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1일 금요일

대마도, [ 大馬島 ]

대마도, [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에 있는 섬.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위치/ 면적
전남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리,
2.523㎢ 
면적 2.523㎢, 인구 129명(2005)이다. 하조도 서거차도의 중간에 위치한다. 1600년대 초기에 경기도 광주에서 양주 허씨 일가가 들어와 살았고, 관매도에 살던 강릉 함씨의 후손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섬의 모양이 큰 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대마도라 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엔 말 목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최고점은 173m이며, 대부분 100m 내외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은 돌출한 갑과 깊숙한 만이 연이어져 있어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한 편이다. 북쪽과 동쪽 해안을 제외하면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높은 해식애가 발달했으며 만입부에 약간의 갯벌이 있다. 1월 평균기온 3℃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943㎜ 정도이다.

취락은 북동쪽 만 안에 모여 있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주요농산물은 고구마·감자·유채·마늘 등이며, 보리·· 등도 소량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도미·멸치·병어가 주로 잡히며, 자연산 굴·미역 등의 채취와 김· 등이 양식된다. 보건진료소 1개소, 경찰초소 1개소와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다. 섬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  [大馬島] 지도,

대마도정벌 (對馬島征伐)

고려시대사사건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    
분야, 고려시/ 대사,/ 유형, 사건/ 시대, 고려/ 성격, 정벌/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

