탈무드'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정치, 문화, 경제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유대 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들이 들어 있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학년/ 단원
중학교
1학년
지역마다 다른 문화
고등학교
1학년
사회 변동과 문화
고등학교

「사회·문화」일상생활과 사회 제도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원래 한 뿌리에서 나왔다면서요? 모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섬기고 이들이 말하는 ‘신’은 언어만 다를 뿐 모두 ‘신’이라는 뜻이라면서요? 게다가 최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개념도 똑같고요.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가 그렇게 항상 싸움을 할까?

유목 민족 종교와 농경 문화 종교
지구상에 있는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농경 문화 종교와 유목문화 종교입니다. 농경 문화 종교로는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를 들 수 있습니다. 농경 사회는 쌀을 주식으로 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모계 사회도 자주 나타납니다. 이들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소를 무척 중시하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태도를 지닙니다.

유목 문화 종교로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막 지역을 이동하는 유목 민족은 철저한 부계사회로 지배와 종속 관계도 엄격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힘을 가진 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죠. 그래서 유목민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아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며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10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조로아스터(BC 630 ~ BC 553?)가 중동 지방에서 창시한 종교입니다. 지혜의 상징인 불을 숭배한다고 해서 ‘배화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종말론, 최후의 심판,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 체계는 유대교의 교리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인도 봄베이 지방의 ‘작은 페르시아 마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답니다.

유대교
유대인의 민족 종교, 
유대교는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시조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섬기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입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선사하는데 십계명의 첫 번째 계율이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여러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유대인은 유일신인 야훼를 섬겼습니다. 약3500년 전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라고 명령을 하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릅니다. 야훼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창과 비옥한 땅을 약속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자 사라는 하녀 하갈을 시켜 아이를 잉태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99세 때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자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내쫓습니다. 아랍 민족의 역사는 바로 쫓겨난 이스마엘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한 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품에 안은 기쁨도 잠시,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야훼에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놓고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한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창을 약속하고 언약의 징표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할례를 치릅니다. 이 의식에서 유례하여 유대인 남자아이는 모두 할례식을 치릅니다.

세월이 흘러 극심한 가뭄 때문에 고향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됩니다. 모세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유대인은 추격해오는 이집트 군사들을 따돌리고 홍해를 갈라 바다를 건넌 날을 유월절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왕과 솔로몬왕 통치 시절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하고 남쪽 유대 왕국만 남게 되어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왕국도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한 후 유대인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1) 신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 흡수되면서 유대인 포로 3분의 1이 유대 땅으로 귀향하고 나머지는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됩니다.2)

이들은 기원전 515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지원으로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을 재건하면서 경전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 신앙에 도입됩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5세기 후반에 구약성서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고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생활 신조로 삼고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면, 유대교는 야훼한테 받은 율법을 기초로 바빌론 유수 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교리를 정립한 민족 종교입니다. 유대교 성서 총 여덟 권 중에서도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장을 중시해 이를 모세 5경이라고 하며, 모세 5경에는 613가지 계율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어머니가 유대인인 사람은 자동으로 유대인이 되지만 유대인이 아니어도 유대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유대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와 유대교 계율을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기독교, 구원자 예수를 믿는 종교, 
지구의 65억 인구 가운데 약 3분의 1인 21억 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기독’이란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기한 말로 ‘구원자 예수’를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교파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갈릴리 지방은 무역이 활발하고 부유한 곳으로 관용과 세계주의 정신이 퍼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때로 예수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진실하게 하느님을 믿던 예수는 경전과 율법에 얽매여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교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는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애가 구원의 길이라고 설교하였고, 예수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면서 추종자도 급속히 증가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고발해 예수는 결국 십자가형을 받고 숨을 거두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했고 제자들 앞에 40일 동안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는 인간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대신 피를 흘렸고, 인간은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사랑, 부활과 영생, 인간으로 온 신, 희생 정신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 사후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든 일등 공신은 바울입니다. 유대인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갑자기 시력을 잃었고 하늘에서 전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여 자신의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고 새사람이 됩니다. 그는 시리아, 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편지를 씁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칙령(313년)으로 공인을 받으면서 성경이 성립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 모두에게 중요한 성서입니다. 두 종교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행적이 담긴 신약성서도 인정하지 않지요.

