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이름은 달구지이지만, 소가 끌면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부르며,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달구지는 바퀴 수가 두 개와 네 개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것은 북한지방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중부 이남의 평야지대에서 많이 썼다.
소나 말로 끄는 수레를 말한다. 달구지는 바퀴가 두 개인 것과 네 개인 것이 있다. 두 바퀴 달구지〈사진 12-21〉는 단순히 수레에 채를 연결한 모양으로 바퀴 축이 하나라서 서있을 때도 소가 쉴 수 없는 단점은 있으나 방향 회전이 쉽고 기동성이 좋아 소가 덜 지친다.
앞바퀴 축에 소에 메우는 채를 연결하여 채를 좌우로 움직이면 앞바퀴 축이 따라 움직여서 방향을 잡았다.
네 바퀴 달구지는 짐을 싣고 내리기가 쉽고 정지하였을 때는 소도 쉴 수 있는 이점은 있으나, 연장이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근년에는 두 바퀴 달구지가 대부분 이었고, 바퀴도 자동차에 쓰는 고무타이어를 사용한 달구지가 많았다.
조선조 정조 때의 『화성성역의궤』에는 대차(大車)와 평차(平車)라는 이름의 수레가 등장하는데 두 바퀴 달구지와 같은 형태로서, 대차가 크고 평차는 그보다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달구지를 예전에는 ‘큰술위’(『역어류해』)라 하고 한문으로는 大車 · 牛車 · 車로 적었다. 그리고 지방에 따라 ‘우차’ · ‘마차’ · ‘구루마’(일본말)라고도 부른다. 달구지로 한 번 에 500∼1,000kg의 짐을 나를 수 있다. 달구지는 근년에 경운기와 트랙터와 같은 동력기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두 바퀴 달구지는 반드시 소가 끌었으며, 소 등에 길마를 얹지 않고 쳇대를 길게 하여 소의 등에 걸어 둔다. 그리고 쳇대가 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양쪽에서 목 앞으로 끈을 둘러 감았다. 이처럼 길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넘어지거나 언덕으로 굴러떨어질 때 소나 말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 달구지 바퀴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인데, 이렇게 해야만 상틀이 높아져서(지상에서부터의 높이는 5자) 바닥이 바위나 돌 등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네 바퀴 달구지는 마소가 함께 끌었으나, 도회지에서 짐을 나르는 경우는 말을, 농가에서 곡식 따위를 운반할 때는 소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으며 거덜이가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우로 움직여서 방향을 잡는다. 달구지 바퀴는 모두 목재이며, 텟쇠를 둘러서 보강한다. 한때는 나무 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쓰는 일이 많았다.
달구지로는 곡식 가마니를 비롯하여 잔 모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짐을 운반한다. 예전에는 도회지에서도 대부분의 짐을 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했으며 중소도시에서 흙·모래·시멘트 등의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금은 차나 경운기 등으로 대체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틀의 무게는 1,500∼2,000㎏이다.
① 쳇대:전주에서는 ‘체장’이라고 한다. 달구지를 마소의 등에 연결하는 두 개의 긴 막대기로 한 끝은 달구지 앞쪽에 달려 있다. 길이는 6자이다.
② 쳇대고리:쳇대를 마소의 길마에 걸어 주는 작은 쇠고리. ③ 사장:달구지의 몸을 이루는 세로로 댄 긴 널쪽. ④ 쇠장:사장을 받치면서 동시에 좌우 양 틀을 고정시키는 각목재. 몸체에 가로로 놓인다.
⑤ 갈고리:짐을 잡아맨 끈을 걸어 두기 위해 장틀에 붙여 놓은 아귀진 쇠붙이. ⑥ 텟쇠:바퀴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러 놓은 쇠. 철판을 구부려서 둥글게 만들고 양쪽을 이어서 바퀴에 씌우는데,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⑦ 빗등:바퀴의 테를 이루는 목재. 이것은 반드시 단단한 괴목으로 하는데, 뒷바퀴는 7개, 앞바퀴는 6개로 이루어진다. 이를 ‘어리빗등(전주)’이라고도 한다.
⑧ 살:바퀴의 테를 유지하기 위하여 빗등과 장구통 사이에 끼운 나무. 이것은 참나무로 만드는데 뒷바퀴에는 14개를, 앞바퀴에는 12개를 붙인다.
⑨ 장구통:전주에서는 ‘수박통’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구멍이 뚫린 수박만한 나무통으로 바퀴의 살이 모두 여기에 꽂히며 구멍에는 중심축이 걸려서 상틀을 바퀴에 고정시키는 구실을 한다. 장구통은 괴목으로 만든다. ⑩ 간철:장구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구통 안팎으로 둘러 놓은 쇠. ‘탱갱이쇠’라고도 한다.
