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 화요일

역마차 [Stagecoach, 驛馬車],

추억의 서부영화 - 역마차 ost (1939)

서부 개척과 총잡이 빌리 더 키드(1859~1881년)
서부의 한 역마차에 탄 사람들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미국영화.
출시일/ 감독/ 출연/ 제작/ 제작사/ 배급사/
1939년
J.포드
J.웨인, T.미첼, G.뱅크로프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워너브라더스영화사
워너브라더스영화사




    • 출처 : 네이버영화원본보기

    • 작품 해설,
      주제,
      1939년작. 유나이티드아티스츠 제작. J.포드 감독. J.웨인, T.미첼, G.뱅크로프트 주연. 서부극의 한 전형으로 영화사에 남을 명작이며 포드 감독의 대표작이다.
      포드는 그의 첫 유성 서부극이기도 한 이 영화를 통해 ‘모뉴먼트 밸리’라는 공간과 존 웨인이란 스타를 발굴했다. 무법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등 문명에서 추방당한 주변인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문명에 대한 감독의 시니컬한 관점과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낙관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인디언의 습격을 겁내며 이틀간의 일정으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역마차에는 수비대로 남편을 찾아가는 젊은 임산부, 주정뱅이 의사, 사기 도박사, 말괄량이 여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탈옥한 청년, 겁쟁이 술장사 등이 타고 있다. 쫓겨다니던 사나이가 원수를 갚고, 임산부가 해산을 하게 되자 모두가 합심하여 순산을 돕는 인정 넘치는 장면 등으로 이어가다가 끝내는 아파치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처절한 전투가 전개된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멸을 각오할 수밖에 없을 때 멀리서 수비대의 구원 나팔소리가 울린다. 한국에서는 1954년 개봉되었다.
      그때 세계는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미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이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남북전쟁 전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서부 개척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철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고 들소와 원주민들만 한가롭게 노닐던 서부는 하루아침에 가축과 총잡이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군대나 관리들을 파견할 수도 없었고 거의 30년 가까이 서부에는 이런 무법 상태가 계속되었다.
      무법 상태란 좋게 말하면 무한정의 자유라는 뜻도 되겠지만 총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로 건너갔을까? 물론 모험과 자유를 찾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동부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었던 범법자, 부랑자, 흑인, 이제 막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등도 많았다. 여기에 노다지 꿈에 부푼 투기꾼과 목장주들이 가세했다.
      1840년대 말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골드러시는 전쟁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금이 소멸되면서 노다지꾼들은 새로운 금광을 찾아 네바다, 콜로라도, 몬태나 등으로 몰려갔고, 광산 주위로는 여지없이 선술집과 여관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노다지꾼, 총잡이, 도박꾼, 매춘부, 사기꾼이 들끓었고, 돈과 이권을 둘러싼 싸움, 광산채굴업자들과 원주민간의 전쟁, 역마차 강탈사건이 끊일 날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에서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했는데, 서부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총잡이 빌리 더 키드가 바로 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리 더 키드의 본명은 윌리엄 보니. 1859년 뉴욕에서 태어나 1881년 보안관 가레트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최소한 21명 이상을 살해한 서부의 전설적 총잡이였다.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캔자스로 이사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다시 콜로라도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거기서 재혼을 한다. 다시 뉴멕시코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부터 빌리는 남서부와 북부 멕시코를 두루 방랑하면서 갱들과 어울리고 절도와 무법의 경륜을 쌓는다.

