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서부영화, 하이 눈, [ High Noon ]

서부영화, 하이 눈, [ High Noon ]

하이 눈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흑백 서부극으로 게리 쿠퍼가 은퇴한 보안관으로, 그레이스 켈리가 그의 신부로 등장한다. 감독은 영화 속 시간과 상영시간이 거의 일치하도록 이야기를 구성했으며,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제작/ 연도/ 감독/ 출연관련/ 서비스/

1952

프레드 진네만

게리 쿠퍼, 그레이스 켈리, 로이드 브리지스, 캐티 주라도, 이안 맥도널드


목차

  1. 시놉시스
  2. 작품해설
  3. 주요 등장인물
  4. 명장면 명대사
  5. 관련정보
  6. 원작
  7. 수상
  8. 음악
  9. 연관 영화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세 명의 무법자들이 보스 프랭크 밀러의 도착을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 마을에서는 보안관 케인의 결혼식이 진행 중이다. 자신이 체포했던 악당 프랭크 밀러가 풀려나 정오에 마을 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케인은 신부와 마을을 떠나는 대신 마을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사람들을 모으러 다닌다. 그러나 프랭크 밀러 무리에게 겁을 먹은 마을 주민들은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케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한다. 부보안관인 하비 펠은 케인이 자신을 후임으로 추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앙심을 품고 케인을 돕지 않기로 한다. 마을을 지키겠다는 케인과 떠나자는 신부 에이미 사이에는 갈등이 벌어지고, 에이미는 케인을 두고 떠나려고 마음먹는다.

한편 하비 펠의 애인이자 케인의 전 애인인 멕시코 여인 헬렌 라미레즈는 케인이 혼자 고군분투하다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마을을 떠나기 위해 재산을 처분한다. 프랭크 밀러의 도착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지만 사람들을 하나도 모으지 못한 케인은 결국 프랭크 일당을 혼자서 대적하게 된다. 떠나는 기차에 타고 있던 에이미는 총소리가 들리자 결국 케인을 찾아 마을로 돌아오고, 네 명의 무법자와 대치하던 케인은 두 명을 처치한 뒤 프랭크 밀러를 비롯한 두 명과 대치 상태에 놓인다.

건물에 숨어 있던 에이미는 프랭크의 마지막 부하를 총으로 쏴죽이지만 그의 인질이 된다. 프랭크는 에이미를 죽이겠다며 케인을 협박하고, 케인이 밖으로 나온 순간 에이미가 프랭크에게 반항하는 틈을 타 케인은 프랭크를 처치한다. 마을은 평화를 되찾고, 케인은 보안관 배지를 던져버리고 에이미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작품설명,

원작에 대한 논란

라이오넬 체트윈드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하이 눈〉의 시나리오작가 칼 포먼에 관한 2002년작 TV다큐멘터리 〈‘하이 눈’의 어두운 이면〉에 따르면 〈하이 눈〉의 시나리오는 알려진 대로 원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작가 칼 포먼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포먼은 한 영화비평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영화가 ‘서부극을 배경으로 한 공격성’을 다룬 자신의 네 장짜리 트리트먼트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영화 속 스토리 시간과 영화 상영시간을 맞춘다는 아이디어도 그 트리트먼트에 이미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다.

포먼의 트리트먼트와 존 커닝햄의 잡지소설 〈The Tin Star〉의 유사성을 지적한 〈하이 눈〉의 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는 표절 시비를 피하고자 포먼으로 하여금 커닝햄의 소설 판권을 구입해서 영화를 진행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2002년은 이미 감독이나 제작자, 배우, 포먼 그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되었다.


매카시즘이 팽배하던 시대적 배경

이 영화의 제작과 상영기간은 1950년대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1938년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등 반미국적인 활동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창설된 비미활동위원회(HUAC)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의 명단을 갖고 있다며 그들의 색출을 주장한 상원의원 매카시의 주도로 활동에 탄력을 받는다.

시나리오작가 칼 포먼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도중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되었다. 포먼은 십년이 넘도록 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아는 공산주의 성향 인사의 명단을 밝히라는 위원회의 요구를 거절했고, 위원회는 그를 ‘비협조적인 증인’으로 간주한다.