역사적 배경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여말선초 약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특히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가 창궐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고려는 사절 파견, 성보(城堡) 수축, 수군 증강, 화기 개발 등의 왜구의 근절책을 세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의 장군출신이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하는 한편, 흥리왜인(興利倭人)주 01)과 귀화왜인을 우대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그러나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땅이 되었다. 대마도주는 소씨(宗氏)로서, 일본사에 의하면 가마쿠라막부시대(鎌倉幕府時代)주 02)지쿠젠주(筑前州)주 03)의 다사이부소이(太宰府小貳) 무토(武藤)가 그의 가신 소(宗尙重)를 대마도에 보내어 이를 점령하고, 그를 수호대(守護代)로 삼았기 때문에 이후 소씨가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매우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본 국내의 내환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몰락한 무사와 농민 등 빈민이 증가해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 공급이 요청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마도를 비롯한 삼도(三島 : 對馬·壹岐·松浦地方)가 왜구의 근거지가 되어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대마도정벌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수군 확충과 화기 발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했고, 현종 때는 동여진 해적을 막기 위해 도부서(都府署)를 설치,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다. 고려 말에는 도부서를 사수서(司水署)로 개편, 전함들을 건조하는 등 수군을 재정비하였다. 조선도 수군을 강화해 세종 때는 총 72곳에 829척의 병선과 5만 169명의 기선군(騎船軍)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기는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 20여 종을 제조하였다. 나세(羅世)·최무선 등의 진포싸움과 정지(鄭地)의 남해대첩에서는 이들 화포를 전함에 배치, 왜구를 섬멸하였다. 화약과 화기는 태종 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군기주부가 되어 더욱 개발, 대마도정벌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다. 1387년 왜국 격멸에 큰 공을 세운 정지가 건의한 바 있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벌을 결행할 때까지 꾸준히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과 조선군이 여말선초 시기 한반도를 침략해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전쟁.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1]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보아,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원수 김종연(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 고려인 남녀 1백여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정벌에 대한 기사는 너무 간략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과가 컸던 것으로 보아 왜국의 피해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의 개선은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이에 창왕도 그의 공을 찬양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그 뒤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고 유구국(琉球國)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에 대한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그러나 사절·향화왜인·흥리왜인의 내왕이 빈번해진 반면, 침입도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되었다.
정벌의 발단은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는 120척으로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만호를 살해하였다. 또, 같은 달 18일 통양포에, 23일 영해성을 침략했으며,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이 해에만도 13회나 침입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력한 응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월 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이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 걸린 것을 미루어보면 김사형이 그 동안에 대마도를 정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정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벌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최초의 대마도정벌이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 함.)이었다.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후 거의 매년 와서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 갔다. 
이들 사절은 도주 소(宗貞茂)와 그 아들 및 도내의 각포만호(各浦萬戶)가 보낸 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에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자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그것도 행장(行狀)주 04)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하였다. 
이 지역에는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고, 그들 가운데에는 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의 허실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1418년(태종 18) 3월 경상도의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이렇게 왜인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60여 회나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주 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흥리왜선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소가 죽은 후 아들 소(宗貞盛, 都都熊丸)가 아버지의 직을 이었으나, 도내의 실권은 산미(三味多羅)주 05)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번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왜구의 두목으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근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이 명나라에 약탈하러 가는 도중 조선의 연안을 약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해동정이 결행되었다. 태종은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군무(軍務)만은 계속하고 있었으며, 기해동정도 태종에 의해 시행된 것이었다. 
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한 때문이었다. 이 싸움에서 병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와 그의 아들,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같은 달 12일 왜선 7척이 해주를 침입, 약탈했고, 13일 황해도조전절제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선 38척에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받는 등 대규모의 왜구가 연안을 침입하였다. 이에 태종은 14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咸吉道)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을 분치시켰다. 이 때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준비를 마친 다음 이종무는 9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인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이종무는 지문(池門·望沙門 : 태조 때 항복해 귀화한 자)을 시켜 도주 소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권했으나 대답이 없자.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그 결과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쓸만한 것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렸으며,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또, 이종무는 적이 내왕하는 중요지점에 책(柵)을 세워 오래 머무를 뜻을 보여주고, 29일 두지포(豆知浦)를 수색해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과 본국인 8명을 찾아내었다. 
이로군(尼老郡)에서 좌우군을 이끌고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朴弘信)·김해(金該) 등 장수와 군사 백수십인이 전사하였다. 일본사료 『조선통교대기 朝鮮通交大紀』에는 이 때 아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하나, 과장된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박실의 패전이 있은 데다가 대마도주 소는 아군이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서 퇴사(退師)해 수호하기를 애원하므로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동정(東征)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 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왜구가 재침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중지하였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지오(時應界都)를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가 뒤에 번복하자, 같은 해 11월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심껏 귀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동정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도둑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년 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전쟁·정벌
전투
교전세력
강제동원:원나라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다.
고려 충정왕 2년(1350),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를 침략하자 합포의 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이 이를 격퇴해 적 3백여 명을 죽였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장 40여 년간 총 3백여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략해 고려 민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고려는 일본 정부에게 왜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일본 정부는 그럴 힘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라는 전란에 휘말렸고 특히 규슈 일대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규슈 일대의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 [[키나이]](畿内)까지 약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렇듯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친 [[왜구]]는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쓰시마 섬]](대마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본래 쓰시마 섬은 땅이 매우 척박해 식량 생산이 요원해서 고려와 교역해 식량을 구입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여몽전쟁]]과 [[원나라의 일본원정]] 이후 교역량이 줄어들자 왜구의 선봉 역할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고려 [[우왕]] 13년(1387) [[관음포 전투]]에서 전선 47척으로 왜구의 전선 120척을 괴멸시키는 등 왜구를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정지(고려)|정지]]는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 지금의 나가사키현에 있는 이키섬]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1281)[* 1281년은 충렬왕 7년인데, 여몽연합군의 [[원나라의 일본원정#S-5|2차 일본 원정]]을 가리킨다.]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후 [[왜구]]는 [[황산 대첩]]에서 [[이성계]]에게 괴멸된 뒤 수그러들었지만, 고려 [[창왕]] 즉위년(1388) 고려가 [[제2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느라 부산한 틈을 타 [[양광도]]를 휩쓸었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에 [[정지(고려)|정지]]가 [[위화도 회군]] 직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해 왜구를 진압했다. 이후 위화도 회군의 주역 세력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한 뒤 분위기를 쇄신할 겸 한반도를 빈번하게 침략하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대마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는 어떻게라도 전쟁만은 막고 싶었다. 조선과 사이가 나빠지면 가장 난처해지는 것이 대마도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과 대마도는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서로 소통도 하던 관계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김새는 원숭이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은.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 대신들을 압도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1585년부터 중국정복을 주창했다. 천하정벌을 위해서...
이 미친 광기를 가진 자가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라며 정복전쟁을 준비한다...
이 사실을 계속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하지만 조선을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내부 당파싸움에 몰입해 왜적이 침입문제도 파가 나뉘어 정확히 보지 못했던 조선의 현실. 
조선이 개국된 지 200년 동안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깃들여져 있어 축성등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망도 높았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일이 일어날지도 모른채,,, 
태평시대에 당치도 않게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느냐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래도 당시 선조는 참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뜻을 그래도 꿋꿋하게 지켜나간다.
당시 말도 안되는 인사행정을 시도해 이순신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을 집안배경과 상관없이 배치했다. 그래도 당했다... 아니 우리가 밀렸다. 
히데요시의 엄청난 전쟁준비... 부산에 왜적이 침입하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수도까지 점령당했다. 선조는 궁문에 자물쇠조차 채우지 못하고 도망을 갔다. 
임진왜란 당시 '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 ' 하여 이름 붙여진 조총은 조선군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군의 전투방식은 가장 먼 곳에서 철환을 쏘고 , 다음은 창으로 찌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밴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일본에서는 뎃포(조총)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하여 무뎃포(무데뽀)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오다 노부가야가 열심히 농사짓고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맛있게 밥을 지어놓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밥상을 통째로 먹었다! (오다 노부가야는 서양뎃포 - 조총을 일본에 들온 인물이다.)
침략한 왜적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자발적으로 왜적에게 투항한 순왜들이 있었다는거! 그리고 그 반대로 우리의 편이 되어준 왜적... 항왜들이 었었다는거! 
분명한 것은 이 항왜들이 남긴 것은 결코 적지 않다는거. 이들이 전한 무예와 전술 그리고 조총이 이후 조선군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길주에 고립된 왜군들을 구출한 가토 기요마사가 한성으로 철수한다. 
이를 지켜본 우리 병사들이 " 쾌재라 (좋구나) 청정이 나가네~" 라며 환호를 지른데서 민요 쾌지나칭칭나네가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렵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440년 전인 1580년에 태어나 1640년대까지 약 60년을 살았떤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10대때 임진왜란 (1592년) , 20대 때에는 정유재란 (1597) , 40대에는 정묘호란과 50대에 병자호란 (1636년)을 겪었다. 반세기 동안 4번의 전쟁을 경험한 것이다.  
게다가 계갑대기근으로 약 70만 명이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기근이 왜란보다 더 무섭다'고 할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개성의 한 백성이 한 살배기 아이를 길가에 놓고 잠시 쉬는 사이 두 사람이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니 아이는 이미 끓는 물속에서 푹 삶아져 죽어 있었다. 범인들을 묶어 관아로 가 실상을 아뢰었다. 죄인들이 자백하지 않자 죽은 아이를 증거로 제시하려고 찾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뼈만 남아 있었다. 나졸들이 배가 고파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를 먹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청으로 나아갈 길을 내어달라고 시작된 전쟁이어서 타겟이 정확하게는 조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타겟이 조선이었다..

