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일본 후쿠오카 까지는 138Km이지만 부산까지는 49.5Km의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대마도 (쓰시마)의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거리를 볼 수 있다,
대마도 우리 땅. 독도가지고 버티는 것은 대마도를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하는 일본의 수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식한 미국 실무자들 때문에 대마도가 일본 지배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한국은 미국 때문에 피해가 많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친일파 정군들이 일본에게 침묵한 결과가 대마도를 내 준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던 지도,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도 인정한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1734년 프랑스제작 지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중 주목할 부분은,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김일성 때문에 찾지 못한 대마도. 멍청한 김일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일단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부터 살펴보자. 2018년 8월 2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월11일 일본의 지도 학자 구보이 노리오 교수를 통해 고지도를 입수했다.
이 지도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Kernot이 1790년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24센치로 소형 판본이며, 채식인쇄 기법을 사용했다. 지도 상단 중앙에 일본 수도 YEDO, 좌측 하단에 조선의 관리로 보이는 3명이 COREANS, 우측 하단에 거북선으로 보이는 STATE BARGE 라고 적힌 3장 삽화를 첨삭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위 지도의 빨간색 원안에 표시된 곳이 대마도인데, 한국 해협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는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색깔로 분류했는데, 모두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이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식 발음인 ‘Dagelet(다제레트)’, 울릉도는 ‘Argonaut(아르고노우트)’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J.H.Kernot가 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일본 자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도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적잖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일본 고지도나 고문서에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했던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또 세계인들도 오래전부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 고지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대마도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정치가.)이 조선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 에는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하여 '일본 영토' 가 아닌 '침략 대상' 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나던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명기돼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것으로 알려진 대마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일본에 편입됐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독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일본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려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국 사람들을 경계한다. 양심이 두려운거지,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49.5㎞, 히타카쓰항까지 배 타는 시간은 1시간10분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 1.7배 크기인 섬이다.
1)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말까지 대마도는 한국의 경상도 계림(신라)의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5) 신라 때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된 신라 국사 박제상 공의 순국비가 있다.
6) 고려 창왕(1389년) 때 박위 장군의 지휘로 왜구의 소굴로 변한 대마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대마도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그 후 조선 태조(1396년) 2차 정벌, 세종(1419년) 이종무 장군의 3차 정벌 후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서약서도 있다.
8)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해 만든 지도(팔도전도, 1592년이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사들에게 내린 하교문,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조선과 대마도를 부자관계로 비유한 퇴계 이황 선생,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외전, 동사강목, 정약용의 비어고에도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조선 왕조 500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11) 1750년 영조 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의 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나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 국내의 많은 역사 기록문에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아래 표시된 부분은 하루빨리 우리가 복원해야하는, 조상이 물려준 우리의 영토이다.
대마도는 한국땅,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영토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 양국 간의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만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최근 이 섬이 한국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2월 8일 일본의 유명 언론 매체 산케이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인들이 대마도에 수많은 땅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표현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고령화와 과소화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일본인이 없어지고 틀림없이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대마도 땅 매입 소식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큰 손들이 대마도의 많은 영도를 사들여서 호텔과 민박 등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대마도가 관광지로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무려 4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와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마도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근거가 존재했습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 팔도총도에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그려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830년에도 일본이 만든 조선국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에 이 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대한민국 땅 독도입니다.
한일 감정으로... 문제는 세계에서 보는 시각이 한국으로 그간 식민지 생활, 그들의 만행으로 잘못됨은 바로 잡히고 반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수수방관 하에 적당한 대응으로 잠자는 사자 건드려 봐야 이로워질게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조국 내가 지킨다고 발언하는대 어느 국민이 머라하겠소 ! ??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능사는 아닐듯...?
이권 그만 챙기고 나라 위한 발언 한번 해보세요 ....정치인님 ????