나중에 기독교는 성상숭배 문제로 동방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게 되었고 로마가톨릭은 착취와 부패가 심화되면서 16세기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열풍을 맞게 됩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고도 말하는데, 프로테스탄트는 당시 부패했던 가톨릭(천주교)에 항거하고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항의’, ‘반대’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슬람교,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세계에서 둘째로 큰 종교는 교인이 13억 명이나 되는 이슬람교입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탄생했습니다. 유복자였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다 나중에는 작은아버지가 키우게 됩니다. 성장한 무함마드는 무역상들과 예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를 돌며 여러 종교를 접합니다. 스물다섯 살 때 열다섯 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한 무함마드는 마흔살에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암송하라. 알라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한 것을!”이라고 외치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진 알라의 말씀은 나중에 모두 기록되어 ‘코란’이라는 경전이 됩니다. 코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었고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의 권위를 지니는 원문이 다르게 바뀌는 걸 막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슬람교가 해외로 전파되면서 코란도 번역이 되기 시작했는데 반드시 아랍어를 같이 싣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법에서는 아랍어로 된 코란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이 세계 제2의 종교로 빠르게 전파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성직자가 따로 없으며 모든 신자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모두 신 앞에 평등하며 누구나 똑같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합니다. 둘째, 복잡한 이론이나 예식 같은 것이 없는 실천 중심의 종교입니다. 셋째, 이슬람교가 성립되던 시기는 비잔틴 제국의 부패와 착취가 심해 이슬람 군대를 침략자보다는 해방자로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넷째, 정복민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관용적 태도를 가졌으며,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을 주어 자발적 개종자가 많았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을 뜻합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알라를 믿고 그의 뜻에 복종함’을 의미합니다. 무슬림들에게는 다섯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① 신앙 고백(샤하다) ② 하루 다섯 번 예배(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 ③ 희사 즉 기부 행위(자카트) ④ 메카 순례(하지) ⑤ 금식(라마단)입니다.

코란과 성경은 아담과 이브를 인류의 첫 조상이자 첫 부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긴 뒤 수치심과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경에서는 신이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고, 코란은 아담처럼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또 성경은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이 타락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데, 코란은 어머니의 은혜와 감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알라께서 명령하시기를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고 2년간 젖을 먹임으로써 허약해졌느니라. 그러므로 내게 감사하고 너의 부모에게 감사하라”라고 코란에 명시하였습니다.

성경은 첫 인간들의 죄로 인간이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고 보지만, 코란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행위가 바로 용서되기 때문에 원죄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원죄가 없으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에 의한 구원도 필요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저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라에게 직접 고백하면 되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신이 아닌 한 사람의 신도이자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들을 알라의 예언자로 여기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여깁니다. 그중에서도 무함마드를 가장 포괄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 계시를 전한 예언자로 여깁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으로 완전한 계시를 전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의 종교를 올바르게 복원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이슬람교를 적대시합니다.

존중이 첫째, 무엇을 믿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랑을 전하지만 종교로 인한 전쟁으로 큰 희생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충고라도 하는듯 불교를 믿었던 인도의 아소카왕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는 불교 신자?