〈하이 눈〉 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는 이 사실을 알고 공동제작자이기도 한 포먼을 영화제작에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포먼에게 우호적이던 프레드 진네만 감독과 주연배우 게리 쿠퍼가 개입하여 그는 제작자로 남게 되었지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포먼은 이 영화 작업 이후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고, 금지령이 풀릴 때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크레이머는 포먼을 변호하지 않았던 이유가 포먼이 크레이머를 공산주의자로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포먼은 크레이머가 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커리어가 무너질까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스탠리 크레이머는 칼 포먼의 제작자 크레딧을 영화에서 지워버렸고, 그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상영시간과 영화 속 시간의 일치

〈하이 눈〉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영시간과 영화 속 스토리 지속시간을 거의 일치시킨 영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 상영시간이 85분이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계가 10시35분을 가리키는 것에서 시작되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는 장면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계가 12시를 가리킨 이후에도 15분가량 마지막 대결 장면이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속 스토리 지속시간은 100분가량이라고 계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시간과 영화의 상영시간을 일치시키는 장치로 시계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하이 눈〉에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의도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실제 시간과 영화 속에서 상기시키는 시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실험적인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편집자인 엘모 윌리엄스는 첫 편집본에서 전체 스토리의 시간을 영화의 상영시간과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기까지의 장면을 정확히 60분으로 편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편집본이 감독과 제작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상영시간을 일치시키는 쪽으로 재편집된 일종의 수정 버전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영화 속 행위는 정확히 상영시간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전 장면과 다음 장면 사이에 시간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형식적 포인트로 작용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시간의 느낌을 계속해서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데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계는 등장인물과 관객에게 동시에 데드라인, 즉 악당이 도착하는 시간인 정오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는 이후 현대영화, 주로 범죄영화에서 사용되는 스토리 구성의 방법론으로 등장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스토리 구조, 즉 ‘시간과의 경주’라는 콘셉트가 갖는 긴장감은 관객을 스토리에 몰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이 눈〉에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단순히 시계를 통해 시간을 상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 구성에 있어서도 정교한 연출을 선보인다. 이 영화 속에서 시계는 대개 눈에 띄지 않는 배경의 일부로 장면의 처음부터 등장하다가 다음 장면으로 전환하려는 순간에 클로즈업을 통해 보여진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시 말해 데드라인인 정오가 다가올수록 감독은 시계가 더욱 크게 보이도록 클로즈업 장면의 사이즈에 변화를 준다. 이는 등장인물의 심리적 긴장감과 압박감을 점진적으로 강화시키는 동시에 관객 또한 등장인물과 비슷한 심리 상태로 몰아넣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수정주의 서부극과 영화의 주제

〈하이 눈〉이 처음 미국에서 개봉됐을 때 비평가와 관객은 처음에 호의적인 평가를 보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는 서부극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주요한 요소들이 모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추격, 폭력, 액션, 그리고 그림 같은 정경들은 일반적인 서부극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하이 눈〉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는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대사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액션 장면은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단 몇 분만 지속될 뿐이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서 게리 쿠퍼가 연기한 보안관 케인이 마지막 대결에서 절체절명의 순간 그레이스 켈리가 연기한 신부 에이미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는 설정은 일반적인 서부극의 영웅적 풍모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하이 눈〉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 때문에 서부극의 장르적 관습에 대한 성찰적인 면모를 보이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단초를 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영웅은 더 이상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며, 그 또한 절망하고 고뇌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가 자신과 함께할 대원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긴 여정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감독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대한 권력 혹은 무소불위의 힘에 맞서 약해지는 인간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어떤 비평가는 영화 속에서 평화주의자로 등장하는 보안관 케인의 신부 에이미가 마지막에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드는 장면을 가리켜, 이성적 태도를 견지해온 그녀의 변화가 결국 감성적 결말로 영화를 끌고 간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설정에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태생적 주제가 이 영화가 지닌 성찰적 관점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정착한 미국의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는, 미국의 폭력적인 개척사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방어적인 폭력으로 악을 처단하는 영웅을 그리는 다소 보수적인 관점이 깔려 있는데, 〈하이 눈〉에서 보이는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케인의 캐릭터가 이러한 보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반면, 에이미가 총을 들고 케인을 돕는 마지막 장면은 결국 폭력을 써야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서부극 장르의 전통적 주제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관점이 녹아 있는 영화 〈하이 눈〉은 풍성한 의미를 전달하며,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인사들이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미국영화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사회적 영향

