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배가 파경의 상황에 도달하게 된 원유에는 다각적인 위기와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유책배우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이러한 책임이 있는 측은 상대방 배우자에게 위자료 명목의 손해배상 지급을 하여야 하고, 이를 받는 입장인 상대방에서는 보다 명확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상대방의 잘못을 입증하여야 합니다. 유책사유는 크게 6가지를 들 수 있는데요.
우선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동반자의 부적정한 행위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륜, 외도 등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 밖에도 재산상 배우자와의 협의 없이 임의 처분하는 등의 행동을 총체적으로 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각별히 파경 송옥이 가장 많은 이유로 꼽히며, 결혼 후 서로 다른 이성과 정신적 교감이나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되어 서로에 대한 정조 의무 등을 잘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부간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또는 가정폭력 등으로 인해 절혼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같은 사항은 일방이나 양방이 외입을 한 경우보다 근거를 확보하기 어렵고 고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책배우자이혼소송 사례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다른 법적소송도 그렇지만 특히 증거수집이나 상황확보 등이 중요한데요.
실제로 심증만으로 유책배우자이혼소송 사례가 될만한 안건을 진행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법원 판례가 있으며 이는 상대방의 배우자가 실제로 그러한 일을 했더라도 이를 명백히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단순한 심증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되고, 이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O씨와 S씨는 혼인 후, 두 자녀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순탄했던 결혼 생활도 O씨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어, 형식혼 소실 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S씨는 O씨의 외도가 의심돼 차에 있던 블랙박스를 확인하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통화하는 것을 확인했는데요. S씨와 낯선 남자의 통화내역을 듣고 일반적인 관계로는 나눌 수 없는 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O씨는 그가 바람을 피우는 상대 이성인 I씨와 외박할 계획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O씨가 회사에서 출장을 다녀온다는 말을 듣고 S씨는 미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O씨와 I씨와 함께 숙소에 들어간 것이 확인됐고, 그 모습을 본 S씨는 외도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S씨는 O씨에게, 부부간에 신뢰를 잃게 되었다며 협의 이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정신적 고통을 받아 유책배우자이혼소송과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간통죄 폐지로 더는 형벌을 할 수 없게 되자 정신적 충격을 받기 위해 제기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O씨는 I씨와는 단순히 친분 관계일 뿐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O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받아들여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다음 사례를 추가로 살펴보면 G씨와 T씨는 혼인 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요. 두 사람 모두 결혼하기 전에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었다가 T씨는 결혼하여 퇴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G씨는 T씨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성혼한 뒤 저축과 뱅크에서 빌려온 금전을 모두 형들에게 빌려줬습니다.
추후에 이를 돌려받지 못해서 재산을 잃은 후에는 1억원 정도의 빚을 지게 되었어요. G씨와 T씨는 이로 인해 자주 다투게 되었다고 해요.
G씨는 누군가와 부정한 관계를 맺어 T씨에게 이런 일이 알려지자 이혼을 요청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완전히 집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G씨와 T씨는 현재까지 따로 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G씨가 T씨를 상대로 가정지원 등에 이혼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이런 행동을 한 G씨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G씨가 제기한 유책배우자이혼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따로 떨어져 별거 생활을 하는 동안에 G씨가 필요한 생계비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았고, 그럼에 따라 이를 받기 위해 애들과 함께 G씨가 일하는 곳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G씨는 퇴직할 때까지 T씨에게 매달 약 150만원을 생활비로 주었습니다. G 씨는 U 씨에게 개인회생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요구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U씨는 본인이 해줄 수 없는 서류로 필요한 경우에만 연락을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G씨는 T씨에게 이혼을 요청하고 유책배우자이혼소송을 내겠다는 메일을 보내게 됩니다. G씨는 T씨와 오랫동안 별거하다 혼인이 갈라진 상황이고 아이들도 모두 성인이어서 G씨가 더는 육아를 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G씨가 퇴직한 후 두 사람이 연락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G씨가 개인회생 신청을 하고자 필요한 서류를 받으려 자녀들에게 연락을 했을 때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T씨는 단지 경제적인 연유나 복수를 위해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당인은 결혼의 삶을 고스란히 지속하기 힘든 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G씨가 유책배우자라며 G씨에게 이혼청구를 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일반인의 입장에서 혼자 진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진행할 때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원활하게 진행하면 향후 편의가 보장됩니다.