      1880년 12월에 가레트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81년 4월 30일 두 명의 보안관 대리를 살해하고 탈옥에 성공하지만 가레트 보안관의 끈질긴 추적과 매복에 의해 마침내 7월 14일 저녁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빌리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분한 이론이 있다. 그날 가레트 보안관에게 사살된 사람은 빌리가 아니었고, 가까스로 그곳을 도망쳐 나온 빌리는 이후 강도짓을 그만두고 편안히 살다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서부 시대를 동경하는 미국 사람들의 적당한 허풍까지 가미되어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그가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총잡이와 더불어 서부의 무법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소몰이꾼(카우보이)이다. 전쟁 후 서부에 방목 형태의 대규모 목축이 성행하게 된 것은 임자 없는 초지가 무한정 펼쳐져 있는 자연적 요소 외에 대륙횡단철도 건설 및 냉장열차의 개발로 서부에서 도축된 고기를 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신속히 그리고 신선하게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의 초지에는 텍사스 롱혼이라는 긴 뿔 육우가 수천만 마리나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의 선조는 스페인의 토로스 종이라고 한다. 즉 초기에 남부를 지배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소가 야생화한 것이다. 카우보이들은 이 소를 몰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부까지 수천 마일을 올라와 철도 주변 대도시의 도축장에 팔아넘기고 여기서 도축된 고기는 열차에 실려 동부로 수송되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런 카우보이들의 삶이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먹을 물과 풀을 찾아 광야를 며칠씩 헤매는 것은 보통이고 카우보이들끼리 좋은 초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카우보이의 낭만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서부 영화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의 향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나아가 미국 역사 자체를 미화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사실 카우보이의 세계가 무법천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축업자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초지와 물의 권리에 관한 상호협약을 맺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협약은 엄격히 준수되었다. 다만 정부가 나서지 않고 주민 스스로 법을 만들고 집행했을 뿐이다. 연방정부도 이들의 자치법을 인정했고 후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때에도 이를 공식법령으로 수용하는 일이 많았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서부의 낭만은 18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부도 점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금의 고갈, 그리고 대규모 채광기업의 등장과 더불어 노다지꾼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선술집이 있던 곳에는 상가, 회사, 신문사,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 소떼를 몰고 초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의 장관도 1885년을 지나면서 보기 힘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카우보이는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다가 고기값의 폭락으로 수지조차 맞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축업자들은 소떼를 끌고 초원을 방황하기보다 울타리를 친 목장의 주인으로 안주하게 되었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의 천국은 불과 3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그렇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1900년에 이르자 이들 서부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몰아낸 들소와 원주민과 더불어 과거 속으로 묻혀 갔다.
      애리조나주 톤토 근처, 로즈버그에서 제로니모가 이끄는 아파치 부대의 습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가운데, 톤토에서는 마부 벅이 이끄는 역마차에 오를 승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법과 질서를 위한 부녀회’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난 매춘부 달라스, 그녀처럼 쫓겨나는 신세가 된 알코올중독자 의사 닥 분, 그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위스키 상인 피콕, 군인 남편을 찾아 먼 길을 떠나온 루시 맬로리 부인, 그녀에게 반한 도박사 햇필드, 광업 회사가 맡긴 돈을 훔쳐 달아나려는 은행장 게이트우드, 악명 높은 플러머 형제를 잡기 위해 두팔 걷고 나선 컬리 보안관이 그들이다.

      그들을 싣고 출발한 역마차는 가던 도중 죽은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갚으려다 무법자 신세가 된 링고 키드까지 태우고 드라이 포크, 아파치 웰스를 거쳐 로즈버그까지 계속 달린다. 각기 다른 신분과 계급에 속한 승객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맬로리 부인이 예상치 못한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닥 분과 댈러스도 다른 승객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심지어 링고 키드는 달라스에게 청혼까지 한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미 공격을 시작한 아파치들이 점점 그들을 위협해오고 있는 중이다. 승객들은 다 함께 아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끝에야 힘겹게 로즈버그에 도착한다. 마지막으로 링고는 컬리에게 달라스를 국경 너머의 목장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뒤 그녀를 배웅한다. 그리고 최후의 총알 3개로 끝내 플러머 형제에게 복수한 뒤 그녀에게 1년 뒤 목장에서 보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컬리는 링고를 체포하지 않고 닥 분과 함께 링고와 달라스의 행복을 기원해준다.
      존 포드는 유성영화가 시대한 도래 이후 처음 만든 서부극이자 13년 만에 만든 서부극 〈역마차〉에서 공동체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시험한다. ‘역마차’는 톤토라는 마을에서 인간 말종 취급을 받고 추방당했거나 단순히 그곳을 지나쳐 가는 외부인들로 구성된 가상의 집단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 비연속적 대화, 규범적 식사 등을 통해 서로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관, 도덕의식 등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아기의 탄생이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아기의 탄생을 계기로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았던 인물들(달라스, 닥 분, 링고 키드)은 자신의 가치와 인격을 증명할 기회를, 그들을 인간 말종 취급했던 인물들(루시 맬로리, 피콕 등)은 반성과 존중의 기회를 얻는다. 미국의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도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역마차〉는 포드가 내러티브와 시각적인 면에서 공동체 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춤, 결혼, 장례식, 그리고 〈역마차〉에서처럼 아기의 탄생 등(···) 이 의식들이 공동체와 그 집단적인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정의한다.”