무엇을 믿든 존중이 첫째.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종교는 존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높일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실천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종교를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교도 해치게 된다.
만약 누군가 자기 종교를 영광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종교를 비하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종교를 해치는 것이다.
-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의 비석.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는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
크리스마스는 350년경부터 12월 25일로 채택되었으며 이는 로마에서 축제로 지키던 ‘태양신의 날인 12월 25일’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치아(Lycia)의 빠따라(Patara)시에서 출생한 니꼴라오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니꼴라오 성인은 자선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후에 미라(Myra)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옷 색깔이 빨간 것은 주교들의 옷 색깔이 빨간 데에서 연유합니다. 산타클로스의 이름은 라틴어로 쌍뚜스 니꼴라우스인데 폴란드 사람들은 ‘싼 니콜라우스’라고 발음했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싼 데 끌레아스’라고 발음했습니다. 그 발음이 그대로 미국화해 ‘산타클로스’로 변한 것이랍니다.

메시아, [ messiah ]
성서에서 구주(救主) ·구세주(救世主)를 가리키는 말.
헤브라이어의 (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a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리스어화 한 말(Christos)로 ‘그리스도’의 어원()이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의 왕은 물론, 사제나 또 사울왕의 방패와 같은 물건도 메시아라고 부르다가, 장차 나타날 왕으로서의 ‘구세주’에 대한 기대()로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이 행하여졌다.

메시아를 ‘구세주’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중간 시대의 유대인으로 다윗을 계승한 왕으로서의 구세주를 소망하여 부른 호칭이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왕의 즉위와 제사장의 구별시에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과 관련하여 39회 사용되었고(레위기 4:3, 5, 16, 6:22, 사무엘상 24:6, 10, 사무엘하 19:21, 23:1), 메시아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메시아 사상의 역사를 구약성경, 중간시대, 신약성경 순으로 고찰해 본다.

그리스어로 그리스토스(그리스도)라고 번역되었다. 성서적 전통에 의하면 신의 개입에 의해서 변모한 역사내 세계에 세워진 신의 지배의 대행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메시아에 의한 종말적 구제에 의해서 초래된 새로운 세계질서의 도래를 대망하는 세계관을 메시아니즘이라고 한다. 메시아 사상은 고대 오리엔트의 우주론적인 세계변모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데, 특히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의거해서 성립했다고 설명된다.

주유(注油)는 본래 이집트의 파라오(왕)가 관리, 봉신을 직에 임명할 때의 관습이었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 야훼가 어느 인물을 성별해서 왕으로 임명한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지고, 주유된 자=메시아라고 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후대에 확대되어서 제사장이나 족장에도 이용되었다.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하는 제도가 단순히 한 사람의 왕의 즉위의례가 아니라, 다윗왕가의 통치를 부정하고 신의 개입에 의한 새로운 천적 왕자와 이상적 질서의 출현을 고지하듯이, 현실의 왕 지배를 부정 매개해서 성립한 것이 매우 강렬한 역사변혁의 의식을 가진 헤브라이 예언자의 독특한 사상이었다.

그후 민족의 위기, 고난시 때마다 메시아를 자인하는 자, 그 도래를 예언하는 예언자가 출현했다. 헬레니즘기 후기와 로마제국의 압정하에서, 유대 민중의 강한 메시아 출현의 소망을 배경으로, 유대교단, 특히 과격파 중에서 메시아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서 권력에 저항했는데, 탄압ㆍ숙청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의 모순, 고통,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대상사(代償死)를 이룬 고난의 업 중에 현실세계와 인간의 궁극의 구제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에게서 참된 메시아(그리스도)와 참된 메시아니즘의 완성을 보았다.

《구약성서》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판관 8:22, 사무상 8:7)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대제사장(히브 9:23~28)으로, 예언자로, 왕으로 믿은 것(마태 16:16)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계약 관계에서 그 중간을 다리 놓는 것으로, 영()을 받은 자, 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죄를 씻는 제사의 희생제물 공여자, 재판장,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점차로 개인에 대한 기대가 부각되고, 각 집단이 각기 다른 내용을 강조하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변이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와 고난이 오히려 메시아 신앙을 강건하게 하고 신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메시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17세기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체비이다.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기대는 유대교의 교리로 굳어졌으며, 유대교의 현대화 운동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고 구원된 세계와 메시아적 미래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는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구약성경의 메시아
구약성경의 메시아는 주로 왕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및 전지역에 확립된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선택된 백성이며(출애굽기 19:5-6),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진정한 지배자인 왕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어져 정의와 공정으로 전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다윗의 가계에서 나온다고 하는 약속이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지고(사무엘하 7:11-17), 다윗에게 강력한 인상을 새겼다(사무엘하 23:1-7). 특히 사무엘하 22:51(시편 18:50)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다윗 왕조의 지배가 한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다윗의 언약은 구약성경에서의 메시아 사상의 구체적인 제1단계이다.