일본 측과 대화도 간단합니다 ?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일본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국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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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기원은 1870년대 일본 요코하마 중화거리, 고베 난킨마치 등의 중국요리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과 1922년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돼지뼈, 닭고기, 야채,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수프로 양념을 하여 삶은 중화면(中華麵)과 함께 먹는 것이 대체적이다.
라면이 많은 인기를 끌자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서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가미하여 먹은 것을 인스턴트라면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인스턴트라면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58년으로 산시쇼쿠산(サンシㅡ殖産:현재 닛신식품)에서 생산한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이 시작이었다.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가 면을 기름으로 튀기는 것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인스턴트라면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60년경으로, 현재 여러 식품회사에서는 각각 특색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 시판한다. 라면은 건조식품이므로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高)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법,
① 배합공정:소맥분과 배합수를 혼합하여 반죽을 만든다. ② 면대형성:롤러로 압연하여 면대를 만든다. ③ 제면공정:제면기로 국수 모양을 만들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하여 라면 특유의 꼬불꼬불한 형태로 만든다. ④ 증숙공정:스팀 박스를 통과시키면서 α화(호화)시킨다. ⑤ 성형공정: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납형 케이스에 넣는다. ⑥ 유탕공정:150℃ 정도에서 튀기고 수분을 휘발시킨다. ⑦ 냉각공정:상온으로 냉각시킨다. ⑧ 수프제조공정:주원료를 고압처리하여 진공농축, 진공건조시킨 다음 각 원료를 혼합하여 포장한다. ⑨ 포장공정:수프를 첨부하여 완제품으로 포장한다.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박정희 대통령은 제작비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 고춧가루를 투입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쌀을 아끼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 캠페인과 정책은 시너지를 이루며 라면 붐을 일으킨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맵고 짠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의 탄생이었다. 중량 100g, 가격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을 통해 삼양사는 6년간 매출액 면에서 300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삼양의 성공이 시발점이 되어 롯데공업(농심),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라면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라면을 대체 식품이라기보다 기호식품으로 인식하게 되고,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오히려 쌀의 소비가 늘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은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한국.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라면의 붐은 1989년 면을 공업용 쇠기름으로 튀겼다는 보도로 촉발된 ‘우지파동’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삼양과 오뚜기는 폐업 직전까지 몰리고 비단 특정 회사만이 아닌 라면 전체에 신뢰를 잃은 소비자 때문에 라면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라면 파동은 기업들이 라면의 고급화ㆍ다양화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220개 종의 라인업과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이루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라면은 분명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납면과 라멘과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분화된 상태로, 그것의 계보를 따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라는 점, 그리고 라면의 시초였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입국이라는 점을 그 계보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80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신라면’의 경우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월까지 누적 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다.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1만 8000개 높이와 맞먹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2010년 말 현재 1조 9500억 원 수준에 이른다.
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 값싸고 조리하기 쉬워 ‘제2의 식량’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요리와 잘 어울려 라면 조리법도 무궁무진하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cm. 한 봉지에 보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가 총 길이는 약 50m이다. 라면은 꼬불꼬불한 면발이 뭉쳐져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돼 있다.
면발은 왜 꼬불꼬불한 걸까. 작은 봉지에 넣으려면 긴 면발보다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면이 나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는다.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면이 더 쫄깃쫄깃해 맛도 더 좋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잘 튀겨진다.
라면에는 방부제가 첨가돼 좋지 않다는 것은 오해다. 라면의 경우 면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대부분은 4~8% 정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미생물이 번식하기 어렵다.
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중국 발음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타자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라미엔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 중국식 라미엔에 일본 맛이 더해져 일본식 라멘이 됐다.
라면은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1910~2007)가 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심각한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도가 설립한 닛신식품(日淸食品)이 국수 면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섞은 아지스케면(味附麵)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판한 것이 라면의 시초다. 제품명은 치킨라멘. 뒤이어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조식품(明星食品)이 가세했다.