      이 긍정할 만한 공동체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마을 ‘밖’에서 형성된다. 문명과 자연의 접경으로서의 서부에 관한 한, 이 영화는 포드의 가장 시니컬한 영화 중 한편이라고 영화학자 태그 갤러거는 지적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랜섬 스토다드가 평생을 걸려 깨닫게 되는 사실이란 〈역마차〉의 등장인물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불과하다. 문명은 타락한 것이란 사실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즈버그를 벗어나 국경 너머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가는 링고 키드와 달라스를 향해 닥 분이 읊조리는 한마디,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되었군”이란 대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 배경

      서부극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 공간인 ‘모뉴먼트 밸리’는 존 포드가 〈역마차〉를 통해 재발굴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유타주와 애리조나주 접경지역의 나바호 인디언 국립공원에 자리하는 곳으로 수많은 서부극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그곳은 (일찍이는 조지 B. 세이츠의 1925년 영화 〈배니싱 아메리칸〉에서부터 촬영지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긴 하나) 포드의 〈역마차〉를 통해 처음으로 문명과 자연 사이의 대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샤츠가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시각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웨스턴의 전형적인 환경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묘사한 점, 그리고 감각적이고 통제된 포드의 카메라 움직임이 그것이다. 포드는 닫혀 있고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역마차 공간과 중간역 그리고 다른 실내 공간과 모뉴먼트 밸리의 광대함을 대조시키며 교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고 지적한 대로다. 그런가 하면 갤러거는 모뉴먼트 밸리를 문명과의 대조 이상을 의미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미지로 이해했다.

      “첫 등장 때부터 모뉴멘트 밸리는 그저 또 하나의 계곡이 아니라 멜로드라마화된 계곡이었다. 마차도 단순한 마차라기보다 ‘서부’의 역사적 신화 체계였던 것처럼 말이다. (···) 〈역마차〉에서는 ‘훨씬 거대한’ 풍경이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바다나 하늘처럼 물리적으로 거대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열망의 광대함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풍경이다. (···) 울타리는 모든 것이 타락하고 불가능해진 문명의 한계를 표시한다. 울타리 너머에서는 무엇이든, 심지어 순수조차 가능하다.”

      참고로,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를 발견하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당시 계곡 근처의 교역소에서 일하고 있던 해리 굴딩이란 사내는 포드가 큰 제작비를 들여 서부극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굴딩은 100장이 넘는 사진을 들고 포드를 찾아가 자신을 만나줄 때까지 그의 문전에서 먹고 자며 기다리겠노라고 소동을 피웠다고 한다. 곧장 굴딩을 만난 포드는 사진 속 로케이션에 반했다. 할리우드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간섭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위치라는 점도 그에게 커다란 매력 포인트로 작용했다. 모뉴먼트 밸리는 이후 포드의 거의 모든 서부극, 즉 〈황야의 결투〉(1946), 〈아파치 요새〉(1948), 〈황색 리본〉(1949), 〈웨건 마스터〉(1950), 〈리오 그란데〉(1950), 〈수색자〉(1956), 〈러틀리지 상사〉(1960), 〈샤이안〉(1964) 등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제작 과정

      〈역마차〉를 만들기 전, 존 포드는 13년간 서부극을 만들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사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포드는 유성영화가 갖는 한계 속에서 많은 분량의 야외 촬영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인 서부극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37년 4월 잡지 〈콜리에〉에 실린 어네스트 헤이콕스의 단편소설 〈로즈버그로 가는 역마차〉를 읽은 포드는 익히 알고 있던 기 드 모파상의 단편 〈비곗덩어리〉와도 닮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이미 유행이 지난 서부극을 제작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제작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유명한 독립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손을 내밀었지만 캐스팅과 촬영 일정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존 웨인이 B급 서부극에만 등장했던 별 볼일 없는 배우로 여겨졌던 탓이다. 포드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월터 와그너도 처음에는 존 웨인-클레어 트레버 대신 개리 쿠퍼-마를린 디트리히를 캐스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포드는 결국 제작비를 반으로 줄이는 데 동의하면서까지 웨인을 고집했고, 영화 개봉 뒤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그는 서부극의 유행을 되돌려놓음과 동시에 웨인을 서부 사나이의 대명사이자 할리우드영화 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만들어놓았다. 한편 ‘모뉴먼트 밸리’에서의 촬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포드와 그의 배우, 스태프들은 해발 1000m가 넘는 그곳에서 변덕스러운 날씨와 싸우며 촬영에 임해야 했다. 현지 나바호 인디언들의 도움도 필수적이었다(실제로 나바호 인디언들이 아파치를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든 조건 속에서도 포드는 그 계곡의 풍경에 깊게 매혹되어 계곡 아래를 지나는 역마차를 여러 번 반복해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그런 계곡의 외부 풍경과 잘 대비될 수 있도록 실내 장면을 찍을 때는 (당시 관습과 달리) 스튜디오 세트에 모두 천장을 만들어 폐쇄감이 강화되도록 했다. 그런 연출을 통해 서부극의 위대한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 달라스(클레어 트레버) :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힘들게 생계를 유지해온 매춘부. 톤토의 ‘법과 질서를 위한 부녀회’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역마차에 오르게 된다.