너무 참혹한 전쟁 정유재란..
히데요시는 한반도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이고 일본인이 들어와 거주를 하려고 하는 꿈을 꾸었다. 
참전했던 일본인 한사람당 조선인의 코가 세 개씩 할당되었다. 
코를 잘라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보냈다. 지금도 아이들이 울거나 보채면 "이비야"란 말을 쓰는데 -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왜군)이라는 말..
역사상 이렇게 참옥한 전쟁을 없었을 것 같다. 조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왜적들은 조선 사람들의 머리 , 코 ,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적은 사람을 보면 죽이든 안죽이든 무조건 코를 베어 갔다고... 전쟁이 끝나고 거리에서 코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전쟁은 어쨋들 마무리 되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어야 했다. 
우리에게 대마도를 정벌할 기회가 주어졌고 영구히 우리 영토화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대마도의 국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인다..
이게 우리의 과거이자 역사인 것 같다.

둘러보기
대마도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인 ‘막금마을’은 한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단 한 가구만 살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뚜렷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은 뚜렷하지가 않았다. 그만큼 사람의 발길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마을이 들어선 이곳에서 막재까지는 비포장 도로다. 그리고 막재에서는 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따로 있다.

대마마을 1구, 아주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대마도 전체적으로는 70여 가구가 산다. 최고인구는 1975년 1,138명이었다. 지금은 빈집도 더러 보이고 사이사이에 밭이 있으며 돌담에 간이 슈퍼도 있다.