⑪ 들보:두 개의 뒷바퀴 사이에 끼어 있어서 상틀과 하장을 바퀴에 고정시키는 네모진 쇠몽둥이. 한 면의 두께가 앞바퀴의 것은 한 치이며 뒷바퀴의 것은 1치2푼 내지 1치4푼이다. ⑫ 메뚜기쇠:들보가 수박통에서 빠져 나가지 않도록 구멍에 꽂는 쇠이다.
⑬ 맷돌:‘맷돌쇠’라고도 한다. 맷돌은 앞바퀴의 상부와 하장 사이에 달려서 앞바퀴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둥근 쇠로, 지름은 1자3치이다. 네 곳에 둥근 구멍이 뚫리고 이에 방망이쇠를 꽂아서 위아래 짝이 고정된다.
⑭ 거덜이 판자:하장과 쳇대를 연결시켜 주는 쇠붙이. ⑮ 상틀:달구지의 몸으로 이곳에 짐을 싣는다. 참나무로 만든다. 하장:앞바퀴의 들보 위에 붙은 판. 달구지 앞쪽의 무게가 여기에 실린다.
뻗침발:하장과 들보 사이에 끼어 있는 가위 다리모양으로 굽은 쇠. 이것이 스프링과 같은 구실을 하여 앞바퀴에 전달되는 충격을 조절한다.
장틀:달구지 양편에 대는 좁고 긴 널. 달구지 한 틀을 제작하는 데는 목수 한 사람 품으로 열흘쯤 걸리며, 소요되는 목재는 두 발 달구지가 60새, 네 발 달구지는 80새이다.
큰 바퀴의 지름은 3자1치5푼이며 텟쇠의 두께를 합치면 3자2치가 된다. 작은 바퀴의 지름은 2자가웃이다. 바퀴의 너비는 작은 바퀴가 2치5푼, 뒷바퀴가 4치이며, 3치나 2치5푼짜리도 있다.
달구지 나 황소 카트 (때때로 불리는 황소 마차 , 특히 사람을 운반 할 때) 두 바퀴 또는 4 바퀴입니다 차량 에 의해 끌려 소 . 그것은 세계 여러 곳에서 고대부터 사용 된 교통 수단입니다. 현대 자동차가 너무 비싸거나 인프라가 선호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됩니다.
특히 물품 운반에 사용되는 불락 카트는 하나 또는 여러 황소에 의해 당겨집니다. 카트는 요크에 부착 된 특수 체인으로 황소 팀에 부착 되지만 한두 마리의 동물에 로프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운전자와 다른 승객은 카트의 앞쪽에 앉고 짐은 뒤쪽에 놓습니다. 전통적으로화물은 주로 농산물과 목재 였습니다.
운송에 사용되는 휠 의 발명은 Sumer 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 . 바퀴 달린 차량의 증거는 BC 4 세기 중반부터 북 코카서스 ( Maykop 문화 )와 중부 유럽 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납니다 . 가장 초기의 차량은 황소 카트 일 수 있습니다.
인력거,[ 人力車 ],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던 수레.
유형/시대/성격/용도
물품
근대
생활용품, 운송수단, 교통수단
운송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두 개의 차륜 위에 사람이 앉을자리를 만들고 포장을 씌운 것이다. 인력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4년(고종 31)으로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가 10대를 수입, 서울 시내 및 서울과 인천간에 운행한 것이 시초이다.
초기의 인력거는 차 위에 고정시킨 네 귀의 기둥에 장막을 쳐서 지붕을 삼은 간단한 구조였으나 뒤에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여름철 등에는 벽과 지붕을 뒤로 젖히고 운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퀴도 처음에는 철테 바퀴를 그대로 써서 몹시 흔들렸으나, 뒤에 통고무 바퀴가 등장하였고, 압축공기를 이용한 타이어가 나온 것은 191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초기의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으나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인력거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초기에는 관리·중산층·노약자·기생 등이 가마를 대신하는 교통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초기의 승객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특히 기생들은 요긴한 교통수단으로 애용하였다.
당시 풍습은 기생이 요릿집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연석에 나올 기생 이름을 대면 요릿집에서 기생조합에 통보하고 이곳에서 인력거를 기생집에 보내어 술집으로 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염집 부인들이 탈 때에는 기생으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차 앞의 장막을 내려서 승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인력거꾼은 요즈음의 택시운전사나 우체부처럼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초행자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나 언덕에서도 운행이 가능하여 중산층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1869년경에 일본인 다카야마 고스케[高山幸助] 등이 서양마차를 본떠 만들었으며, 한국에는 1894년(고종 31), 하나야마[花山]라는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해 들여와 영업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따라서 최초의 인력거꾼은 모두 일본인이었다가 점차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인력거는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 급속히 보급되어 가마를 대신하는 중산층 이상의 교통수단으로 번성을 누렸다.