당시 라면은 아지스케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묘조식품은 이 점을 보완해 1961년 현재와 같은 분말스프를 첨가한 라면을 첫 생산했다. 이것이 오늘날 라면의 모태가 됐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조리와 휴대의 간편함을 극대화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農心)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辛春浩)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三養)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全仲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牛脂)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출처 ^ 참고문헌,
[삼양라면
[농심라면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갈릴레오 SNC)
#라면 #한국식 라면 #삼양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삼양라면 #농심라면 #인스턴트 라면 #북미지역에서 BTS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 문화의 확산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으로 튀긴 꼬불꼬불한 유탕면과 국물을 만드는 수프가 첨부돼 있다 #1966년 3월 21이라는 제조일자 #최고의 맛 #정확한 양 #최선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써 있다 #라면은 일본의 명성식품주식회사와 기술 제휴하여 만든 제품으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한국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코로나19로 수출 여건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치 라면 수출 #김종구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관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온라인 비대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결과 농식품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 #장기보관 #가정 내 간편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주요 수출대상국 #주요 수출대상국에서 큰 폭으로 증가하여 전년 동기대비 36점7% 증가한 4억 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 #소스류 #쌀 가공식품 #즉석밥 #떡볶이 #가정에서 요리에 활용되는 고추장 등 장류의 인기가 오르면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닭고기는 홍콩·미국에서 간편식 삼계탕 수요가 증가했으며 베트남에서 닭가슴살 인기가 오르면서 5000만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면의 종류 #유탕면 #호화건면 #숙면 #유탕면은 가장 기본형태의 라면으로 기름에 튀긴 면 #호화건면은 한번 익힌 면을 다시 말린 것을 말한다 #숙면은 반쯤 익혀서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상태에서 포장한 면이다 #용도에 따라 #비빔면 #컵라면 #라면사리 등으로 나눌 수 있어 비빔면은 비벼 먹을 수 있게 얇고 꼬들꼬들한 면으로 만들어지고 #컵라면은 끓이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도 완전히 익을 수 있게 면의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라면사리 #음식점에서 부대찌개나 전골 등에 추가해서 먹는 것 #분말 수프와 건더기 수프 없이 면만 포장하여 판매한다 #조리법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수프를 따로 넣는다.
즉석식품의 하나. 지방함량 16%, 단백질 8~9%, 탄수화물 등 영양분이 많으며, 500g당 390㎉의 높은 열량을 가진 식품이다. 근래에 와서는 각 회사의 제품다양화로 3분 동안 끓이는 라면에서 더운 물만 따르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즉석라면 등과 같이 제품 종류가 많아졌고, 이로 인해 국민 식생활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라면의 유래는 중국의 건면에서 나왔다는 설과 안도[安藤]라는 일본 사람이 오뎅튀김을 보고 착안하게 되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현재의 즉석식품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일본으로 1958년경부터 생산했으며, 한국에서는 1963년 삼양식품이 처음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라면을 생각할 때 대부분 빨간 국물을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고,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고춧가루가 조금씩 더 들어가 국물이 빨간 색을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안도 모모후쿠라는 사람이 처음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 일본 국민들 대다수는 미군이 제공하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뒤집어 보면 국수 장사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직장을 잃은 안도는 장기간 보관해도 원래의 맛을 살릴 수 있는 국수를 대량 생산해 사업화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업이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거의 10년 동안 국수 개발에 매달린 안도는 마침내 가진 돈을 모두 날려버리고 가정은 파탄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나이도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안도는 좌절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하자며 포장마차를 찾았다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던 안도는 포장마차 주인이 어묵에 밀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기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젖은 국수를 기름에 튀기면 밀가루 반죽에 포함된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면서 밀가루에 숱한 구멍을 남긴다. 이 구멍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면 국수가 다시 부드러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 안도는 연구에 매달린 끝에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간편하게 먹는 즉석 라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라면 생산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안도가 라면 제조 방법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도 쉽게 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국민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라면을 섬유의 한 종류로 오해해서 먹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삼양식품은
캠페인 성격의 시식을 실시하고 라면 알리기 운동에 나섰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일본식의 담백한 국물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삼양라면에 흥미를 보였다.