      링고 키드(존 웨인) : 본명은 헨리지만 사람들에 의해 링고 키드로 불린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플러머 형제들에 복수하기 위해 역마차를 타고 로즈버그로 향한다.

      닥 분(토머스 미첼) : 늘 술에 절어 있는 알코올중독자로 달라스와 함께 톤토에서 쫓겨난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제법 솜씨 좋은 의사다.

      루시 맬로리(루이즈 플랫) : 버지니아에서 남편 맬로리 대위를 찾아 먼 길을 온 여인. 처음에는 자신과 신분이 다른 달라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출산을 계기로 마음이 바뀐다.

      햇필드(존 캐러딘) : 소문난 도박꾼. 루시 맬로리에게 반해 역마차에 오른다. 링고 키드, 달라스, 닥 분에게 그들의 낮은 신분을 반복해 인식시키는 인물이다.

      벅(앤디 데빈) : 역마차를 모는 마부. 입이 가볍고 겁이 많은 편이긴 하나 푸근한 인상을 자랑한다.

      컬리(조지 밴크로프트) : 톤토의 보안관으로 정의감과 용맹함이 투철한 편이다. 악명 높은 플러머 형제를 찾아 로즈버그로 향한다.

      피콕(도널드 미크) : 캔자스시티에서 온 위스키 상인. 아파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로즈버그행을 포기하려 하지만 그의 술이 필요한 닥 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로즈버그로 향하게 된다.

      게이트우드(버튼 처칠) : 톤토의 은행장. 광업회사에서 맡긴 5만달러를 훔쳐 달아나려고 역마차에 오른다.
      명장면 명대사,
      - 링고 키드 : “게 섰거라!”  - 벅 : “링고잖아요!”
      링고 키드를 향해 빠르게 줌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존 웨인이 이 영화 이후로 서부 사나이의 동의어가 되었음을 직감하게 하는 장면.

      〈쓸쓸한 초원에 날 묻지 말아다오〉(Oh, Bury Me Not on the Lone Prairie)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마차가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는 장면들.
      이 영화 이후 서부극의 대표적 이미지가 된 풍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역마차〉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을 발굴한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정보,
      원작
      어네스트 헤이콕스의 단편소설 〈로즈버그로 가는 역마차〉(The Stage to Lordsburg, 1937)
      수상
      • 1939년 뉴욕비평가협회상 감독상
      • 1940년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토머스 미첼), 음악상(리처드 헤이그먼 등 4인)
      • 2008년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역대 서부극 영화 9위
      음악
      〈역마차〉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미국 전래가요를 토대로 만들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쓸쓸한 초원에 날 묻지 말아다오〉(Oh, Bury Me Not on the Lone Prairie)는 모뉴먼트 밸리를 비추는 장면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스티븐 포스터의 민요 〈금발의 제니〉(I Dream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도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중간에 여러 번 반복돼 사용됐다. 이 곡은 이미 끝나버린 서부 개척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멜로디를 지니고 있다.
      연관 영화
      〈역마차〉(1966, 고든 더글러스) : 1966년에 고든 더글러스가 존 포드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동명 작품이지만 원작의 명성에 비해 한참 밑도는 평가를 받았다.

      〈역마차〉(1986, 테드 포스트) : 윌리 넬슨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주연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TV영화. 1986년 CBS 채널을 통해 방송되었다. 
      *(타 방송사 에서도 서부 영화 밤 10시경에 방송을 하기도 했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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