혼자서 해소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법적 해석이나 적용과 같은 시작부터 어렵게 느껴짐과 동시에 상대방이 이를 용인하지 않고 다른 대응책을 가지고 온다면 이를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법원 #법률 #유책배우자 #이혼청구 #유책 배우자 이혼소송 사례로 보아| #법적 해석이나 적용 #유책배우자이혼소송을 내겠다는 메일을 보내게 됩니다 #G씨는 T씨와 오랫동안 별거하다 혼인이 갈라진 상황이고 아이들도 모두 성인이어서 G씨가 더는 육아를 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G씨가 퇴직한 후 두 사람이 연락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G씨가 개인회생 신청을 하고자 #필요한 서류를 받으려 자녀들에게 연락을 했을 때 연락을 하지 않은 것 #T씨는 단지 경제적인 연유 #복수를 위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 #빚 #O씨는 그가 바람을 피우는 상대 이성인 I씨와 외박할 계획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O씨가 회사에서 출장을 다녀온다는 말을 듣고 S씨는 미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O씨와 I씨와 함께 숙소에 들어간 것이 확인됐고그 모습을 본 S씨는 외도에 대해 물었습니다 #S씨는 O씨에게 부부간에 신뢰를 잃게 되었다며 협의 이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받아 유책배우자이혼소송과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 #간통죄 폐지로 더는 형벌을 할 수 없게 되자 정신적 충격을 받기 위해 제기하게 됩니다 #O씨는 I씨와는 단순히 친분 관계일 뿐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은 O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받아들여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순탄했던 결혼 생활도 O씨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어형식혼 소실 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S씨는 O씨의 외도가 의심돼 차에 있던 블랙박스를 확인하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통화하는 것을 확인 #S씨와 낯선 남자의 통화내역을 듣고 일반적인 관계로는 나눌 수 없는 대화의 내용 #형식혼 소실 분쟁 #배우자의 부정행위 #동반자의 부적정한 행위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2019. 1. 1. ·Windows 10 파일 탐색기에서미리보기활성화 시키기. 광활한 테라바이트(TB)의하드디스크(HDD)와 SSD(Solid State Drive) 에 보관된 수많은 그림, 사진파일을빠른 시간에 검색하기 위해서 사용자 취향과 컴퓨터 사양에 맞는 윈도우10…
2020. 9. 9. · Window 10 에서 실수로 삭제한 파일을 찾아 복구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과거 버전에서는 디렉토리에서 휴지통 폴더를 찾아 다시 원하는 위치로 옮기면 살려낼 수 있었는데 Window 10 에서는 휴지통이 어디에 있는지 부터 찾기가 아렵네요. 휴지통에 가서 실수로 삭제한 폴더나 파일을 찾아 복구하는 ..
Windows 10 정품 인증 오류에 대한 도움말 보기 - Microsoft 커뮤니티, 2020. 9. 9.
윈도우 10 폴더 안의 사진 미리보기(?) 질문입니다 - Microsoft 커뮤니티, 2020. 9. 8.
windows 10 탐색기 검색 오류, 2020. 9. 8.
윈도우 10 탐색기 파일 삭제/폴더 추가 딜레이 문제 - Microsoft ...2020. 9. 6.