솔로몬의 사후 왕국은 이분되지만 그 후의 선지자들에 의해 다윗 가의 재 부흥과 통일지배, 근린제국의 합병 희망이 예언된다(이사야 11:10, 예레미야 23:5-8, 에스겔 34:23-31, 37:24-28, 호세아 3:5, 아모스 9:11-12, 미가 5:2).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의 선지자들은 적극적인 왕의 메시아 상을 그리고는 있지 않지만 결코 다윗계의 메시아라는 약속을 잊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 내의 메시아 상은 일관되게 왕으로서의 지배권을 제일로 하는 것이지만 제사장과의 관계(스가랴 3:8, 6:11-15, 시편 110편)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유명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이사야 52:13-53장)도 개인적으로 해석하면 메시아의 제사장적인 활동과 관련을 가진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 사상도왕, 제사장, 나아가 선지자로 복잡해지며 중간시대로 넘어간다.

중간시대의 메시아
이미 스가랴서에서 볼 수 있었던 메시아적 왕과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상은 랍비 문서 속에서도 계속 나온다. 특히 사해 부근에서 생활하던 쿰란 종단은 다윗계 왕보다 종말적인 대제사장을 더욱 소망했다. 나아가 사해 사본은 대제사장, 왕과 더불어 종말의 날에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난다고 기록하고 이상적인 유대 국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존재한다고 하였다(마카베오상 14:41 참조). 이러한 사해 사본이나 경외의 기술은 다윗 왕조의 계속성보다는 이상화, 질적 충실에 대한 기대로 메시아 사상이 옮겨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마카베오 시대에는 다시 정통 왕조로서의 다윗계 메시아를 추구 하였고 특히 B.C. 63년 이후 로마의 지배하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소망하였다. 또한 종말적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술은 구약 위경『시빌의 신탁집』(B.C. 140년경) 제 3권이고 위경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제 3부『비유의 서』(37-71장)에는 ‘인자’를 정점으로 한 메시아론이 기재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메시아
신약성경에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올 뿐이고(요한복음 1:41, 4:25) 대신 ‘그리스도’([헬라어] 크리스트)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상,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아 의식도 구약시대와 중간 시대의 메시아 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우선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왕의 메시아로 생각하고(마태복음 21:9, 22:42, 누가복음 2:25, 30, 38), 다윗의 아들로서 맞이했다. 또한 사람들은 선지자적 메시아로도 기대하고 있었다(요한복음 1:45, 4:25, 6:14-15).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마태복음 26:63). 제자들도 그렇게 불렀다(마태복음 16:16, 요한복음 1:34, 49, 11:27).

이어서 예수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정치적,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 보편적 내용의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 적으로부터 구해내고 사랑과 평화의 세계적 왕국을 수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이나 제자들의 메시아 기대, 메시아 이해를 바꾸기 위해 교육하고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

특히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메시아 성율 독특한 것으로서 제시했다. 예수의 마음에는 다니엘 7:13이 의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마가복음 8:38, 13:26, 14:62). 그러나 동시에 ‘인자’라는 표현에 의해 십자가상의 고난도 나타내고(마가복음 8:31), 그 죽음이 메시아적 지배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마태복음 20:28). 또한 이사야 53장을 자신의 일로서 해설했다(누가복음 22:37). 이와 같이 예수는 그 죽음에 의해 메시아로서의 행위로 왼성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이끌었다.