1930년대에는 신문사에도 자가용 인력거를 두고 기자들이 이용할 때마다 전표를 떼어 주었다.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인력거를 뒤에서 미는 사람을 따로 붙였는데 이를 ‘두패지른다’고 일렀다. 인력거꾼은 뜀박질을 잘해서 서울 장충단에서 벌어진 ‘대운동회’에 참가, 장거리 경주에서 일등을 하는 일이 많았다.
1911년 말 현재 전국의 인력거는 1,217대(당시 자동차는 2대, 객마차는 110대였다.)였으나 1923년에는 4,647대로 늘어났으며, 서울에서는 약 37%인 1,816대가 운행되었다. 인력거를 이용할 사람은 오늘날의 콜택시처럼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어서 불렀으며, 부유층에서는 자가용을 따로 마련하였다.
1924년 당시 자가용 인력거는 1,509대인데 소유자를 살펴보면 한국인(936대), 일본인(482대), 프랑스인(77대), 기타 외국인순이었다. 한편 영업용 인력거는 소유자와 종업원인 인력거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소유자들이 조합을 결성, 운행하였다. 1908년 인력거의 영업허가, 인력거꾼의 자질, 운임, 속도, 정원, 두 대가 마주쳤을 때 길을 비키는 법 등을 정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었다.
1914년부터는 인력거의 운행감독을 각 경찰서에서 맡게 되어 일정한 날짜에 차체수리상태 및 인력거꾼의 복장검사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력거꾼의 복장은 업종의 성질상 개선되기 어려웠다. 특히 여름철에는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 복장단정을 운위할 형편이 못 되었고, 심지어 더위와 땀 때문에 맨발로 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인력거는 191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에 밀려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승객확보를 위하여 1922년 11월 10리에 80전이던 삯을 60전으로, 하루 전세료도 5원에서 4원으로 낮추었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1931년 현재 자동차는 4,331대로 증가한 반면 인력거는 2,631대로 줄어들었다. 인력거꾼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수입도 지나치게 영세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인력거부조합(人力車夫組合)도 결성되었으나, 근무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인력거꾼과 승객 사이의 요금시비도 끊이지 않아 한때는 인력거 승차표를 발매한 일도 있다. 서울의 경우 인력거는 광복 무렵부터 자취를 감추었으나 일부지방 도시에서는 6·25전쟁 이후까지 운행되었다.
인력거의 갑작스런 범람은 서민의 보행교통을 크게 방해하였고, 또한 초기의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일본인 기생[藝者], 한국인의 경우는 귀현신사(貴顯紳士) 또는 유지(有志)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횡포 또한 적지 않았다. 경무청(警務廳)은 1908년(융희 2)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을 공포하여 인력거 영업허가를 비롯해 인력거꾼의 자질·운임·속도·정원·피양(避讓:길을 서로 비켜 주는일) 등 최초의 교통법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인력거는 오늘날의 콜택시처럼 손님이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어 대절하였는데, 부유층은 자가용을 두었다. 인력거 영업은 1923년 절정에 이르러 전국에 4,647대(서울 1,816대)를 기록하였으나 193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와의 경쟁에 밀려 점차 사양길을 밟았으며, 일부 지방도시에는 6·25전쟁 후 얼마 동안 인력거조합이 남아 있었다.
호주,
호주에서는 블록 카트를 블록 드레 이라고하며 바퀴가 4 개이며 보통 큰 짐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20 마리 이상의 동물로 구성 될 수있는 불럭 팀이 드레이를 뽑았습니다. Bullock 팀의 드라이버는 'bullocky'로 알려져 있습니다.
Bullock 팀은 농촌 지역에서 주요 도시 및 항구로 농산물을 운송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호주의 규모 때문에 이러한 여행은 종종 먼 거리를 커버했으며 며칠에서 몇 주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황소 카트 ( carretas 에서 스페인어가 ), 특히 1850과 1935 사이의 일상 생활과 상업의 중요한 측면했다, 여전히 개발되고 독특한 건축 및 장식 전통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퍼레이드 와 전통 축제는 전통적인 황소 카트 퍼레이드가 없으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1988 년, 전통적인 황소 수레는 코스타리카 정부에 의해 국가 작업 기호로 선언되었습니다.