〈하이 눈〉은 영화가 품고 있는 정치적인 함의 때문에 유독 사회적인 이슈가 된 영화이다. 미국 내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영화가 비미국활동위원회에 저항하기를 두려워하는 할리우드 사람들에 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 특히 비미국활동위원회를 지지했던 많은 영화계 인사들은 이 영화를 싫어했는데, 특히 존 웨인은 그가 열렬히 지지했던 비미국활동위원회의 블랙리스트 작업에 대해 이 영화가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는 〈하이 눈〉을 가리켜 “내가 본 가장 비미국적인 작품”이라고 말했으며, 훗날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작가 칼 포먼을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리도록 도운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연인 윌 케인 역을 맡은 배우 게리 쿠퍼는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우호적인 증인’으로 분류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에 강하게 반대했다.

1959년 존 웨인은 하워드 혹스와 팀을 이뤄 〈하이 눈〉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인 답으로서 영화 〈리오 브라보〉를 만들었다. 하워드 혹스 감독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 웨인과 나는 〈하이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 〈리오 브라보〉를 만들었다. 나는 좋은 보안관이라면 겁쟁이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보안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그의 퀘이커 교도 아내가 아닌가. 이러한 설정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서부극이 아니다.” 이러한 혹스의 비판에 대해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혹스 감독을 매우 존경한다. 나는 그저 그가 내 영화를 가만 내버려두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워드 혹스가 〈리오 브라보〉를 〈하이 눈〉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답변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좋은 보안관이라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을 거라는 그의 생각은 나를 놀라게 했다. 보안관도 평범한 한 사람이며 모든 보안관이 같은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 눈〉의 이야기는 과거의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한 남자의 내면적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부극의 영웅에 대한 존경심이 이 영화에서 사라졌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요 인물

윌 케인(게리 쿠퍼) : 서부의 작은 마을 헤이드리빌의 보안관. 보안관직에서 은퇴한 뒤 갓 결혼한 신부 에이미와 함께 마을을 떠나려는 찰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악당 프랭크 밀러가 정오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에이미(그레이스 켈리) : 케인과 결혼한 신부. 퀘이커 교도이며, 프랭크 밀러에 맞서려는 남편과 갈등을 빚고 홀로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결국 남편에게 돌아온다.

하비 펠(로이드 브리지스) : 헤이드리빌의 부보안관. 케인이 자신을 후임 보안관으로 추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부보안관직을 그만둔다. 케인의 전 애인인 헬렌 라미레즈와 연인 사이이다.

헬렌 라미레즈(캐티 주라도) : 케인의 전 애인이자 현재는 하비의 애인. 프랭크 밀러가 마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가게를 처분해 마을을 떠나려 한다.


명장면 명대사

- 라미레즈 : “난 언제나 이 마을을 싫어했죠. 여긴 멕시코 여인이 살기에는 너무나···.”
- 에이미 : “이해해요.”
- 라미레즈 : “그래요? 난 당신을 이해 못하겠어요. 그가 내 남편이면 난 총을 들고 싸워요.”
- 에이미 : “그럼 왜 안 싸우죠?”
- 라미레즈 : “그는 내 남편이 아니라, 당신 남편이니까요.”

극중에서 케인의 신부 에이미와 케인의 전 애인인 라미레즈는 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오빠가 악당들과 싸우다 죽는 것을 목격한 뒤 퀘이커 교도가 된 에이미는 싸움 자체를 반대하며 케인을 떠나려 하지만, 라미레즈는 우회적으로 에이미가 케인을 도와 함께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에이미는 최후의 순간 케인에게로 돌아가 악당들과 대치하는 케인을 도와 그들을 물리치는 유일한 동료가 된다.