“한국 사람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군.”
한국에서 라면을 처음 생산한 것은 1963년이다.
경쟁이 치열한 일본 라면업계에서 한국에 라면 제조 기술을 이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최고지만 라면이 처음 국내에 선보였을 때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밀가루 음식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느끼한 국물에 값도 싼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라면은 가격이 10원으로, 당시 식당에서 사 먹는 백반이 30원이었으니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라면이 널리 보급된 것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덕분이다. 쌀을 아끼려고 라면 보급을 장려한 것인데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였다.
대통령이 우리 국민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느끼한 국물 대신 고춧가루를 이용한 수프를 개발해보라고 제안하면서 개발 자금까지 지원했을 정도다. 그때 당시 박정희대통령,
일본 라면이 패전의 허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발달했다면, 한국 라면은 산업화 도중 식량 자급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라면이라고 하면 인스턴트 라면부터 떠올리지만 라면은 사실 생라면을 기름에 튀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생라면은 어디서 비롯된 음식일까?
일반적으로 생라면의 뿌리는 중국으로 보고 있다. 1870년대, 요코하마의 부두에서 일하던 화교 노동자들이 먹었던 국수를 원조로 본다. 이들이 고향에서 먹던 ‘라몐(拉麵)’이 일본의 생 ‘라멘(らめん)’의 뿌리라고 하는데, 라몐이란 쉽게 말해서 수타국수다.
수타국수가 밀가루 반죽을 바닥에 때리며 늘리는 것과 달리 라몐은 공중에서 그대로 잡아 늘리는 것이 다르고 수타국수보다 면발이 훨씬 가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수타국수를 주로 짜장면으로 비벼 먹지만 중국은 라몐을 쇠고기 국물에 말아 먹는다. 때문에 겉보기에도 일본의 생라면과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생라면을 예전에는 지나(支那)소바, 또는 주카(中華)소바라고 불렀다. 생라면에는 이렇게 격변의 시대에 고향을 떠나 요코하마에 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중국 쿠리(부두 노동자)의 눈물이 배어 있다.
라면은 지나치게 먹으면 건강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라면은 싼값에 허기를 잊도록 해주는 구원의 음식이다.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라면에는 극한의 가난을 견디어낸 중국 부두 노동자들의 질곡과 패전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일본인의 노력, 산업화 과정에서 잘살아보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맨 한국인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목차
인스턴트 라면, 호평을 받다/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 2009년 우리나라, 라면 종주국이 되다/ 한ㆍ중ㆍ일, 라면의 시초를 두고 논쟁하다/ 1870년 일본에 라멘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 라멘, 일본의 전통 음식이 아니다/ 라멘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 일본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 안도 모모후쿠/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 닛싱 치킨 라멘/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전중윤 회장, 인스턴트 라면으로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하겠다/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인스턴트 라면, 호평을 받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의하면 2009년 기준 전 세계에서 연간 1천억 개의 인스턴트 라면이 소비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인스턴트 라면은 쌀과 빵에 이은 인류의 식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리가 쉽고 유통기한이 길기 때문에 구호물자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빈민들에게 라면은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주식이다.
“인스턴트 라면을 끓일 물만 있으면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을 수 있다지만, 인스턴트 라면을 주면 그 무엇도 가르쳐줄 필요 없이 평생 먹을 수 있다.”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소비하는 나라는 단연 중국으로 연간 408억 개의 라면을 먹는다고 한다. 그에 이어 인도네시아 139억 개, 일본 53억 개, 베트남 43억 개, 미국 40억 개이고 그를 이어 우리나라가 34억 개로 6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1인당 소비량에서는 수십 년간 한국이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소비량 69개(전체 소비량으로 세계 1위인 중국의 1인당 소비량은 32개로 반절에 못 미친다)!