큰 도로로 나오니 공사중이다. 옛 보건진료소를 말끔히 페인트칠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고, 바로 옆에는 깔끔하게 만들어진 보건진료소가 있다.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움푹 들어간 지점을 메우는 일종의 매립공사를 하고 있었다.

대마마을 2구 입구에 오른쪽으로 또 공사 현장이 나타난다. 식수원용 저수지 공사 현장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죽항도 외 4개 지구 도서식수원 개발사업’이라고 되어 있다. 전남의 섬들은 대부분 식수난에 허덕이고 있다. 진도권의 섬들 대부분이 빗물을 받아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지하수를 이용하기에 식수가 문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곳이 대마마을 2구다. 북쪽의 대마마을 1구와 마주보는 지점이다. 여기는 방파제가 마을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다. 마을은 안쪽에 자리잡고 있고 산길로 해서 남쪽으로 넘어가면 조그마한 모래해안이 있다. 대마도에는 마미동, 방막터 그리고 씨아시(시하도) 등 모두 세 곳의 모래밭이 있다.

대마도의 선착장은 대마 1구에서 조금 더 위쪽인 북쪽에 있다. 이곳에도 여객선이 하루에 한 번 온다. 학교는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지금은 분교로 바뀌어 학생수가 2명이지만, 과거 한때 246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공부하던 명실상부한 초등학교였다. 대마초등학교는 1963년에 본교로 승격했으나 1990년 3월에 다시 분교로 격하되어 조도초교에 소속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찰초소도 지금은 폐쇄되었다.

생활
지금부터 40여 년 전인 1971년도에 진도 출신인 김정호 기자가 전남일보에 ‘섬, 섬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진도의 섬과 일본의 섬’ 등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 글을 쓸 당시인 1971년도의 대마도는 대마리에 97호, 막금리에 47호가 분포하여 살 만큼 섬주민의 수가 많았다 한다.

인근에 있는 조그만 섬에 비하면 큰 섬에 속하지만, 산지가 많고 천수답 8ha와 밭 64ha를 농사짓는 반농반어업의 상태라 아주 고단한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10년 동안 이 섬에서만 53호가 육지로 떠나갔다. 이 섬의 이도율은 25%가 넘는 셈이다.

대마도는 해안선 길이가 14.5km에 달한다. 이 섬의 북서쪽에는 자연산 톳과 미역을 채취하고, 마을 앞 동남쪽에는 김양식을 하였다. 톳은 미역이나 김양식에 비하여 손질이 적게 가는 대신 일본수출이라는 판로가 보장이 되었기 때문에 수입이 안정적이었다. 1983년에 처음 톳을 양식했다고 한다.

톳과 함께 자연산 미역도 바다농사에 있어 빼놓으면 안 된다. 그런데 진도는 완도와 달리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세서 양식이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자연산 톳과 미역이 대부분이다. 소량이지만 더 품질이 좋은 제품을 생산한다. 한여름이 되면 대마도 역시 자연산 미역을 채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다로 산으로 피서를 가는데, 대마도의 마을주민들은 모두 미역채취를 하고 건조하는 데 분주하다. 농사를 짓는 만큼이나 자연산 미역이 고수익을 내기 때문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을 한다. 여름철에는 온 섬이 미역 건조장으로 바뀐다. 널려 있는 미역에다 바다에서 금방 채취한 것들이 선착장에 쌓여 손질을 기다리기 때문에 섬 전체에 미역냄새가 물씬물씬 풍긴다.

대마도는 다른 섬보다 큰 편이고, 미역 생장을 위한 환경이 좋아서 품질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7월말부터 8월초까지 자연산 미역채취로 분주한 계절이라 장마라도 질라치면 주민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상을 짓는다. 피땀 흘려 생산한 자연산 미역은 20개 한 뭇 가격이 해마다 달라지지만 보통은 30~40만 원선이며 상품은 50~6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한겨울 바위에서 사나운 파도에 시달리면서 자라는 자연산 미역은 고가여서 일반 서민들은 사먹기가 어렵다. 이곳 섬주민들이 섬을 떠나고 싶어도 쉽게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연산 톳과 미역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톳 양식과 미역채취 다음으로 하는 업종은 멸치잡이이다. 이 섬에서만 5집에서 낭장망 어법으로 멸치를 잡아 수입을 올린다. 필자 일행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아직은 이른 봄인지라 약간의 멸치를 잡아서 삶아 건조장에서 말리고 있었다.