2020. 9. 8. · Windows 10용 ISO 파일을 다운로드한 경우, 해당 파일은 선택한 위치에 로컬로 저장됩니다.컴퓨터에 타사 DVD 굽기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으며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설치 DVD를 만들려는 경우, 파일이 저장된 위치로 이동하여 ISO 파일을 …
윈도우10에서도 탐색기를 통한 폴더 및 파일 접근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새로 추가된 부분도 중복되는 요소들이 많아 기본 설정의 탐색기는 복잡해 보이기에 이를 재설정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탐색기 확장 윈도..
#컴퓨터 #윈도우10 #탐색기 #탐색기확장 윈도 #ISO파일 #Windows 10 다운로드 #Windows 10용 ISO 파일을 다운로드한 경우 #해당 파일은 선택한 위치에 로컬로 저장 #컴퓨터 #타사 DVD 굽기 프로그램이 설치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 #설치 DVD를 만들려는 경우 #파일이 저장된 위치로 이동하여 ISO 파일 #WEBDIR Windows 10 탐색기 설정 #탐색기설정 #윈도우 10 폴더 안의 사진 미리보기 #Microsoft 커뮤니티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뉴질랜드는 10세기경 폴리네시아 문화를 계승한 마오리족에 의해서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서양인으로는 네덜란드의 항해사 타스만이 1642년 최초로 발견하였다.
1769년 영국인 선장 쿡이 탐험하였으며, 1840년 마오리족 대표와 영국 대표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9월 26일 독립하여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가 1931년에 영연방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성문헌법이 없는 국가로, 국가 원수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y Ⅱ)이며, 임기 5년의 총독이 영국 여왕을 대리하지만 실권은 2008년 11월에 취임한 키(John Key) 총리에게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우파로,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미국·영국·영연방제국 등과의 유대 강화와 일본·아세안 등 아시아국가와의 협력 증진에 힘쓰고 있다. 또한, 중국·베트남 등을 승인하여 공산권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수도는 웰링턴이다. 국토는 2개의 주요 섬과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뉴질랜드의 문화는 유럽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약 1,920㎞ 지점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섬과 그 부속도서로 구성된 나라로 해안선의 길이는 15134㎞이다.
영연방의 하나로, 면적은 26만 7710㎢, 인구는 443만 839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웰링턴(Wellington)이다. 자치령 및 해외 영토로 남태평양의 쿡(Cook)·니우(Niue)·토클로(Tokelau) 등의 섬이 있다.
종족구성은 앵글로색슨계 위주의 백인이 69.6%, 마오리(Maori) 원주민이 14.5%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 52%, 가톨릭교 15%, 힌두교 등 기타 33% 등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업적 농업과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며,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999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342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로서, 의회는 임기 3년의 단원제(120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국민당(NP), 노동당(LP), 뉴질랜드 제일당(NZF), 소비자납세자당(ACTNZ) 등이 있다.
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1,600km 떨어져 있으며 남위 33~53°사이(남북 길이 1,600km), 서경 162~173°사이(동서 길이 450km)에 있다. 폭 32km의 쿡 해협을 끼고 있는 2개의 주요 섬인 노스·사우스 섬과 기타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스 섬과 사우스 섬은 남부의 산들과 북부의 구릉지대로 양분된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약 10%를 차지하는 마오리족과 태평양 도서군 원주민·화교들이 소수 집단을 이룬다.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지만 불교·힌두교 신자도 있다.
화폐단위는 뉴질랜드달러(New Zealand dollar/NZ$)이다.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특징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뉴질랜드 경제는 농업·중소기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선진적 시장경제이다. 농업은 특히 목양업이 발달했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AD 1000년경부터이다. 1642년 네덜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에 의해 주요 섬들이 처음 발견되었고, 1769년 제임스 쿡 선장은 이 섬들의 지도를 만들었다. 1840년 영국 직할식민지가 된 이 지역에서는 1860년대 내내 마오리족 원주민과 점령자들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1865년 수도를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옮겼고, 1907년 뉴질랜드 자치령의 지위를 얻었다.