2009년 우리나라, 라면 종주국이 되다
2009년 한국 라면의 수출량은 약 1억 4천만 달러로 중국, 일본, 미국을 크게 웃돈다. 상하이에서 한국 라면의 브랜드 인지도는 90% 이상이고, 러시아에서는 ‘팔도 도시락’이라는 제품이 라면 시장 점유율의 60%를 차지해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용기 라면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될 정도다. 심지어 라면의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을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는 라면 종주국이다.
한ㆍ중ㆍ일, 라면의 시초를 두고 논쟁하다
그런 점을 내세우며 이렇게 주장하는 이도 있다.
“라면의 시초가 일본이나 중국이란 말이 있지만 지금 팔리고 있는 한국식 인스턴트 라면은 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납면’이나 ‘라멘’은 라면과 다르다. 라면의 종주국은 한국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시초임을 주장하며 자존심 싸움을 하는 한ㆍ중ㆍ일이기에 라면의 종주국이 어디냐는 논쟁 역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과연 라면은 어떤 식으로 시작된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오게 된 것일까?
1870년 일본에 라멘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
본래 라면은 중국 음식으로 한자로는 ‘납면(拉麵)’이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노면(老麵), 유면(柳麵)이라고도 했다. 납면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라멘’이 된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대 요코하마 등 일본의 개항장에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라멘을 노점에서 만들어 팔면서 일본에 라멘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라멘이란 명칭이 아니었고 ‘지나(支那)소바’ 혹은 ‘남경(南京)소바’라고 불렸다.
라멘, 일본의 전통 음식이 아니다
라멘은 닭 뼈, 돼지 뼈, 멸치, 가다랑어포 등을 우려내고 여러 소스를 가미한 육수에 중화면이라는 국수를 말아 먹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중화요리로 구분되었다.
차후 라멘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라멘집이 생기기 전까지는 중화요리 집에서만 라멘을 다뤘다는 점, 중국 본토 란저우에 그와 유사한 납면(拉麵, 라미엔)이라는 국수가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아왔다는 점 등을 봤을 때 라멘은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인들이 만들던 납면은 수타면을 가늘게 뽑아내던 형식으로 굵은 면발의 일본라멘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납면은 일본식 라멘으로 변형된 것이다.
라멘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
일본식 라멘은 우리가 자주 먹는 인스턴트 라면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라멘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밀가루 일본에 구호물자로 넘쳐났다.
일본은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넘쳐났다. 그 시절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는 밀가루를 원료로 한 식품을 개발하면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온 뒤 전쟁과 패전의 배고픔을 겪었던 그에게는 사업 기회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류가 배고픔을 극복할까?’라는 커다란 그림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에게 이것은 사업의 기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성전(聖戰)이기도 했다. 그러나 쌀을 중심으로 한 식습관의 벽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는 사업 실패와 탈세 혐의기소 등으로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일본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 안도 모모후쿠
좌절 속에서 자살을 결심한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마시자는 생각에 조그만 선술집을 찾았다.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채 마시는 마지막 술.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서 자작을 하던 그는 멍하니 식당 주인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방장은 어묵을 튀기고 있었는데, 밀가루 반죽을 입힌 어묵이 기름에 빠지자 밀가루 속 수분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모습을 보며 안도는 방금 전까지 자살하고 싶었다는 마음 따위는 까맣게 잊고 회사로 달려갔다.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 닛싱 치킨 라멘
“면을 기름에 튀기면 건조되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물을 부으면 다시 원래 상태로 풀어질 테지?”