관련 정보

원작

존 W. 커닝햄의 잡지소설 〈The Tin Star〉(1947)


수상

• 1952년 뉴욕비평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 1953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게리 쿠퍼), 편집상(엘모 윌리엄스 등 2인), 음악상(디미트리 티옴킨), 주제가상(디미트리 티옴킨, 네드 워싱턴)
• 1953년 골든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게리 쿠퍼), 여우조연상(캐티 주라도), 음악상(디미트리 티옴킨), 촬영상(플로이드 크로스비)
• 1953년 미국작가조합상 각본상(칼 포먼)


음악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하이 눈〉의 주제곡은 네드 워싱턴 작사, 디미트리 티옴킨 작곡의 〈High Noon(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이다. 이는 서부극 영화음악의 대가 티옴킨이 작곡한 최초의 주제가이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악당 프랭크 밀러의 부하 중 한명으로 등장하는 배우 리 밴 클리프(이 영화는 그의 데뷔작이다)의 모습과 함께 처음 흘러나온 이후 영화 곳곳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사운드트랙에서는 텍스 리터가 불렀으나 나중에 프랭키 레인의 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널리 사랑받았다.


연관 영화

〈리오 브라보〉(1959, 하워드 혹스) : 서부의 작은 마을의 보안관이 다수의 악당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전개한다는 내용으로, 하워드 혹스와 존 웨인이 〈하이 눈〉에 대한 맞대응으로 만들었다.

〈아웃랜드〉(1981, 피터 하이엄스) : 숀 코너리가 주연한 SF영화로 〈하이 눈〉의 이야기 구조를 따와 진행되는 영화.


참고자료,

[하이 눈 [High Noon] (세계영화작품사전 : 고전 & 현대의 웨스턴 영화, 위키미디어 커먼즈)

영화 https://youtu.be/l35Vs7jbV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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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다음날 또다른 시신 떠올랐다,

총살 다음날 또다른 시신 떠올랐다,

긴박했던 열흘의 기록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가 9월 27일 전남 목포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국가어업지도선 전용부두에 정박하고 있다. 무궁화 10호는 서해 최북단 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후 북한군 총격으로 인해 피살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47)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이다.

11:30 이○○ 주무관 점심 식사 방송 후 식사하러 나오지 않음.

11:31 최○○ 주무관이 전화하였으나 전화가 꺼져있어 이○○ 주무관 방을 확인하였으며 방에 없어 직원들에게 알림.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모(47)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의 9월 21일 당직일지 기록이다. 해양수산부가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실에 제출한 해당 선박의 열흘치(16~25일) 당직 일지엔 이씨 실종을 전후해 긴박했던 선박 내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1시 45분 전 직원 식당 집합”

당직일지로 본 ‘무궁화10호’의 열흘.

무궁화 10호 승선 동료들이 이씨의 실종을 알아차린 것은 21일 11시 30분 무렵이다. 점심을 알리는 방송에도 이씨가 나타나지 않고, 휴대전화도 꺼진 상태인 것이 확인되자 11시 35분 전 직원이 선박 내부 수색에 돌입했다. 당직일지엔 통상적으로 2시간에 한 번씩 특이사항 유무가 기재됐지만, 이씨의 실종 인지 이후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이 분 단위로 적혔다.

실종인지 15분 뒤인 11시 45분, 선장 강모씨가 전 직원을 식당으로 소집했으나 역시 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5분 뒤 강씨는 해수부 소속인 어업지도과장에게 이씨의 실종 사실을 구두 보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궁화 10호는 선체 내부 수색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시 25분, 선박 우현 선미의 계류삭(선박을 일정한 곳에 고정하는 밧줄) 속에 이씨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이 발견되며 상황은 급변했다. 이씨가 선박을 이탈했을 가능성이 커지자 무궁화10호는 5분 뒤 자체 고속단정 2대를 내려 선박 인근 수색에 나섰다.

당직일지에 따르면 실종 인지 1시간 30분 뒤인 낮 1시 무렵, 해경 502함은 해군에 실종자 수색 협조 요청을 했다. 50분 뒤엔 헬기 1대도 수색 활동에 가세했다. 이날 무궁화10호를 비롯한 국가 어업지도선 3척, 시ㆍ군 어업지도선 2척, 해군 함정 1척, 해경 함정 2척이 탐조등을 활용한 밤샘 야간 수색을 벌였지만 이씨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군은 北 사살 알았는데, 무궁화10호는 계속 수색