여기에 요한복음 12:34에 기록되어 있는 군중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속죄하기 위한 수난의 메시아라고 하는 개념은 유대인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제자들도 충분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 사건과 40일에 걸친 예수와의 교제에 의해, 십자가의 경지를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사도행전 3:13, 18-21, 4:27, 30, 10:36, 43).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약속은 더욱 새로운 메시아 상도 주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재림,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심판, 하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활동 등이며, 구약성경이 약속하고 예언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가르침과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교회의 분열, [ Schisma , 敎會分裂 ]
도시에서의 봉기와 농촌에서의 반란이 잇닿는 동안 러시아 교회는 분열되었다. 러시아 교회의 분열 과정에는 세 주인공이 개입되어 있었는데, 차르 알렉세이와 총주교 니콘(Patriarch Nikon)과 사제장 아바쿰(Archpriest Avvakum)이 그들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알렉세이는 러시아의 모든 차르들 가운데 가장 신앙심 깊은 차르로 평가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의 치세 때 교회가 분열되고, 니콘은 외로운 시골길에서 죽은 한편 아바쿰은 화형된다. 종교적 대결자였던 니콘과 아바쿰은 모두 주견이 강하고 광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의 분열을 재촉했던 것이다.

원래 차르 알렉세이는 니콘을 깊이 존경하여, 1652년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빌면서 총주교에 취임할 것을 부탁했다. 니콘은 차르가 자신을 차르의 으뜸 가는 목자이며 교리와 관습과 기강에서의 아버지로 섬길 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를 개혁하려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절대 지지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 총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니콘은 1654년에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종교 회의에서 전면적인 개혁안을 채택하고 이를 과감히 추진했다. 러시아적 전통을 중시하는 이른바 구교도들이 여기에 반발했다. 그 대표가 바로 아바쿰이었다. 차르는 니콘을 지지하는 반면, 아바쿰과 몇몇 추종자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구교도들은 굽히지 않았다. 몇몇 대귀족들도 구교도들의 운동을 지지했는데, 「러시아의 역사」에 따르면 "이들은 구습을 지키고, 차르의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운동을 이용했던 것이다. 많은 농민과 외곽 상공인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구교파 운동이 농노제와 차르 지방관들의 횡포에 대한 항의의 한 형태로 생각되었었다."

처음에는 굳게 단결되어 있던 알렉세이와 니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차르는 나이를 먹으면서, 차르 위에 서서 정부에 영향을 끼치려는 니콘에게 차차 반발하게 된 것이다. 대주권자(Great Sovereign)라는 칭호를 함께 쓰던 두 사람의 대립은 1658년 여름에 표면으로 나타났고, 차르는 결국 니콘에게서 총주교직을 박탈한 뒤 그를 수도원으로 쫓아냈다. 니콘은 알렉세이가 죽은 뒤에야 사면을 받아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되지만 길에서 죽는다.