달구지 상품과 사람을 운반 국가의 농촌 지역에서 사용되지만, 더 자주 인도네시아 있습니다 horsecars 달구지보다는 사용되는. 불로 카트 드라이버는 인도네시아 에서는 바진 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Bullock 카트는 자동차 도입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관광객들에게 사용되는 승용차가 포함되었습니다. 여객 카트에는 일반적으로 태양과 비로부터 보호하기위한 차양이 장착되어 있으며 종종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1939년작. 유나이티드아티스츠 제작. J.포드 감독. J.웨인, T.미첼, G.뱅크로프트 주연. 서부극의 한 전형으로 영화사에 남을 명작이며 포드 감독의 대표작이다.
포드는 그의 첫 유성 서부극이기도 한 이 영화를 통해 ‘모뉴먼트 밸리’라는 공간과 존 웨인이란 스타를 발굴했다. 무법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등 문명에서 추방당한 주변인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문명에 대한 감독의 시니컬한 관점과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낙관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인디언의 습격을 겁내며 이틀간의 일정으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역마차에는 수비대로 남편을 찾아가는 젊은 임산부, 주정뱅이 의사, 사기 도박사, 말괄량이 여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탈옥한 청년, 겁쟁이 술장사 등이 타고 있다. 쫓겨다니던 사나이가 원수를 갚고, 임산부가 해산을 하게 되자 모두가 합심하여 순산을 돕는 인정 넘치는 장면 등으로 이어가다가 끝내는 아파치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처절한 전투가 전개된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멸을 각오할 수밖에 없을 때 멀리서 수비대의 구원 나팔소리가 울린다. 한국에서는 1954년 개봉되었다.
그때 세계는 1873년 : 청, 동치중흥, 1876년 : 영 의회,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미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이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남북전쟁 전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서부 개척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철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고 들소와 원주민들만 한가롭게 노닐던 서부는 하루아침에 가축과 총잡이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군대나 관리들을 파견할 수도 없었고 거의 30년 가까이 서부에는 이런 무법 상태가 계속되었다.
무법 상태란 좋게 말하면 무한정의 자유라는 뜻도 되겠지만 총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로 건너갔을까? 물론 모험과 자유를 찾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동부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었던 범법자, 부랑자, 흑인, 이제 막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등도 많았다. 여기에 노다지 꿈에 부푼 투기꾼과 목장주들이 가세했다.
1840년대 말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골드러시는 전쟁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금이 소멸되면서 노다지꾼들은 새로운 금광을 찾아 네바다, 콜로라도, 몬태나 등으로 몰려갔고, 광산 주위로는 여지없이 선술집과 여관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노다지꾼, 총잡이, 도박꾼, 매춘부, 사기꾼이 들끓었고, 돈과 이권을 둘러싼 싸움, 광산채굴업자들과 원주민간의 전쟁, 역마차 강탈사건이 끊일 날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에서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했는데, 서부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총잡이 빌리 더 키드가 바로 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리 더 키드의 본명은 윌리엄 보니. 1859년 뉴욕에서 태어나 1881년 보안관 가레트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최소한 21명 이상을 살해한 서부의 전설적 총잡이였다.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캔자스로 이사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다시 콜로라도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거기서 재혼을 한다. 다시 뉴멕시코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부터 빌리는 남서부와 북부 멕시코를 두루 방랑하면서 갱들과 어울리고 절도와 무법의 경륜을 쌓는다.
1880년 12월에 가레트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81년 4월 30일 두 명의 보안관 대리를 살해하고 탈옥에 성공하지만 가레트 보안관의 끈질긴 추적과 매복에 의해 마침내 7월 14일 저녁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빌리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분한 이론이 있다. 그날 가레트 보안관에게 사살된 사람은 빌리가 아니었고, 가까스로 그곳을 도망쳐 나온 빌리는 이후 강도짓을 그만두고 편안히 살다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서부 시대를 동경하는 미국 사람들의 적당한 허풍까지 가미되어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그가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총잡이와 더불어 서부의 무법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소몰이꾼(카우보이)이다. 전쟁 후 서부에 방목 형태의 대규모 목축이 성행하게 된 것은 임자 없는 초지가 무한정 펼쳐져 있는 자연적 요소 외에 대륙횡단철도 건설 및 냉장열차의 개발로 서부에서 도축된 고기를 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신속히 그리고 신선하게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의 초지에는 텍사스 롱혼이라는 긴 뿔 육우가 수천만 마리나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의 선조는 스페인의 토로스 종이라고 한다. 즉 초기에 남부를 지배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소가 야생화한 것이다. 카우보이들은 이 소를 몰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부까지 수천 마일을 올라와 철도 주변 대도시의 도축장에 팔아넘기고 여기서 도축된 고기는 열차에 실려 동부로 수송되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런 카우보이들의 삶이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먹을 물과 풀을 찾아 광야를 며칠씩 헤매는 것은 보통이고 카우보이들끼리 좋은 초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카우보이의 낭만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서부 영화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의 향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나아가 미국 역사 자체를 미화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사실 카우보이의 세계가 무법천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축업자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초지와 물의 권리에 관한 상호협약을 맺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협약은 엄격히 준수되었다. 다만 정부가 나서지 않고 주민 스스로 법을 만들고 집행했을 뿐이다. 연방정부도 이들의 자치법을 인정했고 후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때에도 이를 공식법령으로 수용하는 일이 많았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서부의 낭만은 18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부도 점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금의 고갈, 그리고 대규모 채광기업의 등장과 더불어 노다지꾼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선술집이 있던 곳에는 상가, 회사, 신문사,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 소떼를 몰고 초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의 장관도 1885년을 지나면서 보기 힘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카우보이는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다가 고기값의 폭락으로 수지조차 맞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축업자들은 소떼를 끌고 초원을 방황하기보다 울타리를 친 목장의 주인으로 안주하게 되었다.