뉴질랜드는 1919~62년 서사모아를 위임통치했고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70년대 초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EEC) 가입은 뉴질랜드 경제에 인플레이션 급등과 실업의 증가라는 악영향을 미쳤다. 뉴질랜드 정부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경제를 다각화했다. 또한 뉴질랜드는 외교관계에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고, 핵무기 확산 반대 입장을 강하게 견지했다. 문맹률은 거의 0%다.
온대의 나라, 뉴질랜드 여행,
뉴질랜드는 아름다운 자연과 온화한 기후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관광 국가로 성장하였다. 뉴질랜드는 국토 대부분이 연중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서안 해양성 기후 지역이어서 여행하기에 쾌적한 기후 조건을 갖춘 곳이다. 뉴질랜드는 가장 더운 달의 월평균 기온이 22℃를 넘지 않고, 겨울에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푸른 초원을 볼 수 있다.
만약 1월에 뉴질랜드를 여행한다면 어떤 옷을 준비해야 할까? 남반구 중위도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북반구 중위도에 있는 우리나라와는 계절이 반대이기 때문에 가벼운 여름옷을 준비해야 한다. 봄과 가을에 입을 만한 옷도 함께 준비해야 하는데, 뉴질랜드는 바다로 둘러싸인 국가이기 때문에 여름이 우리 나라처럼 덥지 않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세계적으로 목축업이 발달한 국가이다. 자동차를 타고 북섬과 남섬을 달리다 보면 곳곳에 펼쳐진 넓은 풀밭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과 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6,000만 마리의 양과 800만 마리의 소를 사육하고 있으며, 경작지 대부분이 목축을 위한 사료를 생산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여름이 서늘해서 가축이 먹을 수 있는 풀이 풍부하고, 인위적으로 초지를 조성하기에도 매우 유리하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뉴질랜드는 영국의‘고기 창고’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대형화된 현대식 냉동선이 육류를 아주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되면서 뉴질랜드는 세계적인 목축업 국가가 되었다.
뉴질랜드의 북섬은 불의 섬, 남섬은 얼음의 섬이다. 북섬에는 화구가 6개인 통가리로 화산, 고깔모자를 닮은 나우루로 화산, 북섬에서 가장 높은 루아페후 화산(2,797m) 등이 있다. 이들 화산은 여름에는 등산객이,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는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남섬에는 빙하가 만든 계곡과 호수 등이 있다. 특히, 피오르랜드 국립 공원은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뉴질랜드
뉴질랜드의 문화적 환경은 유럽 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20세기 후반 이후 마오리족의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뉴질랜드 정치 발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는 1949년 7월 우리나라를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에는 육군과 해군 5,350명을 파병하였고, 사상자는 120명에 달하였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영연방군이 치른 가장 큰 격전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국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맞아 경기도 가평에서 벌인 가평전투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가평에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의 6·25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뉴질랜드의 한국전참전용사회는 가평전투를 기념하여 1976년 이래 매년 가평북중학교 학생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현충일로 정하고 있어 가평전투는 양국 국민에게 더욱 의의가 깊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합작투자로는 한·뉴펄프합작회사가 설립되어 1978년 10월부터 생산에 들어갔는데, 뉴질랜드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한·뉴육우시범목장에 육우 206두를 지원하고 기술자를 파견한 바 있다. 또한, 평택시범낙농목장 개발에도 종우와 낙농기계를 제공하고 전문가를 파견하였다.
1982년부터 한국의 승용차가 뉴질랜드에 연간 200∼300대씩 수출되었으며, 뉴질랜드의 중개상을 통하여 남태평양 도서국에도 진출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뉴질랜드 수출액은 12억 6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석유제품·자동차·어류·무선통신기기 등이며, 수입액은 12억 2000만 달러로 목재류·축산가공품·육류 등이다.