대마도는 물이 부족한 섬인데 암반지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상습적으로 물가뭄에 시달려왔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국가에서 도서지역 식수원 개발사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한 결과 저수지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대마도에서는 물걱정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대마도의 저수지는 식수원치고는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염분은 없다고 한다.

대마도해수욕장,

쑥·달래가 지천인 대마도
대마도와 인연을 맺은 지는 벌써 22년이나 되었다.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한 이유는 배를 가지고 학생들을 조도로 통학시켜주는 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2012년에 봄 이곳에 와서 별장 하나 지어 놓고 머물고 싶은 곳을 하나 발견했다. 그 이후로도 늘 대마도를 그리워하던 중 2013년 여름, 멸치가 한창 나던 시기에 다시 찾게 되었다.

재작년 이른 봄 이곳 바닷가는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조용한 대마도 바다에서 마을 분들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마을 뒤편에 있는 밭으로 가야 했다. 그것은 쑥 채취 때문이다. 가난했던 시절 한 평이라도 개간하여 곡식을 심어 배고픔을 면하고자 했는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힘든 밭일은 그만두고 전부 다 묵혀 버렸다.

다행히 쑥이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쑥 농사를 짓게 되었다. 다른 지역보다 남쪽이란 이점 때문에 봄이 일찍 찾아오는데다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의 향이 은은하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다른 작물처럼 따로 농약을 하거나 비료를 주거나 풀을 매는 일도 없이 잘 자라기에 쑥 농사가 인기이다. 대마도를 푸르게 만드는 것은 쑥뿐만 아니다. 달래도 지천에 널려 있다. 이곳은 산과 바다에 반찬이 가득하여 쌀만 있으면 된다.

2014년 3월에는 SBS ‘물은 생명이다’ 프로에 출연 요청을 받고 진도 가사혈도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신해7호를 타고 목포로 올라가는데 대마도를 비롯하여 소마도 모도 거차도 등지에서 실은 노란 마대 자루가 가득 보였다. 자루 안에는 쑥이 들어 있었다. 섬사람들의 일년 농사가 이 배에 실려 가는 모습에 감동되어 여러 번 사진 촬영을 했다.

하조도와 상조도의 쑥 수집상이 매일 수집하여 1일 5회 정도 운항하는 철부선을 이용해 조도의 관문인 팽목항을 통하여 육지로 반출한다. 쑥은 특성상 연약한 식물로 이틀만 지나도 생기를 잃고, 자체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검게 타버린다. 그래서 그날그날 즉시 소비자들에게 전달해야 상품성을 유지한다.

만약에 풍랑주의보가 내리면 여객선 발이 묶이기 때문에 쑥을 채취하지 않는다. 쑥 농사는 항상 날씨에 신경을 쓰면서 해야 한다. 아직 생쑥의 통신판매는 하지 않는데, 김이나 미역과 달리 신선도 때문이다. 쑥 향기를 그대로 도시에 사는 소비자에게 전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그들은 쑥 농사에 여념이 없다. 조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해풍 쑥은 칼륨과 나트륨을 육지 쑥보다 10배 이상 더 함유하고 있어 웰빙 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대마도에서 나는 쑥은 kg당 4,000원에서 4,500원 정도라고 한다. 주요 수산물은 김과 미역, 톳, 멸치, 전복, 조기, 갈치, 고등어 등이고, 농산물은 유채, 마늘 등이 재배된다.

 

섬 사람들
대마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실화인데 감동적인 스토리라 지면에 옮긴다.