북한군 피격으로 숨진 공무원 이모씨의 형 이래진 씨가 김기윤 변호사와 함께 6일 오후 국방부에 정보공개청구서를 접수하기 전 서울 용산 국방부 민원실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실종 다음 날인 22일 오전 10시 15분, 수색 참관 등의 목적으로 이씨의 친형 이래진씨 등 실종자 가족 2명이 무궁화 10호에 승선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9시 40분쯤 북한군은 이씨를 사살했다. 국방부는 이씨 시신도 훼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궁화 10호는 자정 무렵 마지막 당직일지 기록에 “수색활동 중 실종자 발견사항 없음”이라고 적는 등 종일 이씨 수색에 집중했다. 선박은 이씨 실종 이후 연평도 해상에 정박해 있었으나 당직일지엔 시신 훼손 정황으로 볼 수 있는 ‘불빛 관측’ 등의 내용은 기재되지 않았다.

22일 당직일지엔 군에서 무궁화 10호에 연락을 취한 내용도 자세히 적혔다. 오후 5시 5분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유선으로 연락해 ‘구명동의(구명조끼)의 종류와 색, 수량 파악’을 요구했다. 군이 이씨가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북한 측에 발견된 것으로 파악한 시각(오후 4시 40분)에서 25분 지난 시각이다.

당직일지에 ‘구명동의’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군이 이씨가 북한군에 발견될 당시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밝힌 만큼, 군의 특수정보 ‘SI(Special Intelligence)’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명조끼 착용은 군이 이씨의 월북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단순 실족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다만 해경은 이씨가 무궁화 10호에 실린 구명조끼를 착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선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시 무궁화 10호엔 물품 대장에 등재된 구명조끼 29개와 비상시 쓰려고 놔둔 구형 조끼 56개 등 총 85개의 구명조끼가 배에 실려 있었는데, 관리하지 않은 구명조끼 몇 개가 배에 실려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관련, 안병길 의원은 “선박 안전 지침상 선외에서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이며, 해군ㆍ해경도 갑판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에 조끼 착용 여부가 월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연평도 해상서 떠오른 또 다른 시신

9월23일 무궁화10호 당직일지.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으나, 가족 확인 결과 숨진 해수부 공무원 이모씨의 시신과 일치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실 제공]

군과 정부가 이미 이씨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사실을 확인한 23일에도 무궁화 10호는 수색활동에 집중했다. 오전엔 잠시 긴박감도 흘렀다. 당직일지엔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발견. VHF(선박 통신 주파수) 채널 6번에서 수신함’이라고 적혔다. 인근에서 함께 수색 중이던 선박이 해상을 떠돌던 또 다른 변사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씨의 시신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궁화 10호 선장과 이씨 가족이 함께 살펴봤지만, 이씨는 아니었다고 한다. 현재 해경은 해당 변사체의 지문 대조 결과 일치된 결과가 없어 한국인이 아닌 것으로 보고 중국에 신원 확인을 의뢰한 상태다.

이씨 승선 다음 날 CCTV 고장

3일 군과 해양경찰이 서해 북단 소연평도 해상에서 사라졌다가 북한에서 피격돼 사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시신 등을 찾기 위해 연평도 서방부터 소청도 남방까지 해역을 수색하고 있다.

당직일지에 따르면 무궁화 10호는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북항에서 출항했다. 이씨가 이 배에 오른 것은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다. 이씨는 연평어장에서 어업지도를 하던 무궁화13호에 근무했지만, 선박 임무 교대 후 무궁화 10호에 승선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 남았다. 해경에 따르면 무궁화 10호 승선은 이씨의 희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8일 밤 10시엔 무궁화 10호의 CCTV가 고장 났다. 당직일지엔 ‘본선 CCTV 작동 불량(화면 꺼짐, DVR 부팅 불가)’라고 적혔다. 출항 당시 점검에선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날부터 실종 당일인 21일까지 4일간 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당직 근무를 섰다.

실종 당일 당직일지에도 ‘04:00 선내외 순찰결과 이상무, 이○○’라고 적혀있다.