그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닛싱(日淸) 치킨 라멘’이라는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상품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화에는 반론도 있다. 이미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타이완 출신의 안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라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납면에서 유래된 중화풍의 라멘과는 면과 맛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는 식품이었다. 하지만 닛싱 치킨 라멘의 출시 이후 지나 소바, 남경 소바 등으로 불리던 비 인스턴트 라면(즉, 일본식 라멘) 또한 라멘이란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미국의 인스턴트 라면 소비자들이 컵에 면을 넣고 포크로 먹는 것을 보고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을 개발하는 등 인스턴트 라면의 대중화와 정립에 있어 인스턴트라면 역사의 처음과 끝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그의 경영 철학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먹는 것에 관계하는 일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성직(聖職)이다. 먹는 것이 풍족하게 될 때야말로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는 식족세평(食足世平), ‘세상을 위해 먹는 것을 만든다’는 식창위세(食創爲世).
실제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특허 등을 독점하지 않고 국내외 업체에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경영 철학에 부합하는 행보를 걸어왔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91세가 되던 2001년에는 우주에서 먹을 수 있는 우주식 라면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실제로 2005년 7월 일본인 우주비행사 노구치 소이치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 스테이션에서 사상 처음으로 라면을 먹는 중계 장면을 보고 안도가 감개무량해 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오랫동안 상하지 않으면서 싸게 팔리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들어 인류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그의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언론은 그를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우리나라의 인스턴트 라면이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도 모모후쿠가 제조특허를 독점하지 않은 덕에, 그리고 일본의 ‘묘조라면(MyojoFood)’ 사장이 노하우를 전부 이전해 준 덕에 1963년 삼양의 전중윤 회장은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출시할 수 있었다.
전중윤 회장, 인스턴트 라면으로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하겠다, 박정희 대통령께보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미군의 음식 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여 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들어왔지만 사람들의 입맛에 제대로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던 당시는 패전 직후 일본의 상황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을 도입한다면 식량 자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전중윤 회장의 생각이었다.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으로 튀긴 꼬불꼬불한 유탕면과 국물을 만드는 수프가 첨부돼 있다.
1966년 3월 21이라는 제조일자, “최고의 맛, 정확한 양, 최선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써 있다. 이 라면은 일본의 명성식품주식회사와 기술 제휴하여 만든 제품으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이다.
종류
면의 종류에 따라 유탕면, 호화건면, 숙면 등으로 나뉜다. 유탕면은 가장 기본형태의 라면으로 기름에 튀긴 면을 말하고, 호화건면은 한번 익힌 면을 다시 말린 것을 말한다. 숙면은 반쯤 익혀서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상태에서 포장한 면이다.
이 밖에도 용도에 따라 비빔면, 컵라면, 라면사리 등으로 나눌 수 있어 비빔면은 비벼 먹을 수 있게 얇고 꼬들꼬들한 면으로 만들어지고, 컵라면은 끓이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도 완전히 익을 수 있게 면의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라면사리는 음식점에서 부대찌개나 전골 등에 추가해서 먹는 것으로, 분말 수프와 건더기 수프 없이 면만 포장하여 판매한다.
조리법
제조방법은 제면→중숙→납형→튀김→냉각→스프첨부→포장의 공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것은 공장에서 라면을 생산할 때의 공정이고, 라면을 끓여 먹을 때에는 보통 해당 라면 봉지에 적혀 있는 조리방법을 따른다. 가장 보편적인 조리방법은 종이컵을 기준으로 물을 세 컵 정도 넣고 물이 끓어오르면 면과 건더기 스프, 분말 스프를 넣고 4분 30초가량 더 끓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호에 따라 계란이나 치즈를 추가하기도 하며, 아예 채소나 고기를 넣고 질이 높은 요리처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완성된 라면은 보통 김치와 곁들여 먹는다.
라면 영양정보,
분류1회 제공량칼로리,
면,만두류/ 500g/ 387.6kcal
출처 ^ 참고문헌,
[삼양라면
[농심라면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갈릴레오 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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