양국간의 친선단체로는 뉴질랜드 한국전참전협회를 비롯하여, 1975년 6월에 창립된 한·뉴협회, 1978년 6월에 창립된 한·뉴의원친선협회, 그리고 1978년 9월에 창립된 한·뉴경제인협회 등이 있고, 재뉴질랜드 교민회도 구성되어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53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오양·동원·대왕수산 등 수산업체가 진출해 있고, 2만 3877명의 한국민 교민과 9095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 3월 26일 뉴질랜드와 수교하였으며, 2006년 현재 외교업무는 주 한국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뉴질랜드』(산업연구원 편, 선진국국별편람, 1986)
[New Zealand in the Making -A Study of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Johnbell Condliffe,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63)
#뉴질랜드 #뉴질랜드여행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는 1949년 7월 우리나라를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에는 육군과 해군 5350명을 파병하였고 사상자는 120명에 달하였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 #영연방군이 치른 가장 큰 격전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국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맞아 경기도 가평에서 벌인 가평전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가평에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의 6·25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뉴질랜드의 한국전참전용사회는 가평전투를 기념하여 1976년 이래 매년 가평북중학교 학생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현충일로 정하고 있어 가평전투는 양국 국민에게 더욱 의의가 깊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 #합작투자로는 한·뉴펄프합작회사가 설립되어 1978년 10월부터 생산 #뉴질랜드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한·뉴육우시범목장에 육우 206두를 지원하고 기술자를 파견한 바 있다 #평택 시범 낙농목장 개발에도 종우와 낙농기계를 제공하고 전문가를 파견 #1982년부터 한국의 승용차가 뉴질랜드에 연간 200∼300대씩 수출 #뉴질랜드의 중개상을 통하여 남태평양 도서국에도 진출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뉴질랜드 수출액은 12억 6000만 달러 #주종목은 석유제품·자동차·어류·무선통신기기 #수입액은 12억 2000만 달러로 목재류·축산가공품·육류 #양국간의 친선단체로는 뉴질랜드 한국전참전협회 #1975년 6월에 창립된 한·뉴협회 #1978년 6월에 창립된 한·뉴의원친선협회 #1978년 9월에 창립된 한·뉴경제인협회 #재뉴질랜드 교민회도 구성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53명의 선수단이 참가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오양·동원·대왕수산 등 수산업체가 진출해 있고, 2만 3877명의 한국민 교민과 9095명의 체류자가 있다 #북한은 2001년 3월 26일 뉴질랜드와 수교하였으며, 2006년 현재 외교업무는 주 한국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1962년 3월 26일에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 #1971년 6월에는 주한 뉴질랜드대사관이 같은 해 7월에는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유엔에서의 한국안 공동제안국 및 중심그룹회원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왔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8년 3월에는 어업 협정 #1978년 12월에는 국제운송소득면제 협정 #1981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3년 8월에는 항공 협정 #1984년 8월에는 사증면제협정 #1999년 5월에는 취업관광사증 협정 #2002년 4월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2005년 11월에는 영상산업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2006년 12월에는 정보통신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며, 일명 Holland·화란(和蘭)이라고도 한다.
서쪽과 북쪽이 북해와 접하며, 해안선은 약 451㎞에 달한다. 속령으로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한때 인도네시아도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으나 1950년 독립하였다.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en gaag)이며,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된다.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특히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C)의 창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주로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762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른 비율로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며, 총리는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의회는 임기 6년의 상원(75석) 및 임기 4년의 하원(150석) 양원으로 구성되며,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PVDA),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당(VVD), 민주66당(Democrats66), 녹색당, 사회당 등이 있다.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되었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으로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하였다.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했으며,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과 영주권 부여의 길을 터놓은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1948년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율리아나(Julianace)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율리아나 여왕은 1980년 4월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 형식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 또는 중용 국정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副署)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므로 국왕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시대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J., 박연, 朴淵)가 표류, 귀화했던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간 하멜(Hamel, H.)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하였다. 1907년 이준(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焚死)한 바 있다. 그의 유해는 1963년 서울로 이장되었으며, 유해가 있던 곳에 1977년 10월 묘비가 제막되었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6·25전쟁 참전국으로 강원도 횡성군에는 화란 참전용사비가 있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1961년 4월 4일 국교 수립에 합의하였다. 1968년 12월 주한 상주공관이 개설되고, 1969년 10월에는 네덜란드 주재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제조용장비·반도체제조용장비부품·나프타·고철 등이다.