빌리 더 키드와 카우보이의 천국은 불과 3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그렇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1900년에 이르자 이들 서부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몰아낸 들소와 원주민과 더불어 과거 속으로 묻혀 갔다.
애리조나주 톤토 근처, 로즈버그에서 제로니모가 이끄는 아파치 부대의 습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가운데, 톤토에서는 마부 벅이 이끄는 역마차에 오를 승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법과 질서를 위한 부녀회’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난 매춘부 달라스, 그녀처럼 쫓겨나는 신세가 된 알코올중독자 의사 닥 분, 그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위스키 상인 피콕, 군인 남편을 찾아 먼 길을 떠나온 루시 맬로리 부인, 그녀에게 반한 도박사 햇필드, 광업 회사가 맡긴 돈을 훔쳐 달아나려는 은행장 게이트우드, 악명 높은 플러머 형제를 잡기 위해 두팔 걷고 나선 컬리 보안관이 그들이다.
그들을 싣고 출발한 역마차는 가던 도중 죽은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갚으려다 무법자 신세가 된 링고 키드까지 태우고 드라이 포크, 아파치 웰스를 거쳐 로즈버그까지 계속 달린다. 각기 다른 신분과 계급에 속한 승객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맬로리 부인이 예상치 못한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닥 분과 댈러스도 다른 승객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심지어 링고 키드는 달라스에게 청혼까지 한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미 공격을 시작한 아파치들이 점점 그들을 위협해오고 있는 중이다. 승객들은 다 함께 아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끝에야 힘겹게 로즈버그에 도착한다. 마지막으로 링고는 컬리에게 달라스를 국경 너머의 목장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뒤 그녀를 배웅한다. 그리고 최후의 총알 3개로 끝내 플러머 형제에게 복수한 뒤 그녀에게 1년 뒤 목장에서 보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컬리는 링고를 체포하지 않고 닥 분과 함께 링고와 달라스의 행복을 기원해준다.
존 포드는 유성영화가 시대한 도래 이후 처음 만든 서부극이자 13년 만에 만든 서부극 〈역마차〉에서 공동체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시험한다. ‘역마차’는 톤토라는 마을에서 인간 말종 취급을 받고 추방당했거나 단순히 그곳을 지나쳐 가는 외부인들로 구성된 가상의 집단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 비연속적 대화, 규범적 식사 등을 통해 서로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관, 도덕의식 등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아기의 탄생이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아기의 탄생을 계기로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았던 인물들(달라스, 닥 분, 링고 키드)은 자신의 가치와 인격을 증명할 기회를, 그들을 인간 말종 취급했던 인물들(루시 맬로리, 피콕 등)은 반성과 존중의 기회를 얻는다. 미국의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도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역마차〉는 포드가 내러티브와 시각적인 면에서 공동체 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춤, 결혼, 장례식, 그리고 〈역마차〉에서처럼 아기의 탄생 등(···) 이 의식들이 공동체와 그 집단적인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정의한다.”
이 긍정할 만한 공동체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마을 ‘밖’에서 형성된다. 문명과 자연의 접경으로서의 서부에 관한 한, 이 영화는 포드의 가장 시니컬한 영화 중 한편이라고 영화학자 태그 갤러거는 지적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랜섬 스토다드가 평생을 걸려 깨닫게 되는 사실이란 〈역마차〉의 등장인물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불과하다. 문명은 타락한 것이란 사실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즈버그를 벗어나 국경 너머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가는 링고 키드와 달라스를 향해 닥 분이 읊조리는 한마디,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되었군”이란 대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 배경
서부극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 공간인 ‘모뉴먼트 밸리’는 존 포드가 〈역마차〉를 통해 재발굴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유타주와 애리조나주 접경지역의 나바호 인디언 국립공원에 자리하는 곳으로 수많은 서부극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그곳은 (일찍이는 조지 B. 세이츠의 1925년 영화 〈배니싱 아메리칸〉에서부터 촬영지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긴 하나) 포드의 〈역마차〉를 통해 처음으로 문명과 자연 사이의 대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샤츠가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시각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웨스턴의 전형적인 환경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묘사한 점, 그리고 감각적이고 통제된 포드의 카메라 움직임이 그것이다. 포드는 닫혀 있고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역마차 공간과 중간역 그리고 다른 실내 공간과 모뉴먼트 밸리의 광대함을 대조시키며 교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고 지적한 대로다. 그런가 하면 갤러거는 모뉴먼트 밸리를 문명과의 대조 이상을 의미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미지로 이해했다.