이씨가 21일 새벽 1시 35분에 조타실을 떠난 이후 실종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행적이 묘연하다는 동료들의 증언과 배치되는 정황이다. 다만 이씨 이름으로 기재된 당직일지 기록 필체가 제각기 달라 대리 서명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8일 밤 10시엔 무궁화 10호 #CCTV가 고장 났다 #당직일지 #본선 CCTV 작동 불량(화면 꺼짐 #DVR 부팅 불가)’라고 적혔다 #출항 당시 점검에선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21일 새벽 1시 35분에 조타실을 떠난 이후 #실종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행적이 묘연하다 #동료들의 증언과 배치되는 정황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북항에서 출항했다 #이씨가 이 배에 오른 것은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다 #이씨는 연평어장에서 어업지도를 하던 무궁화13호에 근무 #선박 임무 교대 후 무궁화 10호에 승선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 남았다 #해경에 따르면 무궁화 10호 승선은 이씨의 희망에 따른 것 #군과 정부가 이미 이씨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사실을 확인한 23일에도 무궁화 10호는 수색활동에 집중했다 #오전엔 잠시 긴박감도 흘렀다 #당직일지엔 ‘해군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발견 #VHF(선박 통신 주파수) 채널 6번에서 수신함’이라고 적혔다 #인근에서 함께 수색 중이던 선박이 해상을 떠돌던 또 다른 변사체를 발견한 것 #안병길 의원 #선박 안전 지침상 선외에서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 #해군ㆍ해경도 갑판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에 조끼 착용 여부가 월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오후 5시 5분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유선으로 연락해 ‘구명동의(구명조끼)의 종류와 색, 수량 파악’을 요구했다 #군이 이씨가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북한 측에 발견된 것으로 파악한 시각(오후 4시 40분)에서 25분 지난 시각이다 #당직일지 #구명동의’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군이 이씨가 북한군에 발견될 당시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밝힌 만큼 #군의 특수정보 ‘SI(Special Intelligence)’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명조끼 착용은 군이 이씨의 월북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단순 실족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해경은 이씨가 무궁화 10호에 실린 구명조끼를 착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선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시 무궁화 10호엔 물품 대장에 등재된 구명조끼 29개와 비상시 쓰려고 놔둔 구형 조끼 56개 등 총 85개의 구명조끼가 배에 실려 있었는데 #관리하지 않은 구명조끼 몇 개가 배에 실려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2020년 10월 11일 일요일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달려가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행동은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릴 수 있었어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윤봉길의사 홍커우공원의거 재현 장면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충청남도 예산 출생

본명은 우의, 별명이 봉길, 아호는 매헌,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며 신학문을 배웠으며. 한시에 재능이 있었어요.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은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과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셨어요.

월진회 취지서,

월진회를 만든 목적과 규칙을 적은 것으로 뒤에는 윤봉길 의사를 회장으로 하는 회원 명단이 들어 있어요.

기사년일기,

1929년 음력 정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쓴 일기로 곳곳에 민족의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은 1930년 23살이 되던 해에 부인과 두 아이를 고향에 담겨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공장에서 일하거나 채소를 팔면서 정보를 수집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찾아가 직접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마침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상하이 침략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일본 왕의 생일 기념식을 겸하여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윤봉길 의사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의열투쟁 단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를 준비했어요.

한인애국단 선서식,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하고 선서식을 거행하고, 입단하며 쓰신 선서문을 걸고 찍은 사진이에요.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단원 윤봉길이 1932년 4월 26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서,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다짐을 쓴 입단 선언서입니다.

-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윤봉길의사의 자필 이력서 및 유촉시,

거사 전날,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마지막으로 직접 써서 남긴 약력과 유서가 적혀 있어요

'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이도 만일 피가 잇고 뼈가 있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기발을 놉피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저와 한잔 술을 부서 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우 아비 업슴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잇고 미국에 발명가 에듸손이 잇고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리라.'​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1932. 4. 27)

​윤봉길의사가 의거 당시 갖고 있었던 지갑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입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시계를 차고 홍커우 공원을 향하셨답니다.

​홍커우공원 의거에 사용된 도시락형 폭탄과 수통형 폭탄(모형)으로 천안 독립기념관 제5전시실 나라 되찾기에 전시되어 있어요.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식장 (1932. 4.29.)

홍커우의거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일본인 대표가 올라오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지셨어요.

의거에 미처 사용되지 못한 도시락폭탄,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진 폭탄으로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어요.