양국은 경제협력을 보다 원활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협의를 해 오고 있으며, 2007년 현재 경제단체로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진출해 있다.
또한, 한·화란친선협회 및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한 바 있으며,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에 수교하였으나 교민이나 체류자는 없다.
북한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2014년 현재 672만 달러로 주종목은 기계공구류와 비금속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입액은 267만 달러로 기계류와 섬유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양측은 2001년 4월 무역 및 경제 협력에 관한 회담록, 북한지역 통과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 양해각서 등을 교환하였다.
네덜란드 내의 한국 문화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루크(Rubruck, W. van)은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그 첫 번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사이에 몽고제국의 영내를 다녀오고 우리나라를 까울레(Caule, 高麗)라 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에 따라 폴로(Polo, M.)도 카울레를 언급하였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뒤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소개한 사람은 하멜(Hamel, Hendrik)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페르베르호(DeSperwer號)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다 돌아갔다. 그 뒤 그는 『하멜표류기』를 1668년 로테르담에서 출간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기는 했으나,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처음으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다.
비첸(Witsen, N.)이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도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값진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가 이 방면에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의사로서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동안 일본의 데지마(出島:나가사키)에 머물면서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표류해서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고, 그에 앞서 한글의 자모(字母)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낸 바 있다.
네덜란드에 돌아간 뒤 그는 1831년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라이덴에서 독일어로 써 냈는데, 그 책의 다섯 장에는 우리나라의 관료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은 뒷날 라이덴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와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곁들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라이덴 소재 국립민족학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가장 두드러진다.
국립민족학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대략 1,500점에 달하는데, 세 사람의 소장품이 그 근간을 이룬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이 그 중 한 사람으로,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 가운데 23점은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이고, 나머지 13폭은 석천(石泉)의 것이었다. 그것이 뒤에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또 한 사람은 한말 전환국(典圜局)의 기사로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인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를 포함하여 조선 말의 값진 유물이 상당수 거기에 들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그것은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로,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이다. 그는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그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그 동안 이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로서,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발라벤이 전임으로서 한국어·한국문학입문·한국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와 라머스 신(Lamer-hin, S.)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전공 학생이 5명, 부전공학생이 해마다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학 가운데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방면의 연구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호프(Moelenhoff)에서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으로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있는바, 거기에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이다.
이 밖에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으로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네덜란드 기후
네덜란드는 겨울 평균 기온 1~4℃, 여름 평균 기온 13~22℃로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보통 비가 자주 오는 습한 날씨가 지속되는 편이며, 날씨의 변화가 심하니 겨울이 아니더라도 겉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겨울에도 눈보다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출처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네덜란드 개황』(외교통상부, 2006)
[ 네덜란드』(산업연구원 편, 선진국국별편람, 1986)
[Korean Genre Paintings in the Netherlands and around the World(Walraven, B. C. A., Korea Journal Vol.23, No.1, 1983)
[Korean Studies in the Netherlands-Past and Present」(Vos, F.,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묄렌호프(Moelenhoff)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 #둥근 사랑 #모난 사랑 #Liefe road liefe vierkant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 #홍길동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변강쇠가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발라벤(Walraven B C A.)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 #Rahder J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 #한·화란친선협회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 #1831년 벨기에가 독립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 #자유헌법 제정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 #서유럽연합(W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 #대외정책을 추구 #온난 다습한 해양성 기후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en gaag)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C)의 창립국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7625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