“첫 등장 때부터 모뉴멘트 밸리는 그저 또 하나의 계곡이 아니라 멜로드라마화된 계곡이었다. 마차도 단순한 마차라기보다 ‘서부’의 역사적 신화 체계였던 것처럼 말이다. (···) 〈역마차〉에서는 ‘훨씬 거대한’ 풍경이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바다나 하늘처럼 물리적으로 거대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열망의 광대함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풍경이다. (···) 울타리는 모든 것이 타락하고 불가능해진 문명의 한계를 표시한다. 울타리 너머에서는 무엇이든, 심지어 순수조차 가능하다.”
참고로,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를 발견하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당시 계곡 근처의 교역소에서 일하고 있던 해리 굴딩이란 사내는 포드가 큰 제작비를 들여 서부극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굴딩은 100장이 넘는 사진을 들고 포드를 찾아가 자신을 만나줄 때까지 그의 문전에서 먹고 자며 기다리겠노라고 소동을 피웠다고 한다. 곧장 굴딩을 만난 포드는 사진 속 로케이션에 반했다. 할리우드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간섭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위치라는 점도 그에게 커다란 매력 포인트로 작용했다. 모뉴먼트 밸리는 이후 포드의 거의 모든 서부극, 즉 〈황야의 결투〉(1946), 〈아파치 요새〉(1948), 〈황색 리본〉(1949), 〈웨건 마스터〉(1950), 〈리오 그란데〉(1950), 〈수색자〉(1956), 〈러틀리지 상사〉(1960), 〈샤이안〉(1964) 등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제작 과정
〈역마차〉를 만들기 전, 존 포드는 13년간 서부극을 만들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사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포드는 유성영화가 갖는 한계 속에서 많은 분량의 야외 촬영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인 서부극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37년 4월 잡지 〈콜리에〉에 실린 어네스트 헤이콕스의 단편소설 〈로즈버그로 가는 역마차〉를 읽은 포드는 익히 알고 있던 기 드 모파상의 단편 〈비곗덩어리〉와도 닮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이미 유행이 지난 서부극을 제작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제작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유명한 독립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손을 내밀었지만 캐스팅과 촬영 일정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존 웨인이 B급 서부극에만 등장했던 별 볼일 없는 배우로 여겨졌던 탓이다. 포드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월터 와그너도 처음에는 존 웨인-클레어 트레버 대신 개리 쿠퍼-마를린 디트리히를 캐스팅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포드는 결국 제작비를 반으로 줄이는 데 동의하면서까지 웨인을 고집했고, 영화 개봉 뒤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그는 서부극의 유행을 되돌려놓음과 동시에 웨인을 서부 사나이의 대명사이자 할리우드영화 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만들어놓았다. 한편 ‘모뉴먼트 밸리’에서의 촬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포드와 그의 배우, 스태프들은 해발 1000m가 넘는 그곳에서 변덕스러운 날씨와 싸우며 촬영에 임해야 했다. 현지 나바호 인디언들의 도움도 필수적이었다(실제로 나바호 인디언들이 아파치를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든 조건 속에서도 포드는 그 계곡의 풍경에 깊게 매혹되어 계곡 아래를 지나는 역마차를 여러 번 반복해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그런 계곡의 외부 풍경과 잘 대비될 수 있도록 실내 장면을 찍을 때는 (당시 관습과 달리) 스튜디오 세트에 모두 천장을 만들어 폐쇄감이 강화되도록 했다. 그런 연출을 통해 서부극의 위대한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달라스(클레어 트레버) :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힘들게 생계를 유지해온 매춘부. 톤토의 ‘법과 질서를 위한 부녀회’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역마차에 오르게 된다.
링고 키드(존 웨인) : 본명은 헨리지만 사람들에 의해 링고 키드로 불린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플러머 형제들에 복수하기 위해 역마차를 타고 로즈버그로 향한다.
닥 분(토머스 미첼) : 늘 술에 절어 있는 알코올중독자로 달라스와 함께 톤토에서 쫓겨난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제법 솜씨 좋은 의사다.