거사 직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는 윤봉길의사,

홍커우의거는 성공했지만 자폭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 상해의 일본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다가 김구 선생이 성명을 발표한 후에야 배후가 김구인 것을 시인하였어요.​

그 후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홍컹우 공원에서 공개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의사의 순국이 독립운동가들의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점과 국제여론 악화를 우려하여 11월 18일에 오사카에 있는 육군 위수형 형무소로 옮겨 수감됩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고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답니다.

​1932년 12월 18일 일본 가나자와로 옮겨 다음날 오전 7시 30분에 총살형이 집행되어 25세의 일기로 순국하셨답니다.

​일제는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 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어요.

국내. 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은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봉길과 이봉창이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와 천황을 노렸다,

시대/ 국가/대륙/

1932년 4월 29일

한국

아시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마련된 일본군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의 폭탄에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인 거류민단장이 그 자리에서 죽고 일본군 중장을 비롯한 고위 인사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앞서 이봉창은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천황이 탄 마차에 미치지 못했다. 윤봉길과 이봉창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의거 직후 체포돼 순국했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훙커우공원의 현재 모습,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당시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다양한 매체나 소설, 책 등에서 도시락 폭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도시락폭탄을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전승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오늘날 역사교과서에서도 잘 소개가 된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그정도이고,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어 3가지 정도 정리해봤습니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상해 홍구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안에서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우렁차게 외쳤다. 

도시락폭탄은 일본 요인 7명을 몽땅 쓸어버렸다. 상해 거류민회 위원장 가와바다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시라카와는 열두 차례에 걸친 복부수술을 받았으나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애꾸가 되었고 9사단장 우에다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이는 독립운동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거와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봉길의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20대의 처녀 이화림이다. 그녀는 김구의 비서로 윤봉길을 뒤따르며 몰래 수행했는데 비밀을 유지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봉길은 이 거사로 중국 100만대군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상해의 중국사람들은 가난하고 초라한 조선사람을 만나면 '망꿔노'라 하며 깔보기 일쑤였다. 또 일제가 조선인 밀정을 곳곳에 풀어 공작에 이용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보면 일제의 밀정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중국인이 많았다.

사태의 진상을 잘 모르는 중국 민간인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조선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이 거사에 감동하여 조선인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냈다. 흥구공원 부근에 사는 중국의 혁명문학가 노신도 이 소식을 듣고 통쾌하게 여겼다. 또 김구가 배후인물로 알려지자 국내외를 통틀어 김구의 정치적 입지와 인기가 높아졌다. 


수통 형 폭탄의 진실

우선 첫 번째 잘못 알려진 사실중에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것으로 보이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부분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당일에 김구선생과 아침을 함께 먹고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장군의 주선으로 마련된 수통 형 폭탄이랑 도시락 폭탄을 챙겨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수통 형 폭탄은 거사용으로 사용된것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오전 11시 40분경에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에 윤봉길 의사는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한 것일까?

두번째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이야기인데요, 상해 홍구공원에 가면 한쪽에 매원이라는 이름 붙여진 곳에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게되면, 윤봉길 의사 의거비가 나옵니다.

조선족 현지 가이드들은 바로 의거비를 설명하면서 이곳이 폭탄을 투척했던 곳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고, 노신의 묘가 있는 곳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운봉길 의사 체포사진의 진실

마지막으로 폭탄 투척 이후 윤봉길 의사가 체포 당하는 당시 사진은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오류중 하나 입니다. 사진은 옷이 멀쩡한 채로 중절모를 들고 약간 겁먹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윤봉길 의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의문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복장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당시 군경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고, 결국에는 그자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독립기념관 #랜선역사여행 #역사여행 #언택트역사여행 #대한독립만세 #천안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전시관 #윤봉길의사 #의열투쟁으로 꽃피운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 #선서식을 거행 #입단하며 쓰신 선서문을 걸고 찍은 사진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우렁차게 외쳤다 #도시락폭탄 #일본 요인 7명을 몽땅 쓸어버렸다 #상해 거류민회 위원장 가와바다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시라카와는 열두 차례에 걸친 복부수술을 받았으나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애꾸가 되었고 #9사단장 우에다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사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거와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봉길의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20대의 처녀 이화림이다 #20대의 처녀 이화림 그녀는 김구의 비서로 윤봉길을 뒤따르며 몰래 수행했는데 비밀을 유지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봉길은 이 거사로 중국 100만대군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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