1976년 대마도의 남동쪽 작은 오두막집에 ‘멍굴이 부부’라 불리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대마도의 큰 마을과 작은 마을에서 각각 태어나고 자랐는데,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어릴 적부터 따돌림을 당하였다 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두 남녀는 결혼하여 섬의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육지의 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들의 삶이 재미있었던 것은, 이 부부가 수화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돌멩이가 동쪽으로 향해 있으면 동쪽에 있는 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고, 바다쪽인 남쪽에 놓아두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이며, 원 밖으로 나가 있으면 멀리 큰 동네를 갔다는 의미를 가짐으로써 서로의 행선지를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속된 신호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하니 부부 사이가 얼마나 좋았을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멍굴이 부부가 대마도에 살던 당시, 대부분의 낙도 선착장은 시설이 열악하여 큰 어선이나 여객선이 접안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배와 선착장을 연결하는 작은 배인 종선이 마중을 나가 승객과 짐을 받아 실어 나르고는 했다.

큰 배에서 종선으로 승객과 짐을 이동시키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승객이나 짐이 많을 때에는 금방 가라앉을 듯 아슬아슬한 운항을 해야 했다. 심지어 배가 접안하려다 침몰하여 동네사람들 여럿이 한꺼번에 죽는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종선은 동네에서 운영하는 배인데 종선 운행자를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의 젊은이로 선발하였다. 선발된 종선 운영자는 다른 일보다 종선업무를 최우선 순위로 두어야 했기에, 마을에서는 적절한 생활비를 지불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이 바다에 일을 나갔다가 악천후로 인해 조난을 당했을 때, 구조대장이 되어 앞장서서 구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종선 운영자가 되는 일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을 멍굴이 부부가 맡아 하니, 어느덧 말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멸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로 가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는 상조도의 산에서 봉화연기를 올림으로써 이루어졌다. 종선 운행자는 이 신호를 기반으로 손님을 데리러 가야 했다.

신호와 기호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말과 언어, 문자에 앞서 기반이 되는 인류의 행위였으므로 말을 할 수 없는 멍굴이 부부에게는 가장 익숙한 커뮤니케이션 체계였던 셈이다. 이들 부부가 섬생활을 행복하게 꾸려나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는 방법이 신호체계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섬 관광
저수지 가까이 있는 바닷가가 아름답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수욕장인데, U자 형태로 된 아름답고 수심이 적당한 천혜의 해변이다. 섬의 남서쪽에 자리잡아 한적한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의 길이도 제법 큰 편으로 모래도 밀가루처럼 곱다. 이런 모래는 황사처럼 바람에 섞여 멀리 날아갈 만한 입자이다. 그래도 상당히 넓은 모래밭을 형성하고 있다. 모래밭 끝까지 가면 간이 선착장이 있다. 그 뒤로는 온통 갯바위 해안이다. 간이선착장 부근에 허물어진 낡은 막사 한 채가 세월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멸치를 잡아 삶고 말리던 멸막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된 곳이다. 이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면 숙박시설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백사장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외지인에게 많이 알려진 이웃섬 관매도해수욕장 때문에 이곳으로 향하는 발길이 드문 것 같다.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는 여행객이나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에게 매우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가진 아름다운 곳이다.

대마도의 자랑거리로는 톳과 미역, 쑥 등을 들 수 있지만, 생태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외지인들의 발길이 드문 섬이라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섬을 한 바퀴만 돌아보면, 자연이 선물한 해안의 지형적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연구거리를 가진 섬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멸치 말리기,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속한 땅이었으나 점차 일본인들이 거주 하면서 왜구의 땅으로 변했다. 
언젠가는찾아야할땅!!!
  
주석
주01商倭주02고려 고종시대주03福岡주04통항증명서로 文引 또는 路引이라고도 함.주05대마도 만호 혹은 早田萬戶라 함.

『지승』(진도)의 대마도 일대,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조도초등학교 대마분교장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대마도 [大馬島]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대마도 [大馬島] - 조선시대 말목장이 있던 섬 (한국의 섬 - 진도군, 2015.,,)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동사강목(東史綱目)
[동국통감(東國通鑑)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한국연구원,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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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제사』-조선전기편-(육군본부,1968)
[조선전기의 대일무역성격」(『아세아연구』 9-4,1968)
[고려말기의 왜구」(『사학지』 9,1975)
[여말선초 피왜부로쇄환」(『사총』 19,1975)
[여말·선초의 대마도정벌」(『호서사학』 6,1978)
[고려말기의 대일관계」(『사회과학』 1,1957)
[여말선초의 왜구와 그 대책」(『국사상의 제문제』 3,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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