루시 맬로리(루이즈 플랫) : 버지니아에서 남편 맬로리 대위를 찾아 먼 길을 온 여인. 처음에는 자신과 신분이 다른 달라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출산을 계기로 마음이 바뀐다.
햇필드(존 캐러딘) : 소문난 도박꾼. 루시 맬로리에게 반해 역마차에 오른다. 링고 키드, 달라스, 닥 분에게 그들의 낮은 신분을 반복해 인식시키는 인물이다.
벅(앤디 데빈) : 역마차를 모는 마부. 입이 가볍고 겁이 많은 편이긴 하나 푸근한 인상을 자랑한다.
컬리(조지 밴크로프트) : 톤토의 보안관으로 정의감과 용맹함이 투철한 편이다. 악명 높은 플러머 형제를 찾아 로즈버그로 향한다.
피콕(도널드 미크) : 캔자스시티에서 온 위스키 상인. 아파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로즈버그행을 포기하려 하지만 그의 술이 필요한 닥 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로즈버그로 향하게 된다.
링고 키드를 향해 빠르게 줌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존 웨인이 이 영화 이후로 서부 사나이의 동의어가 되었음을 직감하게 하는 장면.
〈쓸쓸한 초원에 날 묻지 말아다오〉(Oh, Bury Me Not on the Lone Prairie)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마차가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는 장면들.
이 영화 이후 서부극의 대표적 이미지가 된 풍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역마차〉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을 발굴한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정보,
원작
어네스트 헤이콕스의 단편소설 〈로즈버그로 가는 역마차〉(The Stage to Lordsburg, 1937)
수상
• 1939년 뉴욕비평가협회상 감독상 • 1940년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토머스 미첼), 음악상(리처드 헤이그먼 등 4인) • 2008년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역대 서부극 영화 9위
음악
〈역마차〉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미국 전래가요를 토대로 만들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쓸쓸한 초원에 날 묻지 말아다오〉(Oh, Bury Me Not on the Lone Prairie)는 모뉴먼트 밸리를 비추는 장면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스티븐 포스터의 민요 〈금발의 제니〉(I Dream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도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중간에 여러 번 반복돼 사용됐다. 이 곡은 이미 끝나버린 서부 개척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멜로디를 지니고 있다.
연관 영화
〈역마차〉(1966, 고든 더글러스) : 1966년에 고든 더글러스가 존 포드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동명 작품이지만 원작의 명성에 비해 한참 밑도는 평가를 받았다.
〈역마차〉(1986, 테드 포스트) : 윌리 넬슨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주연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TV영화. 1986년 CBS 채널을 통해 방송되었다.
밀양 표충사 쪽에서 보면 천황산 서남쪽 험한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의 생김새가 사자머리처럼 생겼다고 천황산 사자봉이라고 불렀고 그 아래 평원에 나 있는 억새가 마치 사자의 갈기와 같다고 억새평원을 사자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표충사 쪽에서 바라본 천황산의 바위 무리가 정말 사자머리처럼 보였다.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를 끌어들여 산에 대한 위엄을 부여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함과 더불어 옛사람들의 자연관에 대해 우러르는 마음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재약산 산행길 초입, 활엽수들이 낙엽들을 융단처럼 깔아 놓았다. 탐방객들은 모두 왕이 된 기분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길은 낙엽융단이 깔려 있고, 먼 산엔 곱게 물든 채 겨울을 맞는 단풍들이 스스로 한폭의 수채화가 되어 온산을 멋지게 치장해 놓고 있었다.
완만한 계곡길을 지나자, 나무데크로 된 가파른 계단길이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재약산 첫 번째 폭포인 흑룡폭포가 나타났다. 검은 돌이끼가 낀 암반 골짜기로 떨어지는 긴 물줄기가 마치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형상이다. 물줄기 양켠으로는 붉고 노란 단풍들이 손을 흔들며 흑룡의 승천을 응원해 주고 있는 듯했다.
멋진 풍경을 남겨둔 채, 다시 나무 계단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자 물줄기가 미약한 구룡폭포 있었다. 폭포 이름에는 용이라는 글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폭포가 있는 곳은 풍광이 빼어나다.
재약산은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하는 산이다. 영남알프스는 가지산, 신불산, 운문산, 영축산, 천황산 등 해발 1천미터 이상 되는 9개 산군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지에 형성돼 있다.