알렉세이와 니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구교도들의 개혁운동은 활발해졌다. 그러나 차르는 이들을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아바쿰도 처형되었다. 이에 그들은 볼가강 너머의 숲 속으로 들어가 종교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정부는 거기까지 쫓아가 구교도들을 화형에 처했으며, 이러한 탄압 속에서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기도소에 모여 기도문을 노래하며 불을 지르고 타 죽어 갔다. 「러시아의 역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장작불 집단 자살을 통해 1675~1695년 사이에 불에 타 죽은 사람이 20,000명이나 되었다."라고 전한다. 구교도들을 이렇게 박해했지만, 정부는 교회의 분열을 극복해 낼 수 없었다. 구교도들은 많은 농민과 수공업자와 상인 등의 지지를 받아 가며 신앙을 지켰고, 그리하여 18세기에 이르러 정부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의 유배는 종식되었다. 약 70여 년간 계속된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교회의 조직을 그 기초부터 상처입힌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에 의해 구성된 당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로써 아비뇽은 교회 분열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3개월 동안 인정하였으나, 갑자기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불만을 느껴, 프랑스 왕가 출신 가운데 어느 친척을 천거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즉시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는 아비뇽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두 교황이 대립하게 되었고, 두 교황은 서거 후 각기 다른 후임자를 남겼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상태는 교구, 수도회, 심지어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두 교황이 각기 따로 교황청 기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위기를 어느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렵 교회 개혁을 논구하던 많은 저술들은―개혁의 중심지는 파리 대학이었다―보편 공의회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마침내 두 교황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파리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 파리 공의회는 기존의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대신 새로운 교황―알렉산데르 5세―을 선출하여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두 교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세 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으로 반교회적인 인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Siegmund)는 교황 요한 23세를 움직여 독일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가 소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의 이단설과의 논쟁을 거쳐 후스를 단죄하였다. 특히 공의회는 분열의 종식,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자주 현안으로 떠오른 교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공의회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다른 사안이 뜻밖에도 해결되었다. 즉 교황 요한 23세와 베네딕토 13세―아비뇽에 거주―두 교황이 퇴위하였고, 그레고리오 12세 교황―로마 거주―은 자발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거쳐 교회는 다시금 일치를 회복하였고, 서구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그리스 정교 부분을 참조하라.

1378년에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죽은 뒤 로마에서는 우르반 6세, 아비뇽에서는 클레멘스 7세가 제각기 교황으로 즉위하여 두 교황이 대립하였다. 그 뒤로 독일, 영국 등은 로마의 교황을 지지하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하여 교회가 분열하였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제3자를 등위하게 함으로써 분열을 끝내려 하였으나 양자가 거부함으로써 세 교황이 병립하여 교황청과 교회가 혼란을 겪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제3자를 등위하게 함으로써 분열을 끝내려 하였으나 양자가 거부함으로써 세 교황이 병립하여 교황청과 교회가 혼란을 겪었다.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면서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고 유럽이 쪼개진다.

연도/ 저자
1378년 9월 20일
수잔 케네디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지난 70년간 위치했던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청을 다시 옮겼다.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로마 시민들은-이들의 싸움 때문에 1305년 교황이 로마를 떠났던 것인데-거리로 몰려나와 이탈리아인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추기경 회의에서는 바리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뽑았고, 그는 우르바누스 6세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기경 대다수가 이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새로운 교황은 너무 가혹한 규율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378년 9월 20일 추기경 회의는 새로운 교황인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고, 먼젓번 선거는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제 교황이 둘이 생긴 셈이었다. 우르바누스 6세는 로마에 기거했고,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었다. 이러한 전례 없던 상황은 교황권은 물론 교회의 명성에도 오래 지속되는 손상을 입혔다. 세속 군주들이 두 교황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할 입장이 되면서, 유럽은 두 개의 정치적 진영으로 나뉘었다. 교회 대분열은 최초의 두 교황이 모두 죽은 뒤에도 각 후계자 선출과 더불어 지속되었다. 1409년, 이 분열을 끝내기 위해 소집한 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인 알렉산드르 5세를 선출했지만(그는 곧 사망했고, 요한 23세가 뒤를 이었다), 다른 두 교황이 물러나기를 거부했으므로, 이러한 임시 조치는 분열을 더 오래 지속시켰을 뿐이었다.

"그들은 폭력과 공포감을 이용해 이탈리아인을 뽑으라고… 우리를 다그쳤다."
「반란을 일으킨 추기경들의 선언문」, 13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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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어
기독교, 유대교, 메시아주의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세계 3대 종교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6-2)
[세계 여러 지역의 자연과 문화
[세계의 다양한 문화
[민족종교와 세계종교 (살아있는 지리 교과서, 2012.., 전국지리교사연합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뿌리 종교?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2011.., 전국사회교사모임)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서양 종교의 뿌리, 유대교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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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messiah]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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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대분열의 시작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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