재약산 정상까지는 1.3km정도. 진불암 갈림길에서는 재약산 수미봉 정상에 오르는 계단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영남알프스 산위의 125만평 고산습지 사자평,
구룡폭포를 지나 산길과 가파른 나무계단을 번갈아 올라가자, 굵은 물줄기가 층층으로 떨어지는 층층폭포가 있었다. 사자평 넓은 고산습지가 머금고 있는 물이 사철 층층폭포 쪽으로 흘러내려 수량도 꽤 많은 편이다. 폭포수 아래 있는 소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곧바로 작전도로(임도)가 나왔고 그 평탄한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니 억새들이 군락을 이룬 사자평이 나타났다. 125만평이나 되는 고산습지다. 반석을 깔아놓은 탐방로는 매우 운치가 있었다. 탐방로 양쪽으로 작은 바람에도 머리를 주억이며 탐방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키 작은 억새들이 무척 다정스럽게 보였다.
1960년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을 모아 거점지역을 마련해 관리하는 정부 시책에 따라 사자평 일대에 화전민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이후, 사자평은 화전민의 생계수단으로 억새밭을 태워 군데군데 개간을 하여 감자, 약초 등 고산작물을 재배하고 가축도 기르기 시작 숫도 만들었다고 한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자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생겨났고, 그 화전민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산동초등학교 사자평 분교를 세웠다. 화전민 자녀들이 다닌 이 분교가 그 유명한 고사리학교다.
고원습지인 사자평을 탐방한 뒤 고사리학교 터를 찾아가 보았다. 학교 건물이 있었던 자리엔 억새와 잎이 마른 고사리, 잡목들이 무성하고 시골의 밭마당만한 운동장에는 아이들 대신 키 작은 억새들끼리 모여 볕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 모퉁이에 표지석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경상남도 교육감이 남긴 비문에는 ‘교적비(校跡碑)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터.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고 쓴 문구가 초겨울 햇살을 쬐고 있었다. 쓸쓸했다. 한때는 하늘 아래 첫학교인 이곳에서 사자봉만큼이나 높고 사자평만큼이나 넓은 꿈을 키웠을 아이들을 떠올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억새꽃처럼 바람에 쓸렸다.
사자평을 끼고 있는 재약산과 천황산은 영남알프스의 주능선에 속한다. 경북 청도의 운문산과 가지산에서 시작해서 밀양의 천황산, 재약산, 울주의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로 이어져 있는 이 능선은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에 견줄만하다고 해서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늘에서 바라본 능선이 마치 태극무늬를 닮았다고 해서 태극종주 능선이라고도 한다. 영남알프스는 사계가 모두 아름답지만 가을철이 가장 빼어난 풍경을 연출한다. 그 연출자는 당연 억새다.
피어 있을 땐 화려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하나하나가 꽃으로는 큰 환대를 받지 못하지만, 떼로 몰려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꽃이 억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과 닮은 것 같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자평을 빛나게 한 것도 억새다. 어쩌면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도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 몇몇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쓸리기도 하고 때론 바람에 맞서 저항하기도 하는 민중들일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꽃은 쉽게 시들지 않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뀐 뒤에도 꽃으로 남아 있다.
사자평을 탐방하고 내려올 때는 작전도로를 이용했다. 내려오는 길은, 굽고 휘어진 길도 아름답디만 길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능선과 단풍의 풍광은 두 눈을 황홀하게 했다. 가을과 겨울의 틈새가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자평 탐방에서 만난 새로운 계절 하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촉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자평을 지나다가 고사리분교터에 있는 빨간 단풍나무가 너무 이뻐 보여서 들렀다. 하늘 아래 첫 학교로 불렸던 고사리분교. 30년 동안 졸업생 수는 36명.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가 그 학교의 정식 명칭으로 지난 1996년 3월에 폐교 되었다고 합니다.
사자평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살던 화전민들의 자녀들이 배움터로 삼았던 곳이다. 가난으로 힘들어도 순박함을 잃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졋다,
재약산(載藥山)은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아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흥덕왕 4년(829)에 나병에 걸린 왕자가 고생하다 현재 표충사 자리에 있는 영정약수(靈井藥水)와 좋은 약초로 병이 낫게 되었다 한다. 그 뒤로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정상 전망대에서 천황재는 억새 군락지로 천황산 사자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천황재 억새밭에는 바람과 하늘거리는 억새 물결 따라 가을이다 라고 느껴지는 눈요기의 으뜸이다.
엑새 씨앗이 바람에 금가루 날리듯 햇살에 반짝이는 억새밭은 산행에서 손꼽을 정도로 최고인 풍경입니다.
천황재서 1km 거리에 위치한 천황산 사자봉 정상에 오른 시간은 약 2시 30분정도. 천황산 또한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해 있다. 정상에서 주변 영남알프스 산들은 구만산, 억산, 능동산을 조망도 가히 절경이다.
위 설명: 구글어스 밀양 표충사-흑룡폭포-층층폭포 등산 GPS 트랙 및 고도(표충사에서 층층폭포까지 비교고도는 약 490 m